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연(飛流 등장(登場)
“잠깐! 남의 물건에 손대기 전엔 항상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나요?”
봇짐꾼으로 변장한 자객의 몸이 뒤로 확 잡아당겨졌다.
어느새 다가온 비류연이 자객의 뒷덜미를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남의 물건’이란 물론 비류연이 자기 멋대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나예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누… 누구냐?”
백인회의 회주 관살(貫) 백탄저는 기겁하며 말을 더듬었다. 암습 잠행의 대가 신분으로 아차 하는 순간에 뒤를 잡혔으니 이제 영업 간판 내리라는 거랑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번 암습의 실패로 핵심 전문가들이 거의 죽어버렸으니 어차피 내려야 될 운명의 간판이기도 했다.
“글쎄요? 누굴까요?”
비류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담고 있어 그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비록 등 뒤에 있지만 백탄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살모사를 눈앞에 둔 쥐의 신세에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는 백탄저였다. 돈에 눈이 멀어 괜한 청부를 맡았다는 후회감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크윽!합”
슈욱! 번쩍!
비류연이 그의 뒷덜미를 한번 끌고는 놓아주었기 때문에 검을 뽑을 기회는 있었다. 청부자객답게 그의 검은 짧고 날카로웠다. 게다가 스치기만 해도 사람을 손쉽 게 죽일 수 있는 극독까지 발라져 있었다. 그리고 어둠의 암습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암광처리를 한 탓에 검신은 칠흑처럼 검었다.
짧은 검은 급소를 찌르지 못하면 단번에 목표물을 즉사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일의 능률을 위해 독을 발라두는 것이 이쪽 업계에서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 다.
“흠! 꽤 좋은 물건인 것 같네요. 고가(高價)의 냄새가 느껴지는 걸요.”
한때 대장간에서 수년 간을 굴러먹은 데다가 검장(劍匠)의 자격까지 지니고 있는 비류연은 한눈에 백탄저가 든 검은색 독검의 가치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아직 백 탄저는 경계심 때문인지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경계심은 그의 마지막 남은 반격의 기회마저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쩌죠? 더 이상 그 검은 휘둘러질 일이 없을 것 같군요!”
“무… 무슨 소리냐?”
“이런 소리죠!”
비류연이 살짝 미소지었다.
서걱!
한 번 더 독검을 휘두르기로 내정되어있던 백탄저의 손목은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깨끗이 절단되어 얌전히 신체와 분리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느닷없는 일격이었 다.
“크아아아아악!”
이제 두 번 다시 오른손으로 젓가락질을 못하게 된 비운의 자객 백탄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팔목에 이제 막 생긴 절단면으로부터 피가 샘솟듯 솟 구쳐 나와 대지를 붉게 적셨다.
“그런데 남의 물건이라니, 뭐가 당신의 것이라는 거죠?”
비류연의 스쳐지나가는 문제 발언에 싸늘한 어조로 이의를 제기한 이는 바로 나예린이었다. 그녀는 희로애락을 짐작케 할 수 없는 눈으로 비류연을 바라보고 있었 다.
“글쎄 그게 뭘까요?”
비류연은 양손을 하늘로 향한 채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를 땠다.
채앵!
나예린의 검이 등 뒤에서 그녀를 찔러오는 한 자객의 비수를 막아냈다. 시선은 비록 비류연을 향하고 있지만, 그녀의 육감은 확실히 삼십육 방위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간격 안에 흙탕물을 튕기며 들어온 불쾌한 살의를 읽지 못할 만큼 그녀는 미숙하지 않았다.
스윽!
나예린의 검이 암습자의 비수를 반으로 부러뜨린 다음 그의 몸에 냉혹한 심판을 가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한기가 자객의 몸을 강제 침범해 그의 생명유지 활동
을 끊어버렸다.
“너 자객 아니지, 그렇지?”
