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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소릴의 드래곤


에소릴의 드래곤

마침내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염려해 왔던 일이 일어났다. 드래곤 란데셀리암이 나리메 공주를 납치한 것이다.

비극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긴 어려 웠다. 란데셀리암의 통상적인 행동 범위 내에 있는 공주라곤 나리메 공주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리메 공주도 그 상황을 도저히 예상치 못한 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란데셀리암의 성 에소릴에 도착했을 때 나리메 공주는 맹렬히 항의할 수 있을 정도로 침착을 되찾았다. 

“제발 날 놓아줘, 이 바보 드래곤아, 더스번 경이 올 거란 말이야!” 

드래곤이었기에 란데셀리암은 먹을거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심각 한 파격이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 크기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새장과 다 른 점을 찾기 어려운 모습의 사람장에 갇혀 있는 공주를 보며 란데셀 리암은 미심쩍은 어조로 대답했다.

“여가 듣기에 너는 그 사실이 탐탁지 않은 것 같군. 왜지? 자기를 구하러 올 자가 있다는 건 너희들에겐 기쁜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더스번 칼파랑이 정말로 나를 구하려고 오는 거라면 나도 기쁠 거 야. 하지만 만일 더스번 경이 온다면 그건 드래곤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했다는 명성을 얻고 싶어서라고.”

“글쎄. 너는 그 두 개의 사건이 변별적인 것처럼 말했지만 네가 얻을 수 있는 수익의 형태만 놓고 보면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아, 너는 군거생물이기에 상대방의 목적 또한 고려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여는 여전히 네가 얻을 수 있는 수익이라는 관점에서 사태를 판단하라고 권하고 싶은데. 너라는 개체의 유지에 관련된 문제 잖아.”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어. 어쨌든 더스번 경이 너를 물리치고 나면 난 그 남자랑 결혼해야 하잖아. 사람 머리를 선물로 보내는 그런 사람 이랑 어떻게!”

더스번 칼파랑은 무적의 무사다. 물론 갑옷을 잘 갖춰 입고 잘 손질 된 무기도 들어야 하며 전날 폭음을 하지도 않아야 하지만, 그런저런 사소한 조건들이 모두 갖춰졌을 경우 그는 틀림없이 무적이다.

더스번 경은 벽을 등지고 있을 경우 세 명의 적수와 동시에 싸울 수 있다. 그런데 벽이 없을 경우엔 여덟 명과 동시에 싸울 수 있다. 더스번 경이 전장에 홀로 서 있을 때 경은 낙오된 것이 아니다. 경이 나머지 아 군 전부를 낙오시킨 것이다. 더스번 경을 악마라고 부르는 것은 4년 전 부터 비유가 아니게 되었다. 더스번 경이 팔비노교의 성녀를 팔비노교의 성소에서 욕보인 후 팔비노 교도들은 경을 열세 번째 지옥에서 온 악마의 화신으로 규정했다(이후 팔비노 교도들은 천국에 이르는 길 중 더스 번 칼파랑의 암살을 추가하게 되었다. 다른 방법들보다 훨씬 어렵지만 확실하긴 하다는 주석과 함께.).

란데셀리암은 더스번 칼파랑에 관한 그 모든 평판을 들어 알고 있었 지만, 선물로 수급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기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더스번 경이 반역자 기어립의 머리를 나리메 공주에게 선물했다는 것을 알고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다. 나리메 공주는 펑펑 울면서 말했다.

“너한테 잡아먹히거나 그 짐승 같은 사람의 아내가 되거나잖아. 어 느 쪽을 더 싫어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여는 어째서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우주 가 개인에게 거의 허락하지 않는 놀라운 행운이 있어 칼파랑이 여를 굴복시킨다 하더라도 왜 그가 너와 결혼한단 말이지? 너는 칼파랑의 목적이 네가 아니라 너의 구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명성이라 주장했 다. 어쨌든 여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무슨 말이야? 공주는 원래 드래곤을 물리치고 자기를 구해준 남자 랑 결혼하는 거야. 너도 잘 알면서 그래?”

“여가 안다고?”

“응? 원래 드래곤은 공주를 납치해야 하는 거니까 너도 나를 납치한 것 아니야? 그렇잖으면 아바마마의 성까지 굳이 힘들게 날아올 이 유가 없잖아.”

“글쎄 여가 너를 선택한 것은 연역적 추론의 결과인데.”

“무슨 말이야?”

“여는 네가 가장 좋은 음식을 규칙적으로 공급받으며 충분한 운동 과 정서적 안정을 누리면서도 아직 출산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 질이 우수하고 식감 또한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가정했다. 여의 생각으 로는 다른 드래곤들도 아마……………”

란데셀리암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먹을거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도 거부감이 없는 그였지만 기절한 먹을거리한테 말을 하는 건 아무래 도 좀 이상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뿔들이 잔뜩 돋아 있는 머리를 긁적거리던 란데셀리암은 사람장의 잠금장치를 점검하고는 장 거리 비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리메 공주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어리 둥절해졌다. 쇠창살로 둘러싸인 원통형 상자 바닥에서 깨어나는 일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주변의 쇠창살을 의아한 눈으로 보던 공주는 갑 작스럽게 자신의 상황과 란데셀리암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 시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안녕하세요. 진짜 공주님이에요?”

명백한 사람 목소리에 나리메 공주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원통형 사람장 안엔 그녀밖에 없었다. 쇠창살 사이로 머리를 내밀어 본 나리메 공주는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것을 느 꼈다. 사람장은 보통 새장과 같은 위치, 즉 천장에 매달려 있어서 바닥 과 15미터는 되는 높이에 있었다.

급히 고개를 들어 올린 공주의 눈에 다른 사람장이 보였다.

두 번째 사람장은 공주의 그것에서 6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역시 바 닥에서 15미터는 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공주는 그 안에 있는 것이 젊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후 공주는 그 판단을 철회해야 하나 의심했다. 남자에겐 여자에게 없는 것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머리에 사슴뿔이 나는 건 너무하지 않아?

“넌 누구야? 사람이야?”

“전 후식입니다.”

나리메 공주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비일상적인 말이니 일상의 방패 뒤에 숨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에 뿔이 난 남자는 공주가 이미 깨달은 사실을 확정해 버렸다.

“그러니까 란데셀리암은 공주님을 먹은 후에 입가심으로 저를 먹기호……”


결국 나리메 공주는 두 번째로 기절했다.

나리메 공주가 두 번째로 깨어난 후 머리에 뿔이 난 남자는 결례를 사과한 다음 자신의 용도 대신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는 조빈이 라는 이름의 나무꾼이며 보름달이 뜨면 사슴으로 변신하는 사슴 인간이었다.

“어머? 진짜? 늑대인간처럼?”

조빈은 약간 마음 상한 얼굴이 되었다.

“뭐, 요즘은 늑대인간이 유명해졌죠. 사람들은 사슴 인간들이 늑대인간한테 그렇게 죽어 나갈 땐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사슴 인간이 줄 어서 늑대인간이 사람을 습격하게 되자 기겁했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해요. 우리야 변신해도 달빛 받으며 숲을 달리고 풀을 뜯는 것 이 전부였으니 사람하고 부딪힐 일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숫자만 놓고 보면 우리가 훨씬 많았어요. 늑대보단 사슴 이 더 많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음, 그럼, 너희들은 왜 줄었는데?”

“숲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죠. 사슴 인간에겐 커다란 숲이 필요해 요. 전 면허를 가진 나무꾼이라서 출입이 금지된 미네골 숲에도 마음 대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살만했어요.”

“그러면 지금 변신한 거야? 오늘이 보름이야?”

“아니오. 보름달 아래에서 변신하면 이보다 훨씬 많이 변해요. 란데 셀리암은 제가 사슴 인간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커다란 보석 같은 것을 보여주었어요. 혹시 아세요? 이름에 달이 들어가는 보석이오.”

“월장석 말하는 거야?”

“예. 월장석. 아마 그건 것 같아요. 어쨌든 그걸 보고 나니 요만큼 변 신하더군요. 이 뿔은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도로 들어갈 거예요.”

놀라운 이야기에 나리메 공주는 감탄했다. 그때 조빈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정말 공주님이세요?”

나리메 공주는 15미터 높이의 철제 우리에 갇혀 있는 사람이 보일수 있는 최대한의 위엄을 끌어모아 말했다.

“그래. 나는 이 나라의 공주다.”

조빈은 공주의 위엄에 반응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러면 온갖 좋은 음식을 많이 드셨겠네요?”

얼이 빠졌던 나리메 공주는 문득 란데셀리암의 말을 떠올리곤 왈 칵 화가 치밀었다. 공주는 고함을 지르려 했다. 그 때문에 란데셀리암 이 자기를 잡아 온 거라고 말하고 싶으냐고. 미안하지만 그 이야긴 해 당 분야의 전문가한테서 이미 들었다고. 하지만 조빈의 의도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란데셀리암이 늑대인간들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늑대 인간들은 사람한테서는 사슴 인간 고기의 단맛이 안 난다고 아쉬워해 요. 망할 녀석들. 어쨌든 그 헛소리 때문에 란데셀리암은 저를 후식으 로 먹겠다고 결정한 것 같아요. 전 늑대인간들이 괜히 아쉬워서 하는 소리지 사실 사슴 인간은 맛이 없다고 란데셀리암을 설득해 봤어요. 하지만 란데셀리암은 제가 사슴 인간 고기를 먹어봤을 리가 없다면서 제 말을 믿지 않더군요. 하지만 공주님은 사슴 고기를 드셔보셨겠지 요?”

