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미스트 (Over the Mist) – 3화 : 두 기사단
두 기사단
고맙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 도시 의 선량한 시민들은 저승사자에게 농락당한 이파리 보안관과 나를 바 보 취급하지 않았다. 정의와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인 우리 두 사람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에게 크나큰 거부감을 자아내는 일이었 다. 그래서 시민들은 저승사자를 경외하는 쪽을 선택했다. 저승사자의 찬란한 전설들이 재조명되었고 더 많은 전설들이 창조되었다. 저승사 자가 못을 씹어 먹고 불타는 오줌을 싼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하다 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고 있노라니 미쳐가는 기분 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미레일 요란하스는 우리 도시의 선량한 시민에 속하지 않는다.
그 애는 분노의 화신 같은 모습으로 사무실에 나타나 내 무능함과 나태함, 불성실함 등을 꾸짖었다.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경청한 다음 나는 품위 있는 동작으로 천사를 가리켰다.
“나는 천사가 새끼를 내줬다고 봐.”
미레일을 진정시키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다. 나와 보안관은 실제로 그랬으리라 믿었다. 천사의 동의 없이 그 품에서 새끼를 가져가려 했다 면 무시무시한 폭력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코에 흉측 한 상처가 나 있지도 않았고 바닥에 저승사자의 몸 일부가 떨어져 있 지도 않았다. 저승사자는 실로 평화로운 방식으로 새끼를 데려갔고 따 라서 천사가 그것을 용인했음은 분명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미레일 도 이 논리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한결같다는 사실과 사건이 천 사의 방조 하에 일어났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격분한 오크가 보여주는 모든 증 세를 보여주며 사무실의 보안 상태 점검에 들어갔다. 그 편집증적인 모 습은 어떤 일에 몰두한 안셀과 똑같았고 그래서 나는 보안관이 안셀과 바꿔치기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보안관이 나에 대해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보안관 조수의 박봉이 수많은 덫과 올무와 올 가미와 통발 같은 잡동사니들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 혐 오에 빠질 뻔했다.
나나 보안관이 왜 이런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지 않게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고양이의 악덕으로 손꼽는 바로 그것이 었다. 저승사자는 우리를 존경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일이냐고? 그런 의혹을 품는 것은 이파리 보안관이나 나를 얕보는 처사가 될 것이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단순하다. 나이에 상관없이 타인에게 존경을 받 고 싶어 하면 아이고 자신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하면 어른이다. 그리 고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어른이다. 어쨌든 고양이 한 마리의 존경을 받지 못해 안달할 정도로 유치한 작자들은 아니다.
문제는 저승사자가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도시라면 상관없겠지만 우리 도시처럼 작은 개척 도시에서는 그 런 풍문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사람들 이 두려워하고 있도록 내버려 둘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저승사자 가 평범한 고양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저승사자가 간 단한 책략과 사소한 노고만으로 통제할 수 있는 단순 질박한 동물임을 보여준다면 그런 의혹은 사라질 것이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두렵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이긴 했다.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낮 동안에는 고양이 생포 작전에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고양 이는 어차피 야행성 동물이니 밤에 잡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지는 않겠지. 우리는 주행성 동물이다.
결국 우리는 잠시 저승사자 포획 계획을 보류하고 저승사자가 자신 의 영민함을 드러낼 기회를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무실 주변에 내 봉급을 뿌려놓고 문단속을 철저히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엿새 뒤 우리는 또 한 마리의 새끼를 도 둑맞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든 저승사자의 놀라 운 능력은 둘째 치더라도 그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파리 보안 관은 천사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못된 녀석아. 우리는 근처에도 못 오게 하면서 왜 저승사자는 내 버려 두는 거야?”
천사는 오래전부터 이파리 보안관의 송곳니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 기에 마주 으르렁거리지는 않았다. 다만 보안관을 무시하며 밥그릇에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군요. 도무지 말이 안 돼요. 수고양이는 새끼를 돌보지 않아 요. 혹 저승사자가 제정신이 아닌 수고양이라 해도, 뭐 제정신이라면 그 런 사랑에 빠지진 않았겠지만, 그렇더라도 젖도 안 나오는 그 녀석이 새 끼를 키울 수는 없을 텐데요. 도대체 왜 데려간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너도 이게 무슨 악마의 조화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음. 아직은 판단 보류입니다.”
속마음과 좀 차이가 나는 말을 한 다음 천사를 바라보았다.
주인이 주는 밥 외엔 받아먹지 않는 충견에 대한 전설은 많지만 천사는 그런 전설을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다. 천사는 내가 주는 음식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받아먹었다. 새끼를 두 마리나 잃은 천사를 위로하 기 위해 찾아온 미레일은 그런 모습에 약간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 다. 새끼에게 젖을 주기 위해선 뭐든 먹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미 레일은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다음번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미레일은 살점이 근사하게 붙어 있는 소 뒷다리 뼈를 가지고 나타났다.
어디서 그걸 구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술집 주인 초니가 또 어디서 밀도살을 한 모양이다. 미레일은 그 사실을 가지고 협박하 여소 뒷다리 뼈를 얻어내었을 테고, 의리를 아는 미레일은 절대로 내 게 초니의 범행을 밀고하지 않겠지만 그 뼈다귀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래서 나는 그것이 어디서 났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뼈다귀를 게걸스 럽게 뜯는 천사의 모습을 보던 미레일이 승리감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 을 때 난 심술이 난 듯한 표정도 지어주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새끼 분실 없이 닷새가 더 지났다. 천사와 그 새 끼들이 우리 사무실에 온 지도 열하루가 된 그 날, 잔파드로스 신관이 사무실에 찾아왔다.
천사의 위협 때문에 잔파드로스 신관은 충분히 안전한 거리에서 천 사의 새끼들을 살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진지한지 나와 보안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꽤 긴 시간 동안 새끼들을 관찰한 잔파드로스 신 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모르겠군요.”
“예? 무슨 말씀입니까, 신관님?”
“저 새끼들 말입니다. 꽤 컸는데 여전히 개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모습이군요. 그렇잖습니까?”
보안관과 나는 당황했다. 매일 보고 있었기에 우리는 새끼들의 변화 를 제대로 느끼기 어려웠다. 잔파드로스 신관의 말에 다시 살펴보자과 연 새끼들은 처음 사무실에 데려왔을 때보다 월등히 커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고양이인지 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의 강아지는 귀가 누워 있다. 그 새끼들의 귀는 누운 것도 아 니고 선 것도 아닌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고양이는 이마가 좁다. 그 새 끼들은 넓지도 좁지도 않은 어중간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개는 심 심하면 하품을 하고 고양이는 심심하면 몸을 핥는다.’ 같은 상식은 아 직 적용시키기 어려웠다. 그 녀석들은 걸핏하면 하품을 했고 천사는 시도 때도 없이 그 녀석들의 몸을 핥았다. 고양이에게는 똥오줌가리기 를 가르칠 필요가 없지만 개는 가르쳐야 한다는 상식도 적용이 불가능 했는데, 천사가 지극한 정성으로 다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불안한 얼굴로 천사를 바라보던 잔파드로스 신관은 내 가 내민 찻잔을 붙잡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걸 보면 정말 놀라겠군요.”
“누가 놀란다는 말씀입니까?”
이파리 보안관의 질문에 잔파드로스 신관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속에서 편지 봉투를 여러 개 꺼냈다. 신관은 그것을 모두 보안관에 게 건넸다. 얼핏 보자 보안관 사무실로 오는 공문서들이었다.
“우체국에 있다가 여기로 오는 길입니다. 오는 김에 이곳으로 오는 편지들도 가져왔지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체국엔 왜?”
“이것 때문이지요.”
잔파드로스 신관은 봉투더미 사이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공문서용의 투박한 봉투들에 비해 훨씬 고급스러운 봉투였고 이 미개봉되어 있었다.
“제가 보낸 편지에 대해 대신전에서 보낸 답장입니다.”
“어? 어떻게 오늘 답장이 올 줄 아셨던 겁니까?”
“오늘이 아닙니다. 며칠 전부터 우편 마차가 오는 시간에 우체국에
들르곤 했습니다.”
“아아, 예.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 답장은 무슨 내용입니까? 저게 정 말 악마의 장난이랍니까?”
