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8권 9화 – 새로운 시작

비뢰도 8권 9화 – 새로운 시작

새로운 시작

-특별수련조 편성

“아가씨,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부 겸 노복으로 은설란을 따라온 한로(韓老)가 물었다.

성성한 백발과 세월의 무게에 눌려 굽어진 허리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녀를 생각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적지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아군이었다.

그는 갑작스런 맹주의 명령으로 자신을 돌보게 되었는데도 찡그린 얼굴 한번 지은 적이 없었다. 은설란은 자신의 곁에서 항상 자신을 돌봐주는 한로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의 곁에 있다보면 왠지 모를 안도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한로! 여기가 제가 아는 그 천무학관이 맞다면 이 정도 도전은 받아 주리라 여겨져요. 그렇게 꽉 막히고 속 좁은 사람 같지는 않거든요.” 그녀는 부탁이 아니라 도전이라 말했다. 그녀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이번 일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아가씨…….”

한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녀의 눈은 망설임 없는 단호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로는 잠자코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성명(性): 남궁상

무림명(武林名) : 뇌전검룡(雷電劍龍)

출신문파(出身門派) : 남궁세가(南宮世家)

무기(武器) 검(劍)

무공(武功) : 남궁세가 가문비전 뇌룡검법

특기사항(特記事項) : 구룡의 일인

“…….”

다른 사람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손이 그 안에 초라해 보일 정도로 작게 느껴지는 서류 한 장을 들고 있었다.

보통사람의 두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무튀튀한 손은 그 손에 비해 너무나 왜소해 보이는 도장을 서류 위에 낼름 찍었다. 그러나 종이가 찢어질까봐 힘주어 찍지 는 않았다.

투박한 손이지만 손의 주인은 강호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이 손의 역할은 유사시 돌을 빻아 가루로 만들고 철을 부수기 위한 손이었다. 보통 이 주먹에 맞으면 스치기만 해도 최하가 사망이었다.

이 손은 그 유명한 천무학관주 마진가의 바로 그 무쌍하다는 철권이었던 것이다.

찬찬히 보고서를 훑어본 마진가는 한 손에 도장을 들고 하얀 바탕 위에 조심스레 붉은 인을 찍었다.

합격(合格)

재고(再考)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도장 찍기라는 단순 노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고 있는 일이 도장 찍기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그의 행위는 조심스러웠다.

화산지회 후보 선발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신중함이 행동에 표출되어 나오는 모양이다.

아직도 그의 책상에는 방금 전과 비슷한 내용을 담은 심사서류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다음은 이 아이 입니다.”

영뇌(靈腦) 이무강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서른여섯 가지 병법서와 아흔아홉 가지 학문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天門地里)를 읽는다는 주위의 평가와 전혀 관계없는 그저 간단한 단순노동에 불과했다. 이무강이 마진가 앞으로 다시 한 장의 심사서류를 더 내밀었다.

성명 : 나예린

무림명 : 빙백봉

출신문파검(劍后) 문하(門下) 무기 : 검

무공 : 정천맹주 나백천의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

검후 비전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

특기사항 : 백도연합무림맹 정천맹 맹주 나백천의 금지옥엽

물론 철권 마진가는 서류에 적힌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특기사항 안에 들어갔어야 할 수십 줄이나 생략된 사실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올해의 가장 기대되는 여자 아이 중 하나입니다.”

“음! 그렇겠지요! 올해는 성비(性比)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올해는 유난히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고수들이 많았다. 마진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 규칙 때문이었다.

화산규약지회 운영에 관한 한가지 규칙!

그것은 바로 화산지회에는 양측 모두 지정된 비율 이상 여성이 참가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다행이도 이번에는 성비로 걱정할 일은 없을 듯했다.

영뇌 이무강의 강퍅한 손이 다시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내일 행정적 처리를 위해 서류를 천 노사에게 넘기려면 오늘 안으로 명단 작성을 모두 끝내야 했다. 마진가가 받아든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성명 : 임성진

출신문파 : 녹림문(綠林門)

학년 : 4학년

무림명 : 진성곤(振星根)

무공 : 성진십이곤(星振十二榥), 곤법 중 무거움을 중시하는 붕곤이라는 특이한 곤법을 사용함.

영뇌 이무강은 건네준 서류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이 녀석은 신원이 불확실합니다. 사상도 불확실하고… 사고도 그동안 셀 수 없이 친 데다가 행실도 바르지 않습니다.”

