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호라이즌 (Over the Horizon) – 1화 : 겨울밤
겨울밤
이파리 보안관은 망토에 쌓인 눈을 털며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측백나무관에 좀 들러봐, 티르”
나는 잠시 후에야 그것이 나를 향해 건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조금 전까지의 자 세, 책상에 팔을 괴고 그 위에 머리를 얹어놓은 채 멍한 표정으로 보 안관을 바라보고 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어깨에서 눈을 털어내던 덩치 큰 오크는 멈칫하더니 그제야 나 를 노려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고 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 했다.
“예? 어, 제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파리 보안관은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물론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파리는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말했다.
“응. 측백나무관에 가서 마타피 교수를 좀 만나보라고 했네.”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북서풍이 불고 있었고, 그 광경에서 나는 한 가지 결론밖에 도출할 수 없었다. 저 오크가 드디어 나를 살해하기로 결심했구나.
“보안관님, 북서풍이 불고 있는데 저더러 8킬로미터를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했네.”
“저는 인간이라고요!”
이파리는 내 항의를 무시한 채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보안관 사무실 가운데 놓인 석탄 난로로 걸어갔다. 그러곤 난로 위에 놓아둔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찻잔에 차를 따라 한 모금을 마신 이파리는 그 제야 나를 돌아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 너 아직 안 갔냐?”
……·저 오크는 너무 빨리 배운다. 젠장.
“그만하지요, 보안관님. 도대체 왜 교수님에게 가보라는 겁니까?”
“순찰 도중에 아인켈을 만났어.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고 동시에 심 하게 걱정하고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었지만, 대충 그의 말 을 정리해 본 결과 아인켈은 마타피 교수가 뭔가 끔찍한 걱정거리에 빠 져 있다고 걱정하고 있더군. 어젯밤엔 초니의 주점에서 난동까지 부렸다는 거야. 그건 좀 이상하더라고. 마타피 교수가 난동이라니 내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니까 아인켈이 자기 눈두덩을 보여줬지. 그건 정 말이지 멋지게 부어 있더군. 교수가 술에 취해서 그랬다는 거야. 버나 드 교장과 안셀도 그 자리에 있었고 모두들 교수가 미친 것 같다는 말 을 하더군.”
그건 정말 이상하다. 마타피 교수는 점잖다는 평가를 잃을 바에는 목숨을 끊어버릴 위인이고 그래서 이 조그마한 소도시에서는 존경받 는 인물 중에 하나다. 그런 마타피 교수가 초니의 주점에서 난동을 부 렸다고? 나는 그 조그맣고 점잖은 노인이 초니의 주점 같은 곳에 들어 가는 모습조차 떠올릴 수 없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아인이 고소라도 한 겁니까?”
“고소라니! 아인켈은 걱정하고 있는 거야. 자네도 이젠 슬슬 깨달았 겠지만, 이런 조그마한 도시에서 보안관이라는 건 모든 걱정거리의 해 결사 노릇을 해야 되지.”
물론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도시에 굴러 들어와 보안관 조수 일이 라도 건지게 된 것은 내가 칼을 좀 쓴다는 이유 때문이지만, 보안관 조 수에 채용된 이후 내 장검은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간 잡동사니를 꺼 낼 때 말고는 칼집에서 뽑혀 나온 적이 없다. 단지 칼집을 차고 나타나 기만 해도 모든 분쟁은 즉각 해소된다. 그리고 나는 율피트와 미레일이 벌이곤 하는 싸움(제발 성스러운 신이 그 악동들을 잡아가길!)보다 더 위험 한 분쟁은 본 적이 없다. 이 조그만 개척 도시의 보안관이라는 것은 황 제의 법을 집행하는 법의 대행자라기보다는 결혼식의 주례를 보거나 대로에 쓰러진 주정뱅이를 집까지 업어다 주거나 어린애들의 충치를 위
협하는 사람이다. ‘입 안 벌리면 보안관을 부르겠다!’ ·흑흑. 뜻대로 뽑으세요.’