“아니, 저…… 요리사가 주니까 먹는 거지. 난 특별히 더 좋아하지도 않고……”

“됐군요!”

“응?”

“이렇게 하자고요. 가만히 보니 란데셀리암은 그냥 우리가 맛있어 서 먹으려는 것 같아요. 그렇죠? 무슨 원한이 있다거나 자기 힘을 과시한다거나 하는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맛이 없으 면 란데셀리암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겠죠? 전 란데셀리암한테 공주님 이 맛이 없을 거라고 말할게요. 무슨 이유든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 매 일 분을 많이 발라서 그렇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대신 공주님 은 사슴 인간이 맛이 없다고 말해 주세요. 사슴 고기를 많이 드셨다고 했으니까 적당한 이유를 만드실 수 있겠지요? 스스로 자기가 맛없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다른 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란데셀리암한테도 더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겠어요?”

나리메 공주는 굉장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소박하다는 평가 가 적절한 계획이었지만 공포 때문에 무엇이든 의지할 것이 필요한 사 람에겐 괜찮게 들렸다. 그래서 조빈은 좀 으스스한 기분을 느껴야 했 다. 나리메 공주가 조빈을 바라보며 사슴 고기의 맛을 떠올리려 애썼기 때문에.


귀족들은 더스번 경이 평민파라는 사실에 애석해하고 있었고 평민 들은 경 같은 골수 귀족주의자도 없다고 말했다. 양 계층의 그런 모순 적인 견해에 어느 정도 더스번 경의 책임도 있다. 더스번 경은 누군가 를 두드려 팰 때 상대방의 신분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상대방 과의 거리를 훨씬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상대방이 맞을 만한가부터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으면 그런 지적을 한 자와의 거리 를 주의 깊게 가늠하곤 했다.

숲길을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어깨를 느닷없이 붙잡았다는 이유로 낯선 남자를 한 방에 졸도시킬 때 더스번 경이 고려한 것도 그것뿐이었다. 더스번 경은 도대체 뭐 하는 놈인가 알아보기 위해 졸도 한 상대방의 품속을 뒤지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의 주먹에 맞고 쓰러진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더스번 경은 당황했다. 세상에 내 주먹이 맞으면 성별이 바뀔 정도로 센 건가?

경이 깊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남장 여자는 정신을 차렸다. 경이 헤쳐 놓은 옷섶을 부여잡은 여자는 공포를 가득 담아 외쳤다. 

“제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거 알려주려고 나 붙잡았소? 하긴, 누구에게든 말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더군.”

“예? 예? 아, 아뇨. 그러니까 저를 건드리지 말라고……”

더스번 경은 싸늘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그 표정을 ‘과대망상도 이 정도면 병이군. 남잔지 여잔지도 모르게 생겼으면서’라 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여자는 자신이 변 장을 한 것뿐이라고 해명할까 하다가 그냥 상황을 진전시키기로 했다. “기사님을 건드린 건 남자처럼 행동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남자들은 그러는 것 아니에요? 어깨를 치고 좋아하면서 막 욕을 하고 그러죠?” 더스번 경은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나한테 그러면 죽지.”

“….더스번 경이 맞군요. 나리메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에소릴로 가는 길이고요?”

“그런데?”

“저는 미네골 숲에서 온 사란디테라고 해요. 기사님과 함께 가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공주요? 아하. 그래서 남장을.”

사란디테는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고 싶어졌다. 차선책이, 아니, 그 비슷한 것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란디테는 분노를 꾹 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에소릴엔 공주님 말고도 조빈이라는 남자가 있어요. 제가 구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이에요. 저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고심하다 가 란데셀리암이 공주님을 잡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틀림없이 기사님이 공주님을 구하러 갈 거라고 믿고 여기서 기다리던 참이었어 요.”

“남장을 하고서?”

“그건, 그러니까, 세상엔 이상한 사람들이, 마, 많잖아요.”

“그러다 사팔뜨기 되겠네. 난 이쪽에 있소. 어쨌든, 그쪽한테 내가 필요한 이유는 대충 알겠는데 나한텐 그쪽이 필요없소.”

“아, 물론 전 뻔뻔한 사람이 아니에요. 기사님께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어요.”

“어떻게? 가는 동안 내 갑옷을 빨아줄 건가? 아니면 내가 란데셀리 암과 싸울 때 옆에서 징징거리는 소리를 내서 란데셀리암을 혼란스럽 게 만들 건가?”

잔뜩 골이 난 사란디테는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하게 되면 최대한 신비하고 근사하고 극적인 방법으로 말할 작정이던 사실을 그냥 꺼내고 말았다.

“전 늑대인간이에요! 한 달에 한 번은 아주 힘센 남자보다 더 세진다고요!”

더스번 경은 아무 말 없이 등에 메고 있던 곡괭이를 뽑아 휙 들어 올렸다. 드래곤의 비늘 사이를 쑤시고 들어가는 힘에선 칼보다 낫다는 판단 하에 들고 온 살벌한 물건이었다. 사란디테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살려줘요!”

“웃기네 사람 잡아먹는 괴물을 내가 왜?”

“조빈 씨 때문에 안 그래요! 사슴인 줄 알고 잡아먹으려다가 얼마나 놀랐는데!”

“사슴?”

“조빈 씨는 사슴 인간이에요. 보름달이 뜨면 사슴으로 변한다고요.” 

더스번 경은 사슴 인간 연인을 구하러 가겠다는 늑대인간을 내려다 보다가 그만 골치가 아파졌다. 무시하고 떠나고 싶었지만, 경은 늑대인 간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란데셀리암과 싸울 시간으로 경은 드래곤이 마음대로 날아다니기 힘든 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런데 늑대인간은 특정한 밤에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종족이다.

고민하던 더스번 경은 곡괭이를 내려놓고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한테 무슨 얼빠진 개수작을 하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소. 설명 해 보시오.”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건…

“사계절 중 하나겠지. 우라질, 요점만!”

더스번 경은 불룩 튀어나온 배를 위협적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사란디테는 응수하듯 턱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그건 보름달이 정말 예쁘게 빛나는 여름밤이었어요.”

더스번 경은 신음했다.


나리메 공주는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그러니까 그 늑대인간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조빈은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어요. 어쩌면 사란디테는 정말로 저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제 생각대로 식욕과 애정을 헷갈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뭐, 그럴 만한 상황이긴 했어요. 우리는 밤새 쫓고 쫓겼죠. 둘 다 잔뜩 지친 데다 속도에 취해서 해가 뜨는 것도 몰랐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는 숲 가운데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죠. 헐떡거리며, 알몸인 채로.”

나리메 공주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반은 짐승인 데다 간소한 예절만 익혀온 조빈은 자신이 나리메 공주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을 눈 치채지 못했다.

“지금도 그 아침을 생생하게 기억해요. 사란디테도 그럴 테죠. 깊은 인상을 받았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만 저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최소한 그렇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너, 너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럼 문제가 없잖아.”

“문제가 있죠. 자기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갑자기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는 걸 듣게 되는 건 정말 소름 끼치는 일 아니에요?”

나리메 공주는 진짜로 소름이 돋았다.

“그런 일이 있었어?”

“아니오. 계속 피해 다녔으니 안은 적도 없는걸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 무섭다는 말이에요.”

“너무하잖아. 자기 좋다는 여자한테 그런 끔찍한 누명을 씌우다니.” 

“사란디테가 정말로 저를 사랑하는 경우라도 문제는 여전해요. 저 때문에 사란디테는 평생 자기와 싸워야 할지도 몰라요. 자기 좋다는 여 자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것도 너무한 것 같은데요.”

나리메 공주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조빈은 무거운 공기를 휘휘 휘 젓는 시늉을 하며 웃어 보였다.

“뭐, 그냥 직관적으로 봐도 늑대와 사슴이 사랑할 순 없어요. 여기서 제대로 도망칠 수 있다면 그건 사란디테에게 주는 제 이별 선물 같은 것이 될 거예요. 제가 여기에 없으면 사란디테도 여기에 올 필요가 없게 되니까.”

“그 여자가 너를 구하러 올 거라고?”

“어쨌든 사란디테는 암늑대니까요.”

공주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너나 나나 자기 구해주겠다는 사람 때문에 골치 아프구나.”

“그리고 우리를 좋게 평가한 드래곤 때문에 골치 아프죠.”

조빈의 말에 공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몇 번이나 기절했지만, 아 직도 눈물을 쏟아낼 만큼 서럽기도 했다. 하지만 공주는 눈물을 꾹 참 았다. 드래곤은 짐승이지, 고양이나 말이나 다를 것 없어. 하지만 저기 있는 건, 반은 사슴이지만 반은 사람이잖아. 공주가 되어서 어떻게 우 는 모습을 보여.