불합격시키는 게 어떨까요? 라는 말이었다. 철권 마진가는 단 한 마디만 했다.

“기각(棄却)!”

아무래도 마진가는 그의 서류 위에 합격 도장이 찍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실력이 있다면 일단 후보에 넣어둡시다. 출신이나 성분, 그리고 인성의 뒷조사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소.”

그렇게 말하고는 마진가는 대뜸 그 종이 위에 ‘합격’이라고 새겨진 도장을 찍었다. 이무강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는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성명 : 효룡

무림명 : 을진무쌍검(乙震無雙劍)

출신문파 : 태을검문

무기 : 쌍검(劍)

무공 : 태을무쌍쌍검류, 태을천강쌍검법.

그것은 효룡에 대한 심사를 요구하는 서류였다.

“요즘 관내에서 상당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사전 조사결과 이 아이 역시 출신과 신분이 상당히 불확실합니다.”

다시 이무강이 말을 늘였다. 귀찮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불합격 시켜버리자는 의도가 다분했다.

“기각!”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일단 가능성이 있는 자는 실력만 있다면 누구나 후보로 발탁될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다음 심사자를 본 이무강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지금까지 그의 얼굴이 이만큼 심하게 일그러진 경우는 없었다. 그 안에 적힌 사람은 요즘 그의 머리를 지끈거 리게 만들고 있는 인물이었다.

성명 : 비류연

무림명 : 운수대통 격타금(?)

출신문파 : 불명(不明)

무기 : 불명

무공 : 불명

특기사항 : 모든 것이 불확실함

“엥? 이런 녀석까지 후보로 뽑습니까?”

마진가에게로 건네주기 전에 서류를 한번 훑어본 이무강이 반문했다.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불쾌감이 이는 모양이었다.

이런 의문투성이의 신분 완전 불확실한 녀석을 영예로운 화산규약지회 정파 대표 선발후보로 뽑는다는 것은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완전기각(完全棄却)!”

철권 마진가의 태도에는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신분과 연줄 위주보다는 철저한 실력본위로 후보를 추려내겠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게다가 이 녀석에 관해서 라면 주변에서 이런 저런 수많은 이야기가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린이의 입술을 빼앗은 놈이라 했던가…….’

그 때문에 더욱더 흥미가 이는 지도 몰랐다. 게다가 유언비어에 가까운 소문도 많이 돌고 있었다.

“철각비마대를 홀로 막아냈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까지 도는 녀석일세. 이 녀석을 안 뽑는다면 다른 누구를 뽑는단 말인가? 진짜 어떤 실력을 지녔는지 궁금하지 도 않은가?”

“…..”

이무강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합격!

마침내 비류연의 서류에 합격도장이 찍혔다. 이제 비류연도 화산지회의 대표 선발전에 참가할 자격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물론 본인은 이 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지만 말이다.

마진가는 다시 서류를 들어 하나씩 둘씩 철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화산규약지회는 천무학관주인 철권 마진가가 직접 관리 처리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천무학관이 존재하는 존재 이유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 외에도 명성과 실력이 쟁쟁한 인물들이 철권 마진가의 큼직하게 펼쳐진 철권 위를 지나갔다. 서류를 둘러보는 마진가의 시선은 종이를 관통할 듯 날카로웠다. 여기서 뽑힌 자만이 진정한 천무학관의 강자들이라 칭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붉은 책상.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의 집무실에는 그가 주로 집무를 볼 때 사용하는 붉은 색 책상 하나가 있다.

이 책상은 최고급의 붉은 자단목을 원자재로 당시대 최고의 장인 귀장(匠) 공장장이 만든 최고 중의 최고라 불릴만한 물건이로서 그 우아하게 흐르는 선은 보는 것만으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명품이었다. 지금 그 우아한 명품은 수백 장에 달하는 서류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천무학관 운영과 강호 정세에 관한 거의 모든 사항이 이곳에 서류와 문자로 변해 처리되는 것이다. 가히 작은 강호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스윽!

천무학관의 대소사를 담당하고 있는 행정담당관 천외교 노사는 이 엄청난 양의 서류더미 위에 피도 눈물도 없이 한 장의 문서를 더 내밀었다.

