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네뷸러 (Over the Nebula) – 1화 : 자살기도자
자살기도자
구스룬 프리모는 74세였고, 아침에 장화를 신다가 그 속에 들어온 뱀을 밟고 죽었다.
션 그웬은 19세였고, 착한 젊은이였지만 자기 장화 속에 뱀을 집어넣고 싶어 했다.
션 그웬의 넓지도 좁지도 않은 교우 관계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션 의 욕망을 알고 있었다. 모두들 이 얌전한 도제의 정신 나간 소망에 우 려를 표했지만, 그의 면전에 대고 그 욕망을 거론할 정도로 무례한 사 람은 없었다.
“션, 여자에게 버림받았다고 해서 자살하겠다는 건 바보 같잖아?”
그러니까, 나만 빼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션은 그냥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좋은 선택이다. 고함을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것보다는
그게 덜 창피한 일이니까. 하지만 덕분에 나는 스스로 대답을 만들어 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에이라 그 애도 참 잔인하군. 그 애는 자기가 건실한 청년 하나를 이런 상태로 만들어놨다는 걸 알기나 할지 모르겠어.”
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할수록 품위가 떨어 진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해 본 적은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말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지독하게 얼간이 짓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기운 내야지, 션, 희소식이 있어. 신뢰할 만한 소식통에 의하 면 세상 사람의 반은 아무래도 여자인 것 같아.”
션은 나를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고 난 그 시선에 무언의 동의를 보내었다. 맙소사. 내가 얼빠진 조언을 삶의 지혜랍시고 떠벌릴 만큼 늙 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물론 안 죽을 만큼만 취하게 만든 다 음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에 종사하는 여인들에게 맡겨버리는 편 이 훨씬 간단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내가 보안관 조수가 아니 고 이곳이 지난 몇 년간 내가 살아온 소도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멍청한 조언을 주워섬기는 대신 반드시 그런 방법을 시도했을 테고 절 대로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장검의 휴대를 허락받은 보안관 조수다. 어쨌든 이파 리 보안관이 나를 해고할 때까지는 그 사실에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리고 이 목가적인 소도시는 여섯 살짜리 딸의 앞니를 뽑는 일에 대해 수십 개의 정성 어린 조언과 전폭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이것은 실제로 목격한 일에 대한 진술이다. 미레일 요란하스가 앞니를 뽑게 되었을
때 기술적 조언을 해주기 위해 요란하스 가를 방문한 사람은 모두 열일곱 명이었 다. 그중엔 자신이 제국의 치의학 발달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믿게 된 안셀 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뽑아낸 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놓고 벌어진 무시 무시한 논쟁은 자칫 이 소도시를 공황 상태로 몰고 갈 뻔했다.). 이런 도시에서 보안관 조수가 실연의 상처에 몸부림치는 청년에게 ‘야, 집어치우고 남 자와 여자의 구조적 차이나 알아보러 가자!’고 외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지, 션.”
신이여, 제발 저를 가호하소서. 자칫하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 고난이 닥쳐와도…………, 어쩌고 하는 소리까지 늘어놓게 될 것 같나이다. 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난 자신을 약간 추슬 렀다.
“스승의 죽음과 떠나간 애인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 거라는 것은 이 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해선 안 돼. 인 생은 그렇게 복잡한 게 아냐. 먹고 자는 일 이외엔, 사실 인생에서 제거 했다간 큰일 나는 것은 별로 없어. 삶은 썼다 지웠다 할 수 있는 점토판 같은 것이지, 어딘가가 부러지면 못 쓰게 되는 조각 같은 것이 아냐”
“제 점토판에 뭘 어떻게 쓰라는 거죠?”
“그걸 나에게 묻나? 네가 좋아하는 일이 있잖아.”
“제가 좋아하는 일? 그게 뭔데요?”
“활 만드는 일”
션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어? 활 만드는 일을 안 좋아하나? 하지만 잔파드로스 신관님은 그 렇게 말씀하시지 않던데.”
“신관님께는 좋아하는 척한 것뿐이에요.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 서.”
“흐음. 신관님은 네가 그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렇게 기뻐하셨 는데, 사실은 안 좋아했냐?”
“그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했을 뿐이에요. 프리모 영감은 신관님의 부탁 때문에 할 수 없이 저를 도제로 받아들였고, 저 는 신관님 얼굴 때문에 프리모 영감을 스승으로 모신 거지요. 하지만 이 도시에서 활 만드는 기술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지요? 사냥꾼들 이나 가끔 활을 주문하지만 그 치들도 몇 년에 한 번씩밖에 주문 안 해요. 우리 도시에 궁도를 하는 우아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티르는 보 안관 조수니까 무기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요.”
나는 물론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국법은 장검을 길이 12센티미터 이상 되는 검으로 정해 놓고는 엄 격한 규제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 도시 전체를 뒤져봐도 장검을 휴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파리 보안관과 나뿐일 정도다. 하지만 위험하 기로는 더한 장거리 투사 무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제가 없다. 오랜 세 월 동안 익혀야 하는 활의 특성 때문이다. 누구라도 한 시간이면 장검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그리고 그 한 시간은 죽일 작자를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하지만 활로 사람을 죽이려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3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또한 궁도는 상류층의 교양이다. 그런저런 사정 때문에 제국은 활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제를 가하지 않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나는 무의식중에 장검이 아닌 다른 무기들을 소비재 비슷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궁장(弓匠) 구스룬 프리모의 여유 있는 생전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 점을 질문해 보았다.
“그렇게 안 좋은 거야? 하지만 프리모 영감은 생전에 곤궁해 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그거야 원래 일 안 해도 먹고 살 정도로 부자였으니까 그런 거지요. 그 재산도 죽기 전에 이미 다 썼지만, 프리모 영감은 팔기 위해서가 아 니라 무슨 취미 생활처럼 활을 만들었어요. 그게 무슨 심오한 정신 수 양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션은 술잔을 내려다보며 신음처럼 말했다.
“그 기술은 아무 쓸모가 없어요.”
“그렇지 않아, 션. 네 말대로 이 도시에서야 그 기술이 유용하지 않 을지도 모르지. 아니, 쓸모가 없다고 봐야겠군. 하지만 다른 곳에서 는 아닐 거야. 활이라는 건 대단히 중요한 무기야. 좋은 궁장은 유력 한 귀족가에 고용될 수도 있고 제국 군대에 초빙될 수도 있어. 그러니……”
나는 입을 다물었다. 존재하지 않는 사전의 가상적인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둔하다: 티르 스트라이크 같다는 말의 동의어’ 고맙게도 션은 나를 비웃지는 않았다.
“만약 기술을 익혔더라면 그런 행운이 생겼을지도 모르지요. 하지 만 프리모 영감은 제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그렇게 덜컥 죽었 어요. 저에겐 큰 공방으로 갈 만한 능력도 보내줄 후견인도 없어요. 기 술이라도 좀 익혔으면 그것 믿고 찾아가 보기라도 하겠지만, 프리모 영 감이 지난 2년 동안 해준 말은 마음을 갈고 닦으라는 말뿐이에요, 티 르. 전 활 만드는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그래서 이제 남은 게 뭐지요? 천애 고아에, 스승 잃은 도제에, 버림받은 남자가 있군요.” 불쾌한 상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상상은 사실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나는 션을 조심스럽게 훔쳐보며 말했다.
“그럼 에이라는….?