그리고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 선량한 이웃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은 퇴한 음악 교수를 상담해 주는 것은 보안관 조수의 일일 것이다. 왜냐 하면 보안관은 방금 순찰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에 난 한숨을 내쉬 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보안관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북서풍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눈발 을 퍼붓기 시작했다. 난 망토 죔쇠를 세차게 끌어당기며 눈보라에 저항 하여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곤 이 날씨 속에서 8킬로미터를 걸어 가야 된다는 사실에 소리 없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은 쉽게 멎을 것 같지 않았고 오늘 밤까지 돌아와야 한다면 더 이상 출발을 미 룰 수는 없다. 난 절망과 공포와 자포자기 속에 첫발을 내디뎠다.
눈과 그 너머로 건물들의 거뭇거뭇한 그림자들이 미친 듯이 춤추고 있었다. 발을 내디디는 곳마다 충치 걸린 악마가 신음하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내년 봄이 오면 기필코 떠나고 말겠어. 어린애 들의 싸움을 뜯어말리는 것도, 부부싸움의 중재자 노릇 하는 것도, 좀 지나치게 발랄한 처녀들의 정조의 수호자 노릇 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 긋하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지막의 수호자 부분이다. 그녀 들과 어울려 노는 쪽이 좀더 내 본성에 부합하는 일일 테지만, 나를 정의와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로 떠받들고 우러러보는 그녀들의 부모들 앞에서, 난 어쩔 수 없이 성불구자 흉내를 내야 했다. 처녀들이 나를 유 혹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귀찮은 훼방꾼 취급하기 시작한 것도 이미 오래다. 소박하고 무한한 존경, 술자리의 상석, 거의 매일 같은 저녁 식 사 초대 등의 소도시다운 즐거움도 젊은 여인들이 보내는 차가운 경멸 앞에선 절대로 기쁨이 되지 못한다. 봄이 오기만 하면 이파리 보안관에 게 추천서를 부탁하는 거다. 대도시로 가는 거다. 물론 강도와 밤도둑, 살인마 등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겠지만 지금으로선 죽음보다 더한 상 태니 만큼 상관없다. 난, 젠장, 욕구불만이다!
측백나무관이 보인다.
어느새 8킬로미터를 다 걸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난 측백나무관의 정문 앞에 선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얼어붙은 손을 한참 비빈 다음에 야 허리춤에서 장검을 풀러낼 수 있었다. 그냥 두드려도 상관없겠지만, 난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검 칼자루로 근엄하게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꺼져어어엇!”
내 권위는 발휘되기도 전에 동사했다. 난 한 번 더 문을 두드렸지만 똑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난 추위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보안관 조수입니다, 마타피 교수님, 순찰중인데,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잠시 후 문고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난 재빨리 몸을 꼿꼿이 세웠다. 문은, 실망스럽게도 반쯤 열린 채 멈췄고 그 사이로 마타피 교수
의 불그스름한 얼굴이 나타났다.
퇴직한 음악 교수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언제나 정갈하던 그 머리는 갈기처럼 풀어 헤쳐져 있었고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던 것인지 술 냄새가 진동했다. 옷차림새도 방금 침대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닌가 싶 은 모습이었다. 내가 이 존경받는 시민의 몹시 존경스럽지 못한 모습에 기막혀하는 동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교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하오, 티르, 여긴 별일 없소. 그럼, 계속 수고하시길.”
그리고 교수는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난 당황하여 장검을 내밀어 문을 막았고 교수는 나를 째려보았다. 난 최대한 상냥해 보이도록 노력 하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날씨가 워낙 엉망이라서요. 따뜻한 우유 한 잔만 얻어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타피 교수는 고함을 지를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얼굴로 나 를 올려다보았다. 이 또한 교수답지 못한 일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내가 이런 말을 하기도 전에 나를 불러들여 눈이 그칠 때까지 쉬어가라고 말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교수는 뭔가 중얼거리며 내키지 않는 듯이 문을 열었고 그래서 난 이 가족적인 소도시의 보안관 조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불청객이 된 기분을 맛봐야 했다.
내가 망토와 장검을 현관의 옷걸이에 걸어두는 동안 교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척척 걸어갔다. 잠시 후 저 안쪽에서 교수의 고함 소리 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티르!”