이것은 마진가가 영뇌 이무강과 상의하여 처리한 안건을 정리하여 서면으로 다시 제출한 것이었다. 오늘 이 책상 위를 무사통과하면 이 문서는 그때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쾅!

마진가는 그곳에 훑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결제도장인 천무인(天武印)을 찍었다.

“계획대로 추진하세요.”

“예! 늑기한 노사와 고약한 노사라… 음과 양처럼 참으로 반대되는 성향의 두 사람이군요.”

천외교가 보기에도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사람이었다. 과연 기대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마진가는 별로 걱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로 반대되는 가르침 속에 어떤 깨달음을 얻을지 기대가 됩니다.”

솔직히 천무학관에서 이만큼 반대되는 분위기를 가진 자도 드물 것이다. 천외교는 마진가의 생각이 맞아떨어지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결제해 주십시오. 은설란에 관한 일입니다.”

그리고는 천 노사가 다시 하나의 문서를 제출했다. 이번에는 마진가도 서슴없이 도장을 찍지는 못했다.

내용이 내용인 만큼 약간만이라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으음…….”

한참을 생각한 이후에야 비로소 마진가는 그곳에다가도 천무인을 찍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문서를 받아든 천 노사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한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정과 사는 그 본질적인 뼈대에서부터 무리(武理)를 달리합니다. 옆에서 가르침을 들었다고 해도 본질이 다른데 그리 큰 위협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비전 전수(秘傳傳授) 시에는 빠지기로 했으니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봅니다.”

마진가도 천 노사의 근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한 바가 있어 그 위에 불가(不可) 도장을 찍을 수가 없었다.

“관주! 그럼 이대로 추진하겠습니다.”

아직 이 두 장의 서류가 불러올 파장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어이, 준호! 뭐가 그리 좋아서 눈 오는 날 똥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는 거야? 뭐 잘못 먹었냐?”

안절부절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윤준호를 보다 못한 비류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윤준호의 행동이 너무나 독특했다. “저… 저… 저…….?

윤준호는 자신의 검지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키며 연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저렇게 심하게 혀를 떠는데 말을 알아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그러니까 저… 저… 저기…….”

아직도 단어가 연결되어 제대로 된 말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이 상기될 대로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보니 무지하게 흥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그 흥분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도 사람은 말이 통해야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몸짓만으로 어지간한 의사소통을 마무리하는 동물들과는 틀렸다.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한 대화진행 따위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비류연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물었다. 한번만 더 똑같은 것을 묻게 만든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속으로 다짐하면서…….

“그러니까 뭐냐니깐! 확실히 말해! 아니면 관두고.”

“그… 그러니깐 내 말은… 저… 저길 보라구요.”

모든 의지력을 짜내 드디어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게 된 윤준호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그것이 있었다. 비류연이 눈을 부릅떴다.

“종이(네, 뭐!”

그의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종이인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되는 감상이었다. 아직 비류연은 그 안의 내용은 안 읽은 상 태였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그 내용이요. 공고 붙은 걸 봤으면 그 내용을 봐야지 종이를 보면 어떡합니까?”

윤준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알았다구. 까다롭기는!”

비류연은 다시 한 번 공고로 시선을 주었다. 이번엔 확실히 흰 바탕보다는 검은 글씨에 초점을 맞추면서.

공고(公告)

다음 지명된 관도들은 내년에 있을 화산규약지회의 대표 후보로 발탁된 사람들로서 익일(翌日)부터 새로운 조 편성에 들어가 새로운 노사 밑에서 새롭게 수련 받 는다. 이들은 앞으로 백검조와 흑검조, 두 조로 나뉘어 특별수업을 받도록 한다.

<후략>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

마진가의 이름 옆에는 붉은 천무인이 마치 자신의 권위를 과시라도 하듯 큼지막하게 찍혀있었다. 어떻게 보면 공고문에 딸려있는 품질보증서(品質保證書)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특별관리조로 편입될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곳에는 칠절신검 모용휘를 위시하여 효룡, 장홍, 나예린, 독고령, 그리고 주작단과 비류연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다. 그들은 같은 조에 속하 게 된 것이다. 게다가 특히 올해는 작년에 비해 2학년의 수가 많았다.

그들은 흑검조(黑劍組)였다.

그리고 흑검조의 특별담당노사는 매우 고약한 사람이라고 적혀있었다.

