비뢰도 8권 3화 – 일기승부(騎勝負)

비뢰도 8권 3화 – 일기승부(騎勝負)

일기승부(騎勝負)

“비켜라!”

위무상이 말했다.

“내가 직접 나선다.”

마침내 위무상은 아랫것들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사태가 아니라는 데 수긍하고 말았다.

부하들의 실수를 수습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이었다. 더 이상 철각비마대의 신용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괜찮겠어요?”

철각비마대를 대신해 그의 신변을 걱정해준 이는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위무상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사투를 앞두고 있는지라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싫든 좋든,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자의 실력은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그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강철창을 꼬나쥐었다. 그의 눈에 거센 투지가 불타올랐다. 역시 부대주답게 투기(鬪) 하나만으로도 아래 부하들하고는 월등한 실력차를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아저씨의 등장인가요?”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위무상이 말했다.

“네놈이 그 건방진 혀를 놀려댈 수 있는 것도 이제 이 순간일 뿐이다. 단박에 네놈의 목구녕까지 관통시켜주마. 두 번 다시 그 불경스런 입을 놀리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 꿀꺽!”

겉으로는 충분히 사납고 위압적으로 들리도록 신경 썼지만, 그의 목으로는 마른침이 넘어갔다. 지금은 온몸을 감싸던 살기보다는 신중함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화급한 성정이 경계심을 느끼고 자신의 본성을 누를 정도로 비류연의 신위에 위무상이 긴장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제는 그 자신도 이번의 승부를 점칠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그 무력을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이 싸움 내가 받지!”

비류연은 이 섬세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거칠고 투박한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비류연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로 다가오고 있 는 염도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염도는 자신의 어깨에 애도 홍염을 걸쳐 메고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야! 여기까진 웬일이에요? 모른 척 보고만 있을 작정 아니었어요?”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당연히 도우러 왔지요!”

염도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론 정색하며 말했다. 그의 정체를 알아본 구천학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무래도 오늘 득(得)보다 실(失)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느 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이미 철각비마대의 피해가 너무나 막심했다.

“웬 놈이냐?”

위무상은 여기서 또다시 염도를 못 알아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염도에 비하면 위무상의 무림서열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 말단에 가까웠다. 철각비마대는 대주를 제외하고는 집단으로서 강하지 개인으로서 강한 게 아니기 때문 이다.

“웬 놈?”

염도의 쌍심지가 당장에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는 너는 웬 놈이냐?”

“이… 이놈이!!!”

위무상이 숨을 씨끈거렸다. 평소 강호인명록 외우기를 소홀히 한 것이 분명했다.

“참아라! 그는 바로 염도(焰刀)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돌격태세인 위무상을 저지한 것은 구천학이었다.

“설마 저자가 그 유명한 불타는 개차반이란 말입니까?”

“캬하하하하하하!”

비류연은 자지러진 웃음을 터트렸다. 염도의 면상은 야차(夜叉)처럼 변했다.

“뭐야?”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잠시 학관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던 사이에 건방진 놈들이 많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구천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염(赤), 적발(赤髮), 적미(赤眉)! 저처럼 붉은 색 일색의 특색 있는 신체 특징을 가진 이가 염도 외에 강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위무상이 보기에도 확실히 눈에 튈 정도로 특색 있는 원색적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가 그의 투지를 꺾지는 못했다. 구천학도 위무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볼 텐가?”

솔직히 위무상에게 염도는 너무 부담스런 존재였다. 가급적이면 정면대결은 피하고 싶은 게 구천학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신뢰하는 부하를 함부로 사지에 몰아넣 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위무상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맡겨주십시오!”

그의 단호한 의지표명이었다. 염도의 이름을 듣고도 위축되지 않는 위무상의 모습에 구천학은 내심 흡족했다. 더 이상 그는 막을 생각을 품지 않았다.

“저자가 바로 그 정파 오대 도객의 한 사람인 화령염천탈혼도(火靈焰天奪魂刀)라고 해도 말인가?”

