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9권 22화 – 비영각에도 인권은 있다

비뢰도 9권 22화 – 비영각에도 인권은 있다

비영각에도 인권은 있다

효룡이 주위에 산재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친구들에게서 절망감을 느끼고 유일무이하게 구명줄로 여기고 있는

존재 은설란은 지금 효룡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바빴다.

그녀는 이제야 겨우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 실마리는 의외로 그녀 가까이에 있었다. 무당산 사건을 해결할 열쇠! 그 실마리는 바로 그녀 자신의 수 신 호위를 맡고 있는 비류연이었다.

항상 이질적인 사건 전개가 벌어지고 사실적인 진술이 허무맹랑하게 앞뒤 안 맞는 상태가 되고 증언이 중구난방이 되는 때가 바로 비류연이란 이름이 개입하고 난 이후였다. 그 전까지의 사건 진술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 별 대수롭지도 않은 남자가 어디가 그렇게 대단한 점이 있는 것인가?”

그것이 그녀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조사관의 할 일은 그 의문점과 의혹에 대해 말 그대로 조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관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본연의 임무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역시 수사(搜査)는 주변 탐문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탐문이란 알려지지 않은 소문이나 사실을 더듬어 찾아서 묻는 행위의 일체를 뜻한다. 일단 탐문수사의 기본 은 상식 중의 상식, 바로 사건의 관계자로부터 증언을 듣는 것이다.

은설란도 굳이 이 법칙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은 일종의 내부 조사였다. 즉 한통속들을 조사하는 것이기에 서로를 감싸줄 위험성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상대의 증언을 얼마만큼 신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녀는 그것을 간과하지 않고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효룡과의 만남이 있은 후 그녀의 의혹은 해소되기는커녕 더더욱 깊어만 가고 있었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공자가 나에게 진실을 숨기는 것일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공자만은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조차 말 못할 진실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성통곡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일!

이 의혹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조사에 착수해야 했다. 사건을 철저히 파헤쳐 진상을 규명해야만 무거운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하고 각오했던 대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일단 비류연 그 사람인가?”

아무래도 비류연이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쭉 그녀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직 그 정확한 이유는 은설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더 욱더 그녀의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공공의대로를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 보편적인 권리이다. 공공도로란 한 개인의 돈을 처발라 만든 개인적인 공간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은설란은 이 신성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타의에 의해 침범받고 있었다.

“찝찝하군요!”

은설란이 조용히 말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도 확실히 찝찝했다.

“누가 돈이라도 흘린 걸까요?”

은설란이 비류연을 보고 말했다.

“예? 아니 어떤 놈이 감히!”

누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했느냐는 심각 무쌍한 얼굴로 비류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반문했다. 질문한 은설란이 오히려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외의 과격 반응 에 은설란의 얼굴에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호호! 아뇨, 누군가 자꾸 흘리지도 않은 돈을 주우려고 하는 것 같아서요.”

은설란의 시선이 살짝 뒤를 향했다. 그제야 비류연은 은설란이 뜻하는 바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아아~ 그 사람이요! 열심이긴 한데 어제 그 사람보다는 실력이 떨어지네요. 저렇게 미행이 미숙해서야… 거울도 아닌데 이리도 적나라하게 훤히 보이네요, 훤히…쯧쯧쯧!”

비류연이 혀를 찼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은설란의 눈을 놀란 비둘기처럼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럼 어제도 미행자가 있었다는 이야긴가요?”

어제는 등 뒤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방심하던 사이에 완전히 뒤를 밟히고 만 것이다.

“물론이죠! 뭐 그게 대단한 비밀이라고 사실을 숨기겠어요. 아실지 모르지만 은 소저는 밀정들 사이에서 요즘 꽤나 인기라구요. 실질적으로 진정한 혼자가 된 적 이 한 번도 없으니까요.”

은설란은 비류연의 설명에 기가 막혔다. 농담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이 너무 의미심장했다.

“이제 어쩌면 좋죠?”

“일단 지그시 밟고 시작하죠. 물론, 원하신다면요!”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원해요!”

은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분부하신 대로!”

앞으로 걸어가던 비류연의 발걸음이 우뚝 정지했다. 비류연이 몸을 꼿꼿이 편 채 발끝으로 지면을 톡 찼다.

