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화 은설란(銀雪蘭)
모용휘는 그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하얀 우윳빛 볼을 타고 흐르는 여인의 눈물.
모용휘는 그 눈물에 사로잡혀
자신이 맡은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흑천맹의 심층부에 자리한 한 채의 웅장한 전각! 천사각(閣)!
현 흑도의 구심점이자 힘의 상징인 흑천맹주 갈중천의 거처가 자리한 곳이다. 사파인이라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외경심이 생기는 위엄이 넘치는 엄중하기 짝이 없는 장소!
그 심처 내부에 흑도의 거인을 앞두고 한 여인이 다소곳이 공손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대략 이십오 세 정도나 되었을까? 활짝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화려한 미태를 전신에 두른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입고 있는 칠흑처럼 검은 상복이 그녀의 향기를 죽이고 있었다.
항상 남을 앞에 두고 위압감을 뿜어내던 갈중천도 이 여인 앞에서는 부드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해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이 일 하나만으로도 갈중천이 얼마 나 여인을 배려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방금 전 들었던 매우 충격적이고 엄청난 내용 때문에 잠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여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직도 여인의 말에선 의혹이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 었다.
“… 소녀를 그리로 보내신다 함은?”
그녀의 얼굴 또한 놀라움의 잔향이 짙게 남아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래! 부탁하자꾸나!”
갈중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녀는 갈중천의 대답으로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솔직히 믿겨 지지 않을 만큼 의외였다. 게다가 그녀는 얼마 전 입은 마음의 상처가 아직도 채 아물지 않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흑도의 거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다른 무언가가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의 죽음부터가 뭔가 석연치 않아……. 게다가 분명히 백도에 뭔가 보이지 않 는 강력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구나. 때문에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너를 보내는 것이다. 너라면 저쪽에서도 여자 아이라고 방심할지 모른 다. 너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너의 총명함을 얼마만큼은 가려줄 것이다. 그리고…….”
갈중천은 호흡을 한번 끊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누구보다 총기 넘치는 너의 머리에 나는 무한한 믿음을 보낸다. 너의 가냘픈 어깨에 큰 짐을 지워 미안하구나…….?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고개를 푹 숙였다.
“영광입니다.”
“부탁한다.”
여인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예! 아버님! 제가 기필코 그분의 죽음을 둘러쌓고 있는 흑막을 확실히 밝혀내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라도……. 하늘에 계신 그분의 영혼에 맹세하며.” “아가야!”
마치 아버지 같은 자상한 목소리로 갈중천이 여인을 불렀다. 흑도의 거인이라 불리는 자의 입에서 이렇게 부드러운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믿기 힘든 놀라운 사실이었다.
“예!”
“죽지 말아라! 너마저 죽는다면 난 무척 슬플 거다.”
송구스러운 듯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자상한 목소리였다.
“예! 아버님!”
“그리고, 참으로 미안하구나. 끝내 너희들을 혼인시켜주지 못하고 그 녀석을 그냥 보내버리다니…….”
그의 목소리엔 아득히 깊은 후회가 서려있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님!”
그녀의 눈에 어느덧 눈물이 맺혔다. 복 받치는 슬픔을 자기 속으로 모두 감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에게 갈효봉은 어릴 적부터 이미 내정된 약혼자였다. 하지만 무공 익히기를 밥 먹기보다 좋아했던 갈효봉은 그녀를 여인으로서 대한 적이 한번도 없었 다. 항상 친동생 대하듯 그녀를 대했다. 둘의 사이는 약혼한 연인 사이가 아니라 사이좋은 의남매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앳되던 그녀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점점 아름다워져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꽃을 피워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리하여 흑도의 오대 미인으 로 칭송받기 시작했을 때, 애석하게도 갈효봉은 그 자태를 볼 수 없었다. 그때 이미 그는 미쳐서 천마뢰(天魔牢)에 감금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혈류도 갈효봉은 이상 속의 남자였다. 그리고 최고의 남자이기도 했다.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던 그가 자신의 약혼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뛸 듯이 기뻐했던가! 그날의 가슴 저린 감격은 두 번 다시 맞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없다.
“그런 무정한 녀석은 그만 잊어버려라! 아비보다 먼저 가버린 무심하고 못난 녀석이다.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좋은 혼처자리를 알아봐 주마. 너도 그런 자식 말 고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
갈중천의 목소리에 회한(悔恨)이 묻어나왔다. 듬직한 맏아들이 있었기에 그는 다음 대를 걱정하지 않았었다. 누구보다 총명하고 누구보다 뛰어나던 최고 중의 최 고인 아들이었다. 모든 희망을 맏아들에게 걸었건만… 맏이는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받고 먼저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지워지지 않는 회한만을 남긴 채……. “흑흑흑!”
희뿌연 수막이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조용히 슬픔과 외로움을 속으로 집어삼켰다.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외쳤다.
‘웃어야해! 웃어야해!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밝고 활기차게 웃어야해!’
항상 밝게 웃고 활기차게 행동하며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것! 그것은 바로 이제는 죽어 자신의 곁에 없는 갈효봉이 광기(狂氣)에 빠지기 전 남긴 마지막 부탁이었 다.
여인이 물러난 후 갈중천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거기 있나?”
스르륵!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나 그 앞에 부복했다. 흑천십비의 일인인 비영무흔이라 불리는 어둠 속 최고의 은자!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진 칭 호였다.
“속하 여기 대령했습니다. 하명(下命)하십시오.”
“그 아이가 방금 떠났네. 효봉이가 죽어 상심이 클 텐데 너무 가혹한 일을 시킨 건지도 모르겠네. 이것으로 저쪽의 시선은 그 아이에게로 쏠릴 거야. 항상 화제를 몰고 다니는 아이이니 문제는 없을 걸세.”
“아가씨는 미끼라 그 말씀이십니까?”
‘미끼’라는 말에 갈중천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그 아이는 그 아이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낼 걸세. 누구보다 총기 넘치는 아이이니 자신의 몸 처신 정도는 문제없이 해낼 걸세! 이번 조사 잘 부탁하네. 내 자네만 믿지!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갈중천이 말을 이었다.