“두렵지 않습니다.”

위무상의 시선은 염도와 정면으로 마주친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염도가 걸어온 길 뒤로는 여섯 필의 철갑마가 그들의 주인과 함께 지글지글 타고 있 었다.

“좋아! 좋아!”

염도는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철각비마대에서 두려운 것은 그들의 집단합격공격이지 일기(騎) 승부가 아니었다. 일대일 승부라면 말을 타든 말든, 그 말에 갑주를 올리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강호초출도 아니고 말의 몸집에 겁먹을 나이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챙!

첫 번째 내지른 위무상의 창과 염도의 도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염도는 무식하게도 달려드는 말의 돌진력이 더해진 위무상의 거창돌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지이이이이익!

마신일체의 돌파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염도의 몸이 일장 가까이 뒤로 밀려났다. 그 때문에 일장 길이의 깊은 고랑이 파였다. 그러나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가거나 하 지는 않았다.

“쯧쯧! 무식하기는…….”

비류연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충분히 피하거나 흘려보낼 수 있는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오기로써 정면에서 막아낸 것이다. 참으로 염도다운 행동이었다. 그걸 꼭 정면으로 부딪쳐 깨트리려하다니…….

“꽤 하는군!”

양손에 굳게 잡은 도(刀)로 상대의 창을 굳건히 막으며 염도가 말했다. 위무상이 말과 함께 뒤로 펄쩍 뛰었다. 둘 사이의 간격이 창의 간격보다 벌어지자 염도는 이 참에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다. 위무상이 노린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팍팍팍!

질풍처럼 내질러진 세 번의 연속찌르기! 벌어진 간격을 무시하고 들어온 공격이었다. 염도는 허를 찔리고 말았다.

염도의 양쪽 옆구리는 옷이 헤져 휑하니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스쳐 지나간 두 번의 찌르기가 남긴 작품이었다.

“과연 소문의 염도로군. 나의 삼단질풍격(三段疾風擊)을 정면으로 막아내다니……. 하지만 이 간격 차를 어떻게 극복할 생각이신가?”

이번 공격으로 위무상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위무상이 들고 있던 창의 길이가 두 배로 길어져 10척(약 3m)에 달하는 장창으로 돌변해 있 었다. 거리로서 간격의 유리함을 얻으려는 전법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그 전법은 무의미한 것임이 판명되었다.

“어? 어? 어?”

순간 위무상은 기겁하고 말았다. 그의 창대를 타고 한줄기 뜨거운 열기가 휘감겨 올라왔기 때문이다. 바로 염도의 검염기(劍焰氣)였다.

“큭!”

손바닥이 불에 익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버티다가는 창을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합! 받아라!”

다시 한 번 삼단질풍격의 거친 찌르기가 그의 창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멀쩡하던 지면에는 동시에 세 개의 구멍이 크게 뚫렸다. 넓지는 않지만 깊이는 무려 반장 가까이 되는 구멍이었다. 위무상의 찌르기가 엄청난 관통력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창이 관통한 대지는 구멍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나선이 그려져 있 었다. 엄청난 회전력이 대지를 관통했다는 증거였다. 위무상의 찌르기가 속도뿐만 아니라 엄청난 회전력도 동반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찌르기를 방금 전 염도가 정면으로 막아냈다는 이야기도 되었다. 괴물 판정 위원회는 염도에게 조금 더 손을 들어주었다. 아무리 위력적인 일격이라

해도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같은 수에 두 번이나 계속 당하리라 생각했나?”

그의 목소리는 말안장 위에 앉아있는 위무상의 머리꼭대기 위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염도는 위무상의 머리꼭대기보다 높은 곳으로 훌쩍 뛰어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염도는 위무상이 두 번째로 내지른 창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10척(약 3m)에 달하는 긴 장창이었지만, 염도는 그것을 발판 삼아 안정된 자세로 균형 을 잡았다.