잔파드로스 신관은 대답하는 대신 봉투를 엄지와 검지로 집은 채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말을 꺼내기가 꽤 힘든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차를 홀짝거리며 기다려야 했다. 봉투 모서리가 뭉툭해졌을 무렵 잔파드로스 신관이 겨우 입을 열었다.
“두 마리를 잃으셨지요?”
이파리 보안관은 불편한 기색을 담아 헛기침을 했다. 잔파드로스 신 관이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질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공사다망하
신 분들인데 개까지 지키셔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지요. 하지만, 남아 있는 두 마리는 꼭 지키셔야겠습니다.”
“지켜야 된다고요?”
“예. 내일이나 모레쯤 이것들을 보러 사람들이 올 테니까요.”
“내일이나 모레? 그렇게 빨리요?”
“편지와 함께 출발했으니까요. 우편마차로 온 편지가 조금 빨리 도착한 겁니다.”
“아아, 예. 그런데 누가 온다는 겁니까?”
“수마이 전투 신관과 신전 기사단 200명입니다.”
차를 마시는 도중에 들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이파리 보안관은 콜록거리는 나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전투 신관이요? 그리고 시, 신전 기사단이요?”
“그렇습니다.”
“왜?”
잔파드로스 신관은 심히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과거의 제 지도 신관님께 자문을 요청했 을 뿐입니다. 악마의 사주 하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은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고 쓰고 그것이 악마의 소행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쭤봤습니다. 제가 편지에 쓴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입 니다. 그런데 제 지도 신관님 대신에 엉뚱하게도 신전 기사단 본부에서 편지가 온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쓰셨지요? 고양이와 개에 관련된거라고?”
“예, 예. 물론입니다. 그 이름 때문에 이상한 오해가 일어날 것 같아서 그것이 개와 고양이의 이름이라고 명백하게 밝혀두었습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그렇게 하면 이해가 더 잘 된다는 듯이 손가락을 하나씩 굽히며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런 오해도 없이, 전투 신관 님과 신전 기사 200명이 온단 말입니까? 개가 새끼 낳은 것 구경하려 고?”
“개가 낳았지만, 그 아비는 고양이일지도 모르잖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신기한 일이라고 해도 신전 기사단이 뭐 하 러 온다는 겁니까? 아무 관련이 없잖습니까? 설마 천사와 저승사자를 중매 맺은 악마를 찾아 싸우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이파리 보안관은 일종의 농담을 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잔파드 로스 신관과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보안관을 바라보았다. 우리 시선 에 놀라 머뭇거리던 보안관은 조금 후 격분하여 외쳤다.
“신관님!”
이파리 보안관의 쇳소리에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렇다. 잠시나마 동요했던 것이 창피할 정도로 몽상 적인 이야기다. 저승사자에게 농락당하며 보낸 며칠이 예상외로 많은 정신적 피로를 남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잔파드로스 신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럴듯하군요.”
이파리 보안관은 그만 맥이 쭉 빠진 것 같았다.
“신관님. 지금 진심으로 하신 말입니까?”
잔파드로스 신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우리 도시에서 가장 성스러운 인간은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을 참 근사하게 지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표정이 반갑지 않았다. 고맙게도 신관 은 우리를 오랫동안 애타게 하지는 않았다.
“물론 보안관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안관님의 말씀 덕분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군요.”
“그게 뭡니까?”
“모피어.”
“예?”
“오래된 야사에 그런 것이 있지요. 엘프 삼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털이 난 물고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죠. 그것이 어쨌다는……………!”
허공에 있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파리 보안관의 말끝을 훔쳐간 것 같았다. 나는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숨을 몰아쉬 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천사가 웅크리고 있는 구석 쪽을 바라보았다. 오 랫동안 나와 보안관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곳은 우리 사무실과 아무 관련이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끼들의 침과 분변 찌꺼기와 털이 먼지와 뒤섞여 바닥과 벽 아랫부분에 끈끈하게 달라붙 어 있었다. 벽이 땀을 흘린 것처럼 보인다. 젖내와 노린내가 뒤섞인 규 정할 수도 없고 친근하지도 않은 냄새가 흠뻑 배어 있는 그곳에서 천 사는 두 발에 턱을 얹은 채 눈을 치켜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새끼들의 모습을 찾았다. 그것들은 천사의 몸 일부분인 양 그 어미에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고 천사의 늘어진 털이 그것들을 뒤덮고 있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예전에 잃어버렸다가 우연히 되찾은 편지내용을 다 알고 있고, 그저 읽는 행위 자체를 위해 읽게 마련인)를 보는 눈으로 그 광 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믿기 어렵지만, 세상에는 징조라는 것이 있지요.”
그 말을 자기 의자에 대신 앉혀놓고 잔파드로스 신관은 부스스 일 어났다.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묵례하고는 떠났다. 이파리 보안관 과 나는 ‘어’나 ‘에’ 같은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를 보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시장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잔파드로스 신관이 떠나고 얼마 후 우리 사무실로 뛰어든 몬도 시 장은 자신의 외침에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이는 보안관과 보안관 조수 의 모습에 당황했다. 시장은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라 판단하고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링크 백작과 제도 기사단 200명이 여기로 온다고 했소, 보안관”
이파리 보안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잔파드로스 신관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잘못 아시고 계시는군요. 수마이 전투 신관님과 신전 기사단 200명입니다.”
당황한 몬도 시장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구겨진 편지 를 꺼낸 시장은 그것을 펴 읽기 시작했다. 같은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 서 읽는 듯 시장의 눈이 자꾸 위아래로 움직였다. 시장은 편지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아니오. 링산크 백작과 제도 기사단 200명이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요, 보안관?”
이파리 보안관은 여전히 시장이 뭘 잘못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했 다.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낀 내가 보안관을 대신하여 시장이 내민 편 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었다.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아래턱을 덜덜 떨면서 보안관과 시 장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도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숨소리를 죽였다. 그래서 내 가냘픈 목소리가 꽤 잘 들렸다.
“보안관님.”
“왜? 말해.”
“링크 백작과 제도 기사단 200명’도’ 오는 모양입니다.”
“도?” “도?”
두 사람은 똑같은 말을 외쳤다. 나는 더듬거리며 몬도 시장에게 우 리 도시를 향해 오고 있는 수마이 전투 신관과 신전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몬도 시장은 혼절 했다.
혼절한 몬도 시장에겐 꽤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우애 있는 이웃답게 그의 뺨을 때리는 대신 그를 방치해 둔 채 시장이 가져온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는 제도 기사단장이 보낸 것이었다. ‘고 양이와 개가 교접하여 낳았다는 그 새끼들’이라는 표현을 보건대 제도 기사단 쪽에서는 우리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편지의 주된 내용은 몬도 시장이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원활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약간명의 사람을 보내어 돕겠다는 우애에 넘치는 것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이파리 보안관은 그것을 접었다. 마치 글자들이 당 장 곤충으로 변해 날아오를 것을 걱정하듯 이파리 보안관은 힘 있게 종이를 접어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이 파리 보안관은 자신의 송곳니를 톡톡 두드렸다.
보안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임이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안관님.”
“말해”
“이 사태에 원활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어 돕겠다.. 이건 아무 말도 아니에요. 내용이 없는 말이지요. 얼핏 보면 총책임자 가 몬도 시장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우리 시장이 링크 백 작과 200명의 제도 기사단을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따라서 이 건 우리 병력을 보낼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 어요. 뭔가 우리 쪽에 알릴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이파리 보안관은 불성실한 자세로 입술을 툴툴거렸다. 그리고 느닷없이 말했다.
“몇 명이지?”
“예?”
“신전 기사단 200명에 제도 기사단 200명 기사만 400명인데, 종자 들까지 치면 모두 몇 명이지?”
“어, 기사 각자의 재산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한두 명 데려오는 기 사도 있을 테고 대여섯 명쯤 데려오는 기사도 있겠지요. 이런 대규모 파병일 경우엔 기사 숫자의 네 배라고 생각하면 대충 맞습니다. 그러면 400명에 1600, 모두 2000명 정도군요.”
내 말이 우습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피식 웃었 다. 그는 낄낄거리듯 말했다.
“제기랄. 개새끼 네 마리 때문에 전쟁도 치를 수 있는 병력이 움직인 다는 말이군? 하!”
