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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이의 광부들


상파이의 광부들

마침내 일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샹파이 난쟁이들이 조피크 산을 뚫은 것이다.

문균법 때문에 초기엔 은밀히 후원하다가 공사 후반기엔 아예 대놓 고 법률을 위반해가며 샹파이 난쟁이들을 후원했던 모험 상인들은 잔 을 무더기로 깨트려가며 건배를 나누었다. 몇몇 상인들이 왕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악명 높은 조피크 산의 허리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어떤 평가에 따르면 그것은 국경에 아무런 변화 없이 왕국이 두 배로 늘어난 것과 같은 위업이었다. 단축된 시간 도 영토가 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썩 통찰력 있는 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가끔은 통찰력보다 더 우수할 때도 있는 능력인 동화력을 갖춘 이들은 그 역사적인 위업에 우려를 느꼈다. 그들은 샹파이 난쟁이들이 애초에 그 난쟁이 잡는 공사에 나선 이유를 잊지 않았다. 샹파이 난쟁이들은 가장 긴 터널을 가지고 싶어 했다. 터널은 난쟁이의 자존심 이다. 자레올 난쟁이의 카로당 터널을 언제나 부러워했던 샹파이 난쟁 이들은 터널 공사비를 지원하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자 후원자들의 정체도 묻지 않고 조피크 터널 회사 설립에 동의했다.

그리고 조피크 산을 관통한 터널은 카로당 터널보다 짧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순진한 난쟁이들이 영악한 상인들에게 이용당한 사건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동화력을 가진 이들은 근심에 빠 진 눈으로 샹파이 난쟁이들을 주시했다. 욕심 많은 난쟁이들이 현명한 신들이나 영리한 영웅들에게 이용당할 수는 있다. 옛날이야기엔 언제 나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천성적 토목 건설자인 난쟁이들이 거 리 계산을 잘못하는 경우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은 찜찜함을 견딜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분명히 무슨 사달이 일어나고 말 거 야.” 그리하여, 샹파이 난쟁이들이 모든 사람들을 경악시킨 선언을 했 을 때, 그들은 슬퍼하긴 했지만 크게 놀라진 않았다.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애석하게도 가장 긴 터널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을 위로하기 위해 상인들의 대리인이 찾아왔을 때 샹파이 난쟁이들은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연히 어리둥절해 진 대리인은 조피크 산이 이미 뚫렸는데 어디를 팔 작정이냐고 물었다. 샹파이 난쟁이들은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땅위.

“예? 뭐라고요? 어디?”

“땅 위에 터널을 파겠다고.”

근사한 농담을 떠올리려 애쓰던 대리인은 결국 두 손 들고 말았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니 받아치기도 어려웠다. 대리인은 겸허하 게 질문했다. 허공에 구멍을 뚫겠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돌아온 대답에 대리인은 기절할 뻔했다. 지금껏 구멍을 팠던 샹파이 난 쟁이들은 조피크 산을 통과한 시점에서 공법을 바꾸었다. 벽과 천장 만들기로. 물론 그것은 빈 공간을 터널로 만드는 유일한, 그리고 당연 한 방법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볼 때 그것은 왕국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장벽이 생겨난다는 의미였다.

샹파이 난쟁이들은 카로당 터널보다 몇백 미터쯤 더 긴 터널에 만족 할 생각은 없었다. 모방자는 언제나 착안자보다 수월한 법이다. 두 번째 지상 터널에 추월당하는 일을 결코 참아낼 수 없었던 샹파이 난쟁이들 은 조피크 산에서 뻗어 나갈 수 있는 데까지 장벽을 이어나갈 결심이 었다. 샹파이 난쟁이들은 마구잡이로 어음을 교부하여 가장 높은 값으 로 토지를 사들였다. 당연히 토지 소유자들은 거침없이 공사 예정지를 팔아치웠고 샹파이 난쟁이들은 그 땅 위에 계속 튼튼한 벽과 육중한 천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험 상인들은 그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문 균법 위반을 피하기 위해 경영권과 결재권을 모두 난쟁이들에게 넘겼 던 탓이다. 그들은 충혈된 눈으로 돌아오는 어음을 보다가 밧줄이나 독 약병을 쳐다보곤 했다.

거상들이 어이없게 몰락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왕국이 장벽으로 절단된다는 것은 안보 차원의 문제였다. 결국 왕이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책임자의 지위가 올라갔다는 의미이지 책임을 지는 것이 손쉬워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섣불리 조피크 터널 회 사를 파헤쳤다간 먼지를 좀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 왕국 경제 구조 전체가 오물을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인들의 탐욕에 격 분하고 그들을 몽땅 체포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격분한 다음 왕은 내 키지 않는 기분으로 초법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모든 것에 우선하는 왕 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짐은 조피크 터널 회사의 사원들에게 그들 자신의 명예욕 외엔 아 무것도 만족시킬 수 없고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불편과 고통만을 안 겨 주는 그 언어도단적인 굴착 공사를 당장 중단하는 것이 좋다고 권 고한다.

많은 이들이 애석해하는 사실이지만, 좋은 의도가 더 강력한 전달 력을 지닌다는 것은 낭만적인 오해일 뿐이다. 현자나 지자들의 충고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진실은 분명히 거짓보다 강하다. 진실을 소리 높 이 외치는 일은 언제나 현명한 일이며 또한 옳은 일이다. 하지만 진실 과 좋은 의도는 다르다. 많은 이들의 행복을 고려하여 좋은 의도에서 반포된 왕의 칙령은 실로 곤혹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난쟁이 들이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난쟁이들이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가장 긴 터널을 추구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 장래에 우리가 더 긴 터널을 뚫으려 할 때도 방해할거냐?

첫 번째 문장도 상당히 강력했지만, 난쟁이들이 아무런 가식 없이 솔직하게 강세를 둔 두 번째 문장은 실로 파괴적이었다. 현재 공사 중 인 샹파이 난쟁이들을 제외하면 그 어떤 난쟁이 씨족도 굴착 공사를 하고 있지도, 계획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은 반론 근거가 되지 않았다. 터널은 난쟁이의 자존심이므로, 결국 자레올 난쟁이와 다른 난쟁이들 을 혐오하는 아쿠다 난쟁이를 제외한 모든 난쟁이 씨족들이 샹파이 난 쟁이들을 거들고 나섰다. 34년 전 목걸이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난쟁이 대회가 열릴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제출되자 왕의 정부는 뒤집어지 고 말았다. 난쟁이 대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 중에는 전투 추장의 선발도 있다. 난쟁이 전투 추장은 가문이나 씨족 에 관계없이 모든 난쟁이 전사들을 동원하여 지휘할 수 있다. 한 마디 로 세계 최강의 부대를 소환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존재다.

심도 있는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자명했다. 샹 파이 난쟁이들도 최악의 부담만은 피하고 싶었기에 대화에 동의했다. 왕의 신료들은 샹파이 난쟁이들에게 줄 선물을 급히 꾸렸다. 하지만 샹 파이 난쟁이들이 지명한 협상 대리인이 공개되자 신료들은 그 선물을 벽에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샹파이 난쟁이들의 협상 대리인은 왕으로 불리는 자였다. 따라서 그 위격이 떨어진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리인은 지 상과 터널이 어울리지 않는 것만큼이나 협상과 어울리지 않는 자였다.

사람들은 그 왕이 자기 외의 다른 존재와 말을 해 봤는지, 아니, 말을 할 수나 있는지 의심했다.

샹파이 난쟁이들의 협상 대리인은 뱀의 왕, 바실리스크였다.


아른 레간데는 울적한 기분을 달랠 수 없었다. 일어나리라 예상한 일이 일어난 것에 불과하지만 그 방식이 몹시 괘씸하고 짜증스러웠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짐을 뒤지다가 약혼녀가 숨겨둔 파혼 편지를 발견 하는 것은 확실히 어디다 대고 말하기도 뭣한 일이었다.

주변에 옷가지들을 늘어놓은 채 반라 상태로 앉아 있던 아른은 다 시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문장력을 칭찬할 정도는 아니지만, 꽤 정성 어린 편지였다. 데일은 못된 여자는 아니었다. 아른은 행간마다 스며 있는 양심의 가책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른 또한 합리성을 존 중하는 상인 가문의 남자였다. 데일이 그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고 말 하면 오히려 그녀를 꾸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옷상자 속이냐고. 젠장. 불러내서 눈을 들여다보고 당당 하게 말한다거나 할 수는 없었어? 그런 식으로 쉽게 쉽게 살 수만 있을 것 같아?’

아른은 더 짜증 났다. 용기를 내지 못한 데일만을 꾸짖을 수는 없었 다. 그가 먼저 파혼을 통고할 수도 있었다. 숙녀에게 파혼의 불명예를 안길 수 없다는 것은 치사한 변명이다. 난쟁이들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 다시피 한 남자가 약혼자에게 파혼을 통고했다면 누가 그녀가 모욕을 받았다고 말하겠는가. 결국 그에게도 레간데 가문이 파산 직전임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아른은 씁쓸한 기분으로 데일을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했다.

아른이 간직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한 채 편지를 도로 접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실이 들어섰다. 아직 벌거벗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 지만 아른은 그녀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자 란 가노 실은 그에겐 움직이는 탁자나 옷걸이나 다름없었다. 실 또한 무덤덤한 표정으로 걸어와 살짝 무릎을 구부렸다. 아른이 말했다. 

“네가 이 편지 숨겨두었지?”

“당연하죠.”

“얼마나 받았냐?”

“새 옷 살 정도는 안 돼요.”

“내가 너한테 옷값 제대로 안 줬냐? 일 년에 두 번은…… 젠장. 그만 두자. 그래, 지금쯤 다 읽었을 거라 생각하고 용서를 빌러 왔어?” 

“아뇨. 장원 문지기가 협상단을 찾아온 손님이 저택 입구에 도착했 다고 보고했어요. 보나 마나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청승떨고 있을 것 같 아서 옷 입혀드리려고 온 거예요.”

아른은 그 정확한 예견에 그리 상처 입진 않았다. 대신 의아함을 표시했다

“누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찾아왔다고? 우리 협상단에?”

실은 아른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하고는 옷을 집어 들었다.

“예. 좀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 안 와도 좀 이상하죠. 왕의 사절이거든요.”

“아아. 결국 어느 영감님이 죽을지 결정이 났군. 하마터면 협상단장도 없는 협상단이 될 뻔했는데 다행이네. 그래, 그 운 없는 영감님은 누 구야?”

아른의 말처럼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협상단이 출발하기 직전까지 도 협상단장을 맡을 왕의 사절이 결정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여행 시 간이 많이 걸리는 실무진과 수행 인원만 먼저 출발한 상태였다. 사절 이 결정되는 대로 합류한다는 약속이었지만, 나머지 협상단 전원이 협 상이 열릴 페렘 시 근교의 이 장원에 도착할 때까지 왕의 사절은 나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른과 협상단원들은 협상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 엄청난 수모를 당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실은 대답 없이 아른에게 옷을 입혀주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임금님이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그러셨겠지.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하지만 이런 경우에 화를 내는 것도 좀 그렇지.”