“그 아이에게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자네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물론 저쪽은 말할 것도 없고…….”
갈중천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일을 결심하는 데 그가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는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런 만큼 각오 또한 대단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자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럼 부탁하지.”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일을 할 사람은 눈앞에 부복하고 있는 이 사람 밖에 없다고 갈중천은 굳게 믿었다.
“존명(命)!”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기 전 비영무흔이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한명의 여인을 태운 마차가 여러 기(騎)의 호위를 받으며 사신의 깃발을 세운 채 흑천맹의 정문을 나섰다. 그때 흑천맹의 외곽 성벽 위에는 그 떠나가는 일행을 유 심히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드디어 떠났군!”
드디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때가 왔다.
그가 새피리를 불자 그의 가죽토시 위로 ‘푸드득 소리를 내며 전서응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그는 긴급통신을 알리는 표시를 전서통에 달고는 다시금 전서응을 날
려보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다른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았다. 그것은 원래부터 그가 담당하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을 타고 전서응이 향하는 곳에는 마천각이라 불리는 곳이 자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떠났군. 떠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부랴부랴 달려온 사영뇌(腦 치사한의 보고를 묵묵히 들은 후 대공자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피의 율법을 천명했으면 결과에 승복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는 가! 흑도의 지도자쯤 되는 이가 한 입으로 두 마디를 했다는 그 사실이 대공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글쎄요? 그런 걸 대신 생각하는 게 군사의 역할이 아닐까요?”
대공자의 조용한 목소리에 치사한은 찔끔 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자신을 질책하는 듯한 분위기를 그 속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러 번 얼굴을 마주 대해도 대공자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미증유의 위압감에는 익숙해 질 수가 없었다. 희석되지 않는 그 위압감은 언제나 그의 심장을 공포로 감싸 쥐었다.
“현재 천지쌍살(天地雙殺)은 행방불명으로 처리해 두었지만, 진상이 파헤쳐지다가 무슨 잘못이라도 생기면 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리라 보입니다. 큰 불이 나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치사한은 숨을 한 번 가다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백도 측에는 그 사건의 생존자가 너무 많습니다. 아니, 그 천무학관 비영각 추혼대 대원들을 제외하고는 희생이 전무합니다.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어 떤 힘이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말고도 제 삼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건가요?”
대공자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치사한의 심장이 좀 전보다 조금 더 빨리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등줄기가 왠지 서늘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이번 철각비마대 건만 해도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용맹이 지나쳐 난폭하기까지 하던 그들이 이토록 쉽게 거세된 수말처럼 얌 전히 말머리를 돌려 돌아오다니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그 제 삼의 힘이란 것도 알아내야겠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만큼 불쾌한 일은 없으 니깐 말입니다.”
모든 위험요소는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 거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 어떠한 저해요소도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가 넘어갔다.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파견된 조사관은 모두 백도 측의 잘못으로 일이 진행되도록 손을 쓰겠습니다.”
“모든 것은 가장 은밀한 방법으로! 절대 우리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말아야 합니다. ‘빛 속에 뿌리내린 어둠의 사용을 허가합니다.”
“사… 삼십 년 동안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그들을 말입니까?”
치사한의 몸이 전율로 부르르 떨렸다. 그만큼 대공자의 발언은 엄청난 것이었다.
“모든 것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처리하세요!”
“존명(命)!”
지금 치사한의 머리는 구체적인 실행계획들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흑천맹의 조사관 파견은 천무학관 측에도 큰 골칫거리였다. 조사관이 오면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물론 백 년 전 천겁혈세 이후 맺어진 정사공동합의문에 분명히 상호 조사관 파견을 수용하는 항목이 수록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상호 간의 협력을 긴밀히 하 고 피를 적게 흘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채택된 방식이기도 했다. 서로 간에 쌓인 오해를 무력보다는 우선 말로 해결해 보자는 좋은 취지를 가진 항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사관이 파견되면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조사관이 오게 되면 신경 써야 될 일이 십 수 가지가 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일 하나가 바로 신변보호 문제였다.
조사관이 파견되었는데 우리는 여기서 편안하게 쉬고 있을 테니 열심히 조사해보세요’ 하고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일단 조사관이 파견되어오면 신변보호의 책 임 또한 백도 측으로 넘어온다. 조사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모든 책임을 백도가 져야하는 것이다. 만일 조사관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괜히 죽 도록 고생만 하고 덤터기 쓰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담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 무당산 참변 정도로 큰 사건이면 양측 모두 호락호락 넘어갈 리가 없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정사대전(正邪大戰)으 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비중을 지닌 사건이었다. 감히 티끌만한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역시 그 사람밖에 없나…….”
천무학관을 떠맡고 있는 사내 철권 마진가는 오랜 시간 숙고를 거듭했다. 또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린 마진가는 한 사내를 불렀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알고 있나?”
마진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모용휘는 솔직히 대답했다. 사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허허허! 뭐 나쁜 일 저질러서 불려 온 것도 아닌데 너무 긴장하지 말게.”
찻잔을 놓고 마주 앉아있는 모용휘의 태도가 아직도 딱딱하게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진가가 말했다. 긴장을 풀고 편안히 있으라는 의미였다. 그 런데 모용휘는 그의 말뜻을 전혀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여전히 그의 대답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것이 깔끔하고 규칙적인 모용휘에게 있어서는 천무학관주 마진가와 같은 평상에 앉아 마주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천무삼성 중 한 명인 검성의 손자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태도였다.
“이런, 이런! 전혀 내 말을 못 알아듣고 있군. 마음 편히 가지고 긴장을 풀라는 의미라네.”
마진가의 긴장이완 유인작전에도 불구하고 모용휘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자세는 여전히 자로 잰 듯 정확했다. 만나서 자리를 같이한 후 꽤 시간이 지났지만 마 진가는 모용휘가 자세를 푸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만나지 한식경(약 30분) 가량 지났지만 그동안에 모용휘가 보여준 움직임은 눈 깜빡임과 짧게 말할 때의 입술 움직임뿐이었다.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여전히 모용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쯤 되자 오히려 마진가 자신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자네의 무뚝뚝함은 소문 이상이로군.”