이파리 보안관은 갑자기 주먹을 뻗어 책상을 내리쳤다. 쾅 소리에 몬도 시장이 깨어났지만, 보안관은 시장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 했다.
“우습기 짝이 없는 말이잖아. 대신전이든 제도 기사단이든 정말 궁 금하다면 기사 한 명씩만 보내도 충분해. 그것이 훨씬 싸게 먹히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이야. 기사를 200명씩 소환해서 파견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그 병력을 이곳으로 보내는 것만으로도 대신전과 제도 기사단은 몇 달 치 예산을 까먹게 될걸. 불확실한 일 때문에 그런 돈 잔치를 벌일 수는 없단 말이야 알겠냐, 티르?”
“뭔가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은 저도 짐작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어서 유감이지요.”
내 대답에 보안관은 심술 사나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손을 뻗어 책상에 놓여 있던 편지를 집었다. 그리고 깨어난 몬도 시장에게 내밀었다. 아직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몬도 시장은 엉겁 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파리 보안관이 말했다.
“제도 기사단도 편지와 함께 출발했습니다. 그러니 두 기사단은 모 두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하겠지요. 시장님. 절대로 진입 허가를 내줘서 는 안 됩니다.”
“엉? 진입 허가라니?”
“도시 진입 허가 말입니다. 이것들을 절대로 시내에 들어오게 해서
는 안 됩니다.”
몬도 시장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꽤 애썼다. 하지만 결국 몬도 시장 은 애처로운 얼굴로 물었다.
“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거지? 그리고 나한테 이 사람들을 강제 할 권한이나 있는 거요?”
이파리 보안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돕고 나섰다.
“당연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시장님. 일반 여행자라면 보안관님이나 제가 여행증 조사하면 그만이지만 이건 군대입니다. 군대가 시장님의 허락 없이 시 경계를 넘으면 그 자체로 이미 전쟁입니다.”
“아, 그런가?”
“예. 시장님이 먼저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수마이 전투 신관님 과 링크 백작님이 시장님께 진입 허가를 요청할 겁니다. 절대로 허락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도와주러 오겠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문전박대를….”
이파리 보안관이 격노하여 말했다.
“이런, 우라질, 예의는 무슨 얼어 죽을! 무장병력이 2000명이나 시 내에 들어오면 그것들이 제아무리 선의에 충만한 것들이라도 도시가 난장판이 될 거란 말입니다! 티르와 나 둘이서 그것들을 통제할 수는 없어요!”
몬도 시장은 겁먹은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무의식적 으로 그런 모양이다. 조금 후 몬도 시장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한번 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맞아. 맞는 말이오. 그럼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겠군.”
내가 이어서 말했다.
“물자나 인력 등 어떤 종류의 지원도 해줄 수 없습니다. 현금으로 구입하겠다고 하면 팔 수야 있겠지만. 그리고 군대 진입이 아닌 개인 자 격으로 시내에 들어오는 것도 제한해야 합니다. 한 번에 들어올 수 있 는 인원은 각 기사단마다 두 명으로 제한하십시오. 그것도 낮에만 들 어올 수 있으며 밤에는 절대로 못 들어옵니다. 일몰 후에 시내에서 보 이면 전투 신관이든 백작이든 무조건 체포하겠다고 하십시오.”
“그렇게까지?”
“아니요. 더 있습니다. 들어올 수 있는 두 명당 소지할 수 있는 무기는 한 자루뿐입니다.”
몬도 시장은 황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를 달래듯 말했다.
“기사라서 그나마 한 자루를 인정해 주는 겁니다. 사실 비무장으로 들어오라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이건 상당히 예우해 주는 겁니다. 그쪽 에서도 상식이 있다면 이해하고 오히려 고마워할 겁니다.”
“아, 그래 그래 알았어.”
“그리고 그 명령을 서면으로 작성해서 확인하고 사본을 세 부 작성하십시오.”
“세부? 왜?”
“대신전과 제도 기사단 본부, 그리고 제국 행정성에 보내야 하니까 세부입니다. 수마이 전투 신관님과 링크 백작님에겐 도착하면 구두 로 명령하면 되겠지요. 혹 생각나는 곳이 있으시면 몇 부 더 작성하셔 서 다 보내셔도 됩니다. 지금 당장 시청에 가서 작성하십시오. 오늘 내 에 보내야 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진입 불가, 지원 불가, 들어올 수 있 는 건 낮 시간에 두 명과 무기 한 자루 이해하셨지요? 서두르십시오!” 몬도 시장은 엉덩이를 걷어차인 사람마냥 황급히 달려나갔다. 문이 닫히며 난쾅 소리의 여운이 사라질 무렵 이파리 보안관은 씩 웃었다. “구경 잘했다, 티르.”
나도 보안관처럼 여유 있어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이 마를 닦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것이 고작이었다. 갑자기 사무 실이 지나치게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목깃을 잡아당기며 말 했다.
“보안관님.”
“말해.”
“2000명이나 되는 병력이 왜 오는 걸까요?”
이파리 보안관은 손을 뻗어 천사 쪽을 가리켰다.
“저놈들 때문에 오잖아.”
“저놈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 거죠?”
“몰라. 관심 없어.”
“정말 그렇게 내 할 일만 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할 겁니까? 조금 전 에 시장님을 윽박질러서 쫓아 보내는 것을 돕긴 했지만, 저는 사실 시 장님 붙잡아놓고 생각나는 사람 다 불러 모아서 이 일에 대해 토의해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공청회나 토론회 라도… …..”
“없어”
“왜죠?”
“바보들이 바보짓 하는 걸 가지고 뭐라 할 수 있나. 그건 바보의 권 리인데 난 내 할 일만 할 거야.”
“이것이 끔찍한 재난의 징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2000명이나 되는 병력을 여기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징조를 고려하는 것이 그렇게 바보 짓입니까!”
이파리 보안관은 볼을 부풀렸다가 후 하는 소리를 내며 입김을 내뿜었다.
“아니, 징조 같은 걸 믿는 건 바보짓이 아냐. 나도 그러는걸.”
“예?”
“개구리가 울고 달무리가 끼고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올 징조야. 그렇다면 나는 그 징조들을 보고 비를 피할 준비를 하지. 그런 건 바보짓이 아냐”
“그럼 뭐가 바보짓이라는 거죠?”
이파리 보안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보안관은 숫돌과 대야를 찾아와서는 장검의 날을 세웠다. 뭐라고 악을 써볼까 하다가, 필요한 일 처럼 여겨졌기에 나 또한 그렇게 했다.
이파리 보안관이 방관자적인 입장을 지키고 싶다면 방해하고 싶지 는 않다. 나는 아마도 여기로 오는 자들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신전 기사단과 제도 기사단은 다음날 오후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시 바깥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요구 조건 을 전달해야 하는 몬도 시장에게 다행스럽게도 그즈음 안셀은 자신의 용감성과 기민함, 그리고 투철한 책임감에 어울리는 직업은 전령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셀이 비장한 표정으로 떠나고 나서 얼마 후 두 기사단이 네펜지스 강 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몬도 시 장은 그 움직임에 대해 불안해했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툴툴거리며 설 명했다.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 야영지를 건설하려는 겁니다.”
얼마 후 돌아온 안셀이 이파리 보안관의 추측을 확인해 주었다. 그 들은 곧 야영지 건설에 들어갔다. 전투 거점이라 할 만한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놀라운 광경을 난생처음 보는 우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황제가 우리 도시를 파괴시키기로 결심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신전 기사단과 제도 기사단이 야영지를 건설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 또한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런 소문을 잠식시키 기 위해 꽤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일을 하는 동안 오후가 다 지나갔다. 두 기사단에서 파견한 전 령들이 달려온 것은 일몰 직전이었다. 그들은 내일 아침에 도시 입구 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하고는 체포될 것을 염려하며 황급히 돌아갔다. 시장이 내건 조건은 모두 받아들여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시장 저택으로부터 몬도 시장이 몸살에 걸렸다는 기 별이 왔다. 시장 저택으로 달려간 보안관은 참을성 있게 시장의 넋두리 를 경청한 다음 도시 입구로 나가서 바람 좀 쐬면 낫는다는 처방을 제 시했다. 몬도 시장은 죽을상을 한 채 끌려 나왔다. 시장과 보안관, 나, 상급자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잔파드로스 신관,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 지만 안셀이 포함된 시 대표자 일행은 두 기사단의 진지가 동시에 시 야에 들어오는 위치까지 나가서 멈춰 섰다. 보안관의 처방은 정확했다. 시장의 몸살은 싹 사라진 것 같았다.