션은 히죽 웃었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즐겁지 않은 미소였다. “그래요. 앞날이 없다고 판단된 남자를 걷어찬 거지요.”
잔인한 처녀 같으니라고. 아니, 어쩌면 그 부모의 강권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잔파드로스 신관의 고아원에서 17년을 고아로 보내고, 신관 의 주선으로 가까스로 궁장의 도제로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못 배운 상태에서 느닷없이 스승을 잃은 남자. 그것이 션 그웬이다. 딸 가진 부 모가 흡족해할 만한 신상명세는 아니다.
갑자기 션이 몸을 일으켰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티르. 하지만 이만 가봐야겠군요. 안셀과 약속이 있어서.”
붙잡고 싶은 것을 겨우 억눌렀다. 내 상담이라는 것은 그를 더 피곤하게 만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션 이 주점을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션이 밖으로 나가자 조금 떨어진 탁자에 있던 오크가 몸을 일으켰 다. 오크는 조용히 다가와 션이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패했음을 보고합니다, 보안관님.”
이파리 보안관은 송곳니를 톡톡 두드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쯧쯧 차라리 내가 이야기를 나눠볼 걸 그랬군. 그런데 보기엔 괜찮 아 보이던데?”
“예, 조용하고 품위 있고 우아한 대화였지요. 그게 더 무섭잖습니까?”
“하긴 울고 발광해 대는 것이 차라리 낫지. 자기를 동정할 정도의 정 신은 남아 있다는 증거니까. 야, 그러니까 좀 달래보라고 한 거 아니야.”
“보안관님, 저도 걱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일의 효용성을 무시하지 는 않습니다만, 수십 마디의 조언보다는 도움 되는 손길 하나가 낫지 않습니까?”
이파리 보안관은 멍한 눈길로 나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미레일의 앞니 사건 때문에 받은 충격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 했나 보군그래. 겁 잔뜩 집어먹은 여자애에게 그렇게 우르르 몰려가서 법석을 떠는 것보다는 손 빠른 친구 하나가 가서 쑥 뽑아주고 오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했던가?”
“좋은 기억력이십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비죽 웃으며 뭐라고 짖어대기 시작했다.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는 말이다.
“오크 말입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군요.”
“아아, 오크 경전이다. 제국어로 고치면 ‘세상에 필요 없는 건 영웅, 현자, 성자,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건 멍청이, 얼간이, 바보’ 정도의 의미 겠군.”
나는 숨이 막혀버렸다. 비유적 표현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의미로.
“보, 보안관님! 왜 저를 죽이려는 겁니까?”
“음? 너 방금 입으로 방귀 뀌었냐?”
“오크의 비밀 경전어는 다른 종족에겐 절대로 말해 주지도, 해석해주지도 않잖습니까?”
“너 정말 별의별 것을 다 알고 있군. 내 조수가 되기 전엔 도대체 뭐 해 먹고 살던 놈인지 궁금하다. 걱정 마. 오크가 그걸 말하지 않는 건 다른 종족과의 말싸움에서 질까 봐 무서워서야. 오크들이 머리가 좀 나쁘잖냐”
나는 신음을 좀 흘린 다음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을 완전히 잊기로 했 다. 다음에 만나게 되는 오크도 이파리 하드투스만큼 대범하리라는 보 장은 없으니까. 이파리 보안관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멍청해 보이고 쓸데없어 보이는 그런 사소한 일들이 사실은 사람살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라는 뜻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너 같은 사고방식은 합리적일지는 몰라도 따스하지는 않다는 말이고.”
“파랗게 질린 여자애를 그렇게 겁주는 게 따스한 일이라는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왜 그러냐고 묻지 마. 내가 물어볼 게 하나 생겼으니까.”
“뭔데요?”
“션은 어디로 간 거냐? 내가 좀 만나봐야겠다. 집에 갔어?”
“아뇨. 안셀과 약속이 있다던데요.”
다음 순간 이파리 보안관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 오크의 얼굴 도 허옇게 질릴 수 있다면 말이지만, 곧 이파리 보안관은 의자를 박차 고 일어났다.
“이런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녀석 같으니, 따라와!”
나는 멍청이와 얼간이, 바보 중 어느 것으로 지칭된 것인지 확인하 려 했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이미 초니의 주점 문을 거의 부수듯이 하 며 뛰쳐나간 뒤였다. 황망히 장검과 망토를 챙겨 들며 그의 뒤를 따랐 다. 물론 이파리 보안관이 세계에서 다리가 가장 긴 오크는 아니었기에 그를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옆을 나란히 따라 달리 며 여유 있게 질문까지 할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보안관님?”
이파리 보안관은 씩씩거리며 외쳤다.
“너 요즘 안셀의 직업이 뭔지 아냐?”
“예? 그렇게 자주 바뀌는 직업을 어떻게 일일이 파악할 수 있습니까?”
“그놈 요즘 자기를 천부적인 약사라고 믿고 있어.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듣지 못했다. 이파리 보안관을 놔둔 채 꽁지가 빠져라 달려갔기 때문에.
겨우 아주 아슬아슬한 순간에 안셀이 ‘모든 사랑의 아픔을 단번에 잊게 만드는 비약’이랍시고 내놓은 시커먼 약물을 션이 복용하는 것을 말릴 수 있었다. 시험 삼아 아인켈의 개에게 그 약을 먹여보자 그 개는 피똥을 좍좍 싼 다음 사흘 동안 야옹거리며 앞발로 세수를 했다.
인생의 고난 앞에 좌절한 청년에게까지 관심을 돌릴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것이 우리 소도시의 사법 책임자인 이파리 보안관과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내가 보안관과 보안관 조수의 소임을 망각할 정도 는 아니다. 우리의 허리에 매달린 1미터 20센티미터짜리 살인 병기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잊을 수 없게 만 드는 작용을 한다. 비록 나나 보안관 모두 칼집째 개구쟁이들의 엉덩이 나 때려주는 일이 더 많지만, 장검에는 살인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만 이 가지는 스산함이 감돈다. 그 스산함에 황제로부터 패검을 허락받았 다는 권위까지 덧붙여지면 우리들의 장검은 이 소도시에서 신전의 제 단과 우위를 다툴 정도의 권위적 상징물이 된다. 그러나 잔파드로스 신 관은 제단에 신경 쓸 때보다 그의 고아들에게 신경 쓸 때가 더 많고, 무엇보다도 제단은 허리에 매달고 다닐 수 없다. 그런 사정들을 통해 우리들의 장검이 이 개척 도시 최고의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황금잉어의 달 닷새째 아침 우리의 적들은 우리들의 장검에 일말의 경의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의 그 안하무인 한 태도에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놈들이 보안관 조수 무서운 줄 모르고! 폐하의 관료 앞에 무릎을 꿇어야지!”
버럭 고함을 질러보아도 다른 사람들은 웃기만 했다. 바로 그걸 바 랐기에 나는 즐거웠다. 만약 내 외침에 부응하여 무릎을 꿇는 쥐가 있 었다면 내가 더 놀랐을 것이다.
저번 달, 그러니까 붉은 곰의 달 파사디아 지방에서 흑사병의 기미 가 보였다 한다. 폐하께서는 급히 제국 전역에 흑사병 주의령과 쥐의 박멸을 명령하셨다. 파사디아는 까마득하게 먼 곳이고 우리 도시에 흑 사병이 발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흑사병이라는 놈의 공포는 만만 찮았다. 이파리 보안관과 내 지휘하에 대규모 쥐 토벌 작전이 개시되었 을 때 사람들의 호응은 뜨겁다 못해 델 정도였다.