“짝짝짝!”

비류연은 염도의 묘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염도는 정중하게 이를 개무시했다.

스윽!

염도는 빠르고 가볍게 창대를 타고 위무상에게로 파고들었다. 이미 위무상이 피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다른 창을 뽑아들어 방어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주! 죄송합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위무상은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파악!

붉은 한줄기의 섬광과 함께 염도의 홍염이 위무상의 목에 사정없는 일검을 가했다.

원래대로라면 분명히 위무상의 목은 신체와 분리되어 허공 중에 높이 치솟았다가 땅바닥에 떨어져 다섯 번쯤 데굴데굴 굴러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진짜 더더욱 미치도록 놀라운 것은 위무상의 목이 아직 그 자리에 정상적으로 붙어있고, 아직도 제 기능을 원활히 발 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염도는 정말로 미쳐버릴 뻔했다.

“이건 반칙 아닌가요?”

비류연이 시선을 돌린 곳은 바로 구천학이 서있는 곳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질풍의 마구 뒤에 꼽혀있던 구천학의 애병인 다섯 자루의 오성묵룡창(五星墨龍 槍) 중 하나가 비어있었다.

그것은 지금 원주인인 구천학의 한 손에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방금 전 염도의 칼이 위무상의 목을 베는 그 결정적 순간을 방해한 범인이기도 했다. “미안하군! 하지만 소중한 부하를 죽게 할 수 없었네! 저만한 사람은 또 얻기 힘들지.”

“대주!”

위무상은 감격에 겨워 금방 눈물이라도 떨굴 것 같은 태세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런 꼴사나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분을 위해서 언젠가 반드시 목숨을 바치리라!”

위무상은 그렇게 결심했다. 무사다운 낭만적인 생각이다. 여기서의 목숨은 바로 방금 전 염도의 칼에 단숨에 끝장날 뻔한 바로 그 목숨이었다.

“쳇! 김새는군!”

염도가 투덜거렸다. 뭔가 화장실 갔다가 뒤를 안 닦고 나온 사람마냥 뒤가 찝찝했다.

비류연이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반칙은 반칙이에요. 반칙에는 벌칙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반칙의 대가로 무엇을 지불하시겠습니까?”

비류연은 여전히 구천학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구천학도 말없이 그 시선을 받았다.

“내기!”

구천학이 말했다.

“내기라……. 그건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그리고 꽤 제 구미에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비류연이 구천학의 말에 흥미를 나타냈다.

“그것 참 다행이군. 만일 거절했다면 둘 중 하나가 전멸할 때까지 붙는 전면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네.”

구천학의 말은 진심이 분명했다. 임무의 완수 없이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어떤 내기죠?”

“일기승부(一騎勝負)!”

구천학의 말을 들은 염도, 나예린, 모용휘, 청흔, 백무영, 장홍, 효룡 그리고 주작단의 얼굴에 놀라움의 색조가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일기승부! 다른 말로는 맞짱, 또는 대장전이라고도 불리는 싸움법으로 대표 한 명이 나와 승패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방식을 말한다. 즉 한 사람의 무력에 전체의 승패를 맡기는 방법인 것이다.

“그것 참 흥미로운 방법이로군요.”

비류연은 꽤나 흡족한 듯했다. 구천학이 내건 방법이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럼 그쪽은 당연히 당신이겠고… 그렇다면 우리쪽은..”

부대주 위무상까지 당한 이상 이제 철각비마대에 남은 마지막 패는 대주 질풍묵흔 구천학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외통수였다. 비류연은 주위를 한번 찬찬히 둘러보 며 대표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어딜 보고 있나? 그쪽 대표는 물론 자네일세.”

“저요?”

비류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설마 이제 와서 두렵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뇨! 그럴 리가요. 단지 좀 귀찮아서 남에게 떠넘길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씨익!