기사단 측에서도 우리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두 진지에서 두 명씩 모두 네 명의 기수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말을 천천 히 몰아 다가왔다. 다가오는 자들의 숫자를 몇 번이나 세어본 몬도 시 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기수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말에서 내렸다. 우리 측에서 아무도 말을 타고 있지 않기 에 그런 것 같았다.
통성명이 오갔다.
제도 기사단 쪽에서 나온 자들은 링크 백작과 핏골이라는 이름 의 기사였다. 허리에 큼직한 칼을 찬 링크 백작은 꽤 사나운 인상을 하고 있는 오크였고 눈에서는 영민함이 번득였다. 핏골은 좀 마른 체구 에 팔다리가 엄청나게 긴 트롤이었고 싸움에 능해 보였다. 신전 기사단 측에서 온 수마이 전투 신관과 기사 파린세도 녹록잖은 인물들로 보였 다. 수마이 전투 신관은 인간이었지만 그 체격이 트롤에 범접할 지경이 었다. 들고 있는 전투 망치는 내가 다룰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운 크기 였다. 그를 수행하고 있는 기사 파린세 또한 칼밥을 꽤 먹은 것 같은 손 을 가지고 있는 엘프였다.
의례적인 인사말까지 끝나자 수마이 전투 신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러면 그 동물을 보러 갈까요?”
상쾌한 태도였다. 이곳의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곧장 자기 용건으로 돌입했으니 정녕 태도 만큼은 상쾌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윽박지르기의 교과서적인 모습 이었고 단숨에 우위를 점해서 그 상황을 고정시키려는 의도가 명백하 게 보였지만, 사람 좋은 우리 시장은 자신이 압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 같다. 시장의 입은 당장이라도 그러자고 말할 것 같았다. 내가 재빨리 말했다.
“이미 알려드렸지만, 무기는 하나씩만 가지고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내가 갑자기 끼어들자 수마이 전투 신관은 약간 짜증이 난 것 같았 다. 전투 신관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어 동행하고 있는 기사 파린세를 가리켰다. 파린세는 자신의 허리를 보여주었고 거기엔 빈 칼집이 매달 려 있었다. 링크 백작 또한 기사 핏골을 가리켰다. 핏골은 양손은 물 론이고 허리에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누가 봐도 우리측의 요 구 조건이 성의 있게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할 법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가’에 해당하지 않는다. 나는 링산크 백작의 왼팔을 가리켰다.
“방패를 가지고 오셨군요.”
링크 백작은 성마르게 말했다.
“방패는 무기가 아니지 않소. 보다시피 여기엔 내 가문의 문장이 들 어 있소. 설마 가문의 이름 아래 명예롭게 행동하고 싶어하는 내 욕망 을 탓하지는 않으시겠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방패 뒷면에 있는 다트 12개는 분명히 무기 고, 백작님 가문의 명예와 상관이 없는 물건일 거라 생각합니다. 내주 십시오.”
링크 백작의 얼굴이 굳은 것과 몬도 시장이 이상한 신음을 흘린 것, 그리고 이파리 보안관이 칼자루 위에 손을 얹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깐 동안 링크 백작은 시치미를 뗄까 하는 유혹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12개라는 숫자까지 정확하게 거론된 이상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링산크 백작은 포기했다.
“빌어먹을. 떼놓는 걸 잊었군. 돌아가면 종자 녀석을 박살 내야겠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소? 눈이 날카로우시군.”
그야 제도 기사단의 4단계 무장은 제국군 돌격기병의 그것을 모방 한 것이니까 알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작은 방패 뒤에서 다트 들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자 갑자기 안셀의 활용 방법이 떠 올랐다. 나는 그것들을 안셀에게 주었고 다행히도 안셀은 기뻐하며 받 아들었다. 다시 돌아선 나는 링산크 백작의 허리에 있는 커다란 칼을 가리켰다.
“칼도 내주십시오.”
“무슨 개수작! 무기 한 자루는 휴대할 수 있다고 했잖소!”
“물론입니다. 하지만 백작님께선 흥미로운 정강이받이를 차고 계시 는군요. 그 정강이받이들을 백작님의 허리띠에 연결하면 원래 철편을 쓰던 사람에겐 충분한 무기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철편 사용자들은 철편에 휘말릴까 봐 망토 같은 것을 착용하지 않는 데, 동행하신 핏골 기사님께서도 그런 차림이시군요. 칼을 선택하시겠 다면 정강이받이는 포기하시지요.”
링크 백작의 정강이받이는 아예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좀 다를 뿐 이 역시 원래는 제국군의 경험 많은 보병들이 부리는 묘기 중 하나다. 백작이 자기가 배운 기술의 근원을 제대로 알고 있다 •면 내가 제국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 로 없다. 군대는 다른 자들에게 뭘 배웠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싫어하 는 집단이니까.
이파리 보안관은 웃고 싶은 기분과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 얼굴이 꽤 섬뜩하게 변했다. 거의 협박하는 표정으로 보일 만큼, 링산크 백작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으로 나와 보안관을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혔다. 그는 손수 정강이받 이들을 푼 다음 그것을 내팽개쳤다. 그것들을 정중하게 집어 들어 역 시 안셀에게 건넸다.
“도시에서 나가실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링크 백작은 얼음장 같은 얼굴을 해보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인사 를 하고 신전 기사단에서 온 자들 쪽을 쳐다보았다. 대충 훑어보았지 만, 수마이 전투 신관이 들고 있는 전투 망치 이외에는 다른 무기가 보 이지 않았다. 난감했다. 제국군으로부터 많은 것을 표절한 제도 기사단 과 달리 신전 기사단은 자신들의 고유한 무기 체계를 가지고 있다. 나 는 그들의 무장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몸수색을 요구 할 수도 없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링크 백작이 난폭하게 말했다.
“수마이 전투 신관. 이 보안관보의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군요. 창피 는 내가 당한 걸로도 충분하니, 적발당하기 전에 당신 손목에 찬 투검 과 망치 자루에 숨겨놓은 단검을 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마이 전투 신관은 표정을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가 통제할 수 없는 짧은 순간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스치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수마이 전투 신관은 곧 차분하게 말했다.
“항상 가지고 다니던 거라 그만 떼놓는 것을 잊었군요. 충고 고맙습 니다, 백작”
전투 신관은 투검과 단검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고는 뒤로 돌았다. 안셀에게 그 물건들을 건네며 재빨리 이파리 보안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파리 보안관의 표정을 보고 나와 같 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링크 백작이 벼락같이 외 쳤다.
“그럼 이제 이 똥구덩이 같은 도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겠지? 어 서 들어갑시다! 그 개새끼인지 고양이 새끼인지 모를 것을 보러 왔으 니.”
몬도 시장은 이 폭언에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를 대신하여 이파 리보안관이 침울한 표정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보안관 사무실로 향하는 일행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보다 더 많은 고민이 동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마이 전투 신관과 링산크 백작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어떻게든 대화의 물 꼬를 트려 애쓰는 몬도 시장의 노고에도 보답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뭔 가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기를 죽여 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실수였던 것 같다. 내가 건드린 부분은 옆구리가 아니라 역린 인 듯하다. 몬도 시장은 몸살이 재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안관 사무실 앞에서 다시 사소한 충돌이 일어났다. 체격 좋은 네 명의 기사가 포함된 아홉 명의 인원이 들어서기엔 우리 사무실이 협소했다. 누가 밖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잠시 대두되었고 결국 파린세와 핏골, 그리고 안셀이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 결정이 쉽 게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링산크 백작과 수마이 전투 신관은 모두 자신의 수행인과 함께 있으려 했다. 이파리 보안관이 무뚝뚝하게 조정에 나선 후에야 두 사람은 그 조정안에 합의했다.
그리고 수마이 전투 신관과 링산크 백작은 천사의 새끼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왔건 최소한 실망은 하지 않은 것 같았 다. 백작과 전투 신관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새끼들을 바 라보았다. 백작이 먼저 말했다.
“네 마리라고 알고 왔는데, 두 마리뿐이군? 두 마리는 죽었소?”
