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약한의 특별수련
“흥! 오늘은 이만 물러가네만 언젠가 자네의 배를
갈라 볼 기회를 꼭 한번 주게나! 내 부탁함세.”
“무슨 뜻이신지…….”
늑기한은 의아함을 담은 시선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있으면 그때그때 푸는 것이 상책이다.
뒤로 질질 끌다가 병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자네 건강이 걱정돼서 잠이 안 오니 어쩌겠나? 내 의술에 대한 조예는 깊지 못하지만 자네의 장기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는 꼭 확인해 보고 싶다네!” “네?”
“별거 아니라니깐 그러네! 그저 자네의 간하고 쓸개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뿐일세. 단지 그것뿐이야! 다른 악감정은 없으니 안심하게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충분히 악감정이 섞여 있었다.
‘윽!’
고약한의 가시 돋친 독설에 늑기한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리고 속이 뜨끔했다. 걸린 병도 없는데 위장이 아려 왔다.
마음이 병을 만든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위염을 동반한 복통이 아니었다.
고약한은 아무래도 자신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과연 고단수로군.’
그러나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고 싶군요. 늙고 병든 노구에 부담이 될 수 있는 일을 젊은 제가 감히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노년은 소일거리나 찾아다니시면서…….” “느끼한 역겨운 바람둥이 놈!’
‘심술궂은 망할 놈의 노친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데 부딪치며 불꽃을 튕겼다. 역시 늙은 생강은 맵고, 젊은 여우는 영악한 모양이었다.
“쳇! 빌어먹을 영감탱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 늑기한은 자신이 빌어먹을 영감탱이라 규정하고 있는 고약한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현재 화산규약지회를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백검조를 맡고 있는 늑기한의 거처에는 밤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고약한의 지금 행동은 너무 위험합니다. 뭔가를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눈치 채지는 못했겠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위험합니다. 요즘 보이는 수상쩍은 눈초리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적의(敵意)입니다.”
존대를 하는 쪽은 오히려 늑기한 쪽이었다. 그러나 늑기한의 대화 상대는 목소리만 들릴 뿐, 그의 거처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넘겨짚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네. 섣불리 단정내릴 수는 없지!”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늑기한의 성급함에 제동을 걸었다.
“더 이상 위협을 안겨 주기 전에 제재를 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는 피해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너무 극단적입니다.”
아무래도 늑기한은 고약한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괜찮네! 아직은 때가 아니네. 지금은 더 두고 보게! 저쪽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걸세! 함부로 이쪽을 노출시키지는 말게! 모든 일에는 선후와 시기라는 게 있는 법! 지금 몸을 움직여 그분께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게! 그분의 신뢰를 배반하는 자는 본인이 용서하지 않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말씀을 전하는 자! 명(命)을 내리겠다.”
“예!”
무릎을 꿇으며 늑기한이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모든 것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처리하라.”
“복명(復命)!”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효룡의 쌍검이 비류연을 향했다.
“꼭 이렇게 해야겠나?”
비류연이 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일세!”
침중한 얼굴로 효룡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검극은 여전히 비류연을 향한 채였다.
왼손의 방어, 오른손의 공격! 쌍검식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자 가장 안정되고 굳건한 자세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네.”
효룡이 비류연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래? 좋은 예지력이군! 칭찬해 주지!”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그가 보기에 효룡은 어제까지 시체 친구 같던 그 효룡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을 속박하던 굴레 중 하나를 털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호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어제까지 풀죽어 있던 제2의 궁상자 효룡이 아닌걸?”
“험! 무… 무슨 좋은 일? 그런 일 없었네! 괜히 넘겨짚지 말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벌게지는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어젯밤 운향정에서 있었던 일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순진한 그에게는 너무 자극이 강했 다. 그러나 한 여인이 울먹거리는 그 다음 장면이 생각나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흐흐… 과연 넘겨짚은 것일까?”
“날 원망하지 말게!”
효룡이 비류연의 말을 얼버무리며 소리쳤다. 잡담은 그만 하고 한번 붙어 보자는 의미였다.
“물론! 자네야말로 날 원망하지는 말게! 성적이 걸린 일이라 나도 물러설 수는 없다구. 원망하려면 고약한 성격의 고 노사를 원망해.”
“그런 짓은 안 해!”
지금 그 둘이 서 있는 곳은 허공에 1장 가량 떠서 매달려 있는 가느다란 줄 위였다.
흑검조의 조원 모두가 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효룡과 비류연이 맞붙기 전에 선녀들의 한바탕 축제가 있었다.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일의 시초는 은설란의 특별 수련, 특별 견학에서부터 찾을 수 있었 다.