응접실로 들어서자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닥 가득히 널브러져 있 는 술병들이었다. 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이 거대한 아우성 사이에 서 있어야 했다. 그때 부엌 쪽 에서 마타피 교수가 걸어 나왔다. 교수는 손에 든 술잔을 탁자에 놓고 는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불편한 동작으로 의자에 앉자 교수는 곧장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교수님, 지금 순찰중이라서……”
“됐소, 티르, 사람들이 가보라고 해서 온 거겠지? 그러니 순찰중이었 다는 소리는 꺼내지 마시오.”
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올리는 대신 바닥을 구르는 술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약주를 많이 하신 것 같은데요?”
교수는 내 말을 들은 체 만체하며 자기 잔에 술을 채워 단숨에 들 이켰다. 그러곤 또 술잔을 채웠다. 난 재빨리, 하지만 정중하게 교수의 잔을 집어 들었다.
“교수님, 그만 드시고…….”
마타피 교수는 내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숨에 마셨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의 술병도 뺏어야 했다. 교수는 양손에 술잔과 술 병을 든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내가 상상도 못 한 말을 했다.
“월권행위요.”
당연히 그렇다. 이곳은 그의 집이고 내 손에 쥐어진 건 그의 술이었 으니까.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더 이 소도시의 가족적인 분위기에 빠져 있었나 보다.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이런 폭음은 상궤를 벗어난 바가 지극하다 여겨지며 따라서 신민 의 보호자이시자 그 어버이신 황제 폐하의 관료로서 절대 묵과할 수 없습니다.”
교수도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 그도 ‘우리가 남남입니까?’ 등의 대답 을 기대했지 이런 거리감 있으며 예의 바른 대답을 들을 거라고는 기대 하지 못한 듯했다. 난 미소를 머금은 채 교수를 바라보다가 술병과 잔 을 도로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관두지요, 교수님.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문제가 뭐지요? 이야기를 해보세요.”
마타피 교수는 내가 내려놓은 술병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나는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운 다음 그의 앞 에 내려놓았다.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르, 걱정해 주는 것 고맙소. 하지만 당신이 도와줄 건 없어.”
“들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뭔가 해결 방안을 떠 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어떤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지독한 문제요!”
마타피 교수는 그렇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난동을 부리고 있었어
도 역시 그는 이 소도시의 시민이었고 따라서 누군가 귀 기울여 줄 가족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를 여기로 파견한 이파리 보안관, 그리고 아인켈은 정확한 조처를 한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교 수는 책장에 놓여 있던 상자를 집어 들어 다시 돌아왔다.
교수는 상자 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읽어보시오.”
난 얼떨떨한 눈으로 서신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쳤다. 서신 안에는 훌륭한 글씨로 짤막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존경하는 랜돌 마타피 교수님께
저는 음악을 사랑하는 보잘것없는 연주자이며, 교수님께서 소장하 신 아스레일 치퍼티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는 그것을 꼭 연주해 봤 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다가오는 백사자의 달 아흐렛날 교수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상세한 이야기 나눴으면 합니다.
– 호라이즌
“호라이즌? 희한한 이름이군요. 엘프인가 보지요. 그런데 교수님이 가지고 있다는 이 아스레일 치퍼티가 뭡니까?”
교수는 다시 벌떡 일어나더니 이번엔 2층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잠 시 후 계단에서 내려온 교수는 약간 낡은 듯한 가방을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마타피 교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안에는 붉은 안감이 대어져 있었고 위로 바이올린이 놓여 있었다. 난 교수를 바라보았고, 그러곤 놀라버렸다. 그 바이올린을 바라보는 교 수의 눈은 절대로 술에 절어 있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의 온화한 눈빛도 아니었다. 마타피 교수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바이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레일 치퍼티요.”
교수의 목소리는 위엄 있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경외감마저 느낄 듯했다.
“이 바이올린 말입니까? 그럼 호라이즌이라는 자는 이걸 연주해 보 고 싶다는 것이군요?”