더 이상 공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얼른 용건을 마치자고 마진가는 결심했다.
“자네도 이번에 흑천맹 측에서 무당산 참변 진상조사위원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예!”
물론 모용휘도 알고 있었다. 이미 학관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난 사실이었다. 개중에는 흑도 측의 일방적 조사관 파견 문제 때문에 분노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억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문제의 진상 해명이 필요한 무당상 참변이라면 모용휘도 솔직히 가슴 찔리는 게 있었다.
혈류도 갈효봉과 마지막까지 검을 나누었던 이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하고도 꺾지 못했던 갈효봉은 존경할 만한 훌륭한 무인이었다. 모 든 규칙에 항상 칼 같은 그도 아직 모두 말하지 않은 게 남아있었다.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염도와 맹세한 이상 맹세를 지켜야만 했다. “젊은이들 측에서는 이 건에 대해 여러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는 걸 알고 있네. 혈기왕성한 청년들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어쨌든 규약에 따라 조사관 파견에 합의한 이상 조사관의 신변보호는 우리 천무학관의 책임일세.”
친절하게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모용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버릇없게 끼어들어 마진가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마진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조사관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솔직히 매우 귀찮아지지!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것이 또 곧바로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수재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지 않으려면 철저한 호위를 해야할 필요성이 있다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왜 저한테?”
모용휘가 의문을 가득담은 채 반문했다.
“이번 일은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닐세. 어쩌면 엄청난 음모가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네.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이 그녀를 노릴 가능성이 커! 노부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네.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발생할 악몽까지도 말일세.”
“최악의 상황이라 하심은……?”
“아직은 거기까지만 알고 있게. 아직 자네에게 말해줄 단계는 아니니깐… 그래서 말인데, 이번 조사관의 호위를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좋겠네.”
“예?”
모용휘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오늘 마진가 앞에서 처음 보여준 감정 표현이었다. 마진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들도 비영각 추혼대가 몰살당한 일 때문에 손아귀가 찢어질 정도로 분하긴 하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일세! 분하긴 하지만 이쪽의 의혹이 벗겨지기 전에는 정식으로 저쪽에 항의할 수도 없네. 그렇다고 화풀이로 사신 자격으로 오는 사람을 방치해둘 수도 없으니 믿음직한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일세. 잘 부탁하 네!”
마진가는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더 거절을 불가능케 하는 말이었다.
“어찌 제가 감히 그런 일을… 그런 일이라면 전문가들도 많이 있을 텐데요?”
자신은 아직 학생의 신분이었다. 수신호위(守身護衛)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다.
“아닐세! 노부가 보기엔 자네밖에 없어. 오히려 학생신분인 자네가 호위를 맡는 게 저쪽의 경계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거야. 전문가들은 왠지 자신이 감시받는 느 낌을 줄 수 있지. 잘 부탁하네.”
모용휘가 맡아야할 일은 호법 겸 감시자였다. 항상 조사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감시관찰자의 일은 절대로 겉으로 티가 나서 는 안 될 일이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는 데는 모용휘가 제격이었다. 좀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게 큰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저에게 그런 막중한 임무를……!”
모영휘의 책임감이 뜨겁게,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책임감과는 담을 쌓고 있는 비류연과는 정반대되는 매우 모범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의 어깨에 천무학관 의 미래가 달려있다는데 어떻게 감히 그의 책임감이 불타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탁하네!”
“맡겨주십시오!”
결연한 목소리로 모용휘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노부도 좀 안심이 되는군!”
마진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가장 신경 쓰이던 문제가 일단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오는 조사관은 어떤 사람입니까?”
일단은 상대를 알아야 마음에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모용휘가 물었다.
“글쎄… 누가 올지는 아직 통보받지 못했다네. 아마 닳고 닳은 노마(老魔)를 보내오겠지. 이런 중대한 일에 어린 소녀 따위를 보내올 리가 없지 않겠나? 저쪽도 생 각이 있는데……. 이번에 오는 사람은 상당히 깐깐하고 치밀한 성격을 가진 매우 귀찮은 노친네일지도 모르지. 허허허! 그럼 자네가 좀 고생하겠군!”
긴장을 풀고 웃으라고 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말로 마진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혀 틀린 구석은 어디에도 없는 정론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누구인지 모르고 기다리는 것도 재미일지 모른다.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모용휘는 조사관의 방문예정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놓지 않은 것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
“당장 동지들 전원을 집합시키게!”
비연태가 열혈로 불타오르며 소리쳤다.
한 대의 마차가 관내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천무학관 소속 동호회 애소저회(愛少姐會), 통칭 여인천적(女人天敵)이라 불리는 여자들의 공적이 숨 가쁘게 돌아가 기 시작했다. 수많은 정보가 교환되고 다시 진위여부가 가려지고 중요도에 따라 분류되어 정리되었다.
오래간만의 큰 건수라 그런지 모두들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활기와 타오르는 열기가 지나쳐 자칫 잘못하며 광기(狂氣)로 비화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 었다.
왁자지껄! 시끌벅적! 야단법석!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면서 몸을 부딪치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엔 그것이 당연했다. 이들은 모두들 움직임에 보 법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딪칠 듯 하면서도 서로를 교묘하게 피해나가고 비껴나가는 묘기가 가능한 것이다. 보법까지 쓰면서 타인과 신체적 접촉을 강행한다 는 것은 얼간이나 하는 짓이었다.
“왜들 이렇게 바쁘죠?”
손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본 비류연의 소감 한마디였다. 그는 친구들과 오래간만에 부실에 오는 길이었다. 다들 무지무지 바쁘 다는 핑계를 무언중에 내비치며 아무도 비류연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의 말은 반향 없는 메아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무저갱에 빠진 돌멩이처럼 공 허했다.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았었나?”
비류연이 신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도 무척이나 의외일세! 별일이로군!”