염도는 비류연에게 손목이 잘린 불쌍한 봇짐꾼을 넘겨받은 후 인상을 팍팍 쓰며 협박조로 말했다. 백인회의 자객두(刺客頭:자객들의 우두머리) 백탄저는 어처구 니가 없었다.
이렇게 간단무쌍하게 실패하다니 자유청부 자객 중에서는 그래도 명성을 떨치던 백인회의 우두머리로서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하하하… 그… 그럼요. 제가 무슨 자객 같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을 하겠습니까.”
일부러 어눌한 척 보이려 했다. 그러나 염도는 백인회주 백탄저의 전신을 제압한 손을 풀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렇지! 넌 자객이 아니야! 그렇고 말고! 너의 허리 뒤춤에 꼽혀있는 검은 자객용 단검이 아니야. 저기 떨어진 검도 네 꺼 아니지?”
염도가 가리킨 독검에는 백탄저의 손목이 아직 고스란히 달려있었다. 백탄저는 헤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그럼요. 저게 제 꺼일 리가 있나요. 헤헤헤…”
바보도 아니고 저게 자신의 것이 아닐 리 없었다. 그러나 염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한 박력에 백탄저는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전 자객이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저걸 빼든 것도 강도가 제 짐을 노리는 줄 알고 호신술을 펼친 것뿐입니다. 믿어주세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백탄저가 빌었다.
“그럼! 그럼!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이제 그만 놔주란 말이야…….?
백탄저는 속으로 절규했다. 그러나 놔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 좋은데 말이야.”
염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예?”
백탄저가 의아한 얼굴로 염도를 쳐다보았다. 왠지 느낌이 수상쩍었다.
“왜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객이냔 말이야!”
또각!
“크아아아악!”
백탄저는 자신의 손목이 염도의 무지막지한 손아귀에 의해 ‘똑’ 부러진 채 갈대처럼 꺾이고, 가혹한 분근착골의 수법 아래 전신의 근육이 비틀리고 난 다음에야 그 는 염도가 자신을 이미 자객으로 단정 짓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뻔히 자객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여태껏 쓸데없는 질문만 퍼부으며 말을 빙빙 돌렸던 것이다. 즉 염도는 내심으론 백탄저의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굳이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냥 다 큰 어른의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던 것이 다. 백탄저만 괜히 잔대가리 굴리며 용을 썼던 것이다.
“끄아아아아!”
다시 한 번 백탄저의 처절한 비명성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죠?”
학원 내도 아니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리는 시장 한가운데였다. 비류연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연이에요. 우연!”
“흐음…….”
의심스럽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좀더 반가운 반응을 보여주면 안 되나요? 이거 너무 섭섭한데요. 우리 사이에…….”
비류연이 뻔뻔스런 얼굴로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 뭐가 있었나요?”
나예린이 싸늘한 어조로 비류연의 말을 받았다. 냉기가 펄펄 날리는 말이었다.
“아잉! 그런 건 부끄러워서 제 입으로는 말 못하죠.”
갑자기 눈앞에서 몸을 비비꼬는 비류연을 보는 것은 나예린에게 고역이었다. 필연적으로 그녀는 먼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나예린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태도였다.
“잠깐만요!”
비류연이 돌아서는 나예린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죠?”
마지못해 나예린이 돌아보았다. 비류연이 말했다.
“그래도 조력자인데 도와준 사람으로서 감사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걸보니 아직 대화를 계속하고 싶다는 의사 같았다. 외면되어졌던 나예린의 얼굴이 다시 비류연을 향했다. 그녀의 깊은 야명(夜明)의 호수 같은 눈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류연은 이럴 때의 나예린이 좀 부담스러웠다.
“전 도움 받은 기억이 없는데요.”
이때 나예린 앞으로 하늘에서 검은색 덩어리 하나가 떨어졌다.
쿵!
나예린과 모용휘, 그리고 은설란의 시선이 동시에 그 검정 덩어리를 향해 모아졌다. 그것은 시체였다. 그것도 한눈에 자객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 시체였 다. 그것을 보고도 비류연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럼 이 자객들이 설마…….”