마타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레일 치퍼티를 조심스럽게 들 어 올렸다. 그러곤 그것을 무릎 위에 놓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교수의 눈은, 맹세컨대 미레일을 빠트릴 허방다리를 완성해 놓은 율피트의 눈 보다도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스레일 치퍼티는 이 바이올린의 이름이자 이것을 만든 악기공의 이름이오. 아스레일 치퍼티는 평생 동안 300개 정도의 바이올린을 만 들었고 그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 100개 남짓할 거요. 온 세계를 통 틀어 100개 정도밖에 없단 말이오.”
“아, 예. 그럼 퍽 비싸겠군요.”
“그런 것 같더군. 어떤 자는 3000만 렐 정도의 가치는 된다고 생각하니까.”
마타피 교수가 너무 태연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조금 후에야 놀랐다. 나는 교수의 무릎에 놓인 바이올린을 바라보다가 다시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3000만 렐이라고요? 이게 말입니까?”
“이건 안 팔아요. 하지만 이것과 같은 시리즈의 아스레일 치퍼티가 그 가격에 팔린 적은 있소. 4년 전 파사디아 궁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바이올린 하나가 3000만 렐이라니요?”
흥분한 나머지 나는 거의 고함치듯 말했다. 맙소사, 3000만 렐이면 내가 보안관 조수로 일하며 받는 봉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0년 가까 이 모아야 되는 금액이잖은가. 하지만 마타피 교수는 비웃음 같은 것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르, 이건 싼 편이오. 1억 렐이 넘는 세람브로스 같은 바이올린도 있으니까”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교수를 바라보았다. 교수가 술을 많이 마신 것은 확실하지만 절대로 주정을 부리고 있는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1억 렐짜리 바이올린이라는 건 내게는 세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관념처럼 느껴졌다.
마타피 교수는 거의 술이 깬 어조로 차분히 설명했다. 악기라는 것 이 원래 비싼 법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기 는 때론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거래된다고 한다. 이는 이름 있는 대 장장이가 만든 무기가 무사들 사이에서 기막힌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 과 마찬가지이며, 마타피 교수는 냉소적인 어조로 무기가 비싼 값에 거 래되는 것이 오히려 더 웃기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무기의 목적은 어차피 상대를 죽이는 것이니, 삽이나 곡괭이를 휘둘러도 상대를 죽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거요. 반면 악기의 목적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인데 훌륭한 악기는 천상의 음률을 내지요. 어느 쪽의 거래가 더 합리적이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좋은 무기는 자기 목숨을 구합니다. 좋은 악기는, 귀를 즐겁게 해줄 지언정 목숨을 구하지는 않고요. 목숨보다 비싼 것이 없다는 것을 놓 고 본다면 앞쪽이 더 합리적인 것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티르, 자기 목숨을 구하는 건 올바르고 건전한 생활 태도 좋은 무기가 아니오. 좋은 무기를 가졌다고 해도 부도덕하게 산다면, 그게 더 위험할 것 같은데?”
마타피 교수는 단번에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난 화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3000만 렐짜리 바이 올린이라는 건 제게는 저질스러운 농담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바이올린을 교수님이 어떻게……?”
“가문에 전해져 오는 거요. 한때 잘나가지 않은 집안 없다지만 우리 집안도 한때는 꽤 부유하게 살았거든.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집안이지 만.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저 호라이즌이 이걸 켜보고 싶 어 한다는 거지.”
“음. 그런 귀한 물건이니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이 꺼림칙하시겠
군요.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우울해하실 것은 또 뭡니까? 연주할 수 없다고 말하면 되잖습니까?”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가 없어요, 티르, 음악엔 정말 관심이 없나 보군요. 이 호라 이즌이라는 엘프는 정말 유명한 연주자요.”
“아하, 엘프가 맞군요. 그런데 자기는 보잘것없는 연주자라고……”
“맙소사, 그건 겸양일 뿐이오. 좀 엄격한 이들은 이자가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연주자라고 말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좀 더 솔직 한 자리에선 세계 최고라고 부른단 말이오.”