“괜찮을 거예요. 공주님. 우리는 반드시 란데셀리암이 입맛 떨어지 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란데셀리암을 사람만 보면 구역질을 일 으키는 드래곤으로 만들어서 왕국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시인 들은 우리의 위업을 어떻게 노래할지 고민스럽겠지만요. ‘벗들이여. 그 대들도 알 것이다. 실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밥맛 떨어지는 저 남녀 를 좀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진실성은 중요하죠… 괜찮으세요, 공주님?”

정신없이 웃던 나리메 공주는 결국 눈물을 줄줄 흘렸다.


더스번 경은 혀를 찼다.

“참 철없는 소리 하고 계시네 인생이 박자 놓치면 처음부터 다시 부 를 수 있는 노래도 아니고, 코피 쏟도록 머리 굴려서 살아도 잘 살았 다 소리 듣는 것이 쉽지 않은데 왜 그런 미련한 짓을. 그 남자한테든 당 신한테든 못 할 짓이오. 돌아가서 울음소리 구성진 남자 늑대인간이나 찾아보쇼.”

“좋아요. 충고 하나 빚지셨어요. 기사님.”

“제기랄.”

사란디테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생긴 것이나 행동하는 것만 봐선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말하는 것을 보면 더스번 경은 제법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빚은 갚겠소. 언제든 내가 들을 마음 없는 빤한 충고 하고 뿌듯해 해도 좋소. 동행에 대해선.”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무슨 어린애 같은 소릴. 열심히 귀찮게 해야지. 나도 그럴 테고. 서 로 있는 둥 없는 둥 할 거면 뭐 하러 같이 다녀?”

더스번 경은 곡괭이를 둘러메고는 몸을 홱 돌려 걸어갔다. 사란디테 는 경의 말이 동행 승낙이 맞는지 아닌지 약간 헷갈려하며 그 뒤를 조 심스럽게 따랐다. 경은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대단한 속도로 움직였다. 사란디테는 그 뚱뚱한 기사가 그런 속력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얼마 후 사란디테는 그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더스번 칼파랑 은 거의 뛰는 것에 가까운 속력으로 걸었다. 사란디테는 숨이 턱에 닿 아 말했다.

“이봐요. 기사님. 제가 지쳐서 스스로 물러나게 그러는 거예요? 발상이 빈곤하잖아요.”

“헛소리”

“지금 하시는 행동은 정확히 그렇잖아요. 왜 그렇게 서두르세요?” 

“빌어먹을. 나도 빨리 가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말을 놔두고 왔소. 은밀하게 움직이려고 말이오. 하지만 댁이 짝사랑하는 그 반편이가 보름달 뜨면 변하는 사슴 인간이라면서?”

“말씀이 좀 심하시………”

“그 반편이 목숨이 앞으로 이틀이오.”

“뭐라고요?”

“란데셀리암이 기껏 사슴 인간 잡아놓고 변신도 안 한 상태로 먹는 괴벽을 부리진 않을 거 아니오. 분명히 보름달이 뜨는 날에 잡아먹겠 지. 그런데 앞으로 이틀 후엔 보름달이 뜨거든?”

사란디테는 기사면서 말도 타고 다니지 않는 더스번 경의 괴팍함을 강도 높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더스번 경은 그녀가 오래 그러지는 못할 거라는 판단 하에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경의 오판이었다. 사란디테는 분명히 지쳤지만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더스번 경은 그녀가 두려움 을 이겨내기 위해 계속 말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 다. 물론 이해했다고 해서 항상 양해하는 것은 아니다.

“나한테 귀꺼풀 생길 참이니 좀 조용해 주지 않겠소?”

더스번 경의 어조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기에 사란디테는 그 권고 를 수용했다. 하지만 더스번 경은 그런 사태의 진전에 후회했다. 사란디 테는 입을 다문 대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더스번 경이 못 견딜 지 경이 되었을 때 사란디테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좀 알려주세요. 기사님은 어떻게 참으세요?”

“뭘?”

“나리메 공주님이 몹시 걱정되시잖아요. 그걸 어떻게 참으시죠?”

“쳇. 무슨 연대감 느껴보자는 수작 같은데, 난 내 친구 딸 구하러 가 는 거요. 왕 말이오. 게다가 우리나라의 공주가 드래곤에게 잡혀갔는데 내가 가만있으면 꼴이 웃기잖소. 그런 형편이니 짜증을 다스리는 법이라면 몰라도 걱정이나 두려움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선 해줄 말이 없소.”

사란디테는 혼란을 느꼈다.

“나리메 공주님을 사랑해서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요?”

“나는 진짜 사랑스러운 아가씨들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잘 안다오.” 어리둥절해 하던 사란디테는 잠시 후 더 큰 혼란을 느꼈다.

“그런 여자들이오? 그러면 란데셀리암을 죽인 다음에 공주님은 어떻게 할 건데요?”

“그거야 나리메 공주가 알아서 할 일이지.”

“기사님은요?”

“나야 에소릴에서 반짝거리는 거나 챙겨서 아까 말했던 진짜 사랑스 러운 아가씨들에게 선물하러 갈 테고.”

약간 정신이 멍해진 상태에서 사란디테는 ‘그렇게 드래곤을 물리치 고 공주를 구한 기사는 색주가에 가서 진탕 놀았습니다’로 끝나는 이 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더스번 칼파랑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놀 랍게도 굉장히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란데셀리암은 의혹에 찬 눈으로 나리메 공주를 쳐다보았다. 나리메 공주는 그 시선에 분노하는 것이 올바른 반응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 러웠다. 그 시선은 나리메 공주의 맛없음에 대한 조빈의 기나긴 설득 후에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란데셀리암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공주가 그렇게 맛이 없을까?”

“그럼요. 궁전 생활은 화분이나 다름없지요. 화분에선 예쁜 꽃을 피울 순 있지만 맛있는 과일은 언제나 산에서 비바람 맞은 나무에 열리지요.”

조빈의 확고한 태도에 란데셀리암은 약간 방어적인 몸짓을 해 보였다.

“여는 그 가설에서 엄밀성이나 학문성을 발견할 순 없지만, 수긍 가 는 면모를 발견할 수는 있다.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검증 대상의 일부분을 채취하여 실험을 하는 일이 필요하겠군.”

공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내, 내 팔이나 다리를 조금 떼서 맛을 보겠다는 거야?”

“아니. 여는 손가락이나 발가락, 귀 정도를 고려하고 있는데.”

조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러면 안 되죠. 란데셀리암. 실수하는 거예요. 음, 그러니까, 그래 요. 맛이 없으면 어쩔 거죠? 예. 공주님을 돌려보내고 몸값을 받는 것 이 가장 현명한 해결 방법이죠. 그런데 공주님을 온전한 형태로 돌려보 내야 가장 높은 몸값을 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당신이라 해도 일부분 이 파손된 물품에 제값 다 치르고 싶진 않을 것 아니에요. 사실 반값 도 치르기 싫겠죠.”

란데셀리암은 드래곤의 표정에 익숙하지 않은 이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갈등을 보였다. 고심하던 란데셀리암은 기다란 목을 구부려 나리메 공주의 사람장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거대한 코를 벌름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엉겁결에 자신에게서 정말 지독한 악취가 났으면 좋겠다고 기원하던 나리메 공주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의 기소침하고 말았다. 그리고 란데셀리암이 고개를 들곤 “냄새는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말했을 땐 기쁨도 조금 느꼈다.

조빈이 가차 없이 말했다.

“향수라는 것에 대해서 들어본 적 없으세요?”

란데셀리암은 할 말이 없었다. 그가 고심에 빠져 있는 동안 조빈은 공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기 차례임을 깨달은 나리메 공주는 급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듣자듣자 하니 참 어이없네. 누가 누굴 보고 맛이 있느니 없 느니 하는 거야. 넌 사슴 인간이잖아. 그건 네가 고기도 먹고 피도 먹는 사슴이라는 말이지. 끔찍하기도 해라. 게다가 어쩌면 그건 사슴 고기나 사슴 피일지도 모르지. 미네골 숲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악용해서 밀렵을 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말이야. 보나 마나 네 맛은 최 악일걸?”

란데셀리암은 거의 슬픔에 가까운 당혹감으로 나리메 공주를 쳐다 보았다.

“사슴 인간의 맛에 대한 늑대인간들의 사례 보고에 따르면……” 

“나는 늑대는 잘 모르지만 개는 좀 알아. 왕의 사냥개 관리인이 말 해 줬거든. 개는 토한 것 다시 주워 먹고 음식 쓰레기 같은 걸 몸에 바 르길 좋아하지. 썩은내를 좋아해서 그런다더라. 그런데 개랑 늑대는 사 촌 같은 거라던데. 그렇다면 늑대인간이 좋다고 하는 맛이 무슨 맛일지 상상되지 않아?”