비류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좀 전에 절 도와줬던 그 섬광의 주인이…….”
그제서야 나예린은 쌍귀 형제의 암습을 막아내 준 한줄기 섬광을 기억해냈다.
“물론 나의 한 수였죠.”
그렇다면 그녀는 비류연에게 생명을 구원받은 거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가… 감사해요! 이제 됐나요?”
나예린의 감사의 인사는 무척이나 딱딱했다. 비류연은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딱딱한 감사는 처음 받아보는군요. 전 지금 무척 슬퍼요.”
비류연이 난감함을 표시했다.
그때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듯한 여인의 아름다운 미성(美聲)이 들려와 비류연의 귀를 간지럽혔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 아니, 이제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사중화 은설란이었다.
“아! 그 폭풍 같은 소문의 주인공인 절세미녀시로군요!”
비류연은 인사의 답례로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은설란에 대해서는 애소저회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에 비류연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요즘 그녀 때문에 애소저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라나…….
“어머! 절세미녀라니 별말씀을, 소녀는 사중화 은설란이라고 합니다. 도움을 주신 데 대해 소협께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미인의 미소 섞인 깍듯한 인사를 받는 걸 싫어하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분명 미친놈이거나, 동성애자이거나 변태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다행히 비류연은 변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부터 그녀의 감사에 기뻐할 수 있었다.
“뭘요. 사해는 동도라는데 남이 곤경에 빠졌을 때는 돕는 게 당연하죠!”
비류연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그래봤자 코 아래 밖에 보이지 않지만) 말했다. 그를 아는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기가 막히거나 급체했을 이야기였다. 저 비류연 이 남을 위해 공짜로 나서는 경우란 가뭄에 콩 나는 듯 빈약하다는 것을 모두들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 듬직한 말씀을! 이름 높은 천무학관의 관도답게 협(俠)이 뭔지를 아시는 분이시로군요!”
“그럼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비류연은 가증스럽게도 서슴없이 대답했다. 강호의 협사들이 모두 혀 깨물고 죽을 만한 이야기라고 옆에서 지켜보던 염도는 생각했다. 왜 어 쩌자고 어제 비무에 져서 오늘 이런 꼴을 보고 있는 것인가. 못 볼 걸 본 사람이 되어버린 염도는 지금 똥 씹은 표정이었다.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전신의 닭살 이 파라락 일어났다.
“…..”
“어라? 여어! 휘, 안녕?”
미인들과의 사교적인 인사를 모두 마친 비류연은 그제야 모용휘의 존재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인사를 받는 모용휘는 전혀 안녕하지 못했다. 그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모용휘의 안색은 잔뜩 굳어진 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 친구가 좀 무뚝뚝하죠.”
어쩔 수 없다는 듯 비류연이 고개를 저었다. 미인의 곁에 있어도 변하는 게 하나도 없는 친구였다.
“어머! 원래 그런가요?”
은설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저 친구 태생이 원래 그래요. 저 무뚝뚝함과 병적인 결벽증은 이미 오래전에 불치병 판정을 받았죠. 획기적인 기적의 치료법이 나오기 전엔 당분간 치료는 불가 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죠. 요즘은 거기다가 여자 기피증이라는 터무니없는 병명도 추가된 것 같은데… 아직 초기 증상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무 척이나 심각하죠!”
비류연이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건 정말 큰일이네요!”
은설란은 비류연과 죽이 잘 맞는지 바로바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두 사람은 이미 모용휘의 반응 따위는 신경 한쪽 구석에 처박아 버린 모양이었다. 은설란은 문득 모용휘를 가지고 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모양이었다.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필사의 각오가 아니라면 정말 큰일이죠. 저래가지고 연애나 할지 모르겠어요.”
“난 정략결혼으로 결혼할 거니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모용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확실히 동요하긴 동요한 모양이었다.
“저 봐요! 통나무처럼 뻣뻣한 녀석이죠? 저 녀석은 농담이 이 세상 언어가 아닌 줄 알아요.”