악마 같은 미소가 비류연의 입가에 번졌다. 그 떠넘김을 받는 사람이 절대로 자기는 되기 싫다고 주작단과 염도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유려하게 거절 할 수 있는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유를 한 다섯 개 정도 미리 마련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청흔과 백무영은 아직 영문도 모른 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이들은 아마 비류연이 지금 농담하고 있다고, 편한 마음에 안이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작단과 염도는 그게 ‘천만의 만만의 말 씀!’이라는 사실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이들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이는 우습게도 구천학이었다.

“다른 누가 자네를 대신한단 말인가? 먼저 우리 앞을 가로막은 이가 자네이니 자네의 손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나?”

구천학의 의지는 확고부동하고 위엄이 넘쳤다. 과연 거물은 거물이었다.

“쩝!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비류연이 수긍하자 염도와 주작단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각따각!

질풍묵흔 구천학이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태산이 움직이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휘이익! 좋은 말이로군요.”

“묵성(墨)이라고 하지!”

구천학의 애마 묵성(墨星)은 털올 하나까지 칠흑처럼 검은 갈기로 덮여있었다. 그리고 마치 포효라도 할 듯한 사나운 기세를 전신에서 내뿜고 있었다. 보통 말보 다 반 배는 더 커 보이는 거대한 마신(馬身)은 사람들에게 위협을 심어 주는 데는 더할 나위없는 연출효과였다. 게다가 말 주제에 안광 또한 불을 토해낼 듯 사나워 마치 맹수를 연상케 했다. 이쯤 되면 그냥 말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었다.

“드디어 대장의 등장인가요?”

“자네가 나를 이긴다면 이것이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일세.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자네가 그동안 기울인 노력은 헛수고가 되겠지. 일기(騎)로 단판 승부일 세.”

구천학은 더 이상의 접전은 쓸모없는 희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그들은 저 앳된 소년의 얼굴을 한 괴물의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끝모를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늪의 바닥을 드러내는 일, 그것을 끊을 사람은 이제 자신밖에 없 었다.

덥썩!

백옥보다 하얀 섬섬옥수가 비류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섬섬옥수의 주인은 바로 나예린이었다. 비류연은 의아한 얼굴로 나예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딱히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편린조차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리고는 단 한 마디를 남겼다.

“조심해요.”

이 말 한마디로 비류연은 충분히 만족했다. 보통 때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지금도 나예린은 자신이 방금 한 행동에 대해 이해도 설명도 할 수 없 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그리하도록 시켰다.

“하하하! 이거 나 소저에게 그런 말을 다 듣다니 오늘은 재수가 좋은데요. 이것만으로도 이번 싸움은 보람이 있겠군요. 걱정 말아요!”

비류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지금 누가 걱정했다는 거죠?”

“물론 나 소저죠!”

“전 걱정한 적 없습니다.”

그녀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비류연을 실망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정말요?”

“정말요.”

나예린의 대답에 비류연은 다시 한 번 싱긋 미소지었다.

“그럼 정말이겠죠. 하지만!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이걸로 충분하다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무심한 사제들이야 나중에 충분한 정신교육으로 군기를 잡으면 그만 아닌가.

비류연은 사지의 힘을 빼고 전신을 편안히 이완시켰다.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무언의 종이 그들 마음속에서 조용히 울렸다. 이제 시작이었다.

파악!

일순간 당겨졌던 구천학의 오른팔이 섬광처럼 앞으로 뻗어나갔다.

파앙!

대기를 관통하는 듯한 우렁찬 굉음! 위력적인 창경(槍勁)에 휘말려 대기가 소용돌이쳤다.

파바바바바밧!

순간 보이지 않는 무영의 창이 허공을 격해 비류연의 왼쪽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무영창격의 위력에 휘말려 허공 중으로 흩어졌다. 요란한 파공음에 귓가가 쟁쟁거렸다.

“무… 무영창(無影槍)! 허공격상(虛功隔傷)!”

염도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토록 완벽한 허공격상을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십장 거리를 격(隔: 건너뛰어)하여 적을 상하게 할 정도의 공력은 결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범상한 공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력도 아니었어!’