이파리 보안관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백작님. 그 새끼들의 아비로 추정되는 수고양이가 사무실 에 몰래 숨어들어와서 새끼 두 마리를 훔쳐갔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지켰습니다만 워낙 약삭빠른 놈이라 도리가 없더군요”
도시 입구에서 내가 선점한 우위는 그 순간 사라졌고 우리는 무능 한 시골 사법관의 위치로 전락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알게 된 링크 백작의 난폭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아마 끔찍한 비아냥거 림을 받게 될 것이다. 다행히 수마이 전투 신관은 우리를 놀리기보다 다른 사실에 놀랐다.
“수고양이가? 수고양이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데?”
그건 이미 우리 자신에게도 수백 번 이상 던져봤던 질문이고 질문 하는사람이 전투 신관으로 바뀐다 한들 새삼스럽게 답이 떠오를 리도 없다. 그때 링크 백작이 천사의 새끼에게로 불쑥 손을 뻗었다. 그러 면 큰일 난다고 외치려 했을 때 수마이 전투 신관이 먼저 움직였다.
수마이 전투 신관은 백작의 손목을 붙잡았다.
링크 백작은 살기 어린 눈으로 수마이 전투 신관을 노려보았다. 백작은 수마이 전투 신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손이 아플 법도 하 지만 수마이 전투 신관은 차분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백작님. 이것들이 진정 악마의 작품이라면 손을 대는 것은 섣부른 일입니다.”
타당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링크 백작의 눈에 강한 불신감이 스치 는 것을 놓친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링크 백작이 뭐라 말 하려 할 때 수마이 전투 신관이 그를 외면하며 말했다.
“음. 볼수록 특이하군요.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지 못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것들은 어느 쪽에 속하는지 말하기 어렵군요. 백작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내 예상과 달리 놀랍게도 링산크 백작은 부드럽게 말했다.
“글쎄요. 나도 쉽게 판단할 수 없군요.”
“그렇습니다.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일단 볼 것은 봤으니 점심이라도 들면서 이 동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저희 진지로 가시지요. 다행히 요리사를 데려올 수 있었으니 대접에 소 홀함이 없을 겁니다.”
몬도 시장은 질겁했다. 우리 착한 시장은 먼 데서 오신 손님들을 어 찌 대접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말하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시장의 친절한 제안은 어디에서도 호평받지 못했다. 무례하지 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근하지도 않은 어조로, 수마이 전투 신관은 신전 기사단의 진영으로 자리를 옮겨 논의를 나누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링산크 백작도 동의했기에 몬도 시장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거절했다.
“초대 감사드립니다만 나와 티르는 여기 남겠습니다.”
“식사하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지요.” 똑같은 말이 훨씬 따사롭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수마이 전투 신관 이 말할 때는 거북함만 느껴졌다. 이파리 보안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안관 사무실을 비워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논의를 나누는 동안 이 동물들도 지켜야 할 테고요. 시장님. 잔파드로스 신관 님과 안셀과 함께 전투 신관님의 초대에 응하시지요. 도시는 저희들에 게 맡겨두시고.”
수마이 전투 신관은 더 이상 요청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도시 입구 까지 일곱 사람을 배웅한 다음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이파리 보안관은 창문 쪽에 붙어서 바깥을 훔쳐보았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뒷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살 폈다. 유념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뒷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이파리 보안관 또한 창문에 커튼을 치고 돌아왔다. 우리는 각자 의자 를 들고 사무실 가운데로 모였다. 의자를 맞대고 머리도 맞댄 후 보안 관이 낮게 말했다.
“서두 궁리하기 귀찮아. 그러니까 네가 시작해.”
“그러지요. 신전 기사단과 제도 기사단은 동맹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상대편이 저것들을 가지게 될까 봐 겁내고 있어.”
“잔파드로스 신관은 수마이 전투 신관 때문에 꽤 입장 곤란한 점심 식사를 하게 되겠군요.”
“링산크 백작은 우리 시장을 들볶겠지. 안됐군.”
“그런데 이 족보 골치 아픈 새끼들이 도대체 무슨 엄청난 가치가 있는 걸까요?”
“저것들은 2000명의 피를 뿌릴 가치는 된다고 생각하나 보다.”
얼굴 피부가 갑자기 석회암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설마…… 진짜 전투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도 그 생각하지 않았냐?”
인정했다.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보조무장을 지적해서 약이나 올려주려고 했는데 무의식적으로 가져온 것이 아니더 군요. 링산크 백작은 자기 무장을 뺏기자 수마이 전투 신관의 무장도 내놓게 했지요. 그렇다면 백작과 전투 신관은 그 무기들을 서로에게 쓸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봐도 될 겁니다. 하지만 조금 전 링산크 백작이 수마이 전투 신관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을 보고는 생각이 좀 바뀌었습 니다. 둘이 정말 적대적이라면 설마 지휘관이 상대 진영으로 들어가겠 습니까?”
“아니 들어갈 수 있어.”
“예?”
“이 소동은 저 새끼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 잊어먹었냐? 두 기사단이 싸운다면 그건 저것들 때문이라는 거지. 그런데 지금 저것들은 여기 있단 말이야. 그러니 당장은 싸울 일이 없지. 게다가 상대 진영 으로 들어가면 상대편이 자기 몰래 이것들을 훔치러 오지 않나 감시할 수도 있거든.”
흠칫하는 기분에 다시 창문과 뒷문을 돌아보았다. 나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그리고 핀잔을 들은 다음 조금 크게 말했다.
“훔치러 올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시장과 신관을 들볶는 것부터 시작하겠지. 일단 두 사람이 돌아오 면 그다음에 입장 정리하자. 훔쳐가게 내버려 둔다는 방법도 있으니 까.”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훔쳐가게 내버려 둔다.’라. 두 기사단 에겐 저 새끼들을 가져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 에겐 그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면 훔쳐가게 내버려 두는 것은 괜찮은 방법이다. 그럴 경우엔 우리가 둘 중 한쪽에 게 새끼를 내줌으로써 다른 쪽의 미움을 받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있으 니까.
“하지만 어느 쪽이 훔쳐가게 합니까?”
“뭘 고민하냐. 이런 경우엔 선착순이지.”
이파리 보안관은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했다. 나는 상체를 뒤로 당기고 팔짱을 꼈다.
“보안관님. 저 작자들이 저것들 때문에 전투도 불사하려는 이유가 뭔지 정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안 궁금해.”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궁금한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러면 제가 저것들을 지켜도 되겠습니까?”
“훔치러 온 녀석 붙잡아서 물어볼 생각이지? 다칠 수도 있고 큰 싸
움 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걸 핑계 삼아 저 바깥의 녀석들이 시내로 들어올지도 모르고, 안 돼.”
화가 났다. 이파리 보안관이 지적한 것들은 내가 이미 떠올렸어야 마땅한 것들이다. 천사가 저 계보 혼란스러운 새끼들을 낳은 이후로 나 는 계속 바보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파리 보안관처럼 머리 아픈 문제는 머리 아프길 좋아하는 작자들에게 넘겨버리고 관심 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스스로 노력해 봐야 문제를 해결 할 가능성이 없다면 말이다.
“머리 좀 식혀야겠습니다.”
“그럴래”
“예. 순찰돌고, 초니의 비밀 도살장이나 덮쳐야겠습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피식 웃으며 뜨개질 거리를 집어들 뿐이었다. 보안 관도 나처럼 초니가 새로 만든 비밀 도살장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모양 이다. 그리고 고기를 거의 다 쓴 후에 덮친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나와 마찬가지고.
법의 위대함은 사람의 위대함과 마찬가지다. 분명히 법은 존중받아 야 하는 것이지만, 개개의 사람들처럼 법도 황당하거나 부조리한 부분 들을 가지고 있다. 고기를 먹으려는 우리 시민은 누구나, 그러니까 적당한 담력만 있다면 태연하게 짐승을 죽이지만 주점 주인 초니는 그럴 수 없다. 정식 도축장에서 도축된 고기만이 음식점에서 사용될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니는 문맹자다. 문맹이 여러모로 불편한 것은 분 명하지만 초니에게 특별히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도축 면허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초니는 절대로 무법자 같은 사람은 아니고 한때는 글을 배우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문자는 초니에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초니는 죽는 동물들이 문맹자의 공격에 더 비통 해할 리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초니는 밀도살을 선택했으며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게으름뱅이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장검을 차고 밖으로 나왔다.