그녀가 어렵게 견학의 기회를 잡은 이번 수련은 귀살검 고약한 노사가 특별히 고안했다는 특별 수련이었는데, 마천각과 천무학관 양쪽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들은 은설란으로서도 처음 접하는 수련이었다.
이번 특별 수련의 방식은 허공에 가느다란 줄을 일정한 규칙 없이 높이도 경사도 장력도 다르게 연결해 놓고 그 위를 재량껏 균형을 잡아가며 서로의 무예를 겨루 는 것이었다.
줄의 장력이 약하기 때문에 당연히 휘청거리는 것이 인지상정! 그 출렁이는 줄 위에서 균형을 잡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지가 관건이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절대 줄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딛고 있는 줄이 끊어지거나 줄 위에서 떨어지면 곧 그 사람의 패배가 되는 것이다.
균형 감각과 운신법이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수련이었다.
“열기가 무척 뜨겁군요. 지켜만 보고 있어도 충분히 그 열정을 느낄 수 있겠어요!”
화산규약지회를 향한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은 견학 중이던 은설란 그녀에게도 확실히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물론이죠.”
자부심 강한 목소리로 모용휘가 대답했다. 사문이 칭찬받았는데 문하 제자로서 기쁜 게 당연했다.
주변에서는 비록 의심한다 해도 그도 확실한 인간이라서 오욕칠정 중 하나인 희(喜:기뻐하다)의 감정을 분명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드물게 그 감정 을 곱씹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날 밤 이후 왠지 모르게 낯이 뜨거워져 은설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게 되어 버린 모용휘는 자신의 호위 대상에 시선을 마주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수신 호위의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데다 그것을 떨쳐 버리지도 못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 다.
서슴없이 남을 칭찬하는 것을 보니 그녀도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즉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마천각에서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
지도 모른다.
이른바 승자의 여유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렇다면 저렇게 싱글벙글하며 다른 사람의 강함을 칭찬하는 행동도 납득이 가는 바였다.
“도대체 어떤 수련을 쌓길래 저 정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만일 비류연이라면 앞뒤 재지 않고 그냥 편하게 정면으로 물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든 싫어함을 넘어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에 항상 자유롭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에 비해 모용휘는 주위의 규칙과 상식과 틀에 너무나 얽매어 자신을 구속하고 있었다.
콰당!
그러던 중 다시 한 명의 관도가 줄 위에서 떨어졌다. 승패가 가려진 것이다.
“상당히 혹독하군요.”
고약한의 특별 수련을 지켜보던 은설란의 감상이었다. 보기보다 만만찮은 수련이었다. 인체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쓰지 않으면 수행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으니까요!”
모용휘의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점은 지금 그의 무뚝뚝함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일부러 가장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군요! 역시 화산규약지회를 향한 열정과 투지는 정과 사를 떠나 어느 곳에서든 차이가 없군요. 그런데도 굳이 편을 갈라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쉽네 요.”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동물이니까요!”
그 이상 가는 대답을 모용휘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참 특이한 수련이로군요! 이런 수련을 생각하시다니 고약한 노사님도 역시 인상만 잘 쓰시는 게 아니라 보통 분이 아니셨군요.”
은설란은 이 수련에 대해 무척이나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런 수련법을 고안한 고약한 노사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감탄하고 있었다. “한번 해보시겠어요?”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의외로 나예린 쪽이었다.
진짜? 진짜? 아니, 아니, 설마! 설마! 에이, 에이 등등 나예린의 발언에 모두들 각양각색의 다양한 반응을 보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요? 상대해 주시겠어요?”
나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표시였다. 은설란에게는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나예린이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가뭄에 콩 나는 것만큼이나 드문 일이었다. 은설란도 소문만 무성한 나예린의 실력에 대해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나예린 도 마찬가지였다. 무인에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었다.
“먼저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은설란은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고약한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선녀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그녀들의 움직임은 사뿐사뿐하고 화려했다. 모두들 넋을 잃고 그녀들의 춤과 같은 비무를 바라보았다. 디잉, 디잉.
사뿐사뿐! 줄 위를 가볍게 넘어 다니는 그녀들의 발걸음에 줄이 조용히 울렸다.
은설란과 나예린, 두 사람 모두 막상막하의 실력이었다.
“좋은 솜씨!”
현란한 솜씨를 마음껏 펼치면서도 은설란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중화는 아무래도 얼굴만 예쁘고, 머리만 좋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의 무공 또한 매우 출중 한 것이었다. 검후의 진전을 이은 나예린의 검에도 쉽게 밀리지 않는 은설란의 실력에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나예린도 마찬가지였다.