나는 별말을 할 수 없어 그냥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마타피 교수는 이런 당연한 사실을 설명해 주려니 짜증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 거절할 수가 없소. 이건 예의의 문제요. 다른 사람이라면, 그 러니까 권력이나 재력을 업고 이런 요청을 하는 자라면 얼마든지 쫓아 버릴 수 있소. 나는 대공이나 황제 폐하가 찾아온다 해도 단연코 거절 할 거요. 하지만 좋은 악기를 좋은 연주자가 아니면 누구에게 내놓겠 소? 연주되지 않으면 악기가 무슨 소용이겠소. 그렇다면, 거꾸로 말해 서 좋은 연주자가 원하는데 어떻게 좋은 악기를 내주지 않을 수 있겠 소?”
나는 교수의 걱정이 뭔지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예…, 그래서 걱정하시는군요. 하지만 교수님 말마따나 연주되지 않는 악기는 소용없는 것이고, 그러면 명연주자가 연주하는 건 오히려 기쁜 일이잖습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호라이즌이라 는 엘프가 그렇게 훌륭한 연주자라면 설마 악기를 상하게 하지야 않겠”지요.”
“그런데 손상시킨단 말이오.”
“예? 무슨 말입니까?”
마타피 교수는 상체를 숙여 그 작은 몸으로 아스레일 치퍼티를 뒤 덮듯이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은퇴한 음악 교수가 공 포에 젖은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아연함을 느꼈다.
“호라이즌이라는 이 친구의 별명이 뭔지 아시오? 악기 살해자요.”
“악기 살해자라고요?”
“그렇소.”
“설마 그 작자가 악기를 부숩니까? 그건 당연히 사유 재산 침해나 기물 파손에 해당하는 범죄일 텐데요.”
마타피 교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오, 티르, 악기를 부순다면 악기 파괴자라고 했겠 지. 하지만 이 친구는 악기 살해자요. 살해가 뭔지 모릅니까?”
난 얼떨떨한 눈으로 노교수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법을 집행하는 법 의 대행자라기보단 심술궂은 사감이나 가정 교사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나는 보안관 조수다. 살해가 뭔지 모를 까닭이 없다. 하 지만 나는 이 대화에서 살해라는 용어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살해는 목숨을 끊는다는 뜻 아닙니까.”
“바로 그렇소.”
“그렇다면, 어,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와야 할 말은 아무래도 퍽 웃기는 말이 될 것 같다. 나
는 마타피 교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교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심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자가 악기의 목숨을 끊는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바깥에는 아직도 북서풍이 눈을 가득 실어다 퍼붓고 있었다. 눈보 라에 휘말린 나무들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집안은 따 스했고 그래서 내 옷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난 웃옷을 벗어 의자에 걸 쳐놓은 다음 교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교수의 눈은 충혈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엔 공포와 애원이 넘치도록 흐르고 있었다.
“교수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악기는 무생물입니다. 끊고 자시고 할 목숨이 없습니다. 만약 교수님께서 먹고 자고 새끼 치는 악 기를 제게 보여주신다면 교수님의 말씀에 얼마든지 동의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바에야……………”
마타피 교수는 그만 화를 내었다.
“티르, 제발 농담은 삼가주시오. 난 도저히 그런 걸 참아줄 기분이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농담을 듣는 건 제 쪽인 것 같은데요. 도대체 악기의 목숨 을 끊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마타피 교수는 입술을 깨물더니 무릎에 놓아둔 아스레일 치퍼티를 도로 상자에 집어넣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닫은 교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교수의 술잔이 빈 것을 깨닫고는 술을 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측백나무관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
교수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시작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티르. 먼저 그 호라이즌이라고 하는 자가 저질러 온 일을 말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자는 이미 말했 듯이 최고의 연주자요. 그 이름도 모르니 그가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 에서 독주를 했다는 것은 당연히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정말 대단한가 보군요.”
“그렇소. 그런데 그 정도로 대단한 연주자가 어느 날 파센 백작이라 는 사람에게 찾아갔소. 파센 백작에게는 엔부루스라고 불리는, 역시 대 단한 하프가 있었지. 호라이즌은 그걸 한 번 연주해 보고 싶다고 말한 거지.”
“아, 바이올린이 아니라 하프도 연주하나 보지요?”