이것은 사실이지만 도박이기도 했다. 드래곤의 식습관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로는 조빈과 나리메 공주 모두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드래곤 은 부패한 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주와 조빈은 드래곤의 식 성이 살아 있는 것만 먹는 뱀의 그것과 비슷할 가능성이 있다고 낙관 적으로 가정했다. 란데셀리암이 공주와 조빈을 아직 살려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 가정을 뒷받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리메 공주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란데셀리암의 반응을 살폈다. 그 리고 란데셀리암이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곤 환호를 외 칠 뻔했다.

“여는 너희들을 섭취하기에 앞서 좀 더 다각적인 검토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란데셀리암은 축 늘어뜨린 날개와 꼬리를 질질 끌며 떠났다. 란데셀 리암의 쿵쿵거리는 발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조빈은 커다랗 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예상이 맞았군요. 아무거나 잘 먹는 성격이라면 굳이 수고해 가 며 공주님을 잡아 올 이유가 없죠. 그렇게 신경을 써서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는 건, 바꿔 말하면 맛없는 음식은 싫어한다는 말이죠.”

“그렇구나. 네 말이 맞아. 조빈. 그런 것이 미식가라는 거지.”

“그래서 저렇게 기운이 빠진 거예요. 이대로 조금만 더 설득하면 우 릴 포기할 거예요.”

생활의 가능성에 나리메 공주는 기뻐 춤이라도 출 것 같았다. 게다가 그것이 더스번 칼파랑의 조력 없이 이루어낸 위업이었기에 기쁨은 더욱 컸다.

“넌 내 은인이야, 조빈! 돌아가면 너에게 영지를 내리고 귀족으로 만 들어줄게. 그러면 그 늑대인간도 간단히 쫓아버릴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만 아직 완전히 풀려난 건 아니니 기뻐하는 건 좀 미루도록 하지요.”

조빈은 달래는 손짓을 하며 미소 지었다.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 만 그건 몇 시간 후 통렬한 지적이 되고 말았다. 나리메 공주는 아직 풀려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사람장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더스번 경?”


사란디테는 자신이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취하지 않았나 의심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구조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 사방에 책이 빽빽이 꽂힌 서가가 즐비했고 가운데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도서실인가? 그런데 웬 도서실?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이 있기는 했다. 돌을 던져 해골 경비병의 머리 를 박살 내던 더스번 경이라든지, 진저리치는 그녀를 강제로 하수구에 쑤셔 넣던 더스번 경이라든지, 오물보다 괴물이 더 많았던 에소릴의 중 앙 배수로에서 가장 끔찍한 괴물처럼 보였던 더스번 경이라든지………… 싸움이라기보다 처형 같은 방식으로 괴물들을 제압한 더스번 경은 거 대한 괴이한 괴수의 배를 찢더니 구역질 나는 장기를 꺼냈다. 그러곤 이로 그것을 물어뜯더니 사란디테에게 그 체액을 뿌렸다.

이 녀석의 냄새가 나면 시시한 것들은 가까이 오지 않을 거요.

사란디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건 틀림없이 오줌보일 텐데,

그게 맞느냐고 질문할 수가 없어서.

이게 다 뭐죠?

사람 사는 집에도 시궁쥐나 바퀴, 벼룩 같은 것들이 있잖소. 에소릴 에서 이 녀석들의 위치가 바로 그것이지.

아뇨. 제 말은, 이 상황이 다 뭐죠? 전 이런 건 생각 못 했어요. 드래 곤과 싸우러 온 기사라면 정문에 서서 나팔을 빰빰 불어 드래곤을 불 러낸 다음 도전하는 것 아니에요? 이건 꼭 무슨, 뭐랄까, 이게 기사도 예요?

아니. 구출 작전이오.

‘구출’ 사란디테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 구출이야. 난 조빈 씨를 구 하러 더스번 경과 함께 에소릴에 잠입한 거야. 그러면 여기는 에소릴의 도서실인가. 그런데 저 남자는 왜 짜증을 내고 있지?’

“하수구로 들어온 건 조용히 들어오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식당이 나 음식 창고 등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기 때문이오. 하지만 도서실은 집 안에서 가장 건조한 곳에 있게 마련이니 아까 말한 그런 곳과는 좀 동떨어진 곳에 있을 거요. 그런데 우리가 찾는 사람들은 바 로 그런 곳에 있겠지.”

식당이나 음식 창고라는 말에 사란디테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녀는 엉겁결에 두 손으로 경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사란디테의 손을 떼어내 려던 더스번 경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대단히 큰 보석과 펼쳐진 책을 발견했다. 펼쳐진 페이지를 훑어보던 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월장석으로……………확인………… 조빈한테 그렇게 한 건가. 잘됐군. 이제 당신 차례요.”

“예?”

“늑대의 감각이 등장할 차례라는 말이오. 당신, 조빈의 체취나 숨소리를 알 테지?”

“감각이요? 체취나 숨소리?”

사란디테도 자신의 상태가 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스번 경은 사란디테를 가금류와 어패류 등에 비유한 다음 약이 오른 그녀에게 하얀 보석을 들이댔다.

익숙한 느낌에 사란디테는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얀 보석을 보는 그녀의 피는 맹렬하게 들끓었다. 팔다리가 경련하고 입과 코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귀는 머리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 다. 자신이 변신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란디테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 로 눈을 가렸다.

“싫어요! 조빈 씨한테 보이면 안 돼요!”

더스번 경은 보석을 치웠다. 사란디테는 얼굴을 가린 채 목메어 말했다.

“미안해요. 기사님. 돕겠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진심이라 고요. 하지만 늑대로 변하는 건 정말 피하고 싶었어요. 조빈 씨에겐 사 람이 되고 싶어요.”

“제길. 이건 달이 아니라 월장석이잖소. 완전히 변하진 않아.”

“완전히 변하진 않는다고요?”

“그렇소. 후각이나 청각 정도만 좋아지면 되는데, 그 정도는 괜찮을거요. 지금도 또렷하게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걸, 뭐.”

“제가 정말 사람처럼 말하고 있어요? 진짜 사람처럼?”

“당연하잖소. 자기를 부끄러워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니까.”

제법 긴 설득과 저항의 과정 후 사란디테는 두 손을 치웠다. 그리고 앞으로 튀어나온 입과 거뭇해진 코, 풍성하고 뻣뻣해진 구레나룻 등에 더스번 경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폈다. 더스번 경이 말했다.

“별로 변하지도 않았는데. 그래가지고서 그 녀석 냄새 찾을 수 있겠 소?”

사란디테는 시험 삼아 가슴을 부풀려보았다. 엄청난 악취에 당장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더스번 경이 자신에게 저지른 일들을 떠올린 사란디테는 악담이 맹렬히 목으로 쇄도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 사란디 테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변하는 것을 본 경 은 고개를 끄덕였다.

“란데셀리암한테도 그 녀석의 냄새가 묻어 있을 테니까 자칫 잘못 하면 드래곤한테 갈 수도 있어.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시오.”

“그렇군요. 알겠어요!”

사란디테는 집중했다. 조금 후 그녀는 혀를 길게 내밀고 할딱거렸다.

“찾은 것 같아요! 제 생각엔 거의…..”

“그럼 안내하시오.”

“하지만 기사님이 말한 것처럼 란데셀리암이라면..”

“안내하시오.”

사란디테는 튕기듯 달려나갔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는 산등 성이와 계곡을 뛰어다니며 사냥감을 쫓는 늑대처럼 움직였다. 더스번 경 또한 투실투실한 몸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부족함 없는 속력으로 사란디테의 보조를 맞추었다. 늑대였지만 또한 인간이기도 했기에 늑 대의 집단 달리기를 별로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란디테에게 그것은 취 하고 싶은 경험이었다. 란데셀리암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사란디테는 우우 하고 울부짖고 싶은 기분마 저 느꼈다.

고맙게도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란데셀리암이 아니라 공중에 매달 린 두 개의 거대한 우리였다. 그 안에서 나리메 공주임이 분명한 소녀 가 당황하여 말했다.

“더스번 경?”


더스번 경은 피식 웃었다.

“좋아요. 여전히 제가 보입니까? 전 무슨 모습을 하고 있죠?”

“그만둬요. 그 엄청난 냄새만으로도 진짜 더스번 경이란 걸 알 수 있 으니까 여전하군요.”

사란디테는 냄새라는 말에 더스번 경을 변호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경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했다.

“맞아요. 진짜 더스번 칼파랑 대령했나이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아, 여기 있는 아가씨는 사란디테 양이올시다.”

나리메 공주는 입 튀어나온 남자는 보이지만 여자는 안 보인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 남자는 남장한 여자였고 그 입은 늑 대의 그것이었다. 사란디테는 황급하게 자신부터 변호했다.

“조빈 씨. 제가 왔어요. 정말 걱정이 되어 죽는 줄 알았어요. 이건 월 장석으로 변한 거예요. 당신 냄새를 찾기 위해서…”

더스번 경이 끼어들었다.

“저 하품하다 탈장하게 생겨먹은 녀석이 한 달에 한 번 좋은 스테이크 재료가 된다는 녀석인가?”

사란디테는 질렸다는 얼굴로 더스번 경을 쳐다보았지만, 더스번 경 은 항의할 틈을 주지 않았다.