“과찬이에요. 은 소저의 무공이야말로 경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황송한 말씀!”
은설란이 무기로 사용하는 오색의 채대綵帶기다란 비단 허리띠)가 나예린을 향해 뻗어 갔다. 나예린의 사지를 봉쇄하기 위한 의도의 한 수였다. 그러나 나예린 의 검은 채대가 그녀의 간격 안으로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새하얀 백무를 연상케 하는 검기가 나예린의 검신을 타고 흘러나왔다.
두 명의 선녀는 가느다란 줄 위를 사뿐사뿐 날아다니며 여러 합을 교환했다. 현란하기 그지없는 초식 교환이었다. 은설란과 나예린은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서로 어울리다 보니 은설란은 나예린의 깊은 실력을 좀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대로는 그냥 보기 좋은 모범 시합으로 끝날 뿐이었다. 만일 그 렇게 된다면 무척이나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은설란은 결심을 굳혔다. 좀더 상승의 절기를 내보이기로 한 것이다.
“이대로 끝나면 무척이나 아쉽겠죠?”
은설란의 말에 나예린의 눈이 반짝였다. 은설란이 의도하는 바를 그녀도 알아챈 것이다.
“칠채윤무潤霧)!”
일곱 가지 빛깔이 안개를 물들인다는 초식명 그대로 화려한 광채와 함께 은설란의 채대가 일곱 가지 무지갯빛으로 빛나며 현란한 화풍(花風)을 일으켰다. 나예린 은 감히 방심하지 못했다.
변(變)식의 극에 달한 초식이었다. 이 초식을 깨려면 그보다 더한 변식을 일으키거나 모든 변화를 끊을 1초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시간은 짧았다.
한상옥령신검(霜玉靈神劍)
오의
월하비연(月下飛燕)
단 한 줄기 백색 검기로 이루어진 비연(飛燕:제비)이 망설임의 순간도 없이 꽃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눈앞을 현혹시키던 수만의 꽃잎들이 사라지고 은설란의 모습이 전면에 드러났다. 자신의 절기가 너무나 쉽게 깨져 버리자 은설란은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은설란은 재빨리 채대를 회수해 방어 태세를 취했 다.
그러나 나예린의 검초는 다음 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짝짝!
두 번 울리는 손뼉 소리.
“거기까지!”
고약한이 손뼉 소리로 그녀들의 현란한 춤사위를 중지시켰다. 혼을 잠시 저당 잡혀 놓은 채 구경하고 있던 남자 관도들에게는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고약한이 보기에 두 사람이 전력을 다하지 않는 이상 쉽사리 승패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접전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은설란이 나예린의 무예에 감탄을 보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나예린도 마주 보며 은설란의 예에 답했다. 서로의 무예에 감탄한 것은 나예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살짝 웃었다. 오랜만에 피어오르는 나예린 의 웃음이었다.
천상선녀 두 명의 뇌살미소 합공은 혈기방장한 불타는 청춘들에게는 너무나 강렬한 자극이었다. 그 때문에 고약한의 수련은 잠시 중단의 위기에 빠져야만 했다. 사람들의 빠진 넋이 되돌아오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다음!”
고약한의 외침에 나선 이는 효룡과 비류연이었다. 다음이 바로 그 둘의 차례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직접 검을 겨뤄 보는 것은 처음인가?”
효룡은 약간 긴장했다. 입관 초부터 항상 가깝게 지내 왔지만 오늘처럼 직접 맞부딪친 적은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본신의 실력을 알아낼 수 없다는 비류연만의 특징 때문에 효룡도 그의 실력에 대해 항상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한번 해볼까?”
알 듯하면서도 모를 것이 바로 비류연의 진신진력이었다. 아직도 효룡은 비류연의 한계치를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가끔 보여주는 거짓말 같은 신위만으로도 충분 히 놀라웠다. 오늘은 그 일부를 보여줄까? 효룡은 나름대로 자신의 각오를 다졌다.
“자 와라!”
효룡이 자신 있게 소리쳤다.
“후회하지 마!”
비류연이 대답이었다.
휘익!
깃털처럼 가볍게 비류연이 줄 위에 올라섰다.
전혀 무게를 느끼지 않게 하는 몸놀림이었다. 효룡은 자신의 둔중한 움직임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챙!
효룡은 마침내 친구를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시작!”
고약한의 신호와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수련이 처음이라는 비류연의 말은 거짓인 것 같았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줄 위에서 보여주는 비류연의 움직임이 너무나 거침 이 없었다. 남들은 다들 이 생소한 수련에 어색한 몸놀림을 보여주는데 비류연에게는 그런 어색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초보자들 사이에 낀 숙련자 같았다. “자네 이 수련이 처음이라는 말 거짓이 아닌가?”