내가 쥐구멍 앞에서 장검을 뽑을 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을 때 저편 에서 나처럼 입에 손수건을 두른 이파리 보안관이 다가왔다. 보안관은 손수건을 내리며 질문했다.
“많이 잡았냐?”
대답하기에 앞서 나는 보안관의 뒤편에 있는 손수레를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손수레에 담긴 역청통에는 쥐가 수북이 빠져 있었다. 아마도 통을 다 채우고는 불을 지르기 위해 교외로 가는 중인가 보다. 뒤를 돌 아보자 아직 쥐 몇 마리 담기지 않은 내 손수레가 보였다. 나를 따라 내 손수레를 본 보안관은 혀를 찼다.
“쯧쯧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데 아직 그것밖에 못 잡았냐. 역청이 다 굳어버리겠다.”
“보안관님, 저는 이 도시의 보안관 조수가 된 지 몇 년 안 되었습니 다. 그 말은 바꿔 말해서 거리 조경 전문가, 일기 예보관, 응급 처치 전 문가, 경기 심판, 공증인, 상담가, 축제 기획자, 결혼식 주례, 보건 담당 자, 숲지기 등의 보안관 조수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모두 익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전문 쥐잡이의 역할 또한 보안 관 조수가 ‘당연히’ 익혀야 되는 일일 테지만 제 시간이 그렇게 부족했 다는 것 또한 감안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내 비아냥거림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도둑, 강도, 사기꾼, 살인마 등과 싸우지 못해서 근사하지 않다는 건가 본데, 칼 빼 들고 흉악한 범죄자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1센티미터 짜리 이빨을 휘두르는 쪽을 상대하는 게 훨씬 안전해 배부른 소리하지마”
나는 다시 보안관의 손수레 쪽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뭐죠?”
“저거? 역청이라고 하는 거야. 그 안에 담긴 건 설치류에 속하는 쥐라는 동물의 사체고,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한다면 우리 황제 폐하의 적이라 할 수 있지.”
“아니, 저것 말이에요. 손수레 좀 치우셔야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손수건을 내렸다. 이파리 보안관은 뒤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레를 치웠다. 신부의 앞길을 쥐 사체 더미로 막고 있는 건 아무래도 흉한 모습일 테니까.
마차 한 대가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마부와 더불 어 화사하다 못해 아찔할 정도로 단장한 고운 그레이엘프 처녀가 타고 있었다. 그 뒤로는 혼수로 짐작되는 짐말과 달구지 등이 따르고 있었지 만난 그 처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이라 에존하우어였다. 그리고 고삐를 쥔 건 그녀의 아버지였다. 이파리 보안관은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바탄! 어떻게 된 일이야. 어디로 가는데?”
“아, 보안관님. 쥐 잡으시는 중이군요. 잔트빌로 가는 길입니다.”
“뭐? 오늘이 결혼식이었나?”
“아닙니다. 결혼식은 열흘 뒤입니다. 다만 흑사병이 북상할지도 모른 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그렇게 되면 신부가 출발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 르니 급히 신부부터 보내라는 부탁이 왔습니다. 그곳에 있다가 열흘 후 에 결혼할 겁니다.”
“아아, 그런가? 결혼식엔 꼭 참석하겠네.”
“물론 오셔야지요. 그리고 티르 자네도 꼭 와야 해.”
나는 그러겠노라고 말한 다음 에이라에게도 축하 인사를 보냈다. 하 지만 에이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었 다. 의아해하던 나는 에이라가 다른 곳을 훔쳐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나는 건물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곧장 바탄 에존하우어에게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초청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세상에서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기쁩니다, 에존하우어. 제가 신랑 자리에 서지는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한 신께서 이 땅의 생물을 남녀로 구분하신 신성한 뜻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바탄이 차마 마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내 말에 계속 대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바탄은 온갖 난처한 표정을 다 지었지만 나는 그것을 모두 무시했다. 결국 보다 못한 이파리 보안관이 ‘갈 길이 멀 테니… 어쩌고 하는 말을 하며 내 연설을 마쳤다. 나는 건물 그림자 쪽을 훔쳐본 다음 션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신부의 행렬이 멀어지고 나서 이파리 보안관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뭣 때문에 갈 길 바쁜 신부를 그렇게 붙잡고 있던 거냐?”
나는 빙긋 웃어줬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봄의 신부라.”
맹렬하게 뒤로 돌다가 하마터면 이파리 보안관을 쓰러뜨릴 뻔했다. 이파리 보안관이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거기에 귀 기울일 겨를도 없이 장검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내 눈 앞에는, 잘생겼지만 지워질 날 이 없는 그늘 덮인 얼굴의 위어울프가 하나 서 있었다. 그는 어두운 미 소와 함께 말했다.
“왜 그러지, 티르? 칼을 그렇게 쥐고 말이야.”
“거짓말해봐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니 사실대로 말하는데, 좀 섬뜩하더군. 케이토.”
케이토는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돌려 에이라의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름답군. 지데도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을 거야.”
얼굴 근육이 모조리 뒤틀리는 것 같았다. 억지로 무표정을 가장하 며 케이토의 손목을 살폈다. 하지만 케이토의 손은 모두 겉옷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 손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파리 보안관도 어느새 숨을 죽인 채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 둘의 시선을 눈치챈 케이토는 싱긋 웃었다.
“쥐 사냥 때문에 온 도시가 시끄럽더군.”
“어, 자네 종족이야 흑사병에 걸리지 않지만, 다른 종족들에겐 치명적인 병이거든.”
“아아, 잘 알고 있어. 그럼 수고하게.”
그리고 케이토는 이파리 보안관에게도 인사했다. 보안관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토는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나와 보안관 모두 그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케이토가 우리 의 시선이 보인다는 것처럼 오른손을 뽑아 뒤쪽을 향해 손 인사를 해 보였다.
소매가 스르륵 내려가며 그 안에 있던 은팔찌가 섬세하게 빛났다. 보안관과 나는 거의 들릴 만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어깨까지 부르르 떤 다음 말했다.
“케이토 저 친구, 저런 걸 봤으니 마음이 울적하겠군. 너 며칠 조심해야겠다.”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지 마세요. 지켜주겠다라든지 내가 그를 감시하겠다 정도의 말을 해줄 순 없습니까?”
“위어울프는 네가 전문이잖아. 내가 뭐 도움이 되겠냐?”
“젠장, 뭐가 전문이라는 겁니까! 딱 한 명 죽여봤을 뿐입니다!” 그리고 케이토는 내 손에 죽은 유일한 위어울프 지데의 약혼자였다. 지데는 현행범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엄연한 법 집행이었지만, 엄연한 진실이라는 놈은 결코 목숨의 담보를 서주지 않는다. 똑똑한 놈이다.
그날 오후, 우체국장 아인켈이 보안관 사무실로 찾아왔다.
“티르, 뜨개질하고 있나?”
나는 손으로는 뜨개질을 계속하며 아인에게 인사했다. 아인켈은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큰 의자를 찾아 털썩 주저앉고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자네와 보안관 덕분에 신관님의 고아원엔 옷 떨어질 날이 없겠군.”