초니의 비밀 도살장은 도시 외곽의 측백나무관으로 가다가 도중에 노천광 쪽으로 방향을 바꿔 반 시간쯤 걸어간 곳에 있다. 나는 산책하 는 기분을 느끼려 애쓰며 숲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측백나무관이라는 이름의 원인이기도 한 측백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걷고 있노라니 그럭 저럭 평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만 향하던 눈길을 밖으로 돌려보았다.
모든 곳에 가을이 있었다.
가을은 자신의 붓끝으로 여름이 남겨둔 것들을 세심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실로 가을은 전체를 한꺼번에 보는 능력이 있는 채식가彩飾家) 이며 지워진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님을 아는 문장가다.
초니의 일처럼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은 일이 있다면 한편 으로는 애초부터 알 필요가 없는 일도 있을 것이다. 고양이와 개 사이에서 나온 새끼에게 무슨 엄청난 가치가 있건, 내게 1000명의 병사들을 동원할 능력이 없다면 그럴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나는 관 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비겁자의 논리 같으니!
몰라도 되는 일 같은 것은 없다. 그걸 알기 전까지는 그것이 몰라도 되는 일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워지려면 먼저 씌어야 한다. 쓰이 기 전에는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가을은 여름을 구축(驅逐하지 않는 다. 다만 여름이 구축(構)한 것을 조심스럽게 무너뜨릴 뿐이다. 가을 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그 느리고 세심한 파괴 때문이다.
나는 팔다리를 더 빠르게 놀렸다. 어쩌면 달려가는 것과 비슷했을지 도 모르겠다. 초니의 도살장을 점검하고 빨리 내 오두막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끝내고 시장 저택으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 으면 신전에라도. 몬도 시장과 잔파드로스 신관 중 한 명은 두 기사단 의 속셈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를 얻어왔을 것이다. 두 사람이 아무것 도 가져오지 못했다면 사무실 주변에서 망을 봐야겠다.
비록 훔쳐가게 내버려 두는 것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해도 왜 그 래야 하는지는 알아야겠다.
초니의 도살장이 가까워졌다.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측백나무 의 그윽한 향을 단번에 사라지게 만드는 악취가 풍겨왔다. 초니가 좀더 가까운 곳에서 도살장을 차렸다면 우리는 축농증 환자 흉내를 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냄새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곧 간이 건조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거의 무너져 있었지만 남아 있는 흔적을 보니 소 한 마리를 잡은 것 같다. 아래에는 장기간에 걸쳐 불을 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위를 조금 둘러보자 적당히 은폐되어 있는 반지하 움막이 보였다. 건조시킨 고기를 보관하는 곳이리라. 움막 입구를 뒤덮은 잔가지들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섰다.
난감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상당량의 고기가 남아 있는 보관소 내부가 보였다. 초니는 이 도살장이 절대로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조법을 채택한 것 같다. 아무래도 어제나 그 제쯤 건조를 마치고 보관을 시작한 것 같았다. 보관소를 조금 더 둘러 보자 내 짐작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보관소는 꽤 공들여 만들어진 곳이었고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곳이었다. 초니는 가을은 물론 이거니와 고기를 보관하기 쉬운 겨울 동안 내내 이곳을 이용할 작정인 것 같았다.
몇 번 더 보관소 안쪽을 둘러본 다음 이곳을 잊어야 한다고 결정했 다. 초니의 밀도살 범죄가 밝혀질 시기는 늦겨울이나 초봄 정도가 좋을 것 같다. 나는 다시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흐음. 이 계단도 이곳이 꽤 오랫동안 사용되리라는 증거로군.
계단에 발을 올렸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고기와 갈 고리, 튼튼하게 만들어진 벽과 천장 무엇이 나를 붙잡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조금 후, 나는 주의를 끈 것이 시각이 아닌 후각이었 음을 깨달았다. 그곳에는 맡으리라 예상할 수 없는 냄새가 있었다.
그 냄새를 따라갔다. 보관소의 구석 쪽이었다. 구석 앞까지 걸어간 다음 코를 벌름거렸다. 아래쪽이었다. 약간 고민하다가, 보는 사람도 없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바닥에 손을 짚고 개처럼 냄새를 맡았다.
냄새 대신 다른 것을 먼저 느꼈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굴이 있었다. 보관소의 어둠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굴이었다. 손을 뻗어본 후 에야 그곳에 굴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냄새는 그 안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간단히 해석되는 냄새가 아니었다. 그리고 코는 쉽게 무뎌지는 감각 기다. 더 이상 냄새를 느낄 수 없을 때까지 그 냄새를 빨아들인 다음 나는 손을 집어넣어 굴의 크기를 확인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몇 가 지 가설을 세우며 측백나무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코의 기능이 회복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 때까지 그러다가 나는 다시 보관소로 돌아갔 다. 그리고 조금 전의 행동을 되풀이했다.
가설 중 하나가 맞았다. 여러 가지 냄새들 가운데는 내가 기대하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토사물의 냄새였다. 나는 똑바로 일어서서 조금 전까지 냄새를 맡던 그곳을 내려다보았다.
“저승사자.”
혹 초니가 올지도 모르기에 보관소를 빠져나왔다. 더 이상 도살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측백나무들 사이를 걷다가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대단하다. 보안관 사무실에서 두 마리 새끼를 훔쳐낸 것도, 고기가 가득한 이곳을 은신처로 선택한 것도, 혹 초니에게 들킬까 봐 굴을 판것도 모두 대단하지만 나는 저승사자가 새끼들을 먹인 방법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수컷인 저승사자가 새끼들에게 젖을 줄 수는 없었다. 대신 저승사자는 초니의 고기를 반쯤 소화시켜 새끼들에게 토해주었 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세상에서 그런 짓을 하는 수고양이가 몇 마리 나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장소를 두고 어디로 간걸까?
가끔 들르는 초니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고 먹을 것은 가득 하다. 내가 올 것을 짐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곳을 떠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손으로 더듬어본 굴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 고기 냄새를 맡고 저승사자가 상대할 수 없는 큰 동물이 온 것일까? 아니다. 만약 이곳에 고기 도둑이 있다면 초니는 입구를 단단히 막았을 테고 그랬다면 저승사자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은 도심에 서 먼 곳이긴 하지만 가까운 곳에 측백나무관도 있고 광산들도 있어 큰 동물들이 마구 돌아다닐 만한 곳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곳을 떠났을까? 저승사자에겐 아직 훔칠 새끼가 두 마리 남아 있는 데. 한 번에 한 마리씩 물어 나른다면 앞으로도 두 번은……………
황급히 일어서다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 부으며 간신히 자세를 회복했다. 그리고 사무실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빌어먹을! 남아 있는 새끼는 두 마리지만, 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이 다! 저승사자는 물론 새끼 한 마리만 물어 나를 수 있다. 하지만 천사 또한 한 마리를 물어 나를 수 있다. 다음번이 그 구성 복잡한 가족의 마지막 탈출인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오늘이다. 저승사자는 도시로 다가온 군대와 보안관 사무실로 온 갑옷 입은 사람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되는 추측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나는 달 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성을 따진다면 애초에 개와 고양이가 교미 한다는 것부터가 이성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 황에서는 차라리 직감을 믿는 편이 낫다. 그리고 직감은 내게 그날이 오늘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달린 끝에 도심으로 돌아왔다. 멀리 보안관 사무실이 보였을 때 불안감이 가일층 심화되는 것을 느꼈다. 건 물이 표정을 지을 리는 없지만, 그리고 상궤를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괴롭히던 직감은 더욱 뚜렷해졌다. 마지막 힘 을 짜내어 멈춰 서려는 다리를 채근했다. 보안관 사무실을 몇십 미터 남겨두었을 때였다.
분노에 찬 보안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보안관 사무실의 창문 이 박살나며 무엇인가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우뚝 멈춰 섰다. 폭발하는 잔해 속을 날아 대로 위에 선 것은 입에 한 마리씩 새끼 를 물고 있는 저승사자와 천사였다.
나는 아래를 향해 말했다.
“됐습니다. 내려주세요.”