분명히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자 천관도 측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노사님! 대사형이 이길 수 있겠지요?”

남궁상이 근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아마도!”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염도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씨익!

비류연은 미소를 머금었다.

“호오? 이건 인사 대신인가요? 친절도 하셔라.”

일부러 정면을 노리지 않고 약간 빗나간 측면을 노렸던 것이다.

““자넨 인사조차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 사람이로군.”

나이 어린 후배를 상대로 일격에 정면을 노릴 생각은 없었다. 선배로서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귀 하나 정도는 접수 할까 마음먹었었다. 그리 고 비류연은 그것마저도 간발의 차로 피해낸 것이다.

‘설마 보였단 말인가?’

구천학은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의혹을 부정했다.

척!

구천학은 이제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으로 창을 두 손으로 들고 정면을 겨누었다. 방금 전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했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대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느낌, 지켜보는 이들의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이 사방을 지배했다.

“푸르륵! 푸르륵!”

기묘한 적막 속에서 묵성의 투레질만이 간간히 들려올 뿐이었다. 점점 더 긴장의 시위가 뒤로 당겨졌다.

“합!”

구천학이 발로 말의 배를 걷어차자 묵성이 질풍처럼 거칠고 사납게 기다렸다는 듯이 튕겨나갔다. 대지가 묵성의 말발굽 아래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대지의 흙이 거칠게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인마(人馬)가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질풍으로 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핫!”

파앙!

구천학이 창으로 대기를 찔렀다.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보이지 않는 무형의 관통력이 비류연을 향해 날아갔다. 무영창의 비기 허공격상이 다시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위력 면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났다.

조금 전 보여준 것이 하나의 관통력이었다면 지금은 다섯 개의 관통력이라는 게 틀린 점이었다.

무영창(無影槍) 비기(秘)

허공격상(虛功隔傷) 오성격(五星擊)

그러나 아무리 하나가 다섯 개가 되었다고 해도 한 번 피한 걸 못 피해낼 비류연이 아니었다.

스르륵!

비류연의 몸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리자 다섯 개의 관통력은 속절없이 비류연의 몸을 투과하듯 지나가 애꿎은 맨땅에 부딪혔다.

쾅쾅쾅!

땅이 깊게 파이면서 다섯 개의 거대한 흙기둥이 솟아올랐다. 허공격상(虛功隔傷) 오성격(五星擊)이 무위로 돌아가자 구천학은 재빨리 고삐를 틀어 비류연의 우측, 다시 말해 자신의 오른편에 비류연이 위치할 수 있는 좌측 사선으로 말을 몰았다. 그래야만 자신의 우수가 비류연을 공격하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쉬이이잉!

이번엔 구천학이 창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창이 채찍이라도 된 듯 길게 늘어나며 창영(槍影)이 물결치듯 출렁거렸다.

콰과과과

이번에도 비류연은 간발의 차로 구천학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이번 일격은 참으로 의외의 변화였다. 비류연의 발 앞쪽에 높게 솟구치는 흙벽과 함께 거대한 일자 고랑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물결치는 빛의 무리가 비류연을 향해 날아갔다. 이번에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영창(槍) 오의(義)

파랑분쇄격(波浪粉碎擊)

열지(地)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무시무시한 창 그림자! 기(氣)의 물결!

구천학은 비류연의 주위를 돌며 연속해서 방금 전 자신이 구사했던 기술을 연속 시전 했던 것이다. 열지(裂地)라는 그 이름 그대로 대지가 찢겨지고 갈기갈기 부 서져 나가며 비명을 질러댔다.

쾅! 쾅! 쾅! 펑! 펑! 펑!

이제 솟구치는 흙먼지와 창날의 빛 무리에 가려 비류연의 모습은 그들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맹수조련사의 채찍처럼 사납기 짝이 없는, 숨쉴 틈 없는 맹공(猛功)이었다.