의자에 앉았지만, 트롤인 아인켈의 얼굴은 한참 높은 곳에 있었다. 올려다보기 힘들었기에 나는 그냥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별로 그렇지도 않아요. 애들이라서 옷을 험하게 입거든요. 그래서 나는 이 취미를 도시 전역으로 퍼뜨려볼까 생각중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혹시 순찰중에 션 그웬 못 봤나? 그 친구에게 편지가 왔는데 공방에 없더군. 내일 전해 줄 수 없는 게 ‘지급’이라고 되어 있어.”
아인켈은 혁대에 찬, 다른 사람에겐 배낭이 될 만한 가방을 열더니 그 속에서 서신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봉투 겉면에 대단한 악필로 ‘대지급!!!’이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느낌표까지 그렇게 찍어놨으니 정말 급하긴 급한가 보군요.”
“그래. 이걸 가져온 사람은 말을 전세 내서 왔어. 우편 마차로 온 게 아냐 대단하지? 그 친구에게 누가 이렇게 급한 서신을 보냈는지 모르 겠군. 어쨌든 빨리 찾아서 전해 줘야겠는데, 곤란하게도 곧 우편 마차 가 올 시간이거든.”
“아, 그러시군요. 놔두고 가시지요. 있다가 한 바퀴 돌 생각이니 찾 는 대로 전해 주겠습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해야겠군. 이 소도시의 보안관 조수는 때론 시간제 우체부이기도 하다.
아인켈은 편지와 감사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순찰 나갔던 이파리 보안관이 돌아왔고, 나는 뜨고 있던 편물을 그에 게 넘겨준 다음 편지를 들고 순찰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션 그웬의 마지막 목격자인 버나드 교장은 그가 여행 차림으로 도시 를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질문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투 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습을 보아하니 멀리 가는 것 같던데. 사무실에서 여행증 결재 안 받아갔던가? 여행증에는 시장님과 보안관의 확인이 있어야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안 왔습니다. 여행증이 없어도 슬쩍 들어가는 방법이야 있습니다 만 션에게 그런 수완은 없을 텐데요. 음? 잠깐, 어디로 갔는지 알 만합 니다. 교장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그 말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버나드 교장은 선선히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렸다. 나는 내일까지 돌아오겠다고 이파리 보안관에게 전해 줄 것을 교장에게 부탁한 다음 잔 트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버나드 교장의 말은 무릎이 시원찮은 교장만 태우고 다녔기 때문에 속도를 내는 데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오래간만에 말 을 타는 것이라 내 의지를 말에게 전달하는 것이 서툴렀다. 하지만 도 시를 빠져나와 4킬로미터쯤 달리자 우리는 상당 부분에 걸쳐 의견 조 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말이라는 놈은 가끔씩이라도 한껏 달리지 않 으면 병이 나는 동물이다. 말은 교장의 출퇴근 길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투였지만 꽤 만족스러 운 속도로 달려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션을 따라잡은 것은 잔트빌 교외에 거의 도착해서 일이었다. 션은 나를 보며 놀란 듯했지만 나는 잠시 동안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놈은 가끔씩 한껏 달리면 병이 나는 동물이기 때 문이다. 나는 씩씩거리느라 많은 시간을 잡아먹은 다음 겨우 말문을 열었다.
“뭘 계획하고 있나, 션?”
션은 커다란 등짐을 내 눈에서 감추듯 하며 어눌하게 말했다.
“추측하는 것이 있어서 따라오신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사실은 자네에게 전할 게 있어서 따라온 거야. 하지만 자네가 말한 것도 맞아 세상을 굴러가게 하고 싶은 거야?”
션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나는 그 말을 좀 더 보편적인 형태로 바꿔 말했다. 션은 나를 외면한 채 말했다.
“에이라와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무슨 이야기?”
“에이라에게 같이 떠나줄 수 있는지 물어볼 거예요. 에이라가 동의해 준다면 오늘 밤 당장 떠날 겁니다.”
“그래, 션. 다 좋은데 어떻게 물어본다는 거야?”
“그 집에서 아무리 막더라도 저는 기필코……”
“아니, 그 말이 아냐. 이제 곧 밤인데 여행증도 없이 잔트빌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나?”
션은 당황하여 나를 돌아보았다.
“잔트빌은 우리 도시보다는 훨씬 크고 보안관 조수들도 훨씬 엄격 하지. 내가 복수형으로 말한 것에 주의해 저기엔 보안관 조수들이 수 두룩하다고. 우리 동네 같은 식은 안 통할걸.”
션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내 말에 권위를 덧 붙이기 위해 호흡이 완전히 안정되기를 기다린 다음 나직하게 말했다.
“돌아가자, 션, 에이라에겐 부모가 있고 곧 반려가 될 사람도 있어. 자넨 에이라로 하여금 그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짓기를 강요해선 안돼. 사내답게 돌아가자.”
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말의 목을 쓸어주며 한참 기다렸을 때 겨우 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세요, 티르.”
“어쩌겠다는 거야? 몰래 들어가겠다고? 불가능한 일이야. 자넨 에이라의 시댁이 어딘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해야 합니다.”
“왜?”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요.”
“목숨이라고 했나?”
션은 검푸른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이미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티르, 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살아야 할 이유가 아무것 도 없는 거죠. 그런데 오늘 낮, 당신이 저와 에이라를 위해 시간을 끌어 주셨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게 되었어요. 제겐 아직 단 하나의 이유가 남아 있었어요.”
“단 하나?”
“제 삶의 이유가 되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진부하다 못해 황폐함까지 느껴지는 말들이었지만 그 말들은 이미 상관없었다. 그 말을 하는 션의 눈빛, 저녁별 빛을 가득 담은 그 눈빛이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는 젊은 날의 여름을 떠올리게 했다. 무서울 정도로 뜨겁고 소름끼치도록 황홀하던 여름 저녁.
결국,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패검한 보안관 조수와 함께라면 여행증 없이도 다른 도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잔트빌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돌아가는 편이 낫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우긴 했지만, 나는 션의 눈에 떠오 른 승리감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와 션은 에이라의 시체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세상이 나로 인해 힘차게 도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둘이서 담을 넘었지요. 그때까진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되시 죠? 예, 우리는 갇혀 있는 공주님을 찾아가는 왕자님과 그의 과묵하고, 칼 잘 쓰고, 우애 있고, 탈출 과정에서 두 사람을 보내주고 대신 죽는 역할일 경우가 많은 친구였습니다. 흥분감으로 잔뜩 고양되어 있었죠. 서로 말도 안 되는 말을 주고받으며 소리 없이 킬킬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도 잘 모르는 정원을 조심스럽게 나아가다, 키 큰 정원수에 매달려 있는 희끄무레한 것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겁니다.”
“에이라 에존하우어?”
“예,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 바로 돌아왔으면 되었을 것을.”
이파리 보안관은 소리 없이 뜨개바늘을 놀리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늦든 이르든 알게 되었을걸.”
나는 실을 거칠게 잡아당겨 무릎 위에 널어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어둠과 그 흥분 속에서 갑자기 그런 걸 보게 되는 건 너무 심한 일이었습니다. 션에게 그런 걸 보여줘선 안 되는 거였습니다. 아니, 그날 아침 에이라로 하여금 션과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바라보게 해줘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에이라는 아마 그때 그런 생각을 떠올렸 을 겁니다.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한 겁니다.”
다시 두 사람의 뜨개질 소리만이 보안관 사무실의 밤을 어지럽혔다. 잠시 후 이파리 보안관이 걱정스럽게 질문해 왔다.