효룡도 무척이나 의외인 모양이었다. 그의 놀람은 그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애소저회 부실 안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거리고 있었다. 보통 때의 한산하기만 하고 여유 넘치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퀴퀴한 퇴폐가 흐르고, 게으 름과 나태가 뿌리내린 것만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궁금증을 오래도록 참으면 병이 된다는 말이 있다. 철저한 자기관리가 신념인 비류연은 병에 걸리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마침내 아는 얼굴을 발견한 비류연이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틀어 자신의 눈과 맞춘 다음 물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자신이 대답 없는 메아리를 지 를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라? 류연, 자넨가? 오래간만이로군.”
대답한 사람은 바로 거대한 덩치의 사내, 통나무처럼 굵은 팔다리의 소유자, 붕곤(崩)의 고수, 진성곤(震星榥) 임성진이었다.
“오래간만인 건 좋은 일이죠. 영영 헤어지지 않았다는 증명이니깐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단 알고 시작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아서요.”
궁금증은 최단 시간 안에 해결하는 게 정신건강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자네 아직도 모르나? 대사건이라네! 대사건!”
““대사건요?”
비류연은 전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비류연만을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아니? 자네 아직도 모르고 있었나?”
마치 ‘어떻게 모르고 있을 수 있나!’라고 추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연히 모르고 있죠. 제가 똑똑하기도 하고 별걸 다 알기도 하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가끔은 모르고 싶은 때가 있는 거라구요.”
흰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임성진은 이유를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조사차 흑천맹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말일세… 누군지 아나?”
“알 리가 없죠. 수 번에 걸쳐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시간 너무 끄는 거 아니에요?” 쓸데없는 소리를 한 줄이라도 더 써 분량을 늘리고 싶은 소설가처럼 임성진은 말이 많았다. 비류연이 대답을 재촉했다.
“아주… 아주… 아아아주우우 엄청난 미인이라네.”
“엥? 미인?”
비류연은 순간 벙~찐 표정을 지어보였다. 머리카락에 가려 전면의 얼굴 표정은 파악할 수 없지만 한계까지 벌어진 입 모양만으로도 현재 상태를 충분히 예측 가능 했다. 그것은 허탈함과 어이없음이 혼욕(混浴)된 입벌어짐이었다.
“겨우 그런 일이었어요?”
겨우 정신을 추스르며 정신적 공황(恐慌)에서 벗어난 비류연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런 일이니 당연히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 아직 마차가 도착한 지 한 시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누가 흑천맹에서 파 견된 조사관이 묘령의 여인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느새 이 많은 인원을 모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들은 여자, 특히 미녀가 얽힌 일이면 너무 지나치게 빨라지는 게 탈이었다.
“겨우? 겨우라니! 무슨 그런 천벌 받을 말을! 미인은 모든 상황과 인명에 우선한다는 애소저회 회칙도 자네 모르나? 그 때문에 지금 원래 있던 자료들을 찾아 정리 하고 있는 거라네.”
솔직히 말해 비류연은 애소저회의 회칙 따위는 단 한 자도 암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길래 이런 대대적인 인원을 동원해서 자료를 정리해야 하는 거죠?”
단 한사람의 자료 정리치고는 동원된 인원이 너무 많았다.
“아아! 다름 아닌 흑도 오대 가인(佳人) 중 한사람이야! 마천각의 남자 삼분지 일 이상을 추종세력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절세의 미녀라구! 이 정도의 자료는 당연 한 거지. 게다가 그쪽 흑도 쪽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은 너무 산만하고 너저분해서 손이 많이 간다네. 좀더 교류를 터야 되겠어. 이대론 너무 번잡해… 손만 많이 가 고.
임성진이 투덜투덜 거렸다. 아무래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변태들의 모임이 흑도 측에도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사내들의 한계란 눈에 빤히 보이는 것이다.
“평소에 정리해놨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습니까!”
여태껏 지켜만 보던 장홍이 한마디 했다. 정보란 언제나 가장 열람이 간편한 상태로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정리 안 된 너저분한 정보 들만큼 끔찍한 건 없었다.
“응? 정리란 무슨 큰일을 앞두고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거 아닌가?”
임성진이 두 눈을 말똥거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리란 매일매일 평소에 지저분함이 방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일련의 행동 과정이라구요.”
무슨 사람들이 이리도 나태하고 헬렐레할 수 있단 말인가! 장홍은 언성을 높여 이 화상들의 평상시 나태함을 책망했다. 자신의 옆에 정리정돈의 화신, 청소의 귀 재, 결벽증 환자 모용휘가 없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러나 장홍은 너무 안이했다. 이 정도로 애소저회 회원들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여긴 것 자체가 어불성설 이었다. 임성진은 검지 손가락을 장홍의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어보았다.
“쯧쯧! 아직 멀었군! 멀었어! 우리 애소저회의 회칙 둘! 일은 닥치기 전에 하지 않는다. 알겠나?”
처음 들어본 회칙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기도 안 차는 회칙이었다. 망하기 딱 좋은 회칙이기도 했다. 장홍은 주섬주섬 백기를 들어 항복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 이름 높은 미인이 누군데요? 잡스러운 건 다 이야기해 주고 정작 가장 중요한 이름은 얘기 안 해줬는데요?”
아무리 관심이 없다 해도 이름 정도는 알아놓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 비류연이 물었다.
“그건 말이야…….”
쿠당탕탕탕탕!
부실 한 쪽 켠에서 요란하게 책상을 뒤엎으며 사람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다가 보니 게으름과 나태에 찌들어있던 육체가 거부를 일
으킨 모양이었다. “… 일세!” “헉!”
순간 효룡의 얼굴이 사색이 되며 발을 휘청거렸다. 그의 안색은 염을 한 시체처럼 창백해져있었다. 핏기 한점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네 괜찮나?”
효룡의 갑작스런 반응에 장홍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현재의 효룡은 마치 주화입마에라도 빠진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괘… 괜찮네! 괜찮아! 아… 아무렇지도 않네! 그냥 가벼운 빈혈일 뿐이야.”
효룡은 손을 저으며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음을 주장하려했다.
“절대 괜찮지 않다는 말을 너무 어렵게 돌려 말하지 말게! 자네가 한 달에 한 번 달거리하는 여자들도 아니고, 무공고수 주제에 빈혈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 인가?”
