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9권 10화 – 비계 속에 감춰진 과거

비뢰도 9권 10화 – 비계 속에 감춰진 과거

비계 속에 감춰진 과거

-애증(愛憎)

“자네의 힘을 과신하고 싶은 치기 어린 생각은 잘 알겠네만,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용천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듣는 비류연의 기분은 상당히 불쾌했다.

“과신(過信)? 왜 제가 과신해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이죠?”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비류연이 되물었다.

“그럼 아니란 말인가?”

“과신이란 것은 가지지 못한 자, 부족한 자가 뭔가 있어 보이려 하는 의미 없는 발버둥이죠.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얼간이들이나 하는 짓을 왜! 제가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전 모든 것이 완벽한데 무엇을 위한 과신이란 말인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용천명은 기가 막혔다.

“내가 잘못 안 모양이군. 자넨 과신이 아니고 광오로군! 난 아직까지 내 앞에서 자네처럼 우주 광오한 자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네. 생소한 경험을 시켜 줘서 무척 고맙다고 해야 하나?”

“감사하고 싶다면 거절하지는 않죠.”

용천명은 굉장히 고개가 뻣뻣한 남자라고 여겼다. 자신 앞에서 이렇게 고개를 뻣뻣이 쳐든 후배를 본 역사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남자로군! 지금 자네가 감히 나의 말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지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니 입이 아프긴 하지만, 난 사과를 받기 전에는 이 소저를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군요.”

용천명의 단아한 검미가 순간 불쾌감으로 꿈틀거렸다. 말로는 아무래도 제압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의 왼손이 자연스럽게 검집에 가서 닿았다. 언제든지 발검 이 가능한 준비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곧 놓게 만들어 주지.”

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미소는 마하령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필요 없어요!”

서릿발 같은 차가운 목소리!

용천명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마하령은 매몰찰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 차갑고 매서움에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기겁할 정도였다.

“저… 저래도 되는 거야?”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명색이 구정회의 회주인데…….”

‘윽! 성깔하고는…….?

이런 신중론이 대두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반응은 격렬했다.

“싫다는데요? 이걸 어쩌죠?”

입꼬리를 가볍게 말아 올리며 비류연이 조소했다. 아무래도 그는 남의 염장을 지르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하령……..”

조심스런 어조로 용천명이 그녀를 불렀다.

“친한 척 부르지 말아요! 당신의 도움 따윈 필요 없어요.”

차가운 얼음 가시가 매서운 냉기를 뿜어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용천명으로서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거요?”

용천명은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양 회가 경쟁 관계에 놓여 있지만 이 정도로 매몰찬 거절을 당할 만큼 나쁜 짓을 한 기억은 없었다.

“절대 당신의 도움은 받지 않아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게 나아요. 전 이대로 상관없으니 구정회의 회주님께서는 신경을 꺼주시면 좋겠군요.”

한기(氣)와 독기가 손을 맞잡고 구구절절 흐르는 목소리였다. 정말 자존심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였다.

‘누가 당신 따위의 도움을 받을 줄 알고!’

어린 소녀의 마음에 났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절대 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군웅회의 수치이기도 했던 것이다.

“저기… 화내는 도중 미안한데요, 함부로 남을 살인 계획범으로 만들지 말아줄래요?”

“죽긴 누가 죽는다는 겁니까? 사과 한 번 하라는 거지.”

잠시 비류연이 끼어들어 마하령에게 주의를 주었다. 괜한 누명은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있기는 있군!’

과거에 마하령과 용천명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얼마나 천인공노할 일이 있었길래 마하령은 용천명에게 저토록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아 무런 배경도 없이 이런 깊디깊은 감정의 골이 나타날 리가 만무했다.

아직도 마하령의 눈에서는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하령이 열 살쯤 되던 해였다. 그때 그녀가 살고 있는 천무학관 관주관사로 무림맹주 나백천이 딸을 데리고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마하령은 벌써 살 이 찌기 시작해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토실토실했다.

“안녕하세요. 나예린이에요.”

지나칠 정도로 귀엽다!

열 살 또래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눈을 가지고 들릴 듯 말 듯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나예린이 마하령의 어린 눈에는 굉장히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어린 소녀였지만 나예린은 이때부터도 벌써 그 아름다움이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귀여웠다. 환상처럼 투명하고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흑요석보다 더 검고, 밤하늘보다 더 깊은 마력 같은 눈동자,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순수의 결정체 같은 느낌이었다.

나예린은 같은 여자인 마하령 자신이 보기에도 깨물어 주고 싶고, 뺨을 대고 부비부비 해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깜찍했다. 다만 말수는 지금보다 더 적었다. 마하령은 항상 천상의 선녀처럼 귀엽다고 칭찬받는 나예린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자신에게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들 일단은 겉모 습이 예뻐야 인정해 주는 듯했다. 그것은 어린 마음에 큰 상처로 작용했다.