히이이이잉!

구천학의 애마 묵성이 기분 좋은 투레질을 쳤다.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비류연을 포위 공격하던 구천학은 어느새 본래 자신이 있었던 자리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이 서있던 자리를 완전히 뒤덮었던 흙먼지는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었다. 구천학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런 하자 없는 완벽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이 불안감은 뭐란 말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구천학은 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분명히 타격을 받았을 것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벌써부터 철각비마대 곳곳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반면 염도를 위시한 천무학관도들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져있었다. 학관도들은 심각한 얼굴로 먼지 구름이 걷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콜록! 콜록!”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인영 하나가 뿌연 먼지 구름을 헤치고 걸어 나왔다. 그는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욱한 흙먼지가 그의 기관지를 자극한 모 양이었다. 흐릿한 인영은 물론 비류연이었다. 비류연은 그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라도 하듯 맹공의 지옥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왔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것 말고는 안타깝게도 생채기 하나 없었다.

“이런 이런! 이거 여벌의 무복도 별로 없는데 가서 빨아야 되잖아요.”

비류연은 연신 투덜거리며 자신의 몸에 내려앉은 먼지들을 털어냈다. 뽀얀 먼지구름이 비류연의 사지에서 앞 다투어 일어났다.

“대단하구나!”

구천학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의 내부에 잠자고 있던 무인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일어났다. 이만한 사내라면 전력을 다해 부딪쳐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과연 너만한 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없겠죠.”

비류연의 참으로 뻔뻔스런 대답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다. 난 이 공격에 나의 전심전력을 다하겠다. 네가 만일 이 공격을 무사히 받아낼 수 있다면…….”

구천학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완전히 정리된 상태였다.

“난 나의 패배를 인정하고 나의 부대와 함께 흑천맹으로 돌아가겠다. 준비는 되었나?”

구천학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언제든지요.”

비류연은 항상 준비가 되어있었다.

진지한 얼굴의 구천학이 양손으로 잡은 창을 마치 상단세를 겨누듯 들어올렸다. 그의 왼손은 창끝을 움켜잡고 그의 오른손은 가볍게 창의 중단을 잡았다. 마치 한 자루의 칼날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과연 질풍묵흔 구천학이로군…….

염도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방금 자신이 싸운 위무상과는 차원이 다른 무공실력이었다. 창을 전혀 창답지 않은 방법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촤앙!

머리 위까지 들어올려진 창이 가공할 속도로 비스듬히 베어졌다.

무영창(無影槍) 필살必) 오의(奧義)

무영인(無影刃)

무형(無形)의 검기가 자신을 노리고 창공의 매처럼 날아오는 걸 비류연은 순간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빛처럼 빠른 무형무영(無形無影)의 칼날! 스륵!

그러나 비류연은 치사하게도 필살의 일념이 담긴 이 일격(一擊)마저도 피해버렸다. 대기가 반으로 갈라지는 틈바구니에서도 그는 옷자락이 베이는 정도로 끝났 다. 아마 묵룡환을 풀지 않았으면 못 피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무영인의 위력은 가공할 정도로 빠르고 무시무시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필살기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상대의 생명을 끊는 기술이기에 만일 실패로 돌아가면 본인에게 되돌아가는 정신적 타격이 엄청나다. 자신의 생명이 헛되이 소진되 었는데 어느 누가 멀쩡할 수 있겠는가.

망연자실한 구천학을 향해 비류연은 최후의 일격을 펼쳤다.

번쩍!

섬광이 공간을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쩌적!

투구가 반으로 갈라지고 구천학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풀어헤쳐져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구천학의 시야가 잠시 가려졌다. 다시 열렸을 때 그의 애마 묵성 위에는 어느 순간 올라탔는지 비류연이 무임승차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구천학의 목에는 이빨을 드러낸 비뢰도 하나가 서늘한 예기를 발하며 빛내고 있었다. 구 천학의 완벽한 패배였다.