“아니오. 샹파이 난쟁이들에게 화가 나신 것 같다고요.”

아른은 그것도 당연하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실을 살폈다. 다른 사람이라면 실이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녀와 함께 자란 아른은 실이 웃고 싶은 것을 참 고 있는 것에 가까운 상태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아른은 어리둥 절해졌다.

“사절이 누군데? 누가 왔는데?”

“카쉬 백작 더스번 칼파랑이에요. 괜찮아요?”

바지 자락을 밟고 휘청거리는 아른을 부축한 실이 말했다. 아른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더스번 경? 사악한 더스번 경이 사절이라고? 그게 말이 돼?”

아른은 왕이 밥을 먹기 위해 철퇴를 뽑아 들었다거나 목욕을 하기 위해 전차에 올랐다는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통념을 고려한다 면 더스번 경의 사절 임명은 정확히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아른이 알 기로 더스번 경은 회담장에 데려다 놓으면 회담 상대의 목을 베고 회담 장에 불을 지른 다음 그대로 상대방의 본거지로 달려갈 짐승이었다. 그 리고 그동안 자제력이란 말은 떠올리지도 못할 것이다. 제네갈 공작의 아들, 즉 왕의 조카를 하반신 불구로 만들어 버린 작자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긴 하다. 불경하게도 왕이 미치지 않았나 의심하던 아른은, 문득 자신이 왜 파혼 통고를 받았는지 떠올렸다. 저 쪽 사절은 바실리스크였다.

아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음의 먼 조상쯤 될 듯한 표정이었다. 그 상황을 기뻐해도 되는지는 아직 불확실했지만 어쨌든 통쾌하기는 했다. 아른은 샹파이 난쟁이들이 그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뒷일을 감당할 자신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쨌든 궁금하긴 했 다. 정말로.

재빨리 달려나가려던 아른은 문득 움직이는 옷걸이나 탁자의 평소 엔 인식하지도 못했던 특징을 깨달았다. 만나기도 전부터 자신에게 변 화를 일으키고 있는 더스번 경에게 감탄하며 아른이 말했다.

“넌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어, 실, 어, 경은 평판이 좀… 알지? 성녀를 욕보였다는 소문도 있잖아.”

실은 안도했다. 평생을 함께한 아른도 거의 본 적이 없는 커다란 안도감이었다.

“고마워요. 그분, 칼은 안 가지고 다녀도 여자는 가지고 다니는 분 같더라고요.”

실의 말이 일종의 비유라고 생각했던 아른은 더스번 경을 직접 본 후 복잡한 기분에 빠졌다. 더스번 경의 손엔 칼 대신 곡괭이가 들려 있 었다. 그리고 그 어깨엔 인사불성 상태의 여자가 얹혀 있었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설에 따르면 죽음은 오래전 더스번 칼파 랑을 자신의 수하에서 자신의 동업자로 격상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더 스번 경의 몸 어딘가엔 그 타당한 계약을 증거하는 기묘한 점이 있다 고 한다. 아른은 평소 그 이야기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 었다. 하지만 고주망태가 된 여자를 객실 침대에 던져 놓고 협상단원들 이 기다리는 회의실로 돌아온 더스번 경이 자리에 앉자 아른은 자신도 모르게 경의 드러난 피부를 살폈다. 그리 밀도 높은 관찰은 되지 못했 다. 경의 얼굴 대부분은 수염으로 덮여 있었고 경의 거대한 몸은 육중 한 갑옷이 가리고 있었으므로.

협상단원들의 인사를 받은 경은 곡괭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되바라진 난쟁이들이 허공에 굴을 뚫겠다고 했다고?”

협상단원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왜 검이나 창이 아니라 곡괭이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걸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긁는 경의 모습이 꼭 자살하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뜨악한 시선을 느낀 더스번 경이 대단찮은 일이라는 듯 설명했다.

“난쟁이들의 굴이 문제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가져왔소. 굴이면 곡괭 이가 어울릴 것 같아서.”

“저, 란데셀리암을 쓰러트린 명검 샤란다이트는 혹시 가져오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으시다면 견식하고 싶은데요.”

“샤란다이트? 그게 뭐………… 아, 사란디테 보고 싶으면 객실에 가보 쇼.”

“예?”

“사란디테는 칼이 아니라 그때 나와 함께 싸운 여자 이름이오. 지금 객실에 있는 주정뱅이가 바로 그 여자지. 란데셀리암하고 싸울 때 내가 들고 있던 걸 보고 싶으면 그건 여기 있소.”

협상단원들은 아연한 기분과 뭔가 분한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다시 경의 곡괭이를 쳐다보았다. 이후로 아무도 경의 곡괭이에 대해선 말하 지 않았다. 협상단 내의 지위는 중간 정도지만 모험 상인들의 그룹에서 왔기에 실질적인 책임자에 가까웠던 아른은 헛기침을 했다. 경이 자신 을 쳐다보자 아른은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더스번 경.”

“그렇소. 누구더라? 아, 아른, 샹파이 난쟁이들의 터널에 무슨 문제 가 있다는 소리는 이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소. 하지만 왕이 보낸 작자 가 나를 찾아냈을 때 난 저 실연중독녀를 달래느라 진탕 취해 있었거 든. 틀림없이 상세히 설명해 줬을 텐데 기억이 가뭇없어. 하지만 즉시 여기로 와서 당신들을 만나라는 이야기만큼은 똑똑히 기억났소. 사란 디테는, 흐음. 우리가 퍼마시고 있던 곳이 성소는 아니었소. 정신 나간 여자 혼자 거기에 내버려 두고 올 수도 없었고 내가 없으면 혼자 퍼마 시다가 사고를 칠 것 같아서 그냥 둘러메고 여기로 온 거요. 그러니 사 정 좀 설명해 주시오. 뭐가 문제요?”

아른은 최대한 정확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그 결과로 더스번 경은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바실리스크? 그럼 그 녀석을 죽이면 되는 거요?”

아른은 협상단원들의 표정을 보고는 그들 모두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아뇨. 그게 저쪽의 회담 대표입니다.”

“아하 별명인가 보군. 눈빛이 고약한 녀석인가 보지.”

“아니오. 진짜 뱀의 왕을 말하는 겁니다.”

더스번 경은 뚱한 얼굴로 아른을 쳐다보다가 혀를 찼다.

“그 난쟁이들이 피크 산에서 그걸 찾아냈을 수는 있소. 뭐가 나와 도 이상하지 않은 산이니까. 그리고 난쟁이들이 바실리스크를 생포했 을 수도 있소. 워낙 희한하고 비밀스러운 재주가 많으니까. 하지만, 그래 도 바실리스크는 말을 못 하오. 말을 못 하는데 무슨 회담 대표가 된다고?”

“역시 말을 못 하는군요?”

협상단원들 사이에 새로운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샹파이 난쟁이들이 바실리스크를 협상 대리인으로 내세웠다는 것이 알려진 직후부터 떠돌던 가설이 있었다. 샹파이 난쟁이들이 원하는 건 회담의 결렬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거론되는 것은 상인들의 알력에서부터 적국의 간섭까지 다양하지만 어쨌든 현상만 놓고 보면 꼭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만에 하나 바실리스크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나게 위압적 인 회담 상대자를 내보낸 것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바실리스 크가 말을 못 한다면 그것은 회담 파탄의 의지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때 더스번 경이 말했다.

“말을 할 수야 있지. 하지만 해선 안 되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더스번 경은 곡괭이를 뒤집어 잡고는 그 자루로 자신의 어깨를 탁탁쳤다.

“바실리스크는 말을 할 수 있소. 말할 일도 없는데 왜 그런 재주가 있는진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분명히 말을 할 수야 있소. 하지만 바실 리스크는 말을 하면 눈을 잃게 돼. 그 유명한 즉사의 눈 말이오. 그러니 왜 말을 하겠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아른이 사실이냐고 묻자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스크는 언제나 그래. 눈을 포기했으니 살려 달라고 말하지. 그렇소. 살려 달라고 말하는 걸 내 귀로 들었단 말이오. 평생 처음 하 는 거라 좀 서툴긴 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소. 그 직후 바실리스크는 장님이 되지.”

아른은 ‘바실리스크는 언제나 그렇다’는 말 앞에 하필이면 이 시대 에 태어나 더스번 경과 맞닥뜨릴 정도로 운이 없는’이라는 말을 덧붙 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더스번 경이 내놓은 새로운 정보에도 불구 하고 협상단원들은 여전히 ‘바실리스크 협상 대리인’을 설명할 수 없 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른이 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자 실은 간단히 그 사태를 정리했다.

“그러면 샹파이 난쟁이들은 바실리스크가 눈을 포기하고 대화에 나설 정도의 설득력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이군요. 바실리스크가 아니 라도 눈을 포기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깐깐하네요.”

아른은 멍한 기분으로 깐깐하다는 말은 턱없이 부족한 말이라고 생 각했다. 생떼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듯했다.


다음 날 회담 세부 조정을 위해 찾아온 샹파이 난쟁이들은 아른이 예상했던 것과 거의 일치하는 반응을 보였다. 협상단장이 더스번 칼파 랑이라는 말을 듣자 난쟁이들은 ‘협상을 박살 낼 작정이냐?’는 분노의 표정을 지었다가 혹시 협상이 아니라 전쟁하러 온 거냐?”는 의심의 표 정을 지었다가 아차, 우리도 바실리스크를 내세웠지.’ 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명백히 변호의 여지가 있다는 투로 말했다.

“뭔가 심각한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아니, 아는 자가 거의 없다고 해야 옳겠지만 뱀의 왕은 말을 할 수 있 다. 그런 독특한 특색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말을 하자마자 눈을 잃게 되기 때문이지.”

더스번 경은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아른이 전해 준 실의 설명 을 들었던 터라 경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였다. 놀란 난쟁이들은 더스번 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더스번 경이 그렇게 박학하다는 것 을 못 믿겠다는 난쟁이들의 표정은 곧 ‘아차 싸워봐서 아는 것이구나. 더스번 경이니까’라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른은 역시 널리 알려진 대 로 얼굴에 속마음이 다 드러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더스번 경이 말했다.

“그런데 뭐 하러 말을 하겠소? 그럴 이유가 없지. 이건 협상 안 하겠다는 소리잖아.”

“우리는 합법적으로 공사를 진행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참 견임이 분명한 이 협상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왕의 격을 갖추 고 있고 당신도 잘 알다시피 충분히 대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대리인 을 선임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우리가 내놓아야 하는가? 뱀의 왕이 당 신의 충고를 가납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 책임이다.”

억지라면 상당히 심한 억지지만 난쟁이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의 미가 없다. 특히 그것이 터널을 뚫는 대신 쌓고 있는 난쟁이라면.