“밧줄 같은 것이 있어야겠는데, 밧줄을 던져 저기에 묶고..”

“돌아가요.”

더스번 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리메 공주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에 결의를 담아 반복했다.

“돌아가요. 더스번 경.”

“난 납치라고 들었는데, 가출이셨습니까?”

“난 경의 트로피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더스번 경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경은 아랫입술을 약간 내민 채 나리메 공주를 훑어보았다.

“흥. 살아 있는 트로피와 드래곤 똥 가운데 하나라. 누구나 후자를 선택할 법하군.”

모욕감에 얼굴을 붉힌 나리메 공주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앞날에 대한 귀중한 조언에 감사하겠어요. 더스번 경. 하지만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경이 내키는 대로 깔본 저 남자 덕분에 우리는 란 데셀리암을 꽤 많이 설득했으니까.”

나리메 공주는 그동안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더스번 경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든 이야기를 경청했다. 공주는 자신감 있게 말 했다.

“따라서 나는 란데셀리암의 배웅을 받으며 여길 떠날 거예요. 조빈과 함께. 그러니 당신은 물러가세요.”

사란디테가 쏘듯이 말했다.

“조빈 씨는 저와 함께 떠날 거예요. 공주님.”

나리메 공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란디테는 공주의 얼굴에 떠오 른 동정심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당히 화가 났다.

“란데셀리암이 조빈 씨나 공주님을 잡아먹지 않는다 해도 헛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공주님껜 몸값을 지불할 임금님이 계시 죠. 하지만 조빈 씨에겐 그런 사람이 없어요. 란데셀리암이 다른 늑대 인간이나 마법사 같은 자에게 조빈 씨를 넘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죠?”

“일리 있는 걱정이군. 하지만 아바마마께서는 내 몸값뿐만 아니라 내 은인의 것도 지불할 테니까 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공주의 대답 덕분에 몸값을 내놓으라고 징징거린 꼴이 된 사란디테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사란디테는 결국 폭발했다.

“바보 같은 소리예요! 드래곤한테 잡아먹지 말라고 설득하다니. 태양에게 불타지 말라고 설득하거나 겨울에게 꽃을 피우라고 설득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잖아요. 란데셀리암은 공주님을 놀리고 있는 거라 고요! 조빈 씨는 저와 함께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해요!”

더스번 경과 사란디테가 나타난 이후 처음으로 조빈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사란디테 양 뭔가를 건너뛴 것 같지 않나요?”

더스번 경은 사란디테의 흥분이 빠르게 사그라지는 것을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사란디테는 겁먹은 얼굴로 조빈을 보다가 두 손을 마주 쥐 었다. 다른 세 사람은 그녀가 용기를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란디테가 말했다.

“조빈 씨. 저와 함께 나가겠어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란디테 양 들어서 아시겠지만, 공주님과 저는 서로를 구해야 하니까요.”

“당신은 정말 자상해요. 조빈 씨.” 

사란디테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조빈 씨를 위해 정말 소름 끼치는 것들을 감수한 사람의 바람엔 귀를 기울여주진 않는군요. 당신은 이곳의 주인이 데려왔고, 따라서 처해진 운명 자체를 제외하면 위험은 없었겠죠. 그건 거기 앉아서 저를 내려다 보시는 공주님도 마찬가지일 테죠. 하지만 저는 여기에 어떻게 왔을 것 같아요? 기사님이 아니었으면 전 몇 번이나 죽었을 거예요. 공치사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선택한 것이니까. 하지만 거기에 앉아서 당신 이 시키는 대로 떠든 것 외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공주님을 위해 여기에 남겠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나리메 공주는 울컥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가 왜 너와 함께 가야 해? 프라이팬에서 솥으로 옮기는 것일 뿐인데!”

나리메 공주의 인용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사란디테는 조금 후 에야 그 말을 이해하곤 창백해졌다.

“조빈 씨.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이후로 제가 한 번이라도 당신을 공 격한 적이 있어요? 오히려 당신을 노리던 다른 늑대인간과 싸우지 않 았던가요?”

조빈은 이를 악물었다. 방황하는 그의 시선을 보던 더스번 경이 퉁명스레 말했다.

“흐음. 그럼 정말 좋은 구경거릴 봤겠군.”

사란디테는 절망했다.

“제가 무서웠어요? 조빈 씨? 언젠가 반드시 당신을 잡아먹을 괴물로 보였어요? 드래곤은 당신을 안 잡아먹을 수도 있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전 반드시 당신을 잡아먹는다는 거예요? 그게 말이 돼요?”

“미안합니다. 사란디테 양”

“조빈 씨?”

“돌아가 주십시오.”

사란디테는 더스번 경의 가슴에 이마를 묻은 채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리메 공주는 약간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애정이나 호감 같은 것이 아니라 스스럼없음이었다. 더스번 경의 태도도 흐느끼 는 여자를 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죽고 싶소?”

사란디테는 더 크게 훌쩍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더스번 경은 확 집어던지고 싶다는 표정으로 사란디테를 쳐다보더니 그 어깨를 잡 아 자기 가슴에서 떼어놓았다. 사란디테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경을 쳐다보다가 맥없이 말했다.

“저 방금 실연당했어요.”

“그래서? 어쩌라고?”

“위로해 줘야잖아요.”

“내가 빚진 건 빤한 충고뿐인데. 위로는 빚진 것 없소.”

“그럼 제가 빚지죠. 다음에 갚을게요. 위로 좀 해주세요.”

사란디테는 그대로 혀를 내밀며 경에게 다가왔다. 경의 입 주위를 핥을 태세였다. 하지만 더스번 경은 재빨리 손바닥을 펼쳐 사란디테의 혀를 막았다. 쇠장갑을 핥고 만 사란디테는 질겁하여 고개를 뒤로 홱 당겼다.

“서로 귀찮게 해야 된다면서요! 그래놓고 이 정도도 못 해줘요?”

“귀찮게 하기로 했으니까 말린 거잖소.”

“뭐라고요?”

칭얼거리는 사란디테를 내려다보며 경은 투덜거렸다.

“나쁜 방법은 아니고, 사실 즐거운 방법이긴 한데, 그래도 싸구려요.”

“싸구려?”

“그래요. 싸구려. 위로를 싼값에 구하면 슬픔도 싸지지. 그러다 보면 삶에 남는 게 없소.”

사란디테는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정보다 더 값진 것이 없는데 왜 싸구려냐고 항의했다. 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든 상관없었잖소. 그렇게 되면 싸구려지.”

“……미안해요.”

더스번 경은 치우라는 듯이 손을 흔들고는 진기한 광경을 보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아바마마께 전할 말씀이 있습니까?”

“뭐라고요? 어, 물론 내가 직접 할 거예요!”

“그렇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몰립에게 전할 말씀은 없습니까?”

“예?”

“몰립 기어의 아들 말입니다. 그 잔망스러운 어린놈이 말입니다. 내가 떠나기 직전에 시뻘건 얼굴을 하고 찾아와서는 협박 비슷하게 지 껄이더군요. 당신은 내가 죽일 거다. 하지만 은인이신 공주님을 구할 사 람은 당신뿐이니 일단 목숨은 붙여둔다. 가서 공주님을 구해라. 눈뜨고 못 봐주겠더군요. 뭐 얼마 후엔 술에 취하는 법을 알게 되겠지만 아직 은 자기 자신밖에 취할 것이 없는 나이라 대강 봐줬습니다. 그 맹랑한 놈한테 한마디 말씀이라도 전해 주지 않겠습니까?”

나리메 공주는 기어립의 아들이 왜 자신을 은인으로 여기는지 알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주는 자신이 기어의 머리에 질겁하여 그것을 가족에게 빨리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던 것을 떠올렸 다. 

‘아하, 그래서………….’

갑자기 공주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염려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줘요.”

더스번 경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사란디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서로 붙잡고 끌고 밀고 잡아당기며 왔던 터라 사란디 테는 눈으론 조빈을 바라보면서도 반사적으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경 에게 끌려가는 그녀의 모습마저도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리메 공주는 승리감, 통쾌감을 느껴야 된다고 생각했다. 더스번 경에 맞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으므로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주는 허탈감 비슷한 감정밖에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비관적이게도 그것은 후회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공주는 곧 두통에 시달릴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조빈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기어림은 그, 재작년인가 목이 잘렸던 반역자죠? 더스번 경이 다른 토벌군을 다 낙오시킨 다음 혼자서 반란군을 휩쓸고 그 목을 떨어뜨렸 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공주님이 어떻게 반란자의 아들에 게 은인이 되는 거죠?”

“경이 트로피를 양보했어.”

“예?”

“경이 자기 트로피를 내게 양보했어. 그래서 난…… 내가 얻지도 않 은 트로피를 가지고 선심을 쓸 수 있었어. 원래는 반역자니까 효시 되 어야 하지만 가족에게 줄 수 있었어. 난 잔인함뿐인 끔찍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건 잔인하고 짐승 같은 선물이 맞아. 모욕적이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반환할 것이 빤하다고 생각했다면………… 경의 선 물은 그 수급이 아니라……”

조빈은 거부감 섞인 어투로 말했다.