“그런데 션은 혼자 내버려 둔 거야?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믿을 만한 친구에게 맡겨두었습니다.”
“누구? 설마 안셀은 아니겠지.”
“케이토입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멀거니 나를 바라보다가 핏 웃었다.
“케이토를 믿는다고? 그러면 왜 그렇게 케이토를 볼 때마다 털 세운 고양이 꼴이 되는 거냐?”
“믿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 만하다. 그런데 그건 뭐냐?”
“이거요? 뜨개바늘이라고 하는 겁니다. 보통 수예라고 불리는 직조 기술에 이용되는 유서 깊은 도구지요.”
“네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온 거 말이다.”
나는 겉옷 주머니에서 서신을 빼내었다. 겉면에 ‘대지급!!!’이라고 적 혀 있는 바로 그 편지였다. 나는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를 호 되게 꾸짖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얼간이 짓이군요. 션에게 바로 이걸 전해 주러 간 건데, 경황없는 일들이 계속되는 바람에 정작 이건 전해 주지 못했군요.”
내 설명을 들은 이파리 보안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급한 서신이 아니라 보낸 사람의 성격이 급한 것이기를 바라야겠군. 이리 줘봐.”
나는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받아든 보안관은 실바구니에 담겨 있 던 뜨개바늘 하나를 쓱 들어 올리더니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편지 봉투를 찢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서신 보호법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는 겁니 까? 아니, 도대체 어떻게 보안관이라는 사람이! 맙소사, 아인켈이 이 모 습을 보면 뭐라 할지 궁금하군요.”
“네가 찢었다고 하지. 아인켈은 너에게 이걸 맡겼지?”
나는 말문이 막힌 채 입만 뻐끔거렸다. 이파리 보안관은 나를 그 지 경으로 만들어놓은 데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한 동작으로 태연하게 서신을 꺼내어 펼쳤다.
“이 편지가 단지 급한 것뿐만 아니라 절망적이기도 한다면, 션은 시 간이 좀 지난 다음에 받아봐야 해. 그리고 그걸 판단하려면 뜯어봐야 하고.”
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창문과 문을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화 장실과 마찬가지로 보안관 사무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급하게 뛰어들 어 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보안관은 자기에게 온 서신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읽어 내려갔다. 서신을 다 읽은 보안관은 송곳니를 톡 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입니까?”
“일단 이것과 비슷한 봉투 하나 찾아서 겉에다가 ‘대지급!!!’이라고 써라. 다행히도 봉인이 없으니 위조하는 건 간단하군.”
그렇게 했다. 내가 감히 정의와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들의 안식처에 서 그런 무도한 범죄 행위에 골몰해 있는 동안 이파리 보안관은 계속 해서 비죽 튀어나온 송곳니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내가 봉투 위조를 끝 냈을 때야 보안관은 두 손 들었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잡학다식한 나의 조수여, 묻나니, 너 혹시 마법사에 대해 뭐 아는거 있냐?”
“마술사요?”
“아니, 마법사.”
“같은 말이잖습니까? 어, 혹시 진짜 마법사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런 건 옛이야기나 환상 속에서나 나오는 겁니다. 진짜 마법사라 는 건 없습니다. 확률이 너무 낮습니다.”
“천천히 설명해 봐.”
“글쎄요. 마술이라는 것은 일단 실존하는 겁니다. 인간들 중에 가끔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나타납니다. 엘프나 그레이엘프에게도 나타나지 만, 인간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능력으로 우물 팔 자리를 알아낸다거나 사마귀를 뗀다거나 운수를 보거나 합니다. 그런 건 들어 알고 계시지요?”
오크들은 그런 마술을 믿지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에 나는 확인을 했다. 다행히도 노회한 이파리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봤다. 몇 번 보기도 했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끝이 좋지 않습니다. 신관들은 신 께서 그것을 싫어하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런 마술사들 중 죽기 전 에 다른 마술사에게 자기 마술을 전이해 줄 수 있는 자가 있습니 다. 마술을 전이 받은 자는 보통 마술사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을 가지 게 됩니다. 내일 자기 발을 밟을 말의 색깔을 맞추고, 짚는 곳마다 우물 이 펑펑 터져 나오는 식이지요.”
이파리 보안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귀는 건드리면 떨어져 나가겠군. 그래서?”
“그런 전이가 대여섯 번 이상 성공하게 되면 그 마술사는 초인적인 이적을 부릴 수 있게 됩니다. 불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집을 갑자기 불태울 수도 있고, 마른하늘에서 벼락을 불러들일 수도, 물을 술로 바 꿀 수도 있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죠? 어쨌든 그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은 마법사라고 불리게 되는 겁니다.”
“확률 어쩌고는 무슨 말이냐?”
“그런 전이가 연속으로 대여섯 번 이상 성공하는 것이 확률상 불가 능하다는 말입니다. 전이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대에 걸쳐 천재가 태어나는 집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법사가 나타날 확률은 그보다도 더 적습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다시 송곳니를, 이번엔 반대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네 말을 들으니 여기 나와 있는 전수자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이해되는군. 그런데 동시에 더 혼란스러워지는데.”
“예?”
“이 편지를 보낸 작자는 자기가 14대째의 마법 전수자라고 말하고 있어. 네 말대로라면 이건 사람이 아닌, 거의 반신(半神)이라는 말이 아 니냐?”
“14대요?”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말했다. 하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태연 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기 전에 전이한다고? 그럼 대충 천 년 전부터 전승된 마법 의 소유자겠군. 그것도 전부 인간일 경우고 혹 중간에 엘프가 섞여 있 을 경우엔 수천 년까지도 올라가겠는걸. 수천 년 전이면 그게 도대체 어느 시대냐?”
마술을 별로 믿지 않는 오크인 이파리 보안관은 재미있는 농담이라 도 들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인 간이고, 그 말은 내가 이성의 부족 부분을 감정이나 비논리로 때워버 리는 폭거를 태연히 감행하는 종족에 속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파리 보안관에게 받은 편지의 내용은 그런 내 종족적 특 성의 발현을 더욱 부채질했다. 편지의 내용은, 훌륭한 교양을 가졌지만 작문 능력의 향상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문체로 다음의 내용을 강변하고 있었다.
션, 스승의 죽음과 앞이 보이지 않는 나날 때문에 헛짓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세상 버린 네 스승은 이미 오래전에 친구로부터 자 기죽을 날을 들어 알고 있었고, 그 친구는 바로 나다. 그래서 구스룬 프리모는 나에게 너의 장래를 부탁해 두었다. 그러니 한 번밖에 못 할 자살에는 과연 어떤 방식이 어울릴까 따위의 말 같잖은 고민 따 위 집어치워라! 황금 잉어의 달 열이렛날 도착하겠다.
-마술사 사카 둠바의 14대 전수자, 마법사 까로 트랙스
편지를 다 읽은 케이토는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봉투 겉면의 대지급이라는 말이나 이쪽 사정을 훤히 내다본다는 식의 이 놀라운 내용을 놓고 볼 때 이 까로 트랙스는 분명히 마법사이 긴 한가 봅니다. 아마도 보통 이상의 투시능을 가지고 있나 보군요. 그 리고 정말 구스룬 프리모의 죽음을 예견했다면 예지능 또한 대단한 것 같습니다. 14대라는 말은 차마 믿고 싶지 않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케이토, 내가 처음 마법사를 언급했을 때 티르는 전혀 믿지 않겠다 는 투로 말했소. 그런데 당신은 마법사의 존재를 믿는다는 식으로 말 하시는군?”