“그러니까 댁들은 내가 바실리스크의 입을 열길 바라는 거요? 몇 번 그렇게 해본 적은 있지만 내가 늘 쓰던 방법은 아마 안 될 것 같은 데.”

난쟁이들은 경기를 일으켰다.

“이건 협상이다! 당연히 협상자들의 안위는 보장되어야 한다!”

난쟁이들은 경의 곡괭이를 보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리고 그 보장은 우리에게도 주어져야 한다!”

“누가 어쩐다고. 젠장. 알았소. 알았으니까 여기 있는 아른과 이야기해서 시간과 장소를 확실히 결정하시오.”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야 함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알았다니까.”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난쟁이들을 보다 못한 더스번 경이 자리를 비킨 후에야 아른은 난쟁이들과 세부 조정을 할 수 있었다. 이해가 닿 지 않는 일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최대한 해 두자는 판단 하에 아른은 회담장에 바실리스크를 어떻게 데려올 건지부터 물 었다. 회담자가 입장하자마자 회담장 내의 사람들이 몽땅 죽어 나가서 야 안 될 노릇이다.

샹파이 난쟁이들의 대답은 바실리스크가 눈에 강철 안대를 하고 철 제 우리에 담겨 입장할 거라는 것이었다. 강철 안대는 양쪽에 자물쇠 가 달려 있고 두 개의 열쇠는 양측이 나눠 갖게 될 것이다. 아른은 난 쟁이들이 만든 물건이니 그 강철 안대나 우리의 견고성에 대해서는 담 보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회담은 다음 날 정오 조피크 산 인근의 페 렘 시 공회당에서 열리기로 확정되었다.

난쟁이들이 돌아간 후 아른은 상당한 정신적 피로를 느끼며 더스번 경을 찾았다. 결정된 사항들을 보고해야 했다. 또 경이 장원 주인의 딸 이나 하녀 등을 덮치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다. 하지만 아른이 경을 찾았을 때 경은 사란디테와 함께 저택 도서실에 있었다.

맨정신 상태의 사란디테를 처음 보는 터라 아른은 정중히 인사했다.

그 대답은 놀라웠다. 사란디테는 그를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저 새카만 눈. 우리 자기도 그랬는데…………….”

아른은 가까스로 경이 실연 어쩌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민망해하는 아른에게 책을 보고 있던 더스번 경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 여자 실연중독이니까.”

아른은 애정중독도 아닌 실연중독이면 지나치게 특이하지 않나 생 각했다. 사란디테는 눈물을 훔치고 경에게 대꾸했다.

“흥. 자기는 좋은 남자면서.”

아른은 그 표현과 자신이 아는 더스번 경을 연결지을 수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더스번 경도 그런 것 같았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둬.”

“위로해 줘서 고마워요.”

“그쪽의 일방적인 행패였소.”

“업어와 줘서 고마워요.”

“술 좀 작작 마셨어야지.”

“좋은 남자.”

“…..집에 가시오. 정신차렸으면.”

“바실리스크 구경은 하고 가야죠. 구경하고도 죽지 않는다는데 왜 안 봐요? 그럼, 아른 씨? 잘 부탁드려요.”

사란디테는 아른에게 맵시 있게 인사하고는 도서실을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더스번 경은 아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 유부남이오? 아니면 뭐 이상한 걸로 변신하시오? 혹시 여자요?”

아른은 화를 내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꼭 더스번 경이라서 그런건 아냐.’

“그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데요.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저 실연중독녀가 당신한테 관심을 보였으니까. 아, 그렇군. 이 세상 에선 떼어놓을 수 없는 애인이 있겠군.”

이번에는 아른이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눈물 대신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해당 사항 없음이군요. 파혼을 선언한 약혼녀는 있지만.”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무슨 책을 보고 계셨습니까?”

경이 들어 올린 책은 가이너 카쉬냅이 쓴 ‘좋은 대화를 위한 실천적 조언’이었다. 아른은 잠깐이지만 경이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더스번 경 도 자신을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았다.

“난 내 지명의 유래가 된 이 작자에게 평소 도움을 많이 받아 왔 소. 쓸 만한 소리를 적어 둔 책이 많거든. 하지만 카쉬냅도 이번엔 나를 도와주지 못하는군. 이 책엔 바실리스크와 대화할 때의 조언 같은 건 없소.”

“바실리스크를 설득시켜 시력을 포기하게 하라니, 땅 위에 터널을 뚫겠다는 난쟁이들이나 할 만한 소리입니다. 이 회담이 파탄으로 끝난 다 해도 경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왜 없어? 내가 있잖소.”

“전혀 자책할 일이 아닙니다.”

“자책할 일 맞거든? 술 취한 채 맡은 것이긴 하지만 난 협상단장이 오. 승리는 병사의 것이고 패배는 장군의 것이지. 거기에 불가항력이었 다는 말이 들어갈 틈은 없소.”

놀란 아른은 더스번 경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수정해야 하나 생 각했다. 하지만 뒤이은 경의 혼잣말은 그런 기분이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차라리 난쟁이들이 전투추장 뽑게 한 다음 그 자식을 박살내 버릴까”

아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엔 그렇게까지 말이 안 되나 자문했다.


실은 가끔 자신을 살아 있는 일기장으로 생각하곤 했다. 실이 주인 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 같기도 하고 동정심 같기도 한 감정은 일기장 이 살아 있으면 느낄 법한 감정이다. 예를 들어 실은 주인이 악우에게 (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다.) 유혹당해 처음으로 술에 진탕 취해 돌아온 날을 잘 기억한다. 세상에 대한 반석 같은 믿음이 흔들린 날이 었기 때문이다. 페렘 시내에서 돌아온 아른을 보았을 때 실은 바로 그 날을 떠올렸다. 하긴, 주인님 거라면 떨어뜨려도 별소리 안 났겠군요.

아, 정신이오’라고 말하고픈 것을 꾹 참으며 실은 아른을 진정시키애 썼다.

아른이 그리 기괴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보여주는 행태는 바실리스크와 더스번 칼파랑이 협상하는 모습을 하루 종일 보 고 온 사람에게 당연히 기대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런 일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세상에 그런 욕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더스번 경 정말 욕 잘하 더라. 규파리도 경에 비하면 인품 고결한 신사로 보일걸.”

실은 진저리를 쳤다. 규파리는 레간데 가문의 배달꾼들, 아니, 그 고 용인 전부를 통틀어 최고로 입이 더러운 작자였다. 실은 그렇게 욕을 해댔는데 어떻게 협상이 깨지지 않았냐고 물었다.

“시작되지도 않았으니까 깨질 수도 없지. 난쟁이들은 진짜로 강철 우 리에 든 바실리스크를 데려왔어. 내 눈엔 철사처럼 가늘어 보였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굵은 철봉들이었겠지. 바실리스크 머리를 덮고 있던 강철 가면도 튼튼한 물건이었을 테고. 그 녀석은 커다란 뱀처럼 보였는 데 머리엔 진짜로 왕관 모양의 점이 있던데. 어쨌든 바실리스크는 우리 가운데 똬리를 틀고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어. 회담 내내 말이야. 처 음엔 왕의 사절다운 품위를 지키던 경도 금방 미칠 지경이 되고 말았 지. 화를 내는 방식이 좀 특이했지만 말이야.”

“특이했다고요?”

“경은 아주 희한한 말을 하더군. 독수리가 참새를 대리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이상한 말이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자세히 말해 봐요.”

“못 하겠어. 경이 너무나 화가 나서 횡설수설했거든. 그 앞뒤 없는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면 인간은 더 현명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거야. 더 퇴보할지도 모르지만, 이봐, 실. 너 곡괭이 자루 물어뜯는 사람 봤어? 난 봤어. 세상에 어떻게 왕의 기수이며 백작이나 되는 인물이 그런 추 태를 보이는지. 경은 정말로 곡괭이 자루를 이렇게 물어뜯더라고. 샹파 이 난쟁이들도 비웃기는커녕 부끄럽다는 표정이던데.”

실은 깔깔 웃으며 정말이냐고 물었다. 아른은 놀란 표정으로 가노를 쳐다보다가 머리를 헤집었다.

“이런 들켰네. 나, 참.”

“제가 웃는 모습이 그렇게 안 어울려요?”

“많이”

“너무하시네. 어쨌든 방에 숨어 있는 노비를 불쌍히 여겨 웃겨 주려 한 건 고마워요. 주인의 책임을 다한 거잖아요. 책임감과 화술의 불균 형이야 어쩔 수 없는 거니 뭐라고 하진 않을래요.”

“너 그 신랄함 어떻게 할 수 없냐? 괜찮은 남자 알아보려 해도 내 쪽 에서 미안해진다고. 가노 교육을 어떻게 시켰냔 소리 듣겠단 말이다. 우리 집안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너 시집 보내야 하는데.”

“이번엔 책임감과 판단력의 불균형이군요.”

“응?”

“어디 가서 저 팔 마음이 있는 척하면서 가격 한번 넌지시 물어봐요. 아마 깜짝 놀랄걸요. 옷도 지을 줄 알고 닭도 칠 줄 알고 요리사 보조도 할 수 있고 글도 읽고 쓸 줄 아는 노비가 흔한 줄 아세요? 주인님 은 그저 그런 상인일지 몰라도 전 최고급 노비란 거죠. 비교는 같은 부 류와 해야 공정하죠? 한마디로, 전 시집 갈 때 주인님 도움은 별 필요 없어요.”

아른은 싱긋 웃었다. 걱정을 덜어 주는, 참으로 실다운 어법이라 생 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에게서 눈을 돌려 자신을 보게 되자 아른 은 아득할 정도의 공포감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는 식견이 탁월했다. 조피크 터널이 가져올 경제적 이득 을 정확히 예견했으니까. 하지만 조심성은 부족했다. 하긴 난쟁이들이 땅 위에 터널을 쌓을 거라는 예상을 못 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면 아버지도 좀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아른은 생각했다. 하지만 상인 은 어떤 이윤이 보이더라도 마지막 금고만은 닫아 두어야 한다고 가르 친건 아버님이잖습니까’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른의 아버지도 남 에게 들려주던 격언을 스스로는 듣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레 간데 가문의 재산으로 통하는 길은 샹파이 난쟁이들에게 완전히 열렸 고 난쟁이들은 그 재산을 지상 터널이라는 황당한 사업으로 소진시켜 버렸다. 너무도 약이 오르고 화가 치민 아버지가 쓰러진 건 당연한 일 이다. 그 덕분에 아른은 파혼을 당하고 이 오지로 와서 바실리스크와 더스번 칼파랑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나 구경하고 있게 되었다. 좋은 일이 없다면 그 전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른은 그런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른은 숨이 막혔다. 안 되겠어. 내 생각은 그만두고…

“마음에 둔 남자는 있고?”

실은 무표정한 얼굴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은 채 말했다.

“그건 그만두고 더스번 경 이야기나 좀 더 해 줘요. 독수리가 참새 를 대리할 순 없다고 말했다고요?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요?”

