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9권 4화 – 일반 상식의 기준

비뢰도 9권 4화 – 일반 상식의 기준

일반 상식의 기준

“그런데요……..”

두 사람 사이의 정겨운(?) 티격태격을 지켜보던 은설란이 입을 열었다.

“네?”

“누가 뚱뚱하다는 거죠?”

의아함을 느낀 은설란이 나예린에게 물었다. 나예린이 마하령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저기 마하령 회주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요?”

사실 마하령은 나예린으로서도 안면이 있었다. 사실 천무학관주의 딸과 무림맹주의 딸 사이에 교분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커서는 서먹서먹해지기는 했지만 어릴 때는 언니, 동생 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가 정이 쌓일 정도로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뭐가 불만인지 마하령은 항상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무래도 일종의 열등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당시 통통했던 그녀로서는 자신과 비교된다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던 모양 이다.

“언제나 불만과 동경과 증오가 뒤섞인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었지!’

하지만 본격적인 무공 수련을 위해 사문에 들어간 이후로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라… 확실히 어릴 땐 지금보다 훨씬 더 통통했었지.’

그러나 그것은 벌써 10년도 더 넘은 과거의 일이었다. 어릴 때 뚱뚱했다 해서 커서도 뚱뚱하란 법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법칙이었다.

“어머? 제 눈에 이상이 생겼나 봐요!”

느닷없이 은설란이 호들갑스럽게 수선을 떨었다.

“무슨 일이시죠?”

“제 눈엔 지금 저 소저가 전혀 뚱뚱하게 안 보이거든요. 그럼 저도 뚱땡이인가 보죠. 이제 어떡해! 흑흑흑!”

은설란이 일부러 울상을 지으며 통곡했다.

“……”

나예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이가 없었다. 또 당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관심사는 은설란의 거짓 울음이 아니었다. ‘과거에… 10년도 더 전에 비 공자와 하령 언니가 만난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의 하령 언니에게 뚱땡이란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비류연은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마하령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직 사태는 아무런 진전도 찾아볼 수 없는 답보 상태였다. 은설란은 이 사태가 무척이나 흥미로운지 조금도 관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저 분은 무척이나 바보군요.”

“그렇죠. 정말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바보에요.”

나예린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아마 모용휘도 이견이 없는 듯했다. 간만에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들의 말대로 비류연은 바보였다.

원래 보통 사람은 가문 좋고, 출신 좋고, 지위 높고, 학력 높은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성심성의껏 척추 뼈가 어그러지도록 허리를 깊숙이 숙여야만 한다. 당연히 그 래야만 되는 거 아닌가?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그 일을 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볼 수 있으니 이해를 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 돈, 권력, 명예를 가진 사람을 향해 간도 쓸개로 서슴없이 빼줄 수 있을 것 같은 투철한 장기이식 희망 자들 말이다. 그들의 희생정신은 정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들은 조건반사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며 전심전력으로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 인다. 물론 지문이 지워질 정도로 열심히 손바닥을 비비는 것도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원래 이 빌어먹을 세상은 그렇게 엿같이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그 규칙에 맞춰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희대의 반항아를 자처하는 문제아 비류연은 천 인공노하게도 그런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비류연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고 권력이 강한 사람 앞에서 절대로 굽실거리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완전히 무시했다. 그는 그 사람의 배경 때문에 자신의 신 념을 굽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하령의 뺨을 후려갈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역시 고금 최강의 바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신념대로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어느 시대든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비류연은 지

금 그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경악하는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이들은 비류연이 서슴없이 세상의 고정된 관례를 깨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이처럼 경악하고 분노하 는 것이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서슴없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니 얼마나 울화가 치밀겠는가!