“으음!”
비류연과 임성진은 장홍의 의견이 옳음을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말 괜찮네! 걱정 끼쳤다면 미안하군!”
이제는 효룡의 얼굴에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잠시 가서 쉬게나! 당분간 별일 있을 일은 없을 테니깐 말이야.”
장홍이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게 좋겠군!”
임성진도 찬성했다.
“그럼 가서 좀 쉬다오겠습니다.”
주위의 권유에 못이긴 척 효룡은 발길을 돌렸다. 그에겐 지금의 엄청난 정신적 혼란과 심리적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휴식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오기 를 부리고 있을 여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돌아서는 효룡을 바라보는 장홍의 눈빛은 보도(寶刀)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잘해봐!”
비류연이 모용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응원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모용휘는 두 눈만 멀뚱멀뚱 떴다. 언제나 이 친구들과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역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옆에 붙어있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었다.
“부럽네! 부러워!”
장홍도 마찬가지로 다가오며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장홍은 볼썽사납게도 아저씨 주제에 너무 밝히는 것 같았다. 그는 부러움을 감추지 않고 진심을 폭출시키고 있었다.
“뭐가 말인가?”
모용휘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지라 답답하기만 했다.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이렇게 보면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무척이나 손쉬운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응? 자네 그 소문 못 들었나?”
비류연과 장홍이 뜨악한 표정이 되어 반문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도 방금 전 애소저회에 가서야 겨우 알아 온 소문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생색이었다.
“무슨 소문 말인가?”
모용휘가 물었다.
“벌써부터 천무학관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그 유명한 소문을 못 들었다니 자네 귀는 너무 본연의 임무에 소홀한 듯한 기분이 드는군!”
비류연의 말에 장홍은 주저치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귀는 노사님들의 고귀한 가르침을 듣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학관 내를 떠도는 허황되고 경망된 유언비어나 가벼운 뜬소문 같은 것을 듣기 위해 달려있는 게 아닐세. 착각하지 말아주었으면 고맙겠군!”
너무나 철저한 바른생활 사나이, 정진정명한 모범청년다운 말에 장홍은 순간 질린 표정이 되었다가 금세 안색을 회복했다.
“자네, 보면 볼수록 천년을 버틴 화강암보다 딱딱하군. 게다가 앞뒤가 변비 걸린 대장보다 꽉 막혀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일세. 존경스러울 정도군.”
어떤 교육적 환경에서 자랐는지 장홍 자신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모용세가의 직손들 중에서 이만큼 별종인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환경이라기보다 천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별로 받고 싶지 않은 존경일세. 원한 적도 없는데 굳이 마음대로 존경하지 말게. 그런 쓸데없는 존경이나 받고 있을 만큼 난 한가하지 않네. 아직도 읽어야할 책이 서른 여섯 권이나 남아있네. 이제 용건이 끝났으면 나의 공부를 그만 방해해 주지 않겠나?”
장홍은 얌전히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항복을 표시했다. 그러나 말은 계속했다. 어쨌든 해주고 싶은 말은 꼭 해야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모용휘가 듣기 싫어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다 들어두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일세. 책을 통한 공부만이 진정한 공부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 휘, 자네 이번에 진상조사관의 수신호위를 맡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네만, 그게 그 소문이랑 무슨 상관인가?”
의아한 얼굴로 모용휘가 반문했다. 장홍은 회심을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넨 모르고 있었군. 이번에 흑천맹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여~자’라는 소문이네! 그것도 아주 아주 젊은 여자!”
모용휘의 주변머리로는 분명히 못 들었을 것이라 장홍은 확신했다. 장홍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게다가 무척 놀라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이것은 큰 수확이었 다. 이 정도 반응은 있어줘야 소문을 퍼트리는 보람이 있는 것이다. 항상 도박면상(賭博面像:포커페이스)인지라 감정의 변화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모용휘의 얼굴 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농담이겠지?”
모용휘가 정색하며 물었다. 장홍은 능글맞은 아저씨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무언으로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아닐세! 정진정명한 사실일세! 게다가 아주 아주 미인이라는 소문이야. 벌써부터 그녀의 미모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세! 때문에 자네에게 이렇 게 축하의 말을 전하는 것 아닌가. 이제야 자네 친구들의 절친한 우정을 깨달았는가?”
장홍의 말을 들은 모용휘의 표정은 묘하게 변해있었다.
““난 진심으로 그 소문이 허황된 유언비어이기를 비네. 나에게 여자는 맞지 않아…….”
모용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부터 그에게 있어 여자란 불가해한 존재였다. 여기저기서 수백 명의 여인이 달라붙었지만 마음을 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가벼운 기분으로 심심풀이로 생각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모용휘는 분명 여성도 하나의 존경받을 인격체라고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대 다수의 여성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과잉반응은 그의 머리로는 이해 불가능한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여성은 대하기 힘든 존재였다.
“누가 알겠나? 혹시라도 돌비석 같은 자네가 그 미녀 조사관을 보고 한눈에 반할지. 안 그런가?”
장홍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모용휘를 놀렸다.
“그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일세!”
모용휘는 호언장담했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군.”
장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사관의 호위는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가 영광스럽게도 직접내린 부탁 겸 명령이었다. 모용휘도 확실히 전심전력으로 수행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조사 관이 여성인데다가 자기 나이 또래고 더더군다나 미인이라는 사실은 정말 상상하지 못한 의외의 사건이었다. 가장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가정이 돌 연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길을 가다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방심으로 인해 드러난 허점에 칼을 맞은 꼴이었다.
그 미모의 여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모용휘였다. 그에게는 확실히 달갑지 않은 일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운명의 순간이 들이 닥쳤다.
첫인상!
사람들의 사귐에 있어 첫인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이나 크다고 한다. 가장 처음 뇌리에 각인되는 느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이 첫인상이란 놈이 인생 전체를 좌우한다고도 한다. 특히 남녀 관계에서의 첫인상은 일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치명적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모용휘의 첫인상은 꽤나 복잡 미묘한 것이었다.
“아름답다!”