아른은 다시 놀라서 실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궁금하면 내일 같이 나가 볼래? 겁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 장원 에서도 얌전히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면 더스번 경은 소문보다는 훨씬 덜 난잡한 사람인 것 같아. 사란디테도 경을 별로 두려워하는 것 같진 않고, 아니,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야겠군. 오늘 경이 그렇게 날 뛰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은 건 그 여자뿐일걸. 정말 용감한 여자야. 만 나 봤어?”

“만나봤어요. 주인님에 대해 꼬치꼬치 묻더군요.”

“나에 대해? 이런. 더스번 경의 경고가 사실이었나. 별소리 안 했지?”

“저, 주인님.”

“응?”

실은 한참 아른을 쳐다보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일 저도 함께 갈게요.”


정 싫으면 그만둬도 된다는 아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실은 그다음 날 재개된 협상에 아른과 동참했다. 실의 반응은 실로 역동적이었다.

더스번 경과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에 비례하여 커지는 그녀의 눈동자 나 거칠어지는 숨소리는 당장이라도 망측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만 같은 위기감을 주위 사람에게 선사했고 아른으로 하여금 무의 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더스번 경은 바실리 스크와 또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에 골몰한 나머지 어떤 협상단원의 곁 에 갑자기 나타난 노비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런 비대칭적 관계는 사란디테에게서도 나타났다. 실은 사란디테가 아른에게 접근하는 것을 굉장히 경계했다. 하지만 사란디테는 실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 안다는 눈으로 아른을 쳐다보 며 계속 따스한 말을 건넸고 가끔 가슴 벅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 에 그녀와 아른밖에 없다는 듯한 그 태도에 아른은 자기도 모르게 주 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마침내 바실리스크가 입장하게 되었을 때 아른은 반가운 기분마저 느꼈다.

문균법에 따라 회담은 공개되어 있었지만, 페렘 공회당은 한산했다. 호기심에도 한계는 있었던 것이다. 공회당이 텅 비다시피 한 탓에 바퀴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바퀴는 우리에 달린 것이었고. 우리는 두꺼운 천으로 덮여 있었다. 우리를 밀고 온 샹파이 난쟁이들 이 천을 치우자 그 아래에서 머리 뒤편에 왕관 모양의 점이 박힌 거대 한 뱀이 나타났다. 바실리스크였다. 실은 아른의 말처럼 그 머리와 눈 이 강철 가면으로 덮여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훨씬 위험해 보이게 만 드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 가면이 없었다면 공회당 내의 협상단과 난 쟁이들, 그리고 소수의 정신 나간 방청객들은 즉사했을 것이다.

탁자를 가운데 놓고 바실리스크 우리를 마주한 더스번 경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실은 질겁했지만 다른 이들은 놀라지 않았다. 바실리스크가 더스번 경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자 경이 말했다.

“그래. 나 이쪽에 있소.”

바실리스크는 아주 무례하게 머리를 떨어뜨리더니 사려 놓은 자신의 몸 위에 얹었다.

“이…… 썅.”

실은 더스번 경이 울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 히도 경은 자신을 부여잡았다.

“어젠 내가 좀 흥분하는 바람에 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소. 왕의 뜻을 다시 말하겠소. 왕은 조피크 터널은 조피크 산에서 끝 나길 바라고 계시오. 그게 상식적인 것 같지 않소? 텅 빈 공간에 쌓는 터널이라는 건 아무리 봐도 심한 낭비지. 물론 언필칭 지성을 가졌다 일컬어지는 우리 족속들이 영위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낭비요. 춤은 체력 낭비이고 노래는 호흡 낭비지. 술에 이르러서는 헤아리기도 어렵 소”

아른은 멍한 기분으로 흔한 예술무용론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엔 예술이 정신의 필수품, 실용품임을 설파하여 예술가들을 기쁘게 하는 (그리고 주정뱅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다. 아른은 경이 바실리스크에게 말하길 포기하고 샹파이 난쟁이들에게 호감을 얻으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중 최고를 논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지. 딱 한 번, 단한 번만 쳐다보고 끝이잖소. 한 번 입었던 옷은 다시는 입지 않았다는 제 이론 여왕도 당신에겐 못 당할걸. 낭비를 낭비로 즐길 줄 아는 족속의 일원으로 난 당신을 양해할 수는 없지만 경외할 수는 있소.”

뜻밖의 말에 아른은 호기심을 느꼈다. 더스번 경은 치솟아 오르는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파이 난쟁이들의 저 가소로운 낭비질은 당신에 비하면 낭비 축 에도 못 들어. 그들이 설령 온 세상을 휘감는 터널을 만든다 해도 말이 야. 그런데 당신의 눈을 포기하게 하라고? 이런 건방진 소리가 있나. 독 수리가 어떻게 참새를 대리해?”

어제도 들었던 그 말을 아른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실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은 사란디테 쪽을 쳐다보고 있 었다.

“난 당신을 죽이는 것이라면 언제든 환영하지만 가장 긴 터널 같은 시시껄렁한 것을 위해 설득하고 싶지는 않소. 그건 모욕적이니까. 그러 니, 부탁하오. 저들의 대리인에서 사퇴하시오.”

경이 말하는 동안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얼굴에 드러내던 샹파이 난쟁이들 가운데 한 명이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을 조심하라. 난쟁이들 앞에서 그들의 터널을 모욕하는가? 그것도 세계 최장 터널이 될 조피크 터널을?”

더스번 경은 어찌나 차가운지 난쟁이의 수염에 서리가 맺히지 않을까 싶은 눈으로 난쟁이를 쏘아보았다.

“한 번은 용서해 주겠소. 당신들이 바랐던 것은 나와 바실리스크가 협상하는 것이었소. 구멍 뚫는 것이 댁의 특기라 해도 아무 데나 끼어 들지는 마시오.”

난쟁이들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다가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하 지만 아른은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한 기분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경이 만들어낸 상황 변화가 과연 어떤 전망을 가져올 것인지 검토하느라 정 신이 없었던 탓이다.

더스번 칼파랑은 바실리스크를 설득하는 대신 대리인에서 물러나 라 말했다. 그야말로 매듭을 푸는 대신 끊어 버리는 발상이다. 바실리 스크의 자진 사퇴라면 그건 전적으로 샹파이 난쟁이들이 책임질 일이 다. 하지만 바실리스크가 어떻게 사퇴 의사를 밝힐 수 있을까? 가장 있 음직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야 바실리스크는 사퇴할 수조차 없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우리가 부서지면………………

“어? 뭐야!”

더스번 경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아른은 기가 막히는 모습을 보았 다. 바실리스크는 강철 우리의 문짝에 대고 머리를 호되게 부딪혔다. 두 번, 세 번 부딪히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서 심장이 내 려앉는 소리가 울렸다. 우리의 문이 털썩 떨어졌고 동시에 바실리스크의 가면이 비틀어졌다. 회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문은 더스번 경의 반대편으로 놓여 있었고 바실리스크는 그쪽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바실리스크는 머리를 세게 흔들다가 바닥에 내리쳤다.

가면이 불꽃을 일으키며 바실리스크의 머리에서 벗겨져 나갔다.

아른은 믿을 수 없었다. 죽음이 너무도 확실하게 다가왔는데 그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엉겁결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눈을 감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탓이다. 물론 자신이 상대를 보지 못 한다 해도 상대는 얼마든지 자신을 볼 수 있다. 그 발상이 너무도 웃겨 서, 아른은 자신이 웃다가 죽을 거라 생각했다. 얼간이처럼………… 실은? 두 가지 일이 거의 시간차 없이 일어났다. 아른이 급히 실을 끌어안 으며 뒤로 돌았다. 동시에 사란디테가 고함을 질렀다.

“이쪽을 봤다간 죽을 거야. 바실리스크 난 거울을 가지고 있어!” 아른은 실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밀어붙이며 사란디테를 보았 다. 사란디테는 실제로 거울을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문제는 그것이 조그마한 손거울이라는 점이었다. 그 작은 거울을 통해 바실리스크가 자신을 보고 스스로 죽어 버리는 일은 여간해선 일어나지 않을 것 같 았다.

하지만 바실리스크에겐 거울이라는 말로 충분한 듯했다. 등을 돌리 고 있었지만, 아른은 바실리스크가 분노의 소리를 쇠엑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러더니 여기 쿵, 저기 쾅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더스번 경 이 외쳤다.

“거기서!”

아른은 머리를 뒤로 힘껏 돌려 상황을 관찰했다. 바실리스크는 눈 을 감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거울을 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바로 뒤에선 더스번 경이 곡괭이를 들어 올린 채 바실리 스크를 뒤쫓고 있었다. 바실리스크가 홧김에 뒤를 돌아보았다간 당장 죽었을 테니 대단히 용감했다 할 것이다. 하지만 바실리스크는 뒤를 돌 아보지 않았다. 덕분에 경은 살았고 바실리스크 또한 그러했다. 말 그 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바실리스크는 방청석 아래의 복잡한 구조물 속으로 사라졌다. 바실리스크의 모습이 사라지자 아른은 안도 하며 품속의 실을 내려다보았다. 실은 넋이 나간 듯이 그를 올려다볼 뿐 감사의 인사도 하지 못했다. 아른은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 실. 이제 저쪽으로 피해. 빨리 공회당을 나가.”

실은 괴로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아른은 자신이 그녀를 너무 세게 끌어안았나 걱정하며 실을 놓았다. 실은 그가 놓아준 모습 그대로 꼼 짝도 하지 않고 아른을 쳐다보았다. 보다 못한 아른이 그녀의 손을 쥐 려 했다. 함께 도망칠 심산이었다. 그때 실이 손을 잡아빼더니 뒤도 돌 아보지 않고 공회당 밖으로 달려나갔다.


더스번 경과 협상단은 어떻게든 바실리스크를 공회당 안에 가두려 애썼지만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은 지난한 과업이었다. 결국 바실리스크는 공회당의 커다란 하수시설을 통해 빠져나가고 말 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아른은 페렘 시민들에게 사실을 알 리고 거울 없이는 집 밖에 나오지 말게 하라는 권고를 시청에 전달했 다. 그 직후 급히 장원으로 물러난 아른은 그제서야 더스번 경과 사란 디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이서 바실리스크를 쫓아갔나 걱정하는 아른에게 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파이 난쟁이들에게 가지 않으셨을까요?”

아른은 이를 악물었다. 난생처음 겪는 일 같은 건 더 이상 겪지 않으 리라 믿게 되는 오만한 이십 대에 사실 가장 많은 일들이 난생처음 일 어나는 법이다. 하지만 암살 시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 었다. 그래서 아른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모른 체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노비를 보며 아른은 받아들이기 정말 힘든 그 사실을 직시했다. 그 우리와 가면이 부서졌다는 것은, 특히 샹파이 난 쟁이들이 퇴장한 후에 그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지? 어제 바로 ‘사고가 일어나면 너무 속 보이는 짓이기 때문일까? 빌어먹을. 너를 그 위험한 곳에 데려갔다니” “더스번 경을 찾아서 빨리 이곳으로 모셔오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모르고 있다면 몰라도 자기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아 니까 괜찮지 않겠어? 진짜로 드래곤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한 기사잖아.”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에요. 이 근처에 풀려난 바실리스크가 있으니까요.”