앞으로도 그들은 비류연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사고의 기반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번번이 비류연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일반 상식의 잣대로 비류연을 재려고 하니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그의 그 릇을 측정하려면 보통의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잣대가 필요하다. 그 혼자만을 위한 맞춤 잣대, 그렇지 않으면 골백번을 반복해도 한결같은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자신들이 가진 기존의 잣대가 통하지 않는 상대!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비류연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학연, 지연, 혈연, 배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서 파생되는 권위와 권력과 위력을 싸그리 무시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파렴치한 행동인가! 사상 최강의 바보라 불리는 데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비류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비류연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행동과 안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성격이었다. 그는 어떤 과격한 반격에도 대항할 만 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끝내면 안 되나? 대치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슬슬 마무리를 지었으면 하는 것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언제까지 소모적인 고집 싸움을 계속할 작정이란 말인가?

‘과연 저 두 사람의 대치가 끝나긴 끝나는 건가?”

아직까지 어느 한쪽도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은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질풍처럼 달려가는 호랑이 등 위에서 뛰어내리기엔 이미 때늦은 감 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반 시진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긴장감 넘치는 두 사람의 대립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제 지켜보는 이도 지루해질 때였다. 그러나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긴장감 때문이었다.

비류연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더럽게 인상을 쓰고 있을 때보다도 더한 긴장감이 주위를 꽁꽁 옭아매고 있었다.

입가의 미소는 거둬들이지 않았지만 비류연의 손은 여전히 매의 발톱처럼 마하령의 손목을 잡은 채 놓아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예고대로 ‘부탁 합니다. 놓아 주세요’를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놓아줄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이제 그만 고집부리는 게 어때요? 옹고집쟁이 아가씨?”

비류연이 마하령의 의향을 물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답할 마하령이 아니었다.

“왜 말씀이 없으시죠? 몸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해도 입을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텐데 말이죠?”

“누가 네놈에게 굴복할 성싶으냐?”

빠드득!

그녀의 이가 심한 마찰음을 내며 갈렸다.

“누가 굴복하라고 했나요? 전 단순한 사과를 원했을 뿐이에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는 거예요. 특히 먼저 잘못한 사람들이 많이 하죠.”

“나한텐 같은 의미다.”

어찌 이리 말이 안 통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 번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어떤 협상이든 결렬되면 결렬될수록 감정의 골은 깊어지게 마련이다.

‘누가 그따위 말을 해줄까 보냐!?

그녀의 눈에서 의지의 불꽃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그런 말을 해주기에 마하령의 자존심은 너무나 높고 지위 또한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미 일신상의 무공을 발휘하여 손쉽게 상대의 금나수(擒拿手)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온몸이 꽁꽁 묶인 것처럼 본신 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무명의 애송이에게 순간의 방심으로 순식간에 제압당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 았다. 이 일련의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에 가한 타격은 치명적일 정도로 엄청났다.

10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된 듯한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1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무공에 정진해 하나의 경지에 들어섰다, 자부했건만 산을 허물고 땅 을 가를 줄 알았던 자신의 무공이 산을 내려와 처음 마주친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인의 한없는 절망이 바로 지금 그녀의 상태를 가장 잘 나 타내 주는 예였다.

“내가 지난 5백 일 동안 세상과 벽을 쌓고 수련에 전념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고작 이런 애송이에게 이렇게 끔찍한 수모를 받고자 그 고생을 사서 했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직도 채 아픔이 가시지 않은 육체보다는 정신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얼얼한 뺨이 그녀에게 현실을 매섭게 인식시켜 주고 있었다.

모든 범용 수단이 봉쇄된 느낌이었다. 망망대해에 무참히 던져진 표류공주(漂流空舟) 같다고나 할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무력감을 줄 거라 곤 그녀로서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내가 이런 무력감을 겪게 될 줄이야……..

더 이상의 대치는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역시 사과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금기(禁忌)를 깰 것인가.’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대로 있든 사과하고 손을 놓게 만들든, 그 어느 쪽이든 그녀의 자존심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양자택일은 어느 쪽이든 본인에게 어느 정도의 희생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이때 당사자의 선택 기준은 바로 최소한의 희생이다. 물론 그 어느 쪽도 쉬운 결정은 아 니었다.

“그날 일만 없었어도…….’

‘그 비밀만 들키지 않았어도…….’

악연이라 한다면 가장 지독한 악연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사흘 전 밤!

그날 밤 비류연은 그녀에게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밤을 선사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주루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