“남의 인생사와 언어체계에 너무 관심이 지나치군! 더 이상의 관심은 사양하고 싶네.”
모용휘가 북해의 빙풍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이럴 수가……. 이제는 인간불신증과 인간기피증까지 덤으로 걸린 듯 하군요.”
정말 모용휘의 내면을 감싸고 있는 갑옷과 쌓아놓은 성벽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두터운 녀석이었다.
“정말 절친한 친구이신가 봐요? 그렇게나 상세하게 알고 있다니 말이에요.”
갑자기 모용휘가 구토할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도대체 누가 ‘절친한 친구’라는 지독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에 부합된단 말인가? 그로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감각이었다.
“그냥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친구일 뿐입니다. 소저께서 시간 나실 때 저 녀석의 여인기피증이라도 좀 고쳐주세요. 옆에서 지켜보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걱정 이 크거든요.”
요즘 들어 많이 능글능글해진 비류연이었다.
“쓸데없는 관심이 지나치군. 더 이상 내게 관심을 쏟는다면 나도 이제는 참고만 있지 않겠네.”
모용휘는 이제 인내심이 한계 수위에 다다랐는지 곧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더 이상 놀리는 건 신변의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신변 정도는 지 킬 자신이 있었지만 비류연은 그만 놀리기로 했다. 어떤 훌륭한 장난감이라도 너무 심하게 가지고 놀다보면 부서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탕도 맛있는 건 아껴가며 빨아먹어야 오래가는 법이다.
“보세요! 강함만 있고 부드러움이 없어요. 더 이상 했다가는 칼부림이라도 일으킬 듯하군요. 농담의 묘미를 모르는 녀석이라니깐요.”
비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모용휘에 대한 화제를 끝마쳤다. 그런 비류연을 보고 은설란은 방긋 미소지었다.
“이제 용무를 모두 마쳤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
은설란과 화기애애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던 비류연의 말과 행동은 나예린이 끼어듦으로 해서 끊어지고 말았다. 분명한 건 나예린의 말에 싸늘한 얼음가시가 돋쳐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 삐졌어요?”
비류연이 반문했다.
“그런 일 절대 없습니다.”
나예린이 단호히 강하게 부정했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비류연에게는 분명히 평소와의 차이점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러나 그 원인까지 파악한다는 것은 아직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갈 수 없는데요!”
“왜죠?”
나예린이 날카로운 어조로 반문했다.
“아직 받아야 할 게 남았거든요.”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속에 능구렁이 구십구 마리를 사육하고 있는 자의 미소였다. “도와준 데 대한 감사라면 아까 충분할 만큼 받지 않았나요? 더 이상 받을게… 읍!”
나예린의 다음 말은 비류연의 돌연한 행동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돌연 비류연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꿈결처럼 달콤한 한순간이 지나갔다.
쪽!
주위에 있던, 기분 전환삼아 번화가에 나왔던 남자 천관도는 물론이고 일반무사까지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나예린이 이 거리에 들어서면서부터 수십 명에 달하 는 사내들이 힐끔힐끔 그녀를 바라보거나, 쫓아오거나, 들러붙거나 하면서 그녀의 시야와 감각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천무학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천무학관 주의 를 배회하는 일반무사들에게도 나예린의 미모는 유명했다. 그녀는 안에서는 물론이고 밖에서도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녀 자신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나예린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앞에서 생긋 웃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당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이 남자를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이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안력으로도 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감쪽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매번 이런 순간이었다.
“어머 어머 어머!”
비류연의 기습 입맞춤을 옆에서 지켜본 은설란의 얼굴은 저녁노을보다 더욱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흥미로움으로 가득 빛나고 있었다. “꺄악!”
은설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교성은 찢어지는 비명이 아니라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귀여운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비류연과 나예린의 입맞춤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순간이라 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입맞춤을 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다. “어? 이번엔 안하네요?”
비류연이 신기한 투로 나예린에게 물었다. 그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기 때문이다.