모용휘는 자기가 중얼거린 말에 스스로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마진가가 자신을 그 묘령의 조사관에게 처음 소개하는 장소에서였다.
그것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어디와 어디를 구체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영혼이 끌어당 겨진 듯한 느낌이랄까…….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불가사의한 경험이었다.
“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모용휘의 말은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용휘는 얼른 변명했다. 모용휘가 여자를 아름답다고 느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 여인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인식되기는 생판 처음이었다. 모 용휘는 오늘따라 자신이 매우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와 만나기 전에 여자에 대해서라면 학을 떼던 모용휘였다. 그동안 시달린 전적이 꽤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극성인 여자는 극도로 싫어하는 모용휘였다. “어디 아픈 게 아닌가?”
그가 생각해낸 가장 타당하고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모용휘에게는 이것이 정상적인 사고였다.
사중화(中花)은설란(銀雪蘭)!
사파(邪派)의 꽃이라 불리는 여인답게 천무학관에서도 그녀와 미(美)를 견줄 사람은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좋았던 그녀와의 첫인상도 다음에 이어진 은설란의 말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어머! 이런 미인(美人)이 곁에서 호위해 주신다니 영광이네요. 호호호!”
은설란은 백만송이 꽃이 활짝 피어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재차 주위를 한번 빙 둘러보며 자신의 주위에 여자가 한 명도 없음을 확인한 모용휘가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누가 미인이라는 이야깁니까?”
“어머 화났나요?”
그녀가 ‘어머, 뜨거!’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반성은 안 한 모양이었다.
“호호호! 하지만 그런 화난 얼굴도 귀엽네요.”
모용휘는 갑자기 세상이 어지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혼돈 속에 빠져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혼란스러웠다. 은설란의 돌발적이고 예측을 불 허하는 언행에 모용휘는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굉장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소녀는 흑천맹의 은설란(銀雪蘭)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저를 사중화(邪中花)라 부르지요. 앞으로의 호위 잘 부탁드려요.” 방금 전까지 경박했던 모습은 거짓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인사에 기품이 넘쳐흘렀다. 모용휘는 그녀의 본성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용휘도 얼 른포권하며 답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모용세가의 모용휘라고 합니다.”
모용휘답다면 모용휘다운, 가장 간단하고 단조로운 인사였다.
“어머! 소협께서 흑도의 여인네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한 그 칠절신검 모용휘 공자로군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은설란도 모용휘의 신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천무학관 측에서도 상당히 막강한 패를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이 자리에 서고서야 겨우 상대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대면한 자리에서 서로를 소개하려고 마진가가 소개를 미뤄왔던 것이다. 마진가의 기대대로 은설란은 깜짝 놀랐다. 빈말이 아니라 칠절신검 모용휘의 명성 은 흑도에서도 자자했다. 특히 여인들 사이에서는 특히나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허허허! 모용휘의 명성이 저 반대편 흑천맹에게까지 미치는 모양이구만.”
마진가가 홍소를 터트렸다.
“그럼요. 여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높은데요. 웬만한 흑도의 후기지수들은 감히 이름도 못 내민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유명한 절세귀공자 칠절신검 모용 소협에게 호위를 받을 수 있다니 전 무척이나 행운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감사드립니다. 마 관주님!”
은설란이 애교 있게 인사했다. 어떤 목석같은 이라도 그런 애교만점의 인사를 받고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허허! 별말을! 저 아이야말로 소저 같은 절세미녀를 호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지.”
“어머! 절세미녀라니… 과찬이시어요.”
애교 섞인 앙증맞은 은설란의 목소리에 마진가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마진가에게 은설란은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가는 여인이었다. 마치 손녀딸같이 편안한 느 낌이었다.
모용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휴우… 여자들이란…….’
그녀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여자에 대해 알쏭달쏭하게 된 모용휘였다. 모용휘는 마침내 눈앞의 여인이 자기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상대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인의 몸이다 보니 자신이 항시 곁에서 지키기도 민망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모용휘는 모든 주변상황을 따져보았을 때 아무래도 자신은 이번 일의 적임 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천관주 마진가도 조사관이 어린 여자 아이인 걸 보고 무척이나 놀랐었을 게 분명했다. 길가다 뒤통수라도 한대 후려 맞은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사
람 좋은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지만 말이다.
“나보다 더 적임자가 있을 거야!’
마침내 모용휘는 이 자리를 사퇴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가장 최고이자 최선의 선택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이란 게 무척이나 변덕스럽고 꽤나 얄미운 녀석이라 얌전히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처음에 모용휘가 수신호위로 거론된 것은 성실하고 실력도 겸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뛰어난 능력과 모범적인 모습으로 인해 조사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호위니깐 방도 바로 옆방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설마 흑천맹에서 일부러 사람 뒤통수 후려갈기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사 람처럼 이십오세 정도밖에 안 되는 어린 여성을 보내올 줄 누가 상상했겠는가!
은설란처럼 나이 어린 처녀를 보내오리라고는 천무학관의 날고 긴다는 두뇌들도, 그리고 마진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은설란은 성격이 매 우 쾌활하고 활달하고 명랑하기까지 한데다가, 넘치는 애교로 살갑게 굴기까지 하고 있어 의심을 어느 정도 털어내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심리적 방어기제 가 늦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마진가가 보기에 이건 위험했다.
어쨌든 다 큰 남녀를 계속 붙여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바꿔야 되나,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은설란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다. 아니,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까지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위의 시선도 있는데 둘만 붙여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주위의 잡음이 너무 많았다.
몇몇 모용휘의 광적인 추종자들은 벌써부터 숨 넘어 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마진가의 귓가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정말이지 진짜진짜로 사람 이 할 짓이 못되었다.
그래서 마진가는 남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또 한 사람을 호위로 붙이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번 호위는 당연히 여자였다. 잘 생각해보면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한 명보다는 두 명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과연 관도 중에서 누가 이 일에 가장 적합한가?” 마진가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 하고, 가끔 딴 생각도 하다가 다시 생각해도 그의 머리 속에는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떠올리려 해도 도저히 불가능했다.
빙백봉(氷白鳳) 나예린!