“아니! 확실히 처음일세!”
비류연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처음 치고는 너무 움직임이 좋군!”
효룡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였다.
“난 신경질적인 나이 든 노사한테 과외 수련 받는 취미 따위는 없다구!”
“하긴… 자네는 과외 수련이라면 미인 노사도 사절인 사람이었지!”
“그럼! 그럼!”
단번에 긍정을 표하는 비류연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시원스런 대답에도 효룡의 의혹은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어찌저찌 균형을 잡아가며 펼치는 자신의 검초를 비류연은 얄미울 정도로 쉽게 피해 버렸다. 그러면서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게다가 가끔 발로 줄을 감아 탄력을 더하거나 늦추며 효룡을 희롱하고 있었다. 마치 눈을 가린 채 숨바꼭질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술래는 효룡이었다. “자! 또 와 보라구! 이대로 끝내면 시시하지.”
현재 허공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조금만 방심해도 끊어져 버리는 약한 줄 위에서 비류연은 대지에 뿌리박힌 소나무처럼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효룡의 균형 감각과 운신도 칭찬해 줄 만했지만 비류연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줄 위에서 보여주는 비류연의 활약은 주위의 경탄을 자아낼 만한 것이었다. 그는 줄을 마치 자기 몸의 일부처럼 부렸다. 떨어지지 않기 위한 발악의 일환으로 균형 맞추기에 급급한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효룡이 비류연을 노리고 검을 출수하려 했지만, 자신의 발목을 휘감아 오는 줄 때문에 균형이 흐트러져 번번이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 도저히 제대로 된 무공을 단 한 초식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원래 안정된 자세가 아닌 상태에서 펼쳐지는 무공은 그 위력이 엄청나게 반감되게 마련인데다 그때마다 줄기찬 방해 공작까지 친절하게 뒤따르니 의욕이 샘솟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공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마침내 효룡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류연! 내가 졌네.”
인정할 건 인정해야만 했다.
“겨우 이 정도인가?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지.”
비류연은 시시하다는 표정을 인정사정없이 지어 보였다.
‘실력이 없는 게 아니었군. 확실히 보통이 넘는 움직임! 보통 놈은 아니로군.’
고약한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행운아라는 소문과 다르게 확실히 비류연은 보통 이상의 실력이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온 게 단순히 운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고약한은 비 류연에 대한 평가를 대폭적으로 수정해야만 했다.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새로운 변수가 될지도…….”
고약한은 일단 비류연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과연 비류연이 입만 산 놈인지 아니면 진짜로 진국이라 최후까지 살아남을 놈 인지는 그때 가서 판명이 날 것이다.
짝짝!
“그만! 비류연의 승리다. 내려와라!”
고약한이 다시 손뼉을 두 번 쳤다. 일단 비류연을 주의 대상에 올려 놓는 것으로 고약한은 절충안을 보기로 했다.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자신의 숙소에 돌아온 고약한은 언제나 혼자였다. 그러나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거나 하는 감정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사치 스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그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 때문에 그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오늘 특별 수련을 지켜본 결과 예상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았다. 이 정도면 기대해 봄직 했다. 적어도 포기하지는 않아도 될 듯싶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현 구성원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아직 멀었어!”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시련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련 은 내면의 시련이고 그 시련을 도와줄 방법이 고약한으로서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가보기도 전에 미리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더욱더 강해질 여유가 그들에게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일단 복수의 검이 그의 손에 들려졌다. 이것을 어떻게 벼릴까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었다. 쇠는 불 속에서 달구어져 모루 위에서 담금질당 하며 더욱더 단단해진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시련이란 이름의 담금질로 더욱더 강해질 수 있다. 그 망치를 쥔 사람이 바로 고약한이었다.
“수련의 강도가 이 정도면 너무 약한 건가? 훗! 하긴 이 정도로는 시련이라 할 수 없겠지.”
죽음의 위협이 없이는 시련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고약한의 지론이었다. 이 정도는 아직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도 험했다. 과연 몇 명이나 이 고난과 시련의 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이 정도로 죽으면 안 되지!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은데 말이야! 좀더, 좀더 날 즐겁게 해줘야지! 흐흐흐.”
음험한 웃음이 그의 어둡게 그림자 진 얼굴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내일도 바쁘겠군!”
내일도 아이들이 버텨낼 수 있기를 빌며 고약한은 등잔의 불을 꺼뜨렸다. 타오르던 불꽃의 생명은 고약한의 입김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유일하게 비추던 광명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