공포와 혼란에 오래 시달렸던 아른은 울컥했다.

“걱정 마 여기 네 주인이 있잖아. 네 건강과 안전은 전부 내 책임이 야. 넌 주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누구한테 의지하려는 거지?” 

항의하던 아른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 오래 그러지는 못하겠지. 협상은 파탄 났어. 레간데 가문은 더 이상 네 주인이기 어렵겠지. 하지만 그때까지는 여기 있는 유일한 레간데인 내가 네 보호자야. 그러니까 아까 같은 행동은 하지 마. 젠장.

나를 동정하는 건 사란디테 하나로도 충분해.”

“예?”

“내가 바본 줄 알아? 사란디테는 내가 파혼당했다는 걸 경에게 전 해 들었겠지. 그래서 나를 동정하는 것이고, 넌 내가 마음이 약해진 터 에 그런 동정을 받으면 넘어갈까 걱정되었던 것이겠지. 그래서 더스번 경이 있는데도 나를 따라온 것이고, 고맙긴 한데, 둘 다 필요 없는 동정 이야. 특히나 내 피보호자가 그러는 것은 보기가 괴로울 정도야.”

실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장원의 노예가 찾아와 더스번 경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렸기 때문에.

장원 주인은 바실리스크가 횡행하는 시점에 드래곤을 물리친 기사 가 자신의 장원에 체류 중이라는 사실에 거의 감동해 버렸다. 돌아온 더스번 경은 민망할 정도의 환영 인사를 받았고 목이나 좀 축이게 해 달라는 말에 독한 술까지 한 병 얻었다. 아른이 찾아갔을 때 협상단원 들에 둘러싸인 경은 병째로 그 술을 마시고 있던 참이었다. 약간 붉어 진 눈으로 아른을 본 경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다른 이 들에겐 피곤할 테니 가서 쉬라고 정중히 말했다. 경의 곁에 있고 싶었 던 협상단원들은 아쉬움을 삼키며 물러갔고 실은 아른의 곁에 남았다. 경이 말했다.

“파이 난쟁이들에게서 오는 길이오. 증거 내놓으라는 소리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왔소. 자기들이 만든 것이 부서진 건 유감이지만 그건 바실리스크의 비상식적인 괴력을 간과한 사고라더군. 비상식적인 괴력 좋아하네. 내가 바실리스크 잡아 봤다는 걸 면전에서 모르는 척하는 꼴이라니. 계속 외면할 수 있도록 머리를 뒤로 돌려주고 싶어지더군.”

아른은 소름이 끼쳤다. 더스번 경이 한 말이라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 시로스 부단장님과 말씀하시는 것이………….”

더스번 경은 손사래를 치곤 자신의 관찰력을 과시해 보였다.

“당신이 여기 진짜 대장이잖아. 나 지금 대장한테 상황 보고 하는 거요. 상황이 좀 흉흉하니 기민하게 갑시다. 응?”

“알겠습니다. 난쟁이들은 의도적으로 바실리스크를 풀어 줬다는 것 을 부인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랬소. 거기서 시간을 더 끌다간 때를 놓치게 될까 봐 다른 대표 자를 빨리 뽑아 놓으라고 으름장 좀 놓아 주고 왔소. 사란디테는 내 뒤 를 따라온 놈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좀 있다가 올 거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예?”

“대피하려면 지금 당장 해야 하오. 아니면 끝까지 버텨야지. 그믐이 가까우니까 일단 밤이 되면 새벽까진 달이 안 뜰 거요. ‘도망친 바실리 스크가 야음을 틈타 협상단을 급습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우 린 꽤 살벌한 밤을 보내게 된다 이 말이지.”

아른은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말은 잘 나왔다.

“우리가 아니지요. 경을 노리고 있는 것이잖습니까.”

더스번 경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아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자신이 내어놓은 말이 지나치게 날것이라는 느낌을 받은 아른은 급히 그것을 다듬었다.

“이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경 혼자 도망치는 편이 나을 텐 데요. 예. 확실히 그게 더 안전할 겁니다. 우리는 경에게 방해만 될 테니 까요. 그렇죠?”

“나를 노리는 것이 아니오.”

“아니오. 당연히 경을 노리는 겁니다. 그 외의 다른 자들을 죽여 봐 야 난쟁이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경은 충돌이 일어났을 때 저 쪽에 가장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예. 저자들은 이미 실력 대결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난쟁이 씨족장들이 비밀리에 모여 결 행 날짜까지 정해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경은 한시라도 빨리 왕에게 돌 아가셔서………… 이…………. 내란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니.”

더스번 경은 싱긋 웃었다.

“나이에 비해 턱 힘이 좋으시군. 아른 씨. 그 무거운 말을 담아내다

아른은 과찬이라 생각했다. 그 말을 꺼내 놓자마자 아른은 뼈가 덜 그럭거리는 오싹함을 느꼈다. 내란이라니. 평생 쓸 일이 없어야 하는 단 어다. 자신의 인생이 그에게 관심도 없는 다른 이들에 의해 갑자기 그 리고 영원히 바뀌게 될 거라는 느낌은 정말이지 싫고 분했다.

“아니, 나이에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그래 좋소. 내가 떠나고 나면 어쩔 작정이오?”

“여기엔 포로가 되어선 안 되는 신분인 분들도 있으니 신속히 제네갈로 가야겠지요. 공작님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겁니다.”

더스번 경은 깜짝 놀랐다.

“제네갈? 네우리헨 경의?”

“예.”

“그렇군. 더더욱 내가 없어야겠군. 그 호랑이는 제 자식 그 꼴로 만 든 나를 절대 참아낼 수 없을 테니.”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공자를 그렇게 만든 건 경이 아니라 공자 자신의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네갈 공을 언급한 건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고 누구나 알듯 그분이 왕의 마지막 성벽이 기 때문에…….”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오. 손가락을 구부리면 주 먹이 된다, 비가 온 뒤에 땅이 젖는다 같은 소리나 다름없지.”

아른은 그게 뭐 잘못된 거냐고 묻고 싶었다. 더스번 경은 엄지와 검지로 수염을 꼬더니 말했다.

“그래. 너무 뻔하다는 것이 문제군.”

아른은 감히 더스번 경의 말을 비웃을 뻔했다.

“네우리헨 경이 왕을 배신할 거란 말씀입니까? 공작님이오?”

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손대기 어려운 침묵이 흘렀다. 아른은 초조한 기분으로 테라스 쪽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곧 달도 없는 밤이 찾아올 것이다.

경이 자신의 말에 힘겨워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공작을 생각하지 못했어. 의견 구해 놓고 이러려니 미안하지만, 단장질 한 번 해야겠소. 제네갈엔 갈 수 없소. 내일 회담이 재개될테니까.”

실이 어깨를 꿈틀했다. 아른 또한 놀라서 말했다.

“예? 회담이오? 몇 시간 뒤에 바실리스크가 온다고 하시지 않으셨습 니까 경이 바실리스크를 죽이든, 혹은,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그 반 대의 일이 벌어지든 회담은 재개될 수 없습니다.”

더스번 경은 곡괭이와 술병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회담은 재개될 거요. 부단장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겠소. 난 눈 좀 붙이고 있을 테니 사란디테가 돌아오면 즉시 나를 깨워 주시오.” 

아른은 경의 냉엄하면서 무거운 얼굴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뚱뚱한 기사는 실과 그에게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보이곤 터벅 터벅 걸어갔다. 아른은 묘하게도 발소리나 갑옷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실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담이 재개된다고요?”

“복수라고?”

혼잣말들이 공중에서 충돌하는 소리가 난 듯했다. 실은 정신을 차 리고 주인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른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네우리헨 경이 형을 배신할 리는 없어. 네우리헨 경이 네우리헨 경 인 한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더스번 칼파랑은 왕의 기수이지 왕이 아니야. 공작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샹파이 난쟁이들에게 살인을 청부했 을 수도 있어. 그 경우 공작에게 부탁받은 복수가 끝나거나 혹은 바실 리스크가 죽어 복수가 실패하는 상황이 되면 샹파이 난쟁이들은 회담 을 재개하겠지. 경은 이것이 내전이 아니라 한 남자의 복수라고 판단한 모양이군.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바실리스크가 저쪽의 대리인으로 선임된 건 백작님이 왕의 사절로 결정되기 전이었는데요.”

“그래서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었던 거야. 샹파이 난쟁이들은 처음 부터 경을 죽일 생각은 아니었어. 하지만 네우리헨 경의 의뢰가 어제와 오늘 사이에 난쟁이들에게 전달되었던 거야 난쟁이들은……… 그래. 만 약 사태가 난쟁이 회의를 개최하는 수준까지 치달을 경우 경이 없는 편이 낫다는 판단 하에 그 의뢰를 받아들였을 테고.”

실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 방법밖에 모른다는 것이 아쉽고 분했다. 아니, 다른 방법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실은 절대로 그런 길을 걸을 수 없다. 그래서 실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머나, 정말이에요? 놀랍군요. 이게 복수극이었다니 상상할 수도 없어요.”

아른은 어안이 벙벙하여 실을 쳐다보았다. 실은 고마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쨌든 우린 언제나 말 위에서 대화할 수 있어. 고맙게 도. 아른이 힘없이 말했다.

“그게 맞을 텐데.”

실은 쓰게 웃었다. 너무하네. 맞는지 아닌지는 상관없는 거잖아. 실은 주인에게 밤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아른이 떠나는 그녀의 등을 향해 말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이구나. 그다지.”

실은 걸음을 멈췄다. 많은 것이 될 수 있었던 몇 초를 과거로 보낸 후 실은 뒤로 돌며 명랑하게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요. 물정 모르는 가노를 위해 애써 상황을 설명해 주신 것. 주인의 책임을…………….”

“……다하는 다른 방법이 있어? 있으면 알려줘.”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실은 그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보았다. 그럴 수 있을까?

감히?

“다하지 마세요.”

“잘하지 못하니까?”

“훌륭하다고 할 정도는 절대 아니죠.”

“신랄하군.”

“하지만 그것보다는 주인님의 마지막 밧줄이 되고 싶지 않아서예

요. 그냥 떨어지시면 어때요?”

“…..죽을 텐데?”

실은 가슴이 벅찼다.

“날 수도 있어요. 떨어지지 않으면 알 수 없죠.”

아른이 의자를 멀리 밀어내며 일어났다. 실은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그 끼이이익 하는 소리가 소름 끼친다고 느꼈다. 탈색된 눈빛으로 가노를 보던 아른이 건조하게 말했다.

“정말 내가 필요 없어?”

“데일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예. 필요 없어요.”