특히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칼날에 대해서는 나예린만큼 믿음직스런 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진가였다.
왜냐하면 그는 무림맹주 나백천과의 오랜 친분으로 인해 예전부터 예린이의 선천적 능력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후천적으로 길러 진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얻어진 영적인 힘!
용안(龍)!
수상쩍은 기운을 느끼는 데 그녀보다 적합한 이는 없었다. 게다가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마음도 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아주 사소한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나예 린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선뜻 허락을 득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마진가는 체면 따위는 집어치우고 이렇게 나예린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예린아! 미안하지만 부탁하자꾸나. 설마 널 어릴 때부터 귀여워해준 이 숙부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응?”
숙부라는 권위를 이용해 정(情)에 호소하는 금단(禁斷)의 기술까지 동원할 정도로 마진가는 나예린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 모습의 어디에서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의 위엄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나예린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예린과 사중화 은설란의 만남!
나예린은 왜 자신이 갑자기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잠시 고민해봐야 했다. 단지 가장 확실한 것은 그녀가 차마 마진가의 부탁을 거절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그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갑자기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어왔다.
“어머! 정말 아름다운 분이네!”
나예린을 처음 본 순간 은설란이 내뱉은 순수한 감탄사였다. 감정의 가감(加減)이 전혀 없는 진실성 십이 할의 감탄사! 누가 보더라도 나예린의 아름다움은 인정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은설란도 무척이나 감정에 솔직한 여자였다.
“이봐요, 이봐요? 그렇지 않아요?”
은설란은 자신의 호위로 배정된 모용휘에게 옆구리를 사정없이 쑤시며 물었다. 모용휘는 막 자신이 여전히 은설란의 호위를, 그것도 그 유명한 나예린과 함께 맡 아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절망감에 빠져 있던 차였다.
그러니 좋은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렇군요.”
모용휘의 대답은 변화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다. 그의 태도는 마치 깎아지른 절벽처럼 굳건하게 주위의 모든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굳건함 과 꽉 막힌 것에는 생사의 경계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모용휘는 후자 쪽이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
“어머, 정말 풍류를 모르는 사람이군요. 이런 기막힌 미인을 두 사람씩이나 눈앞에 두고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다니 그것은 크나큰 실례라구요.”
샐쭉해진 표정으로 은설란이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모용휘는 다짜고짜 몸을 빼려했다. 그의 태도는 막무가내였다. 그제야 은설란은 자신의 말이 모용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상당히
강적이라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딜 가요?”
단호히 물러나려는 모용휘를 은설란이 붙잡아 세웠다.
“이제 나 소저가 왔으니 전 이만 물러가려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모용휘가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절세미녀 두 명의 곁에 머물러 있어도 모용휘는 남성 특유의 기쁨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이성의 여자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매우 껄끄럽고 부담스러웠다. 자연히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동성애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은설란은 모용휘의 결심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거의 반 강제적 협박이 나 다름없었다.
“어머! 너무하신 도련님이네! 미인 둘만 위험지역에 놔두고 혼자서만 몸을 뺄 작정인가요? 사지(死地)에 여자 둘만 내버려두고도 양심의 가책을 안 받을 자신이 있나보죠? 무림 제일 기재가 겨우 그 정도의 남자였나요?”
유수처럼 유창한 은설란의 언변과 그 터무니없는 박력에 모용휘는 대답할 말을 잊었다. 그의 정직하고 순박한 머리로는 그녀의 언변에 반박할 만한 변명거리를 끄 집어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사실 그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일의 사태가 불시에 터졌을 때 여자 둘만으로 그것을 수습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 이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안전하다 해도, 만에 하나 벌어질지도 모를 유사시를 대비하는 것이 바로 수신호위의 역할이었다.
모용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제서야 나예린은 모용휘가 여전히 자신과 함께 은설란의 수신호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적힌 공문서를 무뚝 뚝한 얼굴로 전해주었다. 그것을 본 모용휘는 더욱더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의견이 끝내 기각되고 말았다는 사망통지서(死亡通知書)였다. “휴우! 할 수 없군요.”
마침내 모용휘는 백기를 올렸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껄끄러운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여지껏 불편하던 관계가 단숨에 편안한 관계로 돌변한다는 것 은 결단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봐요!”
“예?”
땅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용휘를 은설란이 다시 불러 세웠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 남자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듯했다.
“미인 두 사람을 앞에 두고 한숨이라니! 그것은 큰 실례라구요. 만일 그 한숨을 다른 각도로 해석해 마음의 상처라도 받아서 우을증이라도 걸리면 책임지실 거예 요? 항상 유념해 두시길 바래요. 여자는 항상 그런 사소한 곳에 민감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은설란은 숙맥이나 다름없는 모용휘에게 엄청난 속도의 언변으로 주의를 주는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 모용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은설란이 싱긋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나예린에게 인사했다.
“소저가 그 유명한 정도제일화 천상화(天上花) 빙백봉 나예린이군요.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꾸벅!
나예린은 별다른 감정의 표현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순간 은설란은 이 두 사람이 남매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다.
이렇게 해서 사중화 은설란의 수신호위는 남자 한 명에서 남녀 두 명으로 되었다.
이제 새로운 인연이 한군데서 얽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운명의 실은 서로 다른 운명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하나의 인연으로 묶어 새로운 이야 기의 직물을 짜내려 하고 있었다.
사건은 의외로 생각보다 일찍 터졌다.
5일이란 시간은 짧으면 참으로 짧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 서먹함 정도는 없애 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은설란, 나예린, 모용휘 이 세 명의 관계는 해가 뜨고 기울기를 다섯 번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무척이나 싸늘냉막한 나예린과 무뚝뚝 목석 모용휘를 그저 지켜만 보는 것은 은설란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가 5일 동안 이들 두 사람의 호위를 받으 며 알게 된 사실은 모용휘와 나예린 두 사람 모두 지극히 비(非) 사교적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5일이 넘도록 두 사람과 나눈 대화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녀 는 누가 부탁하기만 하면 그동안 나눈 대화들을 몽땅 입으로 읊어줄 수도 있었다. 이런 답답한 현실을 은설란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관계를 개 선시키고야 말겠다고 그녀는 작정했다.