“졌다.”

그렇게 싸움은 종막(終幕)을 고했다.

이제 해는 서산으로 짙은 황혼을 깔며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걸로 모든 것이 정리된 건가요?”

나예린이 말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렸군요.”

이번 싸움에서 비류연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가차 없이 손을 썼었다. 피비린내가 짙게 나는 싸움이었다.

“일단 한번 피를 보기로 결정한 이상 전 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지키는 결심의 방패입니다. 피와 살인에 대한 공포로 자신의 정신이 침식당 하면 언제나 십이 할의 전력을 발휘할 수 없죠. 물론 전력을 필요로 하는 일도 아니었지만……”

비류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예린은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단 일인의 무력에 밀려 그 이름 높고 강력하기로 유명한 철각비마대가 말머리를 돌려 지평선 끝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은 평생 청흔의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광경이었다. 청흔과 주변의 모든 이들은 대지를 공허하게 울리는 말발굽소리를 들으며,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 다.

하늘과 땅을 사이좋게 공명시키는 말발굽 소리가 귓가를 사정없이 때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적막이 사방 공간 가득히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때문에 더욱더 그 모습들이 비현실적으로 비춰졌다.

철각비마대 전원이 광활한 평야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청흔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거짓말처럼 철각비마대가 정말로 되돌아간 것이 다. 단 일인의 희생도 없이!

그는 이번 일의 원인 제공자이자 무모함의 화신이자, 돌발행동의 귀재이자 상습범인 비류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법 수련이 부족하여 해부해서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도대체 저 사람의 정체는 뭐지?’

이 강호에 누가 있어 저런 인물, 아니 괴물이라 불러 마땅할 자를 키워낼 수 있단 말인가?

무적을 자랑하며, 바람보다 빠른 속도를 과시했던 철각비마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철갑마들 십 수마리가 시체가 되어 피모래와 함께 대지를 뒹굴고 있었다. 그리 고… 나머지 철각비마대는 말머리를 돌려 자신이 떠나온 시발점으로 돌아갔다.

‘지난 삼십 년 동안 철각비마대의 말머리가 돌려진 적이 있었던가??

단언하건데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다. 흑천맹 무적 최강의 상징 중 하나인 철각비마대가 지나간 곳엔 승리와 그들이 가져온 파멸, 파괴가 있을 뿐이었다.

그날 청흔은 단 한번의 예외를 목격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행운이었는지 아니면 불행이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날 본 일에 대해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함구했다. 비류연의 사제들이자 밥들인 주작단은 물론이고, 장홍, 효룡, 그리고 백무영과 청흔도 마찬가지였다.

함부로 입을 나불거렸다가 주변으로부터 미친놈 취급받으며 손가락질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스럽게도 모두들 그런 것에 쾌락을 느 끼는 변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보게! 이보게! 청흔! 청흔!”

과거를 회상하고 있던 청흔의 상념은 백무영의 부름에 깨어지고 말았다.

“으응? 아! 무영, 자넨가?”

그제야 눈에 초점을 찾은 청흔이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비장한 각오로 따라갔다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친구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고 있는 건가?”

백무영이 물었다.

“아아! 아무 것도 아닐세.”

“그때 일을 생각하고 있나?”

역시 눈치나 추리력 하나는 재빠른 친구였다. 청흔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백무영이 그의 내심을 짐작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더 이상 그날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게. 별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게 없다네.”

그날 일만 떠올리면 왠지 자신이 지금 현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환상 속을 헤매고 있는 건지 헷갈리게 된다. 마치 호접몽(蝴蝶夢)처럼…아직도 그날의 일은 그들에게 있어 매우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그래, 그게 좋겠군. 당분간 기억 깊은 곳에 봉인해두고 열지 않는 게 좋겠어. 더 이상 신경 썼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르니 말일세.”

백무영은 그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탁월한 선택일세. 잘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주변을 돌아봤을 때 이미 비류연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청흔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