어른들은 항상 나예린에게만 신경 썼지, 자신에게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나예린에게 심술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분하고 원통한 어린 마음에 나예린을 못살게 굴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어떠한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나예린의 시선은 그녀 자신을 향하지 않는 듯했다. 어린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왠지 자신이 더 어린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종종 있었 다.

자신이 심술을 부려도 나예린은 그저 묵묵히 받아줬다. 그녀가 들고 있던 인형의 목을 따버렸을 때도, 쓰고 있던 화관을 부수어 버렸을 때도 무덤덤한 시선으로 자 신을 바라볼 뿐, 울거나 고자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무반응에도 불구하고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아니, 그만둘 수 없었다. 칭찬에도 심술에도 뚜 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나예린.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주제에 그 모든 것을 귀찮아하다니… 마하령은 그런 나예린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괴롭히려고 했는지도 모른 다. 못살게 굴고 싶었다.

하지만 나예린의 나이답지 않게 깊게 잠긴 눈을 볼 때마다, 자신의 내심이 들킨 듯한 부끄러움에 차마 제대로 실행하지는 못했다. 약간의 심술 정도가 그녀의 한계 였다.

그리고 그때 또 한 명의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무학관을 방문했다.

“하령아! 소개하마. 쌍룡보의 후계자인 용천명이란다. 같은 나이이니 사이좋게 지내거라.”

옥으로 깎은 듯한 미소년이었다. 마하령은 그 소년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나예린이 어제 귀가한 것에 대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같이 있다가 비교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녕! 용천명이라고 해!”

“”……

머뭇머뭇!

처음 만났을 때 마하령은 수줍음으로 인해 한마디로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이 순간까지만 해도 용천명은 무척이나 예의바른 소년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아버지 마 진가가 사라진 순간 소년의 태도는 심드렁하게 돌변했다. 방금 전까지 화사하게 웃던 그 소년과 동일 인물인지 두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저기…….”

마하령이 뭔가 말을 붙이려고 하는 그 찰나였다. 소년이 고개를 돌려 토실토실한 마하령을 쳐다보았다. 소년의 뚫어질 듯한 시선에 소녀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때 소년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지독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뚱땡이!”

그 말 한마디는 아직 한창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어린 소녀의 마음에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한마디!

그런 지독한 한마디를 자신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호감을 품은 첫사랑의 소년에게서 바로 그 ‘뚱땡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어린 소녀가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무게였다. 소년은 비수 같은 한마디를 소녀의 여린 가슴에 박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향기 만발한 꽃밭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소녀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반드시 날씬한 미인이 되어 보이겠어! 그리고… 그리고…….”

소녀는 맹세했다.

그러나 돌연변이인지 이상체질인지 아무리 무공 수련에 집중하고 식사를 조절해도 그녀의 살은 빠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보통 장정보다 적어도 두 배 이상 근수가 나가게 되자, 그때서야 비로소 마진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살이 점점 곱 의 곱으로 불어남에 따라 그녀는 두문불출하게 되었고 그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마진가의 걱정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시집도 못 갈 것 같았다. 그 전에 자폐증에나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자신의 딸은 방 안에 처박힌 채 햇 빛을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타개책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마진가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가 결심한 이상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것이 인체의 모두 부위를 의식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환상의 기공(奇) ·천축대승유가신공(天竺大乘柔家神功)’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깊고 어두운 자아의 무저갱 속에 갇혀 있던 마하령에게는 한 줄기 찬란한 광명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죽을 각오로 이를 악물고 맹렬히 신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 마진가도 신공을 하루빨리 대성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지원도 아 끼지 않았다. 온갖 영약을 구해다 먹이고 자신의 내공까지 일부 나눠 주면서까지 그녀의 성취를 도왔다.

뼈와 살을 깎는 고행을 거듭한 지 6년! 마침내 그녀는 천축대승유가신공을 대성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붙은 살들을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정 두 사람이 손을 잡아도 두를 수 없던 허리가 개미허리만큼 얇아졌다. 수박만큼 커 보이던 얼굴도 달걀만큼 갸름해졌다. 막 벌목한 수백 년 묵은 통나무 같던 다리도 철사처럼 가늘어졌다.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길고 어둡고 힘들었던 폐관을 깨고 나왔을 때 그녀는 남들이 모두 감탄할 만한 몸매와 미모의 소유자로 변모해 있었다. 탈태환골이었다.

6년 만에 새로 보는 태양이 그렇게 휘황찬란하게 밝을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아름다 움에 대한 칭송도 귀가 따갑도록 원 없이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밝고 따뜻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곳이었던가!!’

세상이 달라 보였다. 과거에 보던 세상은 칙칙한 회색빛 단색이었지만, 지금 보는 세상은 총천연색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과거 뚱땡이라 불리던 그녀는 죽 고,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 과거의 악몽을 들춰내려는 사람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