그러나 갈 길은 멀고 험하기는 첩첩산중(疊疊山中)이었다. 관계 개선은 우선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교의 기본은 대화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상대하 면 이 대화부터가 쉽지 않았다.
만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 은설란 스스로가 나서서 말을 걸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저기요, 예린!”
은설란이 조용히 나예린을 불렀다.
“무슨 용건이 있으신가요?”
무척이나 사무적인 어투에도 은설란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저기… 남자친구는 있어요?”
은설란이 스스럼없이 물었다. 볼을 선홍빛으로 물들인다든가 하는 행동은 없었다.
“없습니다.”
나예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 같은 여인인 제가 보기에도 당신은 아름답군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일단 여인의 주 관심사 중 하나인 아름다움을 화제로 대화를 끌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나예린의 반응은 냉랭했다.
“겨우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의 관심을 끌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화제의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대화는 자꾸만 삐꺽삐꺽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하긴 당신같이 아름다운 분이 움직이기만 하면 나라 하나쯤 기울어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라고 여겨지는군요. 예로부터 당신 같은 아름다움을 가리켜 경국지색 (傾國之色: 나라를 무너트릴 수도 있는 아름다움)이라 칭했다지요?”
“전 남자들에게 아양이나 떨며 삶을 영위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수긍이 간다는 듯 은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뭐 남자들이야 아직 철이 덜든 어린애에다가 기본적으로 늑대니까요. 우리 같은 미인들의 사명은 남자들을 치마폭에 가두고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일이에요.”
은설란이 진심을 담아 싱긋 웃었다. 모용휘의 귀에 그녀의 말은 절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과격한 사상이군요.”
나예린의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은설란은 자꾸만 공중을 헛치는 자신의 손바닥이 민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만년빙정처럼 차가운 분이시군요. 과연 당신의 마음을 얻을 분이 누구일지……. 당신을 차지하기 위한 남자들의 처절한 사투와 끊이지 않는 결투와 질시와 질투, 그리고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루어질 피의 길이 보이는 군요. 너무 뛰어난 아름다움은 죄죠.”
“당신도 아름다워요!”
나예린의 말은 진심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은설란의 아름다움도 가히 절세가인이라 할만 했다. 괜히 흑도 오대가인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어머! 정말요? 기뻐라!”
은설란은 매우 기뻐하며 팔짝 뛰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녀는 명랑쾌활했다. 아무래도 은설란 자신이 모르는 새 나예린과 진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좀더 나예린이라는 이 소저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지닌 백절불굴의 정신은 여성에게 도전하는 뭇 남성들이 본받을 만했다. “우리 옷 사러 나가요, 네?”
그것은 느닷없는 제안이었다. 이 돌발제안의 원안자는 바로 은설란였다.
“옷이요?”
나예린에게 있어 옷이란 움직일 때 편하고, 바람을 막고 비를 피하며 몸을 가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물론 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주변에서 보내져 오는 화려하기만한 옷들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갖가지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오색찬란한 비단옷들은 그녀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데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런 옷들은 보통 돌려주는데 몇몇은 받기도 했다. 그것은 그 옷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보통 그런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다. ‘받아만 줘도 만대 의 영광이니 제발 거절치 말아 달라!’이거나 ‘만일 되돌려 주면 그냥 콱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어버리겠습니다!” 식의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상황, 보통 이 둘 중 하나다. 물론 후자가 가장 골치 아픈 경우고, 이보다 더 골치 아픈 경우는 그 옷을 한번 입어주지 않으면 입에 칼을 물겠다는 과격분자와 헤헤실실 음흉한 웃음을 지 으며 딱 한번이라도 좋으니 입어나 보고서 돌려달라는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가요! 가요! 가요! 절대로 가요! 반드시 가요! 그러니 갈 거죠?”
이 천무학관에 들어온 이후 한 첫 번째 부탁이었다. 억지강요에 가까운 은설란의 부탁을 나예린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사중화 은설란의 첫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평화로운 곳이군요.”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사사로운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아직 한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어제까지는 그랬다.
남창(南昌) 번화가(繁華街)에 자리한 꽤 유명하고, 덕분에 돈 잘 버는 주루(酒樓), 오성루(五星樓)!
총 5층으로 이루어진 초거대 주루인 이곳 3층에서 지금 두 사람의 남자가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과 거창하게 차려진 안주를 마치 멸절시키기라도 하듯 맹렬하게 먹어치우는 사람은 아직 나이 어린 20대 청년이었고, 청년의 엄청난 식욕을 멍하니 지켜보는 쪽은 40대의 중년인 쪽이었다. 중년인은 특이하게도 전신 이 붉은색으로 도배한 듯한 인상의 도객이었다. 두 사람은 바로 염도와 비류연이었다.
냠냠쩝쩝! 우걱우걱! 꿀꺽꿀꺽!
감히 범인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놀라운 식욕! 인간의 식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먹어치운 주제에 살도 하나 찌지 않다니, 도대체 그 많은 음식들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또 비류연 이 작자의 위는 도대체 우주(宇宙)라도 되는 것일까? 보면 볼수록 염도는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비류연의 한켠에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비워 진 안주 접시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도대체 자기 돈이 들지 않는 상황에 처하면 어느 정도까지 먹어댈 수 있다는 것인가? 염도는 절대로… 절대로… 죽었다 깨어나도 그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 다.
염도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비류연을 응시했다. 손에 든 술잔은 자신의 본분을 잊은 듯 비워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왜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요?”
잠시 먹는 걸 멈춘 비류연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염도는 자꾸만 늘어나는 계산서의 금액표기 숫자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비류연은 자신을 경제적 파산상태로 몰아넣 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쓰리던 속이 이제는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위에 구멍이 나지 않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젠장 또 지다니…….”
지지만 않았어도 여기서 이렇게 자기 돈 날려가며 비류연을 배불리 먹이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육 개월 동안은 꼼짝없이 이 지긋지긋한 제자 노릇을 해야만 하게 생겼다. 그것이 염도는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