나를 무등 태우고 있던 아인켈 우체국장은 내 다리와 손을 붙잡으며 아래로 내려서도록 도와주었다. 바닥에 서자 우선 바람 때문에 얼얼해진 귀를 좀 문질러야 했다. 우리 도시에서 감시탑으로 쓰일 정도 의 전망과 높이를 갖춘 곳은 신전의 종탑뿐이었고 그곳을 휘감아 도는 밤바람은 뼈에 사무치리만큼 강했다. 불빛이 위로 새지 않도록 가리개 를 펼쳐놓은 랜턴에 손을 가져가 비비며 나는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말 했다.
“들판에 불난 것 마냥 잔뜩 깔려 있습니다. 모두 손에 작대기를 들 고 덤불을 두드리고 있고요. 여우 사냥이라도 하는 것 같군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하진 않겠지만, 저승사자와 천사가 새끼들을 데 리고 저 사이를 뚫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직 소동이 없는 걸 보니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관망 중인 것 같습니다.”
몬도 시장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신전 기사단과 제도 기사단 의 전 병력을 도시 바깥에 풀어놓은 행위는 충분히 포위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이것은 위법과 적법 사이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행동이 다. 그리고 수마이 전투 신관과 링산크 백작 중 누구도 그런 작전 행동 에 대해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천사와 저승사자 를 놓친 것만으로도 우리가 수치를 알아야 하며 권리 주장 따위는 삼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것은 너무 하다. 미레일이 천사의 쇠사슬을 조금 늦춰놓았을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미레일이 악의를 품은 것은 아니다. 그 애는 그저 내가 보지 않을 때 천사가 답답하지 않도록 목줄을 조금 느슨하게 해 놓은 것뿐이다. 하지 만 미레일이 만들어준 틈은 천사가 난동을 부리다가 목을 빼낼 정도는 되었다.
나라부스 의장이 품속에서 눈에 익은 쌈지를 꺼냈다. 많이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쌈지 속에서 미나리 줄기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문나 라부스 의장은 그것을 빨면서 말했다.
“차라리 그 개와 고양이가 빨리 발견되는 편이 좋겠군. 그러면 저 자 들도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갈 것 아닌가. 그것들이 이대로 계속 발견되 지 않는다면 저자들은 화를 낼 테고 결국 우리에게도 좀 더 심각한 피 해가 오게 될 거야.”
내가 말했다.
“우리 쪽에서 먼저 강하게 나가는 것이 어떨까요? 애초에 저 자들이 이곳에 온 동기가 모호하잖습니까. 따지고 보면 이건 우리 시민들이 개 와 고양이를 잃은 사건에 불과하고 저들이 저렇게 소동을 피울 명분은 없습니다.”
몬도 시장이 거떻게 변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저자들은 2000명이고 모두 병사야. 티르.”
“상관없습니다. 대신전과 제도 기사단 본부에 정식으로 항의장을 보내지요.”
이파리 보안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해결책이 안 돼. 제도 기사단은 몰라도 대신전 측은 악마 이 야기를 꺼낼 수 있거든. 만약 대신전이 정식으로 악마 토벌을 선언하면 더 많은 기사들이 올 수도 있어. 그러면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이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이파리 보안관은 구석 쪽에 존재감 없이 서 있던 잔파드로스 신관을 한 번 쳐다보았다. 꽤 의도적인 동작이었다. 그 시선 을 피하려던 잔파드로스 신관은 마음을 고쳐먹은 듯 이파리 보안관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보안관님. 제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괜히 크게 만들어 무장 세력을 도시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지금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저승사자나 천사, 그 새 끼들이 아닌 저 무장 세력들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도시의 보안관이 개 한 마리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곤혹스러운데요?”
사람들의 낯빛이 확 변했다. 그들은 일제히 그 사건은 미레일 때문 에 일어난 일이며 이파리 보안관의 실책이 아니었음을 역설했다. 그 태도들은 열정적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말하는 바람에 호소력은 별로 없었다. 한편, 정작 비난의 대상인 이파리 보안관은 아 무 말 없이 발치 근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날카 롭게 말했다.
“용건이 끝나셨으면 모두들 나가주십시오. 이곳은 신전입니다. 심야 에 이렇게 소란을 피워도 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당황이 커졌다. 하지만 잔파드로스 신관은 굳은 얼굴로 앞 장서서 종탑을 내려갔다. 곧 이파리 보안관이 계단을 내려갔고 우물쭈 물하던 우리는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이 신전을 나서자 잔파드로스 신관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졸지에 대로에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웅성거렸다. 하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무 도 없었기에 그 웅성거림은 곧 시들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자 이파리 보안관이 말했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모두 돌아가서 눈을 붙이도록 합시다. 밝은 낮에 맑은 머리로 생각해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적당한 시점에 나온 제안이었다. 이 거북한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싶 어 하던 사람들은 별 불평 없이 이파리 보안관의 말대로 했다. 멀어져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던 보안관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너도 오두막 가서 자고 싶냐?”
“아니요. 사무실에서 자겠습니다. 며칠 동안은 그곳에 있어야겠군요.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겠고.”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가자”
하루 종일 바람이 별로 불지 않더니 밤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건물 과 도로를 타고 슬금슬금 기어오는 밤안개를 보며 밖에서 수색 작전을 펼치고 있는 병사들에겐 큰 장애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잔파드로스 신관한테도 좀 속물 끼가 있군요. 전 투 신관과 신전 기사단이 근처에 오니 목에 힘이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보안관님께 대들다니, 놀랐습니다.”
“네 수준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지 않으면, 그걸로 사람 판단하지는
마라, 티르 잔파드로스 신관은 인격자다.”
“이 와중에 잘잘못이나 따지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인격자입니까?”
“인격자도 화를 낼 수는 있는 법이야. 잔파드로스 신관은 그 새끼들 이 정말로 흉조라고 믿고 있어. 사실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지. 지금 상 황을 봐라. 네 눈엔 이게 콧노래 나올 상황이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바깥에서 험상궂은 병사들이 칼과 불을 들 고 서성일 때 무력한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 잠 못 이루리라. 오, 맙소사. 충격을 받은 나는 이파리 보안관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자기가 여러 번 경고했는데도 상황이 이렇게 되 어버리니 약간 좌절한 거야. 그리고 오만한 무신론자이자 못된 유물론 자인 늙은 오크가 지키라고 맡겨두었던 흉조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화 도 나고, 당연하잖아.”
“그럼 그게 정말 흉조였을까요?”
뭔가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한 것 같다. 이파리 보안관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조금 후 보안관은 고개를 홰 내 저었다. 그리고 조수의 선택폭이 지극히 좁은 자신의 기박함에 대해 뭐 라 투덜거린 다음 말했다.
“티르, 그건 그냥 강아지야. 왜 강아지냐고? 말이 낳으면 망아지고 소가 낳으면 송아지일 수밖에 없는 듯, 그건 개가 낳았으니까 강아지야.”
“저승사자는 천사와 교미했고, 그 새끼를 훔쳤고,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가면서 키웠습니다.”
“알아. 그게 어쨌다는 거야?”
“저승사자가 그 새끼들의 아비라는 증거지요.”
“내게는 저승사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거로 보이는데, 그런 짓을 하는 수고양이가 있냐? 저승사자가 다른 수고양이들처럼 새끼들에게 완전히 무관심하다면 오히려 그 아비라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다만.” 이파리 보안관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예외적인 전제 로 예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삼단논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그 오류로서 많이 거론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승사자가 새끼들의 아비가 아니라면 왜 그런 짓을 하겠습 니까? 다른 이유가 없잖아요.”
“저승사자가 천사를 암고양이로 착각했고, 조그마한 동물을 괴롭히 는 고양이의 버릇 때문에 새끼를 훔쳤고, 율피트가 먹기 싫은 음식을 몰래 식탁 아래의 저승사자에게 뱉어주곤 했다고 생각하면 어때?”
“억지입니다.”
“저승사자가 강아지들의 아비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억지는 아닐 것 같은데.”
말문이 막혔다. 이 논쟁은 애초부터 내가 불리한 것이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논거들을 성실하게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고양이는 강아지 의 아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공리다. 공리는 논쟁의 도구이지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그 공리를 대상으로 논쟁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저승사자가 새끼들의 아비라고 믿고 있었고 이제 그 느낌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내 감정에 충실하려는 맹목적인 욕구 때문에 나는 논리적 함정을 고안했다. 그것을 이파리 보안관에게 던지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이파리 보안관은 따라 멈추며 말 했다.