아른은 보이지 않는 이가 들고 가는 허수아비처럼 움직여 실의 곁 을 지나쳤다. ‘잘 자라’는 말을 흘려 놓고서 꿈쩍하지 않고 서 있던 실 은 아른의 발소리가 사라진 후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를 도로 테이블 에 밀어 놓은 실은 손볼 것이 없나 살피듯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테라 스로 향했다.

테라스엔 석조 난간이 있었다. 거기에 걸터앉기 위해 몸을 돌렸던 실은 테라스 창 옆, 건물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란디테를 발견했다. 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란디테는 용서를 구하듯 두 손을 붙여 보 였다.

“응. 엿들었어. 미안해. 갑자기 끼어들기가 뭣해서 여기서 기다리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어. 그런데 너 참 대단하다.”

“예?”

“도박이잖아. 주인 가지고 도박이라니. 배짱도 좋네. 괜찮을까?” 

실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분노의 배출구가 되려던 그 입은, 그러나 내부에서부터 막힌 듯 아무것도 내놓지 못한 채 바르르 떨렸다. 잠시 후 실이 눈물을 흘렸다. 놀란 눈으로 실을 보던 사란디테가 황급히 달 려왔다. 그녀는 실을 그러안았다. 실은 저항하듯 몸을 비틀었지만, 사란 디테는 놓아주지 않았다. 실은 체념했다. 계속 바깥에 있던 사란디테의 팔과 얼굴은 차가웠다. 실은 그 차가움에 만족했다.

실은 사란디테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중얼거렸다.

“미안해서요. 이것밖에 안 되는 노비라. 그게 다예요. 별 것 없어요.”

“내가 잘못했어. 그런 말 하는 것이 아닌데. 네가 더 잘 알 텐데.” 

사란디테는 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실은 이게 무슨 짓이냐는 표 정으로 사란디테를 쳐다보았다. 사란디테는 어깨를 움츠렸다. 쩔쩔매는 사란디테를 보던 실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밀어내고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더스번 경은 사란디테 아가씨가 돌아오자마자 알리라고 하셨어요.”

“기사님이? 왜?”

“그야 저는 모르죠. 내일 회담이 재개될 거라는 말씀은 하셨지만.”

“회담이 재개된대? 이 난리가 났는데?”

실은 아까 더스번 경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희열을 다시 느꼈 다. 저도 모르게 실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배였다.

“그래야 해요. 어떻게든 협상을 해야 해요. 난쟁이들은 레간데 가문 을 파산 직전까지 몰아붙였어요. 빨리 이 말도 안 되는 공사를 중단시 켜야 해요. 그런데 그분은, 그 반가운 말을 듣고도 어떻게 협상할 것인 가 하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시고, 저한테 들려주기 위해 사정이 어떻게 된 건가 추측이나 하고 계셔서………… 전 정말이지………..”

사란디테는 다시 실을 안고 싶어졌다. 하지만 조금 전 자기도 모르 게 입을 맞추었던 실수가 있었던지라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사란디테는 그녀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짓을 시도했다. 힘들어하는 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버리는 대신 준열한 조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너 참 네 주인 닮았네.”

실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사란디테는 자기가 한 짓에 진저리를 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기사님한테는 내가 가볼게. 응. 그럼, 잘 자!”

사란디테는 얼굴에 불이 나는 기분을 느끼며 즉각 실의 곁을 떠났 다. 달리다시피 걸어 순식간에 더스번 경의 방에 도착한 사란디테는 침 대를 기세 좋게 걷어찼다. 갑옷 차림을 한 채 누워 있던 경이 벌떡 일어 나자 사란디테가 말했다.

“정말 미치겠어요. 이번엔 여자한테 당했어요! 게다가 제대로 시작도 못 해 보고!”

조금 전 눈을 붙였던 경은 엄청난 하품을 했다.

“뭐? 아, 실연? 좋겠네.”

“이런 아직 추도사 다 못 썼는데 할 수 없죠. 일단 죽여 놓고 마무리하죠.”

“나를 죽이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보다는 밤 산책이나 하는 건 어떻 겠소? 피도 좀 뿌리고 살점도 좀 나부끼면서.”

“끔찍해라. 기사님은 도대체 왜 그 모양이에요? 야참은 물론 가져가

는 거죠?”


아른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누워 있기가 불편해서 취한 자세였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등이 기묘할 정도로 아프고 발끝은 차가웠다.

마지막 과거가 뜯겨나가듯이 그에게서 사라졌다.

미래가 과거의 그 무엇도 답습하길 거부하는 낯설고 위협적인 미래 가 아침과 함께 찾아올 것이다. 그 미래의 아가리엔 샹파이 난쟁이와 지상 터널, 바실리스크, 제네갈 공작과 카쉬냅 백작의 암투 따위의 이 빨이 돋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머리를 밀어 넣어야 하다니, 실로 흥분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 낭만적인 바보야’ 아른은 상체를 뒤 로 넘겨 침대에 누웠다. 빌어먹을 게임에 소모될 패자를 모집하 기 위한 호사스러운 초청 문구를 나한테 말하는 거야? 왜 사형수의 마 지막 만찬을 뺏어 가냐고! 그걸 안 먹으면 살 수 있대? 굶주린 채 죽을 뿐이야’

아른은 패자에게 가혹한 세상에서 비루해지고 비참해지고 비굴해 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진 그가 미덕이라 여기 는 것, 이 세상엔 절대 없을 미덕 한 가지쯤은 지키고 싶었다. 그 추억 으로 남은 생을 버텨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주인의 의무 섬김받기 에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기에 섬김받는 주인. 하지만 실은 그것 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다운 행동이었다. 그래서 아른은 실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비웃었다.

어쩌겠어. 아른 레간데. 네 운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아른은 전율을 느꼈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 앉았던 진짜 이유가 떠올랐던 탓이다. 간단히 휴대할 수 있는 짐만 챙겨서 장원의 말 한 마리를 훔쳐 도망치는 아른 레간데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니, 아른 레간데가 아니다. 이름을 바꿔야 할 테니. 아른은 그 생각에 다시 전율을 느꼈다. 이번엔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옛노래나 이야기 속의 남들에게 그런 일이 닥치는 경우와 달리 자신의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죽음처럼 충격적이었다. 살아온 대부분의 나날 동안 이름은 곧 그 였기 때문에 아른은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해야 돼. 그렇게 해야 돼. 도망도 제대로 못 치는 식물이 되어선 안 돼. 동물로 태어났으면 동물답게 살아. 뿌리 같은 건 없어! 힘껏 도망치 는 쥐새끼가 웅장한 전나무보다 나아!’

아른은 신음을 억누르며 바지를 꿰어 입고 눈물을 삼키며 윗옷을 걸쳤다. 하지만 소지품을 결정하는 단계에 이르자 느릿느릿 움직이던 그의 손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무엇을 가져가야 될지 결정 하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앞에 무엇이 기다릴진 알 수 없다. 임기응변으 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른 레간데를 증명할 것을 가져가야 할지, 아른 레간데에 소속된 건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른은 누가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이 열렸다.

아른은 핏발선 눈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들어선 것은 실이었다. 움 직이는 가구답게 그녀는 문을 두드리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옷을 다 챙겨입은 주인을 보자 실은 놀랐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른은 절망적인 눈으로 창가를 보았다. 창밖은 푸르스름했다. 어느새 해가 뜬 것이다. 그는 결국 쥐새끼만도 못했다.

“부단장님이 조금 전 새 대표자를 뽑았냐고 저쪽에 문의했어요. 그러자 저쪽에선 바실리스크를 다시 붙잡았으니 회담을 원한다면 바실 리스크와 하라고 했대요. 부단장님은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두 모 이라고 하셨어요.”

아른은 그 말에 늦게 반응했다.

“부단장님? 더스번 경은?”

“어젯밤 사란디테 아가씨와 함께 나가신 후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대요.”

“바실리스크를 다시 붙잡았다고?”

“예.”

아른은 새벽에 바실리스크가 올 거라던 더스번 경의 말을 떠올렸 다. 자신을 위해 많은 감정을 소모한 뒤라 그다지 감정이 느껴지지 않 았다. 아직까지 경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바실리스크가 난쟁이 들의 곁으로 돌아갔다면 경은 죽었을 것이다. 네우리헨 경은 결국 다리 를 못 쓰게 된 아들의 복수에 성공한 모양이다. 공자가 경이 딴 제네갈 컵을 친구들과 함께 억지로 뺏으려 했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깨끗 이 무시한 채 아른은 공작이 부러웠다. 몹시.

“어쩌면 도망치셨을지도 몰라요.”

아른은 밤새 자라난 수염을 쓸어만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의 손이 얼굴을 가리게 되었다.

“더스번 경 말이에요. 자신이 없어지면 회담이 재개될 거라고 판단하신 건지도 모르겠네요.”

“회담? 무슨 회담, 바실리스크의 입을 열어야 하는데.”

실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세수할 물을 가져오겠다고 말하곤 물 러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른은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뿌리가 박혀 버렸군. 이제 딱따구리에게 생살을 뜯기며 다음에 떨어질 것이 번개일 지 비일지 전전긍긍해야 하는 건가. 아무것도 못 한 채.

아른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아니. 나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페렘 시내는 고체적인 고요에 휘감겨 있었다.

바실리스크가 돌아다니는 도시에선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다. 집 밖 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회담 재개 요청을 받 고 공회장을 찾은 샹파이 난쟁이들은 오래된 유적 가운데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느낌은 회담 상대가 찾아온 후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공회당을 찾아온 왕의 협상단은 한 명뿐이었다.

“아른 레간데입니다. 다른 분들이 오기에 앞서 바실리스크의 구속 이 확실히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저 혼자 먼저 왔습니다. 어제 일어난 불행한 사태를 고려해 볼 때, 아무래도 안전 문제에 민감할 수 밖에 없군요.”

샹파이 난쟁이들은 퉁명스럽게 천을 치웠다. 그곳엔 어제와 비슷한 철창과 가면으로 둘러싸인 바실리스크가 있었다. 샹파이 난쟁이들은 어쩔 거냐는 듯이 아른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아른은 바실리스크가 있는 우리 쪽엔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서류들을 탁자 위에 죽 늘어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서류를 모두 펼쳐 놓은 아 른은 바실리스크의 우리 쪽을 흘깃 쳐다보고는 서류 중 한 장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안전한 듯하군요. 온 김에 간단한 서류 업무 하나만 처리하고 돌아 가겠습니다. 협상단을 빨리 모셔올 수 있도록 협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쟁이들은 아른이 협상단이 와서 사용할 서류들을 미리 늘어놓았 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뭔데?”

그것은 아른의 위대한 승리였다. 협상사흘째, 처음으로 바실리스크 가 아닌 난쟁이들과 협상단원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는 것을 난쟁이 들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아른은 그 승리를 즐길 수 없었다. 아른은 들고 있던 서류를 살짝 흔들며 건조하게 말했다.

“별 것 아닙니다. 용어 문제입니다.”

난쟁이들은 관록 있는 협상가처럼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 였다. 아른은 계속 말했다.