“수급이오? 사람 머리 말입니까? 그걸 트로피라고 부르는 건 좀 불쾌하군요.”

“그 말도 맞지만, 경은 전사야. 네 말도 맞지만……”

나리메 공주는 더 말하기 싫어졌다. 그녀는 두 무릎을 끌어안고 고 민에 빠졌다. 어떻게 말을 걸어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조빈 또한 침묵 했다. 란데셀리암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란데셀리암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어조로 말했다.

“심사숙고한 끝에 여는 흡족한 결론을 얻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흥겨움은 전염성이 있었다. 나리메 공주와 조빈 또한 환한 얼굴이 되어 란데셀리암을 보았다. 란데셀리암은 자신만만 하게 말했다.

“너희들의 처리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한 덕에 여는 시장해졌다. 허기 보다 감미로운 조미료는 없는 법. 여는 이제 충분한 즐거움과 함께 너희들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한다. 역시 깊이 사유해 보는 일은 언제나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 같지 않은가?”


사란디테는 자기 손목을 붙잡은 채 걸어가는 더스번 경의 등을 향해 말했다.

“왜 공주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하고 결혼할 생각 같은 것 없 다고. 공주님은 기사님이 바라는 포상이 아니라고.”

“말해 뭣하겠소. 거짓말이라고 할 텐데.”

“믿고 순순히 따라왔을지도 모르잖아요. 드래곤을 설득한다는 말 도 안 되는 짓을 고집하는 대신.”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설령 그런다면 그 조빈이라는 놈은 어쩌고? 공주와 조빈은 서로를 폄하해서 함께 살아남으려는 것 같던데.”

조빈이라는 이름에 사란디테는 다시 눈물을 쏟을 뻔했다. 사란디테 는 황급히 질문했다.

“그게 통할까요? 전 드래곤을 말로 설득해서 살아난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나도 들어본 적 없소. 하지만, 쳇. 무슨 일이든 최초의 경우라는 것이 있으니”

“실패하면 어쩔 거예요? 임금님한테 가서 뭐라고 말할 거죠? 기사님은 임금님께 충성해야 하잖아요.”

“그건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오.”

“귀찮게 할 의무가 있는데요.”

더스번 경은 걸음을 멈췄다. 사란디테의 손을 놓은 경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란디테의 목소리는 뾰족했고 그 얼굴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뭐가 불만이오?”

“신경 써주는 척은……………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응?”

“그건 그냥 둘러댄 말이었어. 결국 기사님도 늑대는 싫었던 거죠? 내 가 왜 남장을 했는지 모르겠어. 바보 같으니 더스번 칼파랑도 나를 건 드릴 리 없는데.”

“그건 정말 듣기 우울한 표현이군.”

더스번 경의 말투는 정말 우울했다. 더 쏘아붙일 작정이던 사란디테 가입을 다물 정도로. 경은 허리에 손을 얹더니 바닥을 보며 말했다. 

“이봐 누가 당신을 거부했다 해서 당신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 이 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사실 그건 거부도 아니었소. 그 겁 많은 새끼 는 그냥 무서워한 거요. 거부와 도망은 다르오.”

사란디테는 큰 숨소리만 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은 침을 퉤 뱉고 말했다.

“그리고 나 말인데, 쳇. 헤럼은 나한테 술 한 잔 거하게 사야 해.”

“…..헤럼?”

“딸을 팔 작정을 한 가난한 아버지와 새 성녀가 필요했던 팔비노 사제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어느 날 갑자기 성녀가 된 소녀요. 팔비노 사제들은 계시가 있었느니 별이 떨어졌느니 어쩌니 하지만, 가이너 카 쉬냅에 맹세코 그거야 흔해빠진 개수작이지. 덕분에 그 앤 평생 성전에 갇힌 채 할머니들과 살면서 죽은 작자들 이름이나 암송하게 되었소. 자 기도 그걸 좋아했다면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 앤 그렇지 않았소. 세상 도 보고, 남자도 만나고, 그러고도 여유가 되면 자길 팔아버린 아빠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지. 욕지거리 한 번 본때 있게 해주려고. 정말 숨 넘어갈 정도로 그러고 싶어 했지.”

사란디테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그냥 데리고 나오면 추적받을 테고, 설령 잘 도망친다 해도 다른 여 자가 또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될 터라 머릴 좀 썼소. 그 개자식들에게 내가 그 애를 덮쳤다고 말했지. 포악한 더스번 칼파랑이라면 그럴 만하 지. 안 그렇소? 그 자식들도 믿더군. 덕분에 그 애는 오히려 위로를 받 은 다음 성녀 자리를 반납하고 떠날 수 있었지. 게다가 내가 성소를 욕 보였기 때문에 그놈들은 다음 성녀를 찾기에 앞서 나한테 복수부터 해 야 하지. 성소를 정화해야 한다나 어쨌다나.”

사란디테는 기가 막혔다.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가정이 떠올랐기 때 문이다. 그녀는 더스번 칼파랑을 훑어보고는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혹시 좋은 남자’예요? 모든 여자들의 친구?”

더스번 경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내가?”

“세상에.”

“잠깐만 지금 뭔가를 결정짓는 분위기 같은데. 내 동의 없이.”

사란디테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세상에 더스번 칼파랑이………… 그래서 간단히 물러난 거야. 끼어드 는 재주가 없어서 체질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서…..”

“어어이.”

사란디테는 배를 부들부들 떨었다. 침통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더스번 경은 볼을 세게 긁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쇼. 어쨌든 내가 방금 해준 이야기는 절 대로 남에게 해선 안 돼. 팔비노 놈들 귀에 들어가면 헤럼은 큰일나니 까. 부탁하겠소.”

사란디테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왜 하셨죠?”

“당신이 그 병신 때문에 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게 짜증 나서. 연인을 구하러 드래곤의 성에 실제로 들어온 용감한 사람이 말이야.”

“아하 역시 좋은 남자……”

“그만”

사란디테는 그만하지 않았다. 그녀는 경의 어깨를 두드릴 듯한 얼굴로 말했다.

“기사님이나 그거 그만두세요. 언제나 이기는 건 나쁜 남자예요.”

더스번 칼파랑은 화를 내려다가 사란디테의 환한 미소에 스며 있는 고통을 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경은 짤막하게 말했다.

“빚 갚았소.”

“어머, 이런!”


나리메 공주는 온몸이 아플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목숨이 위험하다는 식의 공포가 아니었다. 나리메 공주의 몸은 죽음의 두려움 을 느끼고 있었지만, 공주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것은 좀 다른 공 포였다. 공주는 철창과 철창 너머 조빈을 쳐다보았다.

조빈이 공주를 돌아보았다. 그는 공주의 눈에서 원망과 안타까움을 읽었다. 절망 때문에 쪼그라든 조빈의 정신 속에서 책임감인 듯한 감정 이 꿈틀거렸다. 공주님을 구해야 해. 나를 믿었는데. 나 때문에 더스번 경과 함께 가지 않았는데.

배가 고프면 맛있을 거라고?

“깊이 사유하는 일도 좋지만, 란데셀리암. 뜻밖의 행운이라는 것도 있죠.”

“여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아무리 배가 고프다 해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맛있는 쪽이 좋겠 죠?”

“그게 무슨 말인가?”

나리메 공주는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조빈은 머릿속이 불타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이 성안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어요.”

나리메 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조빈!”

란데셀리암은 나리메 공주와 조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곧 드래곤은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란데셀리암은 미소 지으며 달래듯 말했다.

“그래. ‘그 친구들’은 어떻게 생겼지? 이름은 뭐라고 하고?”

란데셀리암의 농담은 정확히 더스번 경이 구사했던 것과 같은 것이 었다. 별것 아니지만 놀라운 일치에 나리메 공주는 말문이 막혔다. 반 면 긴장이 풀린 조빈은 빠르게 말했다.

“제가 겁에 질려서 환상의 친구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에요. 진짜로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

“여가 에소릴에 반입한 음식은 너희들뿐이다.”

“몰래 들어왔어요. 우리를 구출하려고.”

“그렇군. 그리고 너희들은 여전히 여의 눈앞에 있고.”

“우리가 구출을 거부한 거예요. 당신이 우리처럼 맛없는 걸 먹는 대 신 그냥 놔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괜히 문제 일으키기 싫었어요. 정말 있어요. 여기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잠깐 확인 해 보면 되잖아요. 제가 왜 곧 들통 날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건 논리적이군. 그런데 현재 그 존재 자체가 불확실한 자들이 더 괜찮은 음식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살이 잘 오른 남자와 숲을 달리며 건강하게 자란 여자니까요. 어딜봐도 우리와 정반대잖아요.”

나리메 공주가 외쳤다.

“조빈! 그만둬! 더스번 경과 사란디테는 우릴 구하러 온 거야!”

조빈은 아랫입술을 감쳐문 채 공주의 시선을 외면했다. 란데셀리암은 앞발로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을 감은 드래곤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후 란데셀리암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냄새가 나는군.”

나리메 공주는 손목에 경련이 나도록 철창은 움켜쥐었다. 눈을 감 은 란데셀리암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칼파랑이라 여가 접한 풍문들을 고려한다면 그럴 만하지. 확인해 봐야겠군.”