“위어울프는 마법과 마법사를 믿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했던 마법사가 있었으니까요.”
“뭐요? 마법사가?”
케이토는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은팔찌가 드러나게 했다.
“아시지요? 이것도 일종의 마법입니다.”
나와 이파리 보안관은 거의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케이토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 마법은 까마득한 옛날 가이너 카쉬냅이라는 마법사가 우리 종 족에게 가르쳐준 겁니다. 그리고 우리 종족 이외엔 필요 없는 마법이기 에 다른 종족들은 이 마법을 모르고, 그러다 보니 이것이 마법이라는 생각도 못 하게 된 거지요. ‘위어울프는 은팔찌를 찬다. 그리고 은팔찌 를 벗으면 변신한다.’ 이게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전부지요. 하지만 위어 울프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은팔찌를 차는 것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이것이 본능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닌 후천적 기술이라는 점을 이해하 실 수 있으실 겁니다. 예, 바로 마법이지요.”
“그렇다면 마법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어쩌면 13회 의 전이가 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소름 끼치는 기분이었다. 열세 번의 전이라니. 확률이 이토록 무시되 어도 되는 건가? 내가 이파리 보안관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건지 신화 의 파도와 환상의 바람을 타고 전설의 배를 몰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 었다.
나는 고개를 내두르며 케이토에게 말했다.
“알았어. 열이렛날이 되면 이 친구가 사기꾼인지 진짜 마법사인지 알 수 있겠지. 그런데 션은 뭐하고 있지? 자넨 그걸 말해 주러 여기 온 것 같은데.”
“응, 그것 때문에 온 것이 맞네. 먼저 한 가지 보여줘야 할 것이 있군”
다음 순간 나는 뒤쪽으로 뛰어올랐다.
시켜도 다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케이토가 왼손을 얼굴 옆 으로 들어 올리자마자 나는 앉아 있던 자세에서 왼손으로 의자를 다 리 사이로 잡아빼며 그대로 의자 등받이를 뛰어넘어 벽을 등지고 섰다. 오른손으론 이미 칼자루를 쥔 자세로 앞을 노려보는 내 모습이 케이토 에겐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케이토는 맑은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웃을 수가 없었다.
“케이토! 당신 왼손?”
“예, 팔찌가 없지요.”
“설명해 주겠소?”
“먼저 말해 두겠습니다. 어젯밤 내내 션과 함께 있으며 그 친구의 상 태가 이만저만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일 을 저지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지 않고서야 한 사람을 완전히 감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다못해 화장실에 서도 신이 허락지 않는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제 왼쪽 팔찌를 빼내어 션에게 채워주었습니다. 션이 그것 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 위어울프만이 그것을 올바로 다룰 수 있으니까 요. 그 팔찌는 일종의 감시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처럼 정확하진 않지만, 션의 심리에 심각한 충격이 생기면 바로 제가 느낄 수 있으니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단 말이오?”
“아니, 그 정도는 아닙니다. 쌍둥이들 중 한 사람이 아프면 다른 사 람도 느닷없이 아파진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그것과 비슷합니다. 션이 무모한 짓을 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겁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토는 비어 있는 왼쪽 손목을 쓸어 만졌다. 그곳의 피부는 다른 곳보다 훨씬 밝은색이었다.
“그럼 이제 제가 온 이유를 짐작하시겠지요. 이 도시에 들어올 때 저 와 지데는 보안관님께 각서를 썼습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절대로 은팔 찌를 벗지 않겠으며, 만일 벗은 모습이 발각되면 그 즉시 사살당해도 이의가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케이토는 내 쪽을 곁눈질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아 마 그 자신도 자기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알아차리지 않기로 했다.
“저는 이것이 부득이한 일이라는 점을 설명드리고, 혹 있을지 모르 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니 한시적으로 허락하겠소. 하지만, 션에게 다시 그 팔찌를 돌려받는 시기는 내가 결정하겠소. 그리고 내가 요구하 면 당신은 곧 팔찌를 돌려받아 착용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직접 조처하거나 보안관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리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션에게도 이 팔찌의 작용에 대해 설명해 줬으니까요.”
“아주 괜찮게 들리는군. 당신의 조처는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케이토는 목례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보안관 사무실의 어릿광 대(그 시점에서의 내 모습을 다르게 표현할 수가 없다)에게도 목례하고 문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가 나서기 직전, 그 어릿광대는 자제력을 잃은 채 다급하게 외치고 말았다.
“케이토! 한 가지만 물어보자.”
케이토는 문턱에 선 채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질문이지?”
“팔찌 두 개를 다 풀어야 변신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런데, 그 렇다면 왜 그 비싼 은팔찌가 두 개나 필요한 거지? 그건 단순히 짝을 맞추는 것이 보기 좋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가 부주의로 풀려버리거 나 훼손되는 것에 대한 안전장치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라면?”
“두 개가 있어야 되는 이유가 있는 건가? 그러니까 말이야, 예를 들 어, 흐음. 내 말으으은.”
허둥대고 있는 나를 대신하여 내 친구 케이토는 나 자신도 구체화하지 못했던 내 의심을 명료하게 정리해 주었다.
“자네는 하나의 은팔찌가 내 속의 털 많고 이빨 날카로운 친구에 대해 절반의 억제력밖에 가지지 못할 거라고 의심하고 있나?”
“그런 건가?”
케이토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문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자네 추리가 사실이라면, 자넨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확인하게 될 것 같군. 그러니 기다려보게.”
문이 닫혔다. 나는 벽에 기대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만난 최고의 친구에게 살해당할까 봐 두려워해야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때 이파리 보안관이 침울하게 말했다.
“티르”
“예?”
“두 배로 조심해야겠다.”
내가 만난 최고의 오크가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얄밉다는 것 또한 슬픈 일이다.
어깨에 떨어지는 햇살이 부드러운 애무 같은 것에서 날카로운 화살 촉 같은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햇살은 내리쳐지는 망치 로 바뀌어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확 돌아버리게 만들겠지만, 아 직 주위에는 봄의 산뜻함이 넉넉히 남아 있었다. 늦봄, 방종한 꽃들이 서슴없이 향기를 뿜어대는 가운데 사람들은 여름의 꿈속으로 성급히 빠져들고 있었다.
성급하다는 것은, 그러니까 치마 아래로 파고드는 저 손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거기서 정지.”
여자애는 비명을 내질렀고 사내애는 화닥닥 일어섰다. 꽤 놀란 모양 인지 사내애는 돌멩이를 들어올리며 핏발선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기 까지 했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로부터 모습을 드러냈고 그제야 나를 발견한 사내애는 안도와 원망이 뒤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맙소사, 티르였군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아아, 놀라게 했다면 미안, 하린.”
여자애는 의미가 좀 다른 두 번째 비명을 지르며 하린의 등 뒤로 숨 었다. 하린은 멋쩍은 얼굴에 불쾌함과 두려움까지 떠올리며 질문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너희들이 오기 전부터”
“그, 그럼 처음부터……?”
“이야기는 안 들었다. 나도 예의는 아니까 가서 소문이나 퍼뜨려라.” 하린은 자신의 조그마한 몸으로 여자애를 가려주려고 애쓰면서 짐 짓 거칠게 말했다.
“쳇. 소문은 벌써 났어요. 이파리 보안관이랑 당신이 으슥한 곳마다 숨어 있다고. 그런데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어요.”