“너도 들었냐?”
당황하여 간신히 짜낸 논리 함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이파리 보안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파리 보 안관은 나 대신에 이제 한층 짙어진 안개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말발굽 소리다. 밤에 들어오면 체포한다고 했는데…………, 빌어 먹을 놈들이 드디어 막 나오는군. 칼뽑아, 티르”
어깨가 굳었다. 내가 황급히 칼을 뽑아 들었을 때 이파리 보안관은 어느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내 귀에도 말발굽 소 리가 들렸다. 대로에 깔린 포석을 때리는 다가닥, 딱! 하는 무거운 소리. 어떻게 지금까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깊은 생 각에 빠져 있었나? 나는 이파리 보안관의 뒤를 재빨리 따라갔다. 말발 굽 소리가 커졌다. 다가닥, 딱! 이파리 보안관은 칼을 적당히 늘어뜨린 채 멈춰 섰다. 대로 가운데를 가로막듯이 선 이파리 보안관이 외쳤다.
“멈춰라!”
다가오던 말발굽 소리가 잠깐 멈췄다. 안개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이파리 보안관은 상체를 앞으로 조금 숙였 다. 앞으로 걸어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보안관과 내 거리는 몇 미터쯤 떨어져 있었고, 그 거리는 영원히 줄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때 무 엇인가가 포석을 강하게 때리며 굉음을 내었다.
시간이 가혹하게 느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암흑과 희뿌연 안개만 가득하던 공간이 갑작스럽게 거대한 전투마와 기수로 바뀌었다. 마술 같았다. 말과 이파리 보안관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도 되지 않았고 나 타났을 때부터 말은 지나칠 정도의 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파리 보안 관이 말의 발에 걷어채어 날아갔을 때 나는 묘하게도 충격을 느끼지 않았다. 그 모습은 지나치게 무기질적인 광경처럼 보였다. 몸을 비틀며 날아가는 이파리 보안관은 커다란 인형, 아니, 그보다도 더 이파리 보 안관 자신과 관련이 없는 물체 같았다. 바닥을 구르는 이파리 보안관과 그가 있던 자리를 지나치는 말을 보며, 그리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 여 말을 피한 후에도 나는 약간의 난처함과 약간의 우스꽝스러움 외에 는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무슨 말을 외쳤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이파리 보안관에게 접근했는 지도 모르겠다. 이파리 보안관의 몸을 더듬고 그의 피를 손바닥에 묻히 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느렸다. 공간은 쪼그 라들고 있었다. 묘하게도 선명하게 들리는 어떤 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마니 다치셔씀니까?”
소리 소리다. 바람 소리처럼 잠깐. 저런 걸 말이라고 하던가? 그 소 리를 들은 직후 나는 어떤 엘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다른 마술이다! 놀랍군 아냐. 내가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인가? 그랬나? 모르겠 다. 어쨌든 저건 엘프다. 에에에엘프. 저게 엘프지? 그 엘프가 있는 쪽 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이런 소리였다.
“갑짜기 고하믈 치셔서 마리 놀라씁니다. 손 쓸 겨르리 업서씁니다.”
하수구를 흐르는 물소리만큼도 의미를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어쩐지 거슬리는 소리다. 그런데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넌 마를 세워써. 멈춰따가 출발해써.”
이건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소리의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응? 이건 내가 낸 소리인가? 그 순간 시간이 역전되었다. 그리고 이런 말들 이 들려왔다.
‘넌 말을 세웠어. 멈췄다가 출발했어’
갑자기 고함을 치셔서 말이 놀랐습니다. 손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나는 악을 쓰며 기사 파린세에게 달려들었다.
“개자식! 네 말은 분명히 멈췄다가 돌격했어!”
내 돌진에 대응하여 파린세는 점잖게 칼을 뽑았다. 빠른 동작이었지 만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오만했다.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 예쁜 얼 굴을 뭉개주고 싶다. 수십 수백 조각으로 찢어버리고 싶은 가면이다. 그 리고 그 가면 너머에서 은둔하고 있던 공포를 끄집어내어 내 제단에 봉헌하리라 기필코!
정신이 펄펄 끓는 것 같았지만 머리 한편은 무섭도록 맑았다. 나는 파린세가 어떻게 방어할지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단숨에 심 장을 도려낼 수 있었지만 대신 나는 파린세가 방어 태세를 갖출 때까 기다렸다. 그리고 그 방어 위에 내 공격을 작렬시켰다. 파린세의 얼 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촌구석의 보안관 조수가 어떻게?’라고 말하는 표정이군. 틀렸어.
파린세의 허리가 움직일 것이다.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주지. 파린세 의 발이 그 동작을 따라갔다가 찌르기를 위해 비틀어질 것이다. 기다 려주지. 빨리 움직여라. 지루할 지경이다. 가까스로 찌르기가 시작되려 했을 때 나는 파린세의 옆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리고 찌르기 위해 뒤로 당긴 파린세의 오른팔을 그대로 뒤로 밀어 올렸다.
이번에는 경악의 표정이군. 그것도 아냐.
파린세의 상체가 앞으로 구부러졌다. 느리다. 제발 좀 빨리 와! 내 왼쪽 무릎에 이끼가 끼겠군. 옳지. 이제 다 숙였나? 파린세의 얼굴을 무 릎으로 쳐올렸다. 천천히 위로 솟구치는 파린세의 머리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턱이 위로 충분히 치솟았을 때, 갑자기 그 턱에 구멍을 내어 입에 넣은 음식이 흘러내리게 하면 파린세를 굶어 죽게 할 수도 있다 는 잡념이 들었다.
공포를 내놔라.
파린세의 목에 칼날을 갖다 대고 주의를 촉구했다. 공포를 내놔라. 파린세의 명치를 칼끝으로 간지럽히며 부탁했다. 공포를 내놔라. 파린 세의 칼을 허공으로 날려 보내고 그 뺨을 때리며 애원했다. 제기랄, 공 포를 내놔! 그래야 죽일 수 있단 말이다!
마침내 그것이 나타났다. 파린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 사람 살려!”
고마움에 눈물이 날 것 같다. 마침내 이 녀석의 명줄을 끊어줄 수 있겠군. 나는 땅에 엎드린 파린세를 걷어찼다. 숨 막히는 소리. 감미롭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녀석의 등 위로 훌쩍 뛰었다. 그리고 반대편으 로 걷어찼다. 통쾌한 느낌이 느껴졌다. 지인 중에 접골사 있나? 아, 미안 해 부를 시간이 없겠군. 똑바로 누운 녀석의 가슴을 짓밟았다. 목표물 고정 칼을 위로 던져 거꾸로 쥐었다. 거기 있군. 네 녀석의 울대뼈.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 말은 꼭 네 유가족에게 전해 주지. 나는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멈춰”
눈이 뒤로 돌아가고, 그리고 고개가 따라 돌아갔다. 뒤쪽에서 들려 온 그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뭘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내 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바라보자 피를 닦아 낸 걸레 같은 모습으로 처박혀 있던 이파리 보안관이 보였다. 아냐. 역 시 죽었어. 보고 싶지 않았는데.
보안관의 입이 움직였다.
“티르”
이파리 보안관의 눈이 나를 향했다. 살아 있다!
그 순간 나는 파린세가 도대체 무슨 물건인지 모르게 되었다. 눈 깜 짝할 사이에 보안관 곁으로 돌아온 나는 칼을 팽개치고 보안관의 상 체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들어 올리려다가 움찔했다. 들어 올려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칫 이파리 보안관을 죽이게 될지도 모 른다.
꿈쩍도 할 수 없었던 나 대신에 이파리 보안관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내 손 위에 얹었다. 세상에, 이렇게 차갑다니. 보안관이 말했다.
“하지 마.”
뒤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시끄러워! 나는 이파리 보안관의 입 쪽으로 귀를 가져갔다. 거친 숨소리가 귀를 긁는 것 같다.
“너도 죽는다. 이 멍청아……. 멍청이 하나쯤 죽어도 상관없지 만…………, 도시도 다친다. 내버려 둬.”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응? 뭐라고? 나는 떠오르는 첫 번째 말을 무턱대고 말했다.
“죽지 마세요.”
말해 놓고 보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말 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이파리 보안관에게 들렸던 모양이다. 보안관의 얼굴이 움직였다.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 기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