“무얼 말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더 싸늘해져 있었다. 아직도 비류연의 감촉이 입술 끝에 남아있는 듯 했다.
“무엇은요! 나 소저의 검이 아직 뽑히지 않고 검집 안에 들어있는 것을 말하는 거죠.”
약삭빠르게도 비류연은 이미 원래 있던 곳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곳에 서있었다. 기습 입맞춤을 하고 나서 펼쳐지리라 예상되던 그녀의 검격이 미치지 않는 범 위까지 미리 몸을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공격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의아했던 것이다.
의아해하긴 나예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왜 자신이 매번 그랬던 것처럼 검을 뽑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 기회를 놓쳤을 뿐 잊은 건 아닙니다.”
거짓말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검을 뽑아 이 사내를 베어야 한다는 사실을, 중징계를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일순간이나마 잊고 있었다.
“흐흠, 그래요?”
비류연은 짓궂은 표정으로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나예린의 부동심이 깨어질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았다. 다시 그녀의 얼굴이 차갑 게 굳어졌다.
“그것보다 우선 해명을 들어볼까요?”
북해빙설처럼 차가워진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듣는 이의 심금을 얼려버릴 정도로 차가운 말! 더 이상 비류연의 언변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사표명이 기도 했다.
“일종의 감사에 대한 보답이라고나 할까요?”
“여전히 남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 무례한 사람이군요.”
“아직은 마음대로 허락해 주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두 번이 세 번이 된 것뿐이에요.”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예린도 분명히 엄연한 여자였다. 신경 쓰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섬세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저 남자 한테 휘둘려야 하는가……. 이미 비류연을 다른 남자랑 똑같이 보고 있지 않은 자신을 그녀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이 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 다. 단지 알 수 있는 건 그 남자만 생각하면 자신이 무척이나 분한 마음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남자에게 분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저 남자가 차지하는 자리가 따로 생긴 듯한 느낌이 들어 더욱더 싫었다.
그리고 그를 벨 수 없는 자신의 미진함이 그녀를 더욱 분노케 했다.
“은 소저, 나 소저. 그럼 이만 가실까요? 가서 보고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습니다.”
모용휘가 중재의 의미로 끼어들어 길을 재촉했다. 이정도로 성대하게 일을 벌여 놨으니 학관 내가 잠잠할 리가 없었다. 아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보고해야 할 일 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은설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제 2차 암습에 대비해 한시라도 빨리 천무학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 다음 번의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
비류연이 은설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호호호! 왠지 그날이 매우 가까울 거란 생각이 드네요. 살펴가세요.”
비류연의 작별인사에 은설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류연은 포권을 취한 다음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사건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천무학관 순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후처리를 도맡아한 염도와 함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이미 오늘 만족스런 성과를 얻어낸 후라 불만이 없었다.
돌아서는 비류연의 등을 바라보는 은설란의 눈에 기광이 번득였다.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타인이 눈치 채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만 나예린만이 잠시 시선을 돌려 은설란을 살짝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가타부타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저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무척이나 든든하겠죠?”
은설란이 나예린을 보며 말했다. 은설란은 웃고 있었다. 이런 대대적인 자객의 암습 같은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그녀는 웃을 수 있는 배짱이 있었다. 확실히 이 사 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글쎄요… 쓸데없는 일이나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나예린이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쨌든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네! 남을 무척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도 함께 가지고 있죠.”
나예린의 평가는 은설란에 비해 턱없이 짰다.
“저 사람과는 곧 다시 만날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어요. 그거 아세요? 제 예감은 무척 잘 들어 맞거든요!”
은설란은 나예린을 바라보며 활짝 웃어 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의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이틀 뒤, 비류연은 자신을 흑천맹 진상조사관 사중화 은설란의 호위가 되었음을 알리는 공문서를 받게 된다. 이유인즉, 조사관 본인의 강력한 희망과 요구 때문이 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제 은설란의 호위는 이로서 세 명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추진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또 한번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일을 준비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