이 한 장의 공고가 불러온 파급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드디어 강호 최대 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얼마나 큰 대회면 일년 전부터 그 준비에 절치부심들 하겠는가. 묘한 흥분과 긴장감, 그리고 열기로 천무학관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윤준호가 계속해서 지나치게 몸에 해로울 정도로 흥분하며 손가락질 해대고 있는 이유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기 때문이 다.

‘윤준호!’라 적힌 석자의 이름.

“봐요! 보라구요! 확실히 보세요! 보이죠! 보이죠? 확실히 보이죠? 내 이름! 윤준호라 적힌 내 이름 석자가 확실히 보이죠?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죠?”

비류연은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친구의 기쁨과 행복과 감동을 나누어 두 배로 만들 어 줄 생각 따위는 꿈에도 품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에게 대수롭지 않다 해서 그것이 윤준호에게까지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화산파 저능아 내지는 미숙아 내지는 불량품 소리를 들어온 윤준호에게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거나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지금 불가능이 가능이 되어 현실 로 나타났던 것이다.

공고도 다 읽었겠다, 윤준호가 지독히 흥분한 이유도 알았겠다, 그래서 비류연은 다시 새로운 감상을 발표했다. 그것은 이랬다.

“그런데, 뭐?”

무지무지 귀찮고, 흥미도 하나 없고, 짜증나기까지 하다는 시큰둥한 반응, 그 반응은 윤준호에게는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아니, 이런 엄청난 일에 이 사람은 아무런 흥분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무인이라면 누구나 피가 끓고, 투지가 일어날 이런 일을!

그래서 소심한 윤준호도 주위의 열기에 취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왠지 자신과 이 글을 읽고 흥분하는 다른 모든 이들이 바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만은 자신이 그들의 대변자가 되기로 윤준호는 굳게 결심했다.

“그럼 흥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드디어 화산규약지회의 대표를 뽑는 대표 선발전이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드디어 천무학관 전체가 화산지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그렇게 흥분해서 삿대질을 수십 번 해대며 혀를 꼬고 말을 잇지 못해야 하는 이유야?”

아직 윤준호의 변명은 꺼리와 정당성, 그리고 개연성과 구성에서 낙제점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비류연이었다. 하지만 윤준호에게는 그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그럼요! 당연하잖아요. 화산지회는 그저 단순한 무림대회가 아닙니다. 향후 5년 간의 정사양도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대전 중의 대전이라구요. 그런 대회의 대 표로 뽑힌다는 것은 실질적인 백도의 대표가 되는 것, 전 정파무림의 명예를 어깨에 짊어지고 싸운다는 그런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 표 후보에 오른 거구요. 그 엄청난 사람들의 모임에 저 같은 것이 뽑히다니…….”

이대로 놔두면 윤준호는 그대로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익사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냐?”

시큰둥! 시큰둥! 냉랭! 여전히 별 감흥 없는 반응을 보이는 비류연이었다. 나름대로 일반 보편적인 건실한 백도 청년 윤준호에게는 비류연이 오히려 더 이해 못할 존재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 자는 도대체 어떤 괴상망칙하게 생겨먹은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젊은 정파 신진고수, 후기지수라면 눈에 불을 켜고 절치부심하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 바로 이 화산규약지회(華山規約之會), 줄여서 화산지회(華山之會)라 불리는 대회였다.

5년에 한 번 있는 정사흑백의 자웅을 겨루는 대전 중의 대전이었다. 전 무림에서 가장 큰 행사라 불리기에 가장 합당한 행사라 할 수 있었다.

대표로 뽑히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라 불리는 이 대회의 대표 후보에 오르는 엄청난 일을 겪고도, 권태에 찌든 목소리로 시시하다고 말하다니……. 게다가 올해 화산지회는 백 년째 기념대회라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소문이 예전부터 파다했었다.

“저건 이미 대표 선발전이 시작됐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구요! 우리는 그 엄청난 영광의 자리에 한 걸음 다가갔다는 거구요. 게다가 거기에… 거기에…….” 윤준호는 끝내 격한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남자가 눈물을 보였다고 해도 지금의 그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에고! 알았다, 알았다고.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라.”

별 수 없이 비류연은 윤준호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요즘 사람이 너무 좋아진 게 아닌가, 자신을 책망하는 비류연이었다.

그러나 비류연도 놀랄 만한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다음날 특별 편성된 교실에서 벌어진 일은 비류연으로서도 충분히 놀라고 남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