쉬이이익!

동시에 비류연의 신형이 뒤로 쭈욱 늘어났다.

일단 타작이 시작되었다. 대화에 앞서 주먹과 폭력으로 무작정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무척이나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대부분의 나쁜 방법들은 매우 효과적이거나 매우 편리하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매우 효과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이 방법에 걸린 비영각 소속 대원 십비대원(秘隊員) 팔비(八秘)는 죽을 맛이었다.

“꾸에에에에에엑!”

자신의 임무에 항상 충실하던 팔비는 업무 중 사고를 뛰어넘어 지금 이 순간 순직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창구는 모두가 다 막혀 있 었다.

위기감이 엄습해 왔다. 아직은 창창한 나이에 순직해서 집안에 위로금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나불거려졌 다.

“끄아아아악! 아니에요! 아니에요! 난 아니라니깐요.”

팔비의 비명성이 높다란 가을 하늘에 메아리쳤다.

“뭐라구요?”

은설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해를 푸십시오.”

팔비의 얼굴은 업무 중 상해로 말이 아니었다. 치료비나 제대로 청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팔비였다.

“그러니깐 노리는 게 내가 아니었다 그거죠?”

질문한 사람은 은설란이었다. 자신을 미행한 줄 알았던 미행자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팔 비는 남아서 대기 중에 있는 주먹이 날아오기 전에 얼른 말했다.

“네! 물론입니다. 그래도 의심이 가신다면 제 신분을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허리춤에서 꺼낸 패(牌)는 분명 천무학관 비영각 소속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분명 팔비의 행동은 첩자로서는 실격이었다.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결과는 즉효였다.

“그럼 누굴 미행한 거죠?”

가장 선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저… 저 사람이요.”

은설란과 나예린, 그리고 모용휘의 눈이 크게 떠졌다. 팔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비류연이 있었다.

“그럼 누구에게 부탁받은 거죠?”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죽어도!”

그나마 비선(秘線)다운 모습을 한 번 보여주는 팔비였지만, 점수는 이미 완전히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은설란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그 시선은 의혹으로 가득 도배되어 있었다.

“이 남자에게 뒤를 밟을 만큼의 중요성이 있었단 말인가?”

확실히 특이하고 독특한 유형의 인물이긴 했다.

‘이 남자가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무당산 사건 중 여전히 은막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비류연뿐이다. 그 사건에서 비류연이 맡은 역할만이 명확하게 드러난 바가 없었다.

이때부터 최초로 은설란은 비류연의 존재가치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었다.

‘좀더 알아볼 필요성이 있겠군.’

아무리 봐도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았다. 주변을 좀더 캐볼 필요성이 확실히 있었다.

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하늘은 무척 높고 새파랬다.

나예린은 조용히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요즘 왠지 모를 이유 때문에 주위가 너무 소란스러운 듯한 느낌이었다.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호위 역을 덥석 맡아 버린 자신, 암습자들의 습격, 또다시 빼앗겨 버 린 입술! 마하령과의 만남!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왠지 운명의 흐름에 휩쓸려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요즘처럼 마음이 심란한 적은 없었다. 그녀의 머리와 가슴은 명경지수처럼 맑고 차갑고 잔잔했다. 잡생각이나 사념은 어디에도 그녀를 침범하지 못 했었다. 그런데 요즘 왠지 생각이 많아졌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나예린이었다. 그것은 부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원인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장본인, 그 사람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마음을 혼란스럽 게 만드는지는 그녀의 영역 밖이었다.

한쌍의 새가 지저귀며 하늘에서 노닐고 있었다.

‘난 혼자야.’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남자 따위…….?

짐승하고 그 경계와 구분이 모호할 뿐이었다. 두 발로 서 있다는 것 이외에는… 최소한 그녀에게는 그러했다.

그녀 주위에 그 누구도 남자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어처구니없고, 때때로 철없고, 굉장히 수시로 파괴적인 남자에게서 어떤 장 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과거의 안 좋았던 경험이 더욱더 그녀의 심란함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으으으으!’