란데셀리암은 눈을 뜨며 동시에 몸을 돌리더니 쿵쿵 걸어갔다. 나리 메 공주가 악을 쓰는 소리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목이 멘 공주는 철 창에 매달려 거세게 기침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공주는 콜록거리 며 조빈을 쳐다보았다. 조빈은 이를 악물었다.

“어쨌든 시간은 벌었잖아요.”

“너・・・・・・ 콜록!”

“더스번 경이에요. 무적의 더스번 칼파랑이라고요. 경이 이길 확률 이 아무리 낮다 해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가능성마저도 없어지는 거잖아요.”

“코, 콜록! 너는……”

“죽을 판국이잖아요. 포기해선 안 되는 거잖아요. 가장 작은 확률이라도 붙잡아야 해요.”

갑자기 공주는 기침이 딱 멎는 것을 느꼈다. 곧 더 큰 기침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리메 공주는 쉰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너는 후식이야”

조빈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더스번 경은 하수구 뚜껑을 들어 올리던 곡괭이를 뽑아 들더니 씩 웃었다.

“허, 기특한 새끼. 주인 도리를 다 하네. 그래. 손님 떠나면 배웅해야지”

다가오는 어마어마한 발소리에 다리가 굳었던 사란디테가 정신을 차렸다. 경은 반대편 손을 품속에 집어넣어 장석을 꺼냈다.

“하지만 불청객인 데다 양상군자씩이나 되니 그런 은혜를 바랄 수야 없지.”

경은 사란디테에게 월장석을 던졌다.

“더 늑대로.”

경의 탈문법적인 말을 이해한 사란디테는 급히 월장석을 들여다보 았다. 그것은 드래곤의 소장품이 될 만큼 거대한 보석이며 어쩌면 세계 에서 가장 큰 월장석일지도 모르지만, 사란디테에게 더 이상의 가시적 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란디테는 팔다리에 어느 정도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경은 구구한 설명이나 확인은 생략했다. 

“되는 데까진 해야지. 자, 갑시다!”

란데셀리암은 이제 확실히 에소릴 내에 있는 이질적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란데셀리암은 자신의 집에 야생 동물이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은 주부와 비슷한 분노를 약간 느꼈다. 그리고 그 분노에 집중했다. 침입은 란데셀리암이 에소릴을 통치한 후 처음 경험하는 사건이었으므 로 상당한 감정적 고양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곧 란데셀리암은 주부에 서 사냥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드래곤은 원래 최고의 사냥꾼이다.

열린 하수구 뚜껑을 발견했을 때 란데셀리암이 당장 에소릴의 하수 설비를 폐쇄하지 않은 것은 그 사냥꾼다운 감각 때문이었다. 란데셀리 암은 침입자들이 하수구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곳으로 나가지는 않았 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남아 있는 냄새를 확인할 필요도 없 었다. 란데셀리암의 성 에소릴이 그에게 침입자들은 현재 정문을 향해 성 내부를 달리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란데셀리암은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존재를 발각당하지 않 은 상태에선 하수구를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이미 발각당했다면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이 낫다. 하지만 그것은 에소릴의 경비와 가 사 등을 책임지고 있는, 혹은 드래곤적인 다른 이유에서 그곳에 있는 란데셀리암의 수하들에게 정면으로 달려드는 짓이기도 했다. 란데셀리 암은 고함을 질러 에소릴을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었다.

“여의 비복들에게 명령한다! 침입자들을 내버려 둬라! 옆으로 비켜 라! 여는 깨끗한 고기를 원한다!”

일리 있는 염려였다. 란데셀리암의 수하들 중 상당수는 목표물을 도 저히 입도 댈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릴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동시에 수하들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이기도 했다. 란데셀리암 이들은 풍문에 따르면 더스번 칼파랑에게도 대부분의 목표물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릴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상대를 도와주는 짓이었다. 란데셀리 암은 지름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란데셀리암은 질풍처럼 달렸다. 드래곤의 발톱에 할퀴어진 돌들이 불꽃을 내뿜으며 아우성쳤다. 삽시간에 3층 누대에 도달한 란데셀리암 은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란데셀리암이 내려선 곳은 바로 에소릴 의 정문 앞이었다. 란데셀리암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급히 걸음을 멈추는 뚱뚱한 남자와 호리호리한 남자가 있 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 의아했지만, 란데셀리암은 일 단 붙잡고 나서 확인하기로 하고는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나 곧 란데셀 리암은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끼며 앞발을 끌어당겼다. 그 발바닥은 길 게 찢어져 있었다. 뚱뚱한 남자가 놀라운 속도로 곡괭이를 들어 올려 그 발바닥을 찢어버린 것이다.

약간 늦게 찾아온 통증에 신음하는 란데셀리암을 향해 더스번 경이 말했다.

“어이쿠. 워낙 힘 좋게 오니 잘 갖다 대기만 해도 찢어지네.”

앞발을 핥던 란데셀리암이 언짢아하며 말했다.

“가시가 있는 음식이었군.”

더스번 경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봐. 너희 집에 몰래 들어온 걸 사과해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너도 납치 같은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보다시피 우린 이제 떠날 참이니 개개지 말고 비켜 알려주는데, 여기 있는 여자는 조금 전에 짝사랑하던 남자한테 꺼지라는 말 들었다고. 건드리면 큰일 나.”

란데셀리암은 여자가 어디 있냐고 물으려 했다. 그때 호리호리한 남 자가 여자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이 기사님은 죽도록 여자 뒤치다꺼리하고는 다른 남자들이 재미 보는 것 구경해야 하는 남자라고. 그러니 강할 수밖에 없잖아. 건 드리면 안 될걸.”

더스번 경이 으르렁거렸다. 

“실연녀” 

사란디테가 대꾸했다. 

“좋은 남자”

란데셀리암이 말했다. “전채와 간식.”

더스번 경과 사란디테는 황당함과 분노 속에서 란데셀리암을 노려 보았다. 하지만 란데셀리암은 진실을 알려줬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듯 이 마주 볼 뿐이었다. 더스번 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말했다.

“너, 날지?”

“그런데?”

“그래서 그 대가리가 새대가리군.”

란데셀리암은 그 논리에 하자가 많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가리 조심해라. 보자마자 음식이 어쩌니 하더니 이젠 전채에 간 식? 앞에 있는 것이 뭔지는 똑바로 알아야지. 하긴 제대로 알았다면 그 렇게 막지도 않았겠지만.”

란데셀리암은 파르스름한 콧김을 내뿜었다. 허리를 숙이고 팔을 축 늘어뜨려 곡괭이를 낮게 든 더스번 경이 말했다.

“경고한다. 우리 앞에서 비켜라. 안 그러면 강제로 비키게 하겠다.”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 때문에 기고만장한 모양이군. 하지만 너희들 도 들어서 알 것이다. 그것은 여의 명령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수 구로 도망치는 대신 여의 성을 가로지른 건 합리적인 듯하나 사실 우 매한 시도였다.”

“내 생각은 다른데, 하수구에선 하늘을 볼 수 없잖아.”

“하늘?”

“그래, 이 자식아. 하늘 말이다.”

란데셀리암은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살폈다. 서쪽 하늘은 태양의 여 운이 약간 번져 있는 보랏빛이었다. 그리고 동쪽에서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땅 가까이에 있어 놀랍도록 거대하게 보이는 보름달이었다. 조빈을 먹기로 낙점한 날이었기에 란데셀리암은 오늘 보름달이 뜬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란데셀리암은 보름달을 보며 충격을 받 았다. 순간 길고 비장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우…… 우우우!

란데셀리암의 콧김이 더욱 푸르스름하게 바뀌었다. 아니,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파르스름한 빛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입 주위에선 연기가 흘러나왔다. 더스번 경의 뒤편에 있던 사란디테가 어느새 두 발 로 선 늑대로 변해 있었다. 더스번 경은 쇠장갑에서 불꽃이 튈 정도로 곡괭이를 세게 움켜쥐고는 말했다.

“나는 레돔과 스미리의 아들 더스번 칼파랑이다. 카쉬의 백작이며 지극히 존귀하신 게 왕의 기수다. 그리고 여기 있는 숙녀는 미네골 숲에서 온 사란디테 양이다. 귀하는?”

“무의미한 소리를 하는군. 여는 이미 네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다. 너 또한 그럴 텐데?”

더스번 경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과 함께 사란디테가 다시 울 부짖었다. 오우우우우! 더스번 경은 문득 그것이 나팔 소리 같다고 생 각하곤 속으로 미소 지었다. 경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나는 레돔과 스미리의 아들 더스번 칼파랑이다! 카쉬냅의 백작이 며 지극히 존귀하신 게 왕의 기수다. 그리고 여기 있는 숙녀는 미네 골 숲에서 온 사란디테 양이다! 귀하는?”

란데셀리암의 표정이 의혹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드래곤의 얼굴을 마주 보던 경은 그냥 씩 웃고는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때 란데셀리암이 말했다.