“조금 전 레간데 상회가 공동 출자자에서 단독 출자자로 바뀌었습 니다. 앞으로 그 이름을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난쟁이들은 당황하여 눈을 껌뻑였다. 아른은 공회당에 오기 전 전쟁 을 치르듯 하며 급조한 서류들을 가리켰다. 노련한 사무가라면 그 서류 들에서 상당한 탈법이나 편법의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꽤 합법적이었다. 어쨌든 조피크 터널 회사의 내부 구조만큼 합법적이었다.

“이 서류들을 검토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레간데 상회가 채무를 포 함하여 다른 출자자들의 지분을 모두 인수했습니다. 따라서 레간데 상 회는 조피크 터널 회사의 단독 출자자로 바뀌었고 회사의 모든 채무에 대해 단독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뭐?”

‘도끼 맞아 쓰러지는 나무도 네 머리를 때릴 수는 있어 아른은 침 착하게 말했다.

“물론 회사의 경영권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샹파이 씨족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영권을 오랫동안 행사하시긴 어려울 것 같군요. 많은 분들 의 관심 덕분에 레간데 상회가 조만간 파산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입 니다.”

난쟁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거친 난쟁이들의 목소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이다 보니 알아듣기도 시원찮았다. 아른은 사기나 협잡, 속임수 같은 단어들이 범람하는 듯하 다는 인상을 받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정심을 기대하 는 건 역시 좀 유치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나라를 절단내고 경제 구조 를 파탄 내서라도 저희들의 같잖은 터널을 만들겠다는 난쟁이들이 레 간데 가문의 파멸에 관심을 가질 까닭은 없다. 아른은 눈물을 참기 위 해 애썼다. 절대로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레간데 가문이 다른 자들을 위해 희생하는 건가?”

아른은 깜짝 놀라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하지만 성난 난쟁이들 중 어떤 자가 그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저 소란 속에서 그 목소리가 똑똑히 들린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아른은 불가사의한 기 분을 느꼈다.

“설마 제비를 뽑지는 않았을 테고, 그건 네 선택이겠군. 장렬하긴 하 다만 동정심을 바랄 순 없겠지. 그것은 배교다. 상인에게 이윤은 종교니까.”

아른은 격분했다. 그는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외쳤다.

“이윤은 공정한 거래를 통해 추구하는 거야! 거래가 공정하지 않으 면 그 순간 이윤 추구는 강도질이 될 뿐이다. 너희들의 어디에, 땅 위에 터널이 놓이는 이 상황의 어디에 공정함이 있나!”

깜짝 놀란 난쟁이들이 항의의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덕분에 그 기 묘한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신앙은 여건이 될 때만 가지는 것이 아닐 텐데. 욕망을 추구했으면 끝까지 추구해야지. 난쟁이들에게 돈을 주어 굴을 파게 한 그 욕망 말 이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하는 건 의미 없다. 난쟁이들은 가장 긴 터널을 파겠다고 언제나 말했다.”

‘난쟁이들?’

어느샌가 찾아온 고요 속에서 아른은 바실리스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왕은 장님이었다.

아른이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속삭였다.

“너, 시력이……”

바실리스크는 꼬리 끝을 머리 근처로 가져와 뭔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철제 가면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반사적인 두려움 때문 에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아른은 바실리스크의 눈이 새하얗 다는 것을 발견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샹파이 난쟁이들은 얼굴 가득 당혹감을 드러낼 뿐 꼼짝도 하지 못 했다. 바실리스크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더니 아른의 왼쪽 방향으로 머리를 향했다. 보이지 않아서 똑바로 볼 수 없나 생각하던 아른은 그 것이 귀를 기울이는 동작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너를 배교자라 말할 수도 있지. 혐의에 대한 해명은?”

혼란스러워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기에 아른은 오히려 그 대 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른은 빠르게 말했다.

“그래. 우리가 돈을 줬어. 우리가 굴을 파게 했어. 그리고 우린 망했 어. 하지만 스스로 발을 집어넣은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다른 이들까지 끌어들이지는 않겠어.”

“그렇다면 너는 가짜 상인이다. 지금의 내가 가짜 왕인 것처럼.”

“……그러면 어쩌란 거야?”

“나는 모른다. 상인이 아니므로.”

아른은 진한 허무감을 느꼈다.

“그만두겠어. 이런 구름 잡는 이야기. 그런데 네가 장님이라면, 그러면 더스번 경은……?”

마치 등장 신호를 받은 것처럼 공회당의 문이 열렸다. 흙먼지와 피 로 범벅이 된 더스번 경이 들어섰을 때 아른은 당연하다는 느낌과 어 이없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그런데 경은 혼자가 아니었다. 경의 뒤 로 여기저기에 붕대가 감겨 있는 초췌한 몰골의 난쟁이들이 줄에 묶인 채 뒤따르고 있었다. 그 밧줄의 끝은 사란디테가 쥐고 있었다. 경은 아른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하고 다 묶어서 데려오다 보니 좀 늦었소. 어? 너 왜 가면 벗었냐?”

경의 질문을 받은 바실리스크가 상냥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방금 거기 있는 젊은이가 협상, 터널 공사, 자기 가문을 한 방에 다 날려 버려서 더 이상 위장할 필요가 없게 됐어. 칼파랑”

더스번 경은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아른을 쳐다보았다. 아른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그런 시선 보내냐며 왈칵 화를 낼 뻔했다. 

“어떻게 그러셨소? 재주도 좋네.”

“더스번 경.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저 바실리스크와 아는 사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바실리스크가 말할 줄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 는지는 이야기했지? 내가 예전에 살려 줬던 녀석이오.”

아른은 바실리스크를 쳐다보았다. 저게 바로 ‘하필이면 이 시대에 태어나 더스번 경과 맞닥뜨릴 정도로 운이 없는’이라는 말을 붙여야 하는 그 바실리스크라고? 하긴 바실리스크가 오가다 만날 수 있는 들쥐처럼 많은 건 아니니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면…………….

“그러면…… 그러면 왜 모르는 척하신 겁니까?”

“정확한 사정을 모르니까. 혹시 눈 안 보이는 무력한 처지라 샹파이 난쟁이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나선 것일지도 모르잖소. 한 번 살려 줘 놓고서 물색없는 소리를 떠들어서 죽일 수야 없지.”

사란디테가 이죽거렸다.

“좋은 남자.”

그녀를 째려본 후 경이 계속 설명했다.

“그래서 모르는 척하고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지. 그런데 어제 당신 덕분에 겨우 이놈들이 구제할 도리가 없는 얼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소.”

아른은 살인 혐의라도 받은 양 질겁하여 말했다.

“저 때문에요?”

“그래요. 내전, 네우리헨 경, 뭐 그런 것들 말이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네우리헨 경이 복수를…….”

“복수? 무슨 복수?”

“그, 공자님의 그 일 때문에, 공작이 난쟁이들에게 의뢰하여 바실리스크로…………. 하지만 바실리스크가 장님이라면………….”

“아, 그런 이야기? 글쎄. 공작은 나를 엄청나게 싫어할 자유는 얼 마든지 누리겠지만, 그리고 나도 그 자유를 얼마든지 존중할 테지만, 경은 강도질의 후원자, 지지자가 될 자유는 결코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 공자의 행동은 분명히 그런 것이었거든.”

아른은 말문이 막혔다.

“뭐, 공작의 속마음이야 나도 모르겠소. 내가 말하는 건 ‘뻔한’ 이야 기요. 네우리헨 경은 반드시 형을 돕는다는 것. 고결한 기사인 경은 내 전의 희미한 낌새만 맡아도 확인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즉각 반응부터 할 거요. 간단히 말해 당장 출전 나팔을 불고 말을 달리기 시작할 거란 말이오. 그러면 누군가가 공사를 못 하게 되겠지?”

“그야 그럴 테죠. 하지만 난쟁이들은 그걸 각오한 것………….”

난쟁이들의 표정을 본 아른은 말끝을 삼키고 말았다. 그 얼굴들은 정말이지 속마음을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아른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냈다.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더스번 경은 맛없고 질긴 풀을 억지로 우물우물 씹는 소처럼 말했다.

“처음부터 앞뒤가 많이 안 맞더라고. 이놈들 하는 짓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지. 그런데 어제 당신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놈들이 완 전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더군. 너무도 뻔한 사실도 모르는 바 보 말이오. 그렇게 가정해 보니 전부 설명이 되더라고. 땅 위에 터널을 쌓는다? 바보라서 자기가 자랑스러워 하는 건 남들도 존경하는 줄 알 아서 그렇다. 자기 후원자들을 파산시킨다? 바보라서 후원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 못 한다. 바실리스크를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바보라서 대화가 남 윽박질러서 승리하면 되는 거라고 믿는다. 바실리스크를 일부러 풀어준다? 바보라서 잘 안되는 협상은 겁줘서 파탄을 내 면 그만이라고 믿는다.”

경의 설명을 들으며 아른은 속에서 계속 혐오감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난쟁이들을 노려보았다. 난쟁이들은 왜 노 려보냐는 듯이 험악하게 마주 보았다. 다른 일부는 더스번 경을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아른은 말도 하기 싫어졌다.

“당신 말 듣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봤소. 저놈들은 진짜 바보다. 저 놈들은 내전 의도 같은 건 없다. 원하는 건 무슨 몽니를 부려서라도 하 기 싫은 협상을 끝내고 다시 공사를 시작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바 보들의 바보짓 때문에 진짜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제네갈 공작은 왕에 대한 도전엔 즉각적으로 반응할 테니 거기까지 생각하니 뒤통수 가다 서늘해지더라고. 방법은 하나뿐이었지. 약간의 피 냄새만 나도 제네갈의 호랑이가 울부짖을 테니 최대한 조용히 해결해야 했소. 바실 리스크는 장님이니 온다면 틀림없이 난쟁이들이 올 거라 생각했소. 그 래서 마침 사란디테가 내 곁에 있다는 행운에 감사하며 어젯밤에 찾 아온 암살자들을 붙잡았소.”

아른은 묶여 있는 난쟁이들을 쳐다보았다. 난쟁이들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애써 지으며(성공적이진 않았다. 난쟁이들이라.) 항의했다.

“우리는 밤산책 중이었다! 당신들이 갑자기 우리를 공격한 거다!”

더스번 경이 히죽 웃었다.

“손에 가느다란 못과 망치를 들고 말이지.”

“우리는 건설자다! 도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 냐!”

“온갖 잡것들하고 씨루다 보니 별 괴상한 걸 다 알게 되더라고. 이를 테면 이런 것도 있어. 정수리의 특정한 곳에 못을 박으면 머리카락 때 문에 상처가 잘 보이지 않고 못대가리 때문에 출혈도 거의 없어서 바 실리스크 때문에 죽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 딱 한 명만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나? 그러면 협상단이 다 도망칠 거라고? 어떻게 하면 사고방식 이 그렇게 열악해질 수 있냐?”

아른은 혐오감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난쟁이들이 다시 외쳤다.