“경험 부족한 연인들이 찾아낼 장소야 뻔하거든. 나는 너희 나이 건너뛴 줄 알아? 그리고 그 뒤의 아가씨, 난 당신이 랏돌 가의 데로네 양 이라는 거 모르니까 안심해.”
“티, 티르 아저씨!”
데로네 랏돌은 숨막힌 비명을 질렀고 하린은 씩씩거렸다. 저 귀여운 연인들에게 뭔가 축복이라도 내려주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
르지 않았다.
“뭐 다 이해하는데, 그래도 식구 늘어날지 모르는 모험은 좀 천천히 시도하도록 해라. 너희들 믿고 난 이만 가겠다. 신사와 숙녀가 나눌 법 한우아한 대화만 있을 것으로 믿겠어. 그리고 웬만하면 일찍 들어가 라.”
“저, 소문내는 거 아니죠?”
“설마 너희들이 나나 보안관에게 들킨 첫 번째 연인일 거라고 믿는거냐?”
나는 보안관이라는 말에 약간의 강세를 두었다. 물론 믿느니 어쩌느 니 하는 건 완전히 거짓말이다. 이런 매혹적인 봄밤의 연인들이 교양 있게 행동할 것을 믿느니 고양이가 쥐에게 연민을 품게 될 날을 기다리 는 것이 훨씬 낫다. 하지만 이파리 보안관에 대한 언급은 저 애들에게 자제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위대한 이파리 보안관이 지금 이 시각 사무실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의무는 없다. 나는 위장 삼아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와 칼집을 들어 올린 다음 두 사람에게 손 인사를 보내고는 그 자리를 떠나왔다.
그렇다. 이 소도시의 사법 책임자의 빡빡한 스케줄 속엔 걸어 다니 는 정조대 노릇도 포함되어 있다. 젊은 애들의 머리가 뜨거워지는 계절 은 이래서 싫다. 게다가 오늘 같은 보름달빛 아래에선 트롤조차도 가슴 속에서 물결치는 본능의 파도에 멀미를 느껴 비틀대는 법이다.
보름달이라.
나는 장검을 약간 느슨하게 뽑아두었고, 그런 자신에게 밤에 생길 수 있는 위험들을 몇 가지 알려주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다. 자신에 대 한기만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래, 나는 케이토가 무섭다. 그의 자 제력과 냉철한 이성을 알기 때문이다. 튼튼한 둑은 더 많은 물을 저수 한다. 케이토의 그 육중한 자제력의 수문 뒤엔 어마어마한 슬픔과 분 노가 고여 있을 것이다. 그 수문이 터지는 날은 내게 인상 깊은 기념일 이 될 것이다. 나와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가 죽게 될 테니까. 휘파람을 불기에 좋은 시간이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내 휘파람을 들은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티르입니까?”
“케이토는 아니지?”
“션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지요?”
“그 팔찌 때문에. 달빛에 번쩍이더군.”
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격 해진 맥박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제기랄. 케이토 생각을 하고 있 을 때 갑자기 은팔찌를 찬 그림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놀라 죽는 줄 알 았다. 하지만 달빛의 환상을 걷어내고 자세히 바라보자 그 그림자는 케이토보다 훨씬 섬세했고 게다가 왼쪽에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나 는 션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네펜지스 강의 강물이 검은 뱀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그 너머 산맥의 능선을 따라 깔려 있는 노천광들은 달빛을 담은 거대한 사발처럼 보였다. 낮에 보았더라면 검은색 이탄과 그 주위를 온통 뒤덮은, 바람 이라도 불라치면 잿빛 안개가 되어 치솟아오르는 석탄 가루를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보름달 아래에서 노천광은 무수히 많은 빛 조각을 담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간혹 보이는 랜턴 빛은 그 우미함 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야간 작업중인 광부들에게 악 담을 보내었다.
“션, 여기서 뭐하고 있었나?”
“티르, 당신은 왜 이곳에 왔어요?”
“소문 못 들어봤어? 오늘 밤의 내 배역은 정조의 수호자야. 그래서 처녀 총각들이 찾을 만한 곳을 순찰하고 있지.”
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난 바보 노릇 하는 것도 지겹다
고 생각했다. 션의 질문은 이미 대답이었다.
“에이라와 함께 찾던 곳인가?”
“al.”
밤바람, 구역질 나는 냄새, 나풀거리는 잠옷, 흔들거리는 시체, 밧줄, 아래에 쏟아진 똥오줌, 하얗게 도드라진 에이라의 부은 얼굴, 신음, 절 규. 그 피 냄새가 코끝에 매달려 사라지지 않았다.
“슬픈 일이다, 션. 왜 자살 같은 짓을 했을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당신과 보안관께서 배역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무슨 말이지?”
“에이라는 아이를 가지고 있었어요.”
션은 단조롭게 대답했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션은 계속해서 높낮이가 없는 어조로 말했다.
“에이라는 극단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정도 많고 겁도 많았지요. 하지 만 침착하진 못했어요. 짐작되는군요. 받아들일 수도, 손써 볼 수도 없 는 상황들이 마구 밀어닥치자 그만 어쩔 줄 모르게 되었을 거예요.”
션은 잠깐 기다렸다가 말했다.
“지금의 저처럼 말입니다.”
션은 조금 더 긴 침묵 후에 말했다.
“미칠 것 같아요.”
비릿한 피 냄새는 가실 줄을 몰랐다.
“에이라를 욕하고 싶진 않지만 목숨을 끊는 것은 가장 바보 같은 선택이다, 션.”
“바보 같다? 죄라고 하시지 않는 건 마음에 듭니다만, 왜 바보 같다 고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니까. 에이라는 그녀 자신에게도 너에게도,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그 아이에게도 못 할 짓을 한 거야.”
“잔”
“뭐?”
“잔입니다. 잔파드로스 신관님의 이름을 따기로 했어요. 딸이든 아들이든 좋은 이름이죠.”
바늘구멍에 정박용 밧줄을 꿰는 기분을 느낀 다음에야 다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래, 잔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잔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뭐라고 했겠나? 무슨 취급을 당하든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니 일단 태어나게나 해달라고 하지 않았겠어?”
“저기 있습니다.”
“뭐라고?”
“에이라와 잔. 저기 있습니다.”
션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성운들이 밤하늘에 은빛 옹이를 만들 어내고 있었다. 저 기라성 속에는 격한 슬픔이 성좌를 만들어낼 자리 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워 보이네요. 이곳은 이렇게 따뜻한데…………. 왜 이 세상은 여자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설 만한 자리도 내주지 않는 걸까요. 왜 저렇게 춥고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야 하는 걸까요. 이 세상을 소유할 수 있는 건 행 복한 사람들뿐입니까?”
“세상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추파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렇지는 않아. 대부분의 경우 세상은 공평해.”
세상은 실로 공평하다. 지난 몇 년간의 나를 돌이켜보면 그 점은 분 명해진다. 세상은 제국군 12군단의 무술 사범이었던 나를 이 깡촌의 보안관 조수로 만들어버리는 대신 나를 살해할지도 모르는 친구와 남 부럽지 않은 뜨개질 기술을 선물했다. 그리고 나는 이 대차대조표에 만족한다.
하지만 션은 차갑게 말했다.
“공평하다는 것은 감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세상에는 감정이 없다는 말인가요?”