사내의 으스러질 듯 쥐어진 손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심혼을 태울 듯한 분노가 그의 전신을 전소시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청성파의 기대주이자 빙봉영화수호 대의 대주 선풍검룡(旋風劍龍) 위지천이었다. 그는 오늘도 끈질기게 나예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척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의 주관적인 신념에 관 계없이 나예린에게는 도움은커녕 막대한 민폐가 되는 행위였다.

“이노오옴!”

빠드득!

위지천은 치아가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갈았다.

항상 곁에서 나예린을 지켜본 그는 나예린의 변화를 눈치 채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지만 인식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뼈저리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나예린의 상태가 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원인으로 인해 그녀에게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싫어 도 느껴야만 했고 끔찍스럽지만 보아야만 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사실은 자신이 그놈과 같은 흑검조 소속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흑검조에 나예린이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황홀할 만큼 기쁜 일이었지만, 눈 엣가시 같은 존재인 비류연이 그 황홀한 기쁨을 반에 반으로 반감시키고 있었다.

‘저놈만 이 세상에 없다면!’

하루에 수십 번씩 같은 생각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위지천이었다.

요즘 나예린은 혼란에 빠져 있는 듯했다. 확실히 예전에 보여주던 인간 외적인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있었다. 확실히 두껍게 쌓아 올린 벽을 조금씩 허물고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예린이었지만 위지천은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그 변화의 원인이 바로 비류연이라는 망할 놈의 인간이라는 거의 확고한 심증을 그는 지니고 있 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품고 있는 영원한 마음속의 우상이자 선녀인 그녀의 입술을 빼앗아 간 천하의 도둑놈! 개새끼! 인간 말종! 그 빌어먹을 자식의 이름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 망할 놈의 자식은 자신이 꿈에서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황홀한 붉은 보석을 겁대가리 없이 낼름 취했고, 지금은 미인 조사관의 수신 호위라는 명목으로 나예 린과 착 달라붙어 있었다. 현실에서 그녀와 자신과의 거리는 5장(약15m)이 넘는 데 비해 비류연과 나예린 사이의 거리는 다섯 자(약 165cm)도 되지 않으니 울화

통이 안 터질래야 안 터질 수가 없었다.

차가운 달빛을 깎아 놓은 듯했던 나예린의 얼굴에 하나씩 둘씩 표정이 늘어갈 때마다 위지천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듯했다. 비류연의 혀를 뽑아 토막 을 친 다음 육회로 떠버리겠다던 그날의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후우…….”

다시 나예린의 고운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보는 이의 가슴을 슬픔에 잠기게 할 만큼 애잔한 한숨이었다. 예전의 그녀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 다. 나예린은 혼자가 되더라도 조각 같은 무표정을 유지했었다. 그놈, 비류연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야호! 나 소저!”

운향정의 청아한 적막을 단번에 때려 부수는 생기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나예린의 차갑던 얼굴에 더욱 풍부한 표정이 떠올랐다. 위지천은 이를 악 물었다. “크으으으으!’

그 소리는 위지천이 죽어도 잊지 못하는 바로 그 몹쓸 놈의 목소리였다.

“빨랑 가죠! 거기서 뭐해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기다려요! 빨리요!”

감히 남들은 부담스러워 말도 제대로 못 거는 나예린에게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치는 비류연이었다.

“지금 갑니다.”

나예린이 대답했다.

“빨리요! 저 목 빠져요.”

비류연이 엄살을 부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네!”

다시 나예린이 대답했다. 비류연의 재촉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흘깃 지긋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나예린은 이윽고 몸을 돌려 운향정을 빠져나갔다. 고요와 적막이 가득한 공간에 위지천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죽일 테다. 이놈… 반드시 죽일 테다. 비… 류… 연!”

빠드득!

그놈은 쓰레기 같은 녀석이었다. 암적인 존재였다. 종기 같은 존재였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이 망할 놈의 구더기 자식!”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증오를 불태웠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에 응답해 주기라도 바라면서… 그리고 응답이 왔다.

“그렇게 분한가? 그렇게 증오스러운가? 그렇다면 망설이지 마라!”

“누… 누구냐?”

기척도 없이 자신의 등 뒤로 다가온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놀란 위지천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다… 당신은!”

위지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힘을 원하는가?”

그 사람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