“나는 히바카네어와 베그체레스의 아들 란데셀리암이다. 내 어머니 의 아들로서 물려받은 에소릴의 주인이자 또한 그 수호자다.”

더스번 경은 돌진하기 위해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렸다. 꼿꼿이 선 그는 곡괭이 머리를 왼손으로 탕 때렸다.

“더스번 칼파랑과 사란디테는 에소릴의 주인이자 수호자인 란데셀 리암에게 도전한다! 우리는 너를 굴복시키고 이 성을 떠날 것이다. 도전을 받아들이는가?”

란데셀리암의 거대한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힘 그 자체를 변화시켜 만들어낸 듯한 날개를 꿈틀거리며 란데셀리암이 말했다.

“나 란데셀리암은 카쉬냅의 백작이자 게잘 왕의 기수 더스번 칼파 랑과 미네골에서 온 사란디테의 도전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나를 이기지 않고선 에소릴을 떠날 수 없다!”


나리메 공주는 비유할 말도 찾기 어려운 굉음에 넋을 잃었다. 튼튼 한 에소릴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고 폭 풍 같고 해일 같은 소리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에소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다신 쳐다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나리메 공 주는 어쩔 수 없이 위안을 찾아 조빈 쪽을 보았다.

역시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곳에는 사슴 인간이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조금 전 동쪽 창문에 보름달이 나타났을 때 조빈 의 머리엔 가지 많은 뿔이 돋고 그 발은 커다란 발굽으로 바뀌었다. 조 빈은 펄쩍펄쩍 뛰며 그 발굽으로 사람장의 바닥을 때리고 뿔을 철창에 걸어 비틀어대었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금속 타악기들을 바닥에 쏟아 붓는 듯한 소음을 일으켰다. 하지만 에소릴 저편에서 엄청난 대결을 뚜 렷이 나타내는 소리들이 들려오자 조빈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귀를 부여잡은 조빈은 “미이익, 뮈이이이익!”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세상 자체를 부정하려 애쓰는 조빈에겐 나리메 공주 나 공주의 목소리 같은 건 전해지지도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조빈을 보던 공주는 곧 그를 외면했다.

얼마 후 굉음이 멈췄다.

나리메 공주는 소름이 끼쳤다. 공주는 이명이 울리는 귀를 후빈 다 음 소리가 정말 사라졌는지 확인했다. 애석하게도 에소릴은 확실히 고 요를 되찾았다. 무엇인가가 결정되었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정말로 끔찍 했다. 나리메 공주는 이제 그 고요에 매달렸다. 그것이 계속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고요는 얼마 후 란데셀리암으로 바뀌었다.

공주는 어깨로 숨을 쉬며 다가오는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원래 무서 운 모습이었지만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지금은 그 모습만으로 살 인적이었다. 쿵쿵 걸어오는 란데셀리암을 보던 조빈은 까무룩 기절했 다. 란데셀리암은 변신한 조빈을 잠시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곧 나리메 공주를 돌아보았다.

나리메 공주의 입이 발작적으로 열렸다.

“나는 음식이 아니야.”

란데셀리암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 다. 공주는 뒤로 물러나 철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철봉을 쥐고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나는 음식이 아니야! 게잘 왕의 딸이자 이 나라의 공주인 나리메 릴카담 스쉬라킴이다! 네가 뭐라고 부르든 네가 먹게 될 건 그거야!” 

란데셀리암은 나리메 공주의 사람장을 걸쇠에서 떼어냈다.

드래곤은 사람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연 란데셀리암은 뒤로 물러났다. 나리메 공주는 철창을 움켜쥔 채움 직이지 않았다. 란데셀리암은 다시 두 걸음 물러난 후 말했다.

“가라”

나리메 공주는 어안이 벙벙하여 란데셀리암을 올려다보았다.

“가라. 여의 비복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알려두었다. 여의 성에서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져가라.”

“가져…… 가?”

“드래곤의 성에 왔다가 살아서 나가는 자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그것이 드래곤의 규칙이다. 피곤해서 배웅은 할 수 없군.”

공주는 혼란을 걷어내려 애쓰며 말했다.

“왜 나를 놔주는 거지?”

“칼파랑이 선택한 것이 너다.”

“더스번 경?”

“칼파랑과 사란디테는 여를 굴복시킴으로써 살아서 이 성을 떠날 수 있게 되었고, 또 한 가지 선물을 가져갈 권리도 얻었다. 칼파랑이 여 의 성에서 고른 것이 너다.”

경이 이겼다고? 경과 사란디테가?

나리메 공주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환희를 느꼈다. 그리고 그 기쁨 덕분에 공주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또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무적의 무사 더스번 경과 늑 대인간사란디테가 란데셀리암을 쓰러트린 것이다!

“네게 들은 바 있어 여는 칼파랑에게 가져가서 아내로 삼기 위해 너 를 선택한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칼파랑은 네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그냥 놓아주면 된다더군. 그래서 그가 직접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스려야 할 고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가 너를 풀어주러 온 것이다. 빨리 가져가고 싶은 것을 챙겨 떠나라”

정신없이 기뻐하던 공주는 란데셀리암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 다. 넘치는 기쁨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것을 누구와 나눠야겠 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공주는 아래로 내려온 것이 자신뿐이라는 사실 을 깨달았다. 공주는 조빈의 사람을 보고 다시 란데셀리암을 보았다. 하지만 란데셀리암은 빨리 가지 않고 뭐 하냐는 눈으로 쳐다볼 뿐 움 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나리메 공주는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더스번 경은 나를 선택했어. 그렇다면……………

“사란디테는 뭘 가져가기로 했지?”

“그 늑대인간은 여의 소장품 중에서도 특히 귀한 월장석을 선택했다.”

나리메 공주는 폭소를 터뜨렸다.

정말 대단한 웃음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공주는 평생 그렇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 공주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발을 구르고, 끝내 헛구역질까지 했다. 참다못한 란데셀리암이 발톱으 로 바닥을 한참 두드린 후에야 공주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하지만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나는 조빈을 가지겠어.”

란데셀리암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드래곤의 앞발은 위로 올라가 조빈의 사람장을 붙잡았다. 란데셀리암은 사람장을 내려놓고 친절하게 기절한 조빈을 밖으로 끌어내기까지 했다. 그동안에도 키들키들 웃던 나리메 공주는 결국 참을 수 없었던 질문을 꺼냈다.

“그 사람들, 내가 이럴 거라고 했지?”

란데셀리암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빈을 똑바로 눕힌 후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제스처를 위엄 있게 해 보이며 말했다.

“이 사슴 인간이 깨어나거든 드래곤의 규칙을 알려주고 이 성에서 아무것이나…… 어디가!”

두 손을 뒤로 깍지 끼고 투스텝으로 사뿐사뿐 걸어가던 나리메 공 주가 피벗 하여 뒤로 돌았다.

“가라면서? 난 그 사람 담아갈 만한 주머니도 없어. 그러니, 다스려 야 할 고통이 많겠지만, 그 사람 깰 때까진 좀 기다려야겠네. 그럼 잘 있어라. 난 간다?”

나리메 공주는 화려하게 스핀 턴을 한 후 다시 흥겨움에 넘치는 모 습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고뇌에 찬 란데셀리암을 뒤로 한 채.


드래곤의 성. 높은 창문에서 보름달의 파란 광선이 미끄러져 떨어지 는 거대한 복도 위로 작은 소녀가 춤을 추며 걷는다. 원래 화려했을 옷 은 때를 좀 탔고 언제나 단정하게 올려져 있거나 땋여 있었던 그 머리 카락도 어지럽게 풀어져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의상 겸 장신구로 삼고 있는 것은 차갑고 우아한 달빛이다. 달빛은 간혹 그녀의 짝이 되 기도 한다. 그때 소녀는 두 팔을 들어 달빛의 어깨와 손을 쥐고 빙글빙 글 돈다・・・・・・

달빛을 두르고 달빛과 춤추던 나리메 공주는 거대한 정문에 도착했 다. 맹렬한 싸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돌 파편들이 여기저기 떨 어져 있고 벽엔 할퀸 자국과 긁힌 자국, 그리고 핏자국이 선연했다. 공 주는 그 광경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춤추며 에소릴을 빠져나 갔다.

저 아래쪽을 본 공주는 입을 조금 벌렸다. 거대한 형체 둘이 산비탈 을 내려가고 있었다. 곡괭이를 어깨에 걸친 더스번 경과 그를 부축한 채 걸어가는 늑대인간의 모습이었다. 더스번 경은 욕지거리와 외설적인 단어가 상당히 뒤섞인 듯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거리가 멀고 목소 리가 잔뜩 쉰 터라 공주는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지만 바로 곁 에 있는 사란디테는 그 노랠 잘 들을 수 있었다. 사란디테는 냉정히 감 상평을 말했다. 오우우우우! 컹, 컹, 아우우우! 그 악랄한 불협화음을 듣는다면 예술가가 아니라도 수모를 당한 예술을 위해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나리메 공주 또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건 예술에 닥친 위기와 는 관계없는 눈물이었다. 눈물을 훔쳐낸 나리메 공주는 두 사람을 향 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곤 산 아래를 향해 달렸다.

월광이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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