“글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런 몰인정하고 냉혹한 세상 따위 없애버리겠어요.”
이렇게 유아론적인 자살 선언도 여간해선 듣기 어려울 것이다. ‘눈 을 감는 것’을 ‘세상을 덮는다’고 표현하고 자살하는 것을 ‘세상을 없 애는 것’이라고 말해도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는 인간이며, 그레이엘프에게나 어울리는 저런 화법엔 위화감이 느껴 진다.
“이제 어지러워지는군요.”
“뭐?”
션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묘하게 창백하다고 느낀 순간, 나 는 지금껏 맡고 있던 것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에이라의 피 냄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있어 주셔서 고마워요.”
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발아래 땅이 거떻게 번득이는 것을 발견했다.
션의 오른팔을 낚아챈 다음, 나는 심한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한밤의 도시를 온통 뒤집어놓고 나서야횃불, 넘어지는 사람, 고함소리, 다급한 발소리, 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잠옷 차림의 사람들, 사람 살려! 사람 살 려! 정신 나간 자살 기도자 좀 살려줘!) 나는 겨우 션의 오른팔을 붕대로 감아놓고 몰려든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션을 눕힌 침대 옆에 몇 명의 착한 시민들이 모여들었는지는 묻지 마라. 다만 그를 눕혀놓은 시장님 댁의 대문 바깥이 밤새도록 인파와 횃불로 불야성을 이루었다는 것만 말해 두겠다.
하지만 케이토는 그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온몸에 서 땀과 분노를 콸콸 뿜어내던 모습 그대로 케이토를 향해 달려갔다. 뭐? 감시 장치? 쌍둥이의 교감? 조처를 하겠다고?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야옹거리며 손등에 침을 묻혀 세수하고 있는 케이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가 포도주 압착기에 들어간 것 같아.”
물수건 아래에서 케이토의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안셀에게서 압류 한 약병과 증류기, 혼합기 등을 궤짝에 집어넣으며 그에게 측은한 시선 을 보내었다. 의자에 쓰러진 채 물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그의 모 습 어디에서도 평소의 그 침착하고 고상한 위어울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꼬리를 잡으러 빙글빙글 돌 때보다는 훨씬 품위 있는 모습임을 부정할 수도 없다.
“케이토, 자네도 이제쯤이면 안셀의 결과물에 자기를 내맡기는 것이 다시없는 바보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텐데.”
“알고 있었어.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어.”
“무슨 말이야?”
케이토는 의자에 축 늘어진 모습 그대로 손만 옆으로 움직여 물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잔은 비어 있었고, 잔을 몇 번 흔들어본 케 이토는 투덜거리며 그것을 도로 내려놓았다.
“션은 아마 죽은 연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내가 그렇게 지데 생각 이외에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된 이유를 설명 할 수 없어.”
케이토가 물수건을 덮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서도 잔에 물을 채워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 모든 사랑의 아픔을 잊게 해주는 비약’인지 뭔지 하는 것을 덥석 받아든 건가?”
“티르”
“왜?”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던데. 머릿속에 털실 뭉치에 대한 간절한 욕구 이외엔 아무것도 안 남게 되더라고.”
잠시 후 나와 케이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고 있었다.
“아아, 이젠 배까지 아프군. 그런데 션은 어떻게 되었나?”
“괜찮을 것 같아. 시장님 댁에 눕혀놓았고, 시장님의 하인들과 무더 기로 몰려온 선량한 시민들이 감시하고 있어. 며칠 동안은 상태를 두고 봐야 할 테지만.”
케이토는 물수건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파리한 얼굴을 매만 지던 케이토는 자신의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창피한걸. 지금 많은 사람들이 션을 도우려 하고 있지만 나 역시 그 친구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이유 에서야 내게 있어 그건 자기 구원이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였거든. 무 슨 말인지 짐작할 테지?”
“자넨 훌륭히 이겨냈어, 케이토.”
“정말 그렇게 믿는 건 아니겠지? 이 팔찌를 한번 벗어볼까? 속이지 않겠네, 티르, 내가 아직 이 도시를 떠나지 않는 것은 여기에 지데의 무 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 그 보 안관 조수를 죽여야겠구나’ 하고 결심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이해해.”
내 대답은 내 귀에도 잘 들리지 않았다.
“티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션 은 나와 같아. 션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지만, 어쨌든 그 친구도 나처럼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고 있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 그래서 나는 션을 돕고 싶어. 션을 도울 수 있다면 나 자신도 도울 수 있을 거야.”
케이토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 고매한 시도는 돌팔이 약사의 약 한 병에 붕괴되었다. 이거 정말 창피한데.”
나는 마주 웃어준 다음 궤짝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 에 숨겨둘지 잠시 고민했다. 안셀이 자신을 전설적인 대도라고 생각하 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결국, 궤짝 겉면에 ‘안셀 압류품’이라고 큼 직하게 써 붙인 다음 잘 보이는 선반에 올려놓기로 결정했다. 내 설명 을 들은 케이토는 다시 낄낄거렸다. 그러나 케이토는 곧 양쪽 관자놀이 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아직 약 기운이 다 가신 것 같지 않아. 나를 다시 감옥에 넣어주게. 내일까지 감옥 안에 있도록 하겠어. 괜찮겠지?”
나는 랜턴을 집어 들었다.
“좋을 대로”
케이토를 지하 감방에 감금한 다음 배식구를 통해 굴러나온 은팔 찌를 집어 들었다. 곧 문 저편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살기가 전해져 왔지 만 나는 가까스로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우리 사무실의 감방 또한 다 른 감옥이 그렇듯이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분노한 트롤 죄수 같은 것 까지 상정한 다음 설계되었다. 위어울프의 힘으로는 감방을 부술 수 없 다, 결코.
하지만 피가 얼어붙을 것 같은 저 포효는?
나는 계단을 뛰어 올라오다가 두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숨을 고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지하 감방 은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이제 포효는 약한 산울림처럼 멀게 들려왔 다. 제기랄. 이렇게 뛸 필요는 없었다. 그러잖아도 나는 오늘 밤에 너무 많이 달렸다. 처음엔 션이었고 두 번째는 케이토. 션은 가벼운 편이었지 만 축 늘어져 있었고, 케이토는 끊임없이 가르랑거렸다. 둘 모두 밤길에 업고 뛰기에 좋은 파트너는 아니었다.
나는 랜턴과 은팔찌를 책상 위에 놓아둔 다음 의자에 털썩 주저앉 았다. 책상 위에 다리를 얹은 나는 그대로 방심 상태에 들어섰다. 피로 했고, 혼란스러웠고, 흥분해 있었으며, 어쨌든 자와 컴퍼스만으로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방법을 궁리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 다. 그래서 나는 멍한 상태로 랜턴 불빛 속에서 반짝이는 은팔찌를 바 라보았다.
저걸 착용하면 션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고?
천천히 손을 뻗어 은팔찌를 집어 들었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게 우리 시대의 마법을 증거하는 유일한 물품이란 말인가?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말이다.
가만히 팔찌를 관찰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은팔찌의 모습에 는 상식을 거부하는 마법적인 면이 있었다. 어쨌든 이 팔찌는 케이토에 게 안셀의 약을 시음할 정도로 끔찍한 기분을 전달했다. 팔목을 벤 다 음 죽은 연인을 생각하고 있던 청년이 느낄 법한 기분이다. 특별히 회 의주의자가 아니라면 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안셀 압류품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법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들기 딱 알맞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