“억지다! 아무 증거도 없이 되는대로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대는 짓이다!”

“그래. 못과 망치는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데도 도움이 되지. 성공 하기 직전까지는 언제나 둘러댈 수 있거든. 너희들이 돌아가지 않았는 데도 저 난쟁이들이 태연히 여기 나타난 것도 그 때문이겠지. 실패해도 증거는 없다 이거지.”

아른은 회담을 위해 나선 난쟁이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자신감 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른은 걱정에 빠져 경을 보았다. 그리고 경 의 얼굴에도 난쟁이의 그것과 비슷한 감정이 떠올라 있음을 발견했다. 

“바보에 대한 칭찬은 이 정도로 하자. 증거? 그래. 없어. 하지만 증언 의 경우엔 어떨까?”

“증언? 누가!”

“그럴 수 있다는 걸 떠올리기 힘들지만, 사실 들을 수 있고 오래전부터 말도 잘 하게 된 현장 증인이 하나 있거든. 나는 그 친구가 협조적일 거라고 봐.”

모든 이들의 서로 다른 시선이 바실리스크에게 집중되었다. 아른은 바실리스크가 피식 웃는 것 같다고 느꼈다.

“흐음. 칼파랑은 내가 어젯밤에 들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모양이군.” 

회담장에 있던 난쟁이 중 하나가 찢어지는 고함을 질렀다. 그 난쟁 이는 단검을 뽑아 들고는 우리에 달려들었다. 그때 아른은 사란디테가 어떻게 란데셀리암과 싸울 때, 그리고 어젯밤에 경을 도울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사란디테는 품에서 거대한 목걸이를 꺼냈다. 거기엔 월장석으로 보 이는 하얀 보석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사란디테의 모습이 변 했다. 거대한 짐승의 모습이 된 사란디테는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우리 를 열려 애쓰던 난쟁이는 그 소리와 기세에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사 란디테는 단검을 쥔 난쟁이의 손을 밟더니 바실리스크가 든 우리의 문 을 등으로 막았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마!”

경고가 없어도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른은 줄행랑을 치고 싶은 기분마저 느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실리스크가 침착 하게 말했다.

“늑대인간 울음소리 같은데, 이상하군. 나한테야 항상 밤이긴 하지만 그녀에게도 그렇진 않을 텐데.”

더스번 경이 대답했다.

“달 없이도 변하는 온 세상에 하나뿐인 늑대인간이야. 말도 안 되게 커다란 월장석이 있거든.”

“로히람의 달? 달 보고 변하는 족속들에겐 전설적인 보물이지. 월장 석이 아니라 로히람 수면에 비친 달빛이 굳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 어. 그건 란데셀리암이 가지고 있을 텐데.”

“아, 나랑 같이 란데셀리암과 싸우고 얻었지. 그런데 너 많이 똑똑해 졌네? 그런 것도 알아?”

“인정하기 싫지만 듣고 말할 수 있게 되니 좋은 점이 많더군.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듣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야.”

“증언하면 내가 보호해 주지.”

“증언하지.”

난쟁이들의 얼굴이 곧 터질 듯 붉으락푸르락했다. 아른은 그들이 고 함을 지르고 싶지만 사란디테가, 그리고 더스번 경이 무서워 그러지 못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신없이 그 모습을 구경하던 아른 은 더스번 경이 어깨를 잡았을 때 움찔했다. 경이 말했다.

“아른. 어떻게 협상과 공사와 당신 가문까지 박살 냈는지는 바실리 스크에게 듣겠소. 당신은 여기서 좀 나가야겠소. 지금부터 여기선 대외 비로 해야 할 일이 좀 있소. 문균법 위반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당신은 안 듣는 것이 좋거든. 나가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조치해 주시오.”

아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없이 밖으로 향했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로에 나서게 되자 아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른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옷을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주먹으로 땅바닥을 후려치던 아른은 결국 지쳐서 땅에 엎드렸다. 차 갑고 거친 땅바닥에 뺨을 댄 채 아른은 쉼 없이 눈물을 흘렸다. 시야가 흐릿했고 뱃속이 너무도 차가웠다.

‘몇 분이야’ 아른은 그 사실이 미치도록 약올랐다. 

‘몇 분만 기다렸 으면 더스번 경이 알아서 공사를 중지시켜 줬을 거야’

경은 샹파이 난쟁이들이 협상을 파탄 내기 위해 살인까지 감수하 려 했다는 증거를 쥐고 있다. 난쟁이들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것 이다.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아른은 그렇게 했다. 그 때문에 그는 공동 출자자가 아니라 단독 출자자가 되었다. 공사비와 샹파이 난쟁이들이 사들인 토지에 대 한 대금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자살은 많은 경우 소극적 저항 이고 아른의 것도 그러했다. 아른은 그것이 복수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보짓이 되었을 뿐이다.

‘배교였기 때문인가? 그래서인가? 이것이 배교자의 운명인가?’ 아른은 몸을 천천히 돌려 등을 땅에 대고 누웠다. 왕창 취하거나 무 슨 사고를 당하지 않고서는 거의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 거기 있었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보는 도시. 하늘이 대단히 낮게 보였다. 답답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아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양쪽 귀로 마구 눈물을 흘려보냈다. 

“주인님.”

아른은 눈을 떴다. 실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옆에 주저앉아 상체를 그의 위로 기울이고 있다. 실은 소매로 조심스럽게 아른의 눈 주위를 닦았다.

“다른 분들이 말해 주셨어요. 주인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른 분 들의 빚을 혼자 다 짊어지고 파산하신 거라고요. 그걸 듣고 바로 찾아 왔어요. 죄송해요.”

“네가 사과할 건 없어.”

“제가 괜한 소리를 했어요.”

“내가 선택한 절망이고 내가 선택한 바보짓이야.”

“그건 맞아요.”

“신랄하군.”

아른은 문득 걱정스러워졌다.

“다음 주인에겐 제발 그렇게 하지 마. 노비를 때리는 주인도 있어.”

“비싼 말엔 함부로 채찍을 대지 않는 법이에요.”

“그래. 너 비싸다고 했지. 다행이군.”

“하지만 전주인을 낙마시킨 말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니까.”

실은 아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러니, 제 스스로 제 평판과 몸값을 지켜야겠군요.”

아른은 미간을 찌푸렸다. 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실은 똑바로 일어나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엔 더 이상 웃음기가 없었다. 

“전 바보였어요. 주인님이 저에 대한 책임은 잠시 잊고 협상에 집중 하길 바랐어요. 왜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무시했을까요. 제가 협상 에 집중하면 되는데, 그래요. 사란디테 양의 말이 맞아요. 전 가노 노릇 에 매달리고 있었던 거죠.”

실은 걷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앉은 아른은 실의 뒷모습 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아른은 실이 다른 곳이 아닌 공회당으 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리게 깨달았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 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라는 더스번 경의 말을 떠올린 아른은 가까 스로 실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실. 거기서.”

실은 서지 않았다. 그녀는 공회당의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 렸다. 아른은 현기증을 느끼며 그 뒤를 따랐다.

공회당 안에 들어선 실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제스처였을 뿐 긴장한 실의 눈 엔 거의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 때문에 실은 가면을 벗은 바실리스 크나 사란디테의 변신한 모습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여러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나요?”

더스번 경이 곡괭이 끝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 이 친구들이 공사 중인 조피크 터널에 대해서………… 하지만 이건 비공개인데.”

“그런가요. 물러가죠. 그런데 터널? 그건 터널이 아니에요.”

“물론 지상에 있는 터널이니 꽤 웃기는 물건이긴 하지.”

“그런 의미로 드린 말이 아니에요. 그건 진짜로 터널이 아니라 다른 것이에요. 유개 도로죠.”

“뭐? 유개………… 도로?”

“예. 악천후에도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천장을 씌운 세계 최초 의 유개 도로죠. 흥미롭고 꽤 도전적인 시설이긴 하지만 투자 비용 대 효용을 생각해 보면 채산성이 없는 시설 같아요.”

실은 난쟁이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도, 더스번 경의 눈에 황홀감이 떠오르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암흑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심정으로 말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말씀드려야겠네요. 유개 도로 건설은 조피크 터 널 회사 설립 계약서에 없어요. 조피크 터널 회사는 이름 그대로 터널 을 뚫는 것이 그 목표니까요. 따라서 레간데 상회는 회사 업무와 상관 없는 유개 도로 건설을 위해 난쟁이 여러분들이 발행한 어음에 대해 지불 책임이 없어요. 그건 샹파이 난쟁이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사업이 니까요. 그럼 계속 말씀 나누세요.”

실은 깜깜한 어둠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가에 서 있는 그녀의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주먹은 피투성이고 얼굴은 눈물에 젖은 흙덩이로 덮여 있었다. 누가 봐도 초라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실에겐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모습처럼 보였다. 두렵고 두려워 실은 뒷걸음질조차 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실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소?”

“왜 그렇게 묻죠?”

“당장 졸도할 것처럼 보였거든.”

고개를 돌린 실은 더스번 경의 얼굴을 보았다. 경이 그녀의 귀에 얼 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정말 고마웠소. 이번엔 어떻게 막았지만 다음번엔 다른 난쟁이들 이 완전히 합법적인 방법으로 똑같은 짓을 할 수도 있었거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골치가 아팠소. 유개 도로? 기가 막히군. 생각 해 보면 별 것 아닌데 위대한 발상이란 그렇지. 앞으로 난쟁이들이 비 슷한 짓을 하려 하면 그건 터널이 아니라 유개 도로라고 말해 주면 되 는 것이군. 그러면 가장 긴 터널을 갖고 싶어 하는 난쟁이들이 그런 것을…….”

실은 경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멍한 정신 속에서 조금씩 커지고 있는 감정을 주시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실은 그 감정이 두려움임을 인식하고는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생각해 보았다. 너무 나도 명백한 대답이 떠올랐다.

더스번 칼파랑이 내 팔을 잡고 내 귀에 속삭이고 있어.

실은 무서운 기세로 더스번 경의 얼굴을 할퀴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주인님! 살려 줘요!”

달려간 실은 아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아른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사과의 눈빛 비슷한 것을 경에게 보내곤 허둥지둥 문 을 닫았다. 멍한 눈으로 문이 닫히는 것을 보던 더스번 경은 뒤늦게 분 노를 떠올렸다. 하지만 어쩐지 분노보다 더 큰 무엇이 느껴졌다. 더스번 경은 그것이 얼굴의 아픔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자기기만 이었다.

사란디테가 가까이 다가와 경의 얼굴을 살폈다.

“흉터는 안 남겠네. 그나저나 어떡해요. 우리 둘 다 같은 여자한테 당했네요.”

“……썅.”

“울지 말아요.”

“누가 울어?”

“울면 핥을 거예요. 한다면 해요. 저 싸구려 위안도 잘 주는 성격인 것 알죠?”

사란디테는 입을 벌리고 늑대의 긴 혀를 내밀어 보였다.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 때문에 더스번 경은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정말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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