“모든 악기를 다 연주할 줄 알아요. 그것도 최고로, 도대체 이런 천 재가 있나 싶을 정도지. 어쨌든 파센 백작은 뛸 듯이 기뻐했소. 생각해 보시오.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에서 연주했던 연주자가 그의 저택에서 연주하는 거요. 그것도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연주해 보 고 싶다는 이유로. 당연히 백작은 친지들과 친구들과 유력자들을 초청 했지. 그리고 어느 아름다운 저녁, 백작가에서 연주회가 시작되었소.”
“그리고 호라이즌은 준비해 갔던 단검을 꺼내어 그 하프의 심장을 단숨에 찔렀습니까?”
마타피 교수는 내 농담을 완벽하게 무시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생전 처음 듣는 아름다운 연주를 듣게 되었 소”
“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사람들은 환호하고, 박수 치고, 심지어 울기까지 했소. 한 사람만 빼놓고 모든 이들이 열광했지. 그 사람은 바로 호라이즌이오. 연주를 끝낸 호라이즌은 시무룩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돌아가 버렸 소. 그 근사한 연주회의 소문을 들은 다른 명기의 소유자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호라이즌을 불러들였고, 호라이즌은 거절하지 않았어요. 그 는 다른 이들에게도 생전 처음 듣는 음률을 들려주었소. 사람들은 항 상 감동했지만 호라이즌만은 항상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갔지.”
“예, 그런데요?”
“끝이오.”
“예?”
“완전히 끝났단 말이오.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소. 파센 백작가 에 어느 날 다른 중견 연주자가 찾아온 거요. 연주회가 또 열렸지만 연 주는 시원찮았소. 사람들은 그 중견 연주자에게 조소를 보내며 역시 호라이즌이 최고라고 말했지. 그 불쌍한 연주자는 심한 모욕을 당한 거지. 그런데 또 다른 연주자가 찾아왔소. 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사람 들은 호라이즌 만세를 외쳤소. 그런데 또 다른 연주자가 그걸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지. 어쨌든 연주회는 항상 열리는 거니까”
“그리고 역시 호라이즌 만세가 되었습니까?”
“그래요. 하지만 모욕을 당한 세 연주자들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소. 그들은 주저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리고 뭔가가 이상 하다는 것을 느꼈지. 그들은 알고 있던 모든 음악가들을 불러들였소. 동료 음악가들에게 엔부루스를 연주해 주길 부탁했지. 그들은 세 연주 자를 비웃으며 백작가를 찾아갔소. 그러곤 모두 모욕을 당한 채 돌아 왔지.”
“아니……”
“그제야 사람들은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누가 연주해도 시원찮았소. 파센 백작은 조율사들을 불러들이고 최고 의 연주자들을 불러들였소.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봐도 엔부루스는 더 이상 감동적인 음률을 내지 않았지.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든 종류 의 음악으로 미친 듯이 도전했는데도 말이오. 조율은 완벽했고 연주 또한 정확했소. 최고의 청음을 가진 자들이 음표 하나 틀리지 않았다 고 보장했소. 모든 것이 정확했소.”
마타피 교수는 끔찍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하지만 감동이 없는 거요.”
난 멍한 표정으로 마타피 교수를 바라보았다. 교수는 괴로운 얼굴로 아스레일 치퍼티가 들어 있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린 일인지는 짐작하겠지요? 그동안 호 라이즌은 이미 무수한 명기들을 연주했소.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호라 이즌이 연주했던 명기들을 검사해 보았고 모두 마찬가지였소. 누가 연 주해 봐도 감동이 없는 거요. 불쌍한 엔부루스와 다른 명기들은 이미 죽어 있었던 거요.”
마타피 교수는 술잔을 확 들이켰다. 너무 급하게 마신 탓인지 교수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미심쩍어했지. 하지만 호라이즌은 멈추지 않았지. 그는 계속해서 서신을, 그러니까 조금 전 당신이 본 것 같은 서신을 보내었 소. 그렇게 직접적으로 요청하는데 어떻게 발뺌하겠소? 게다가 사람들 은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다시 명기를 내주었소. 호라이 즌은 현악기 타악기든 관악기든 가리지 않았소. 그들은 최고의 음악 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건 항상 그 악기들의 스완송이었소. 명기를 가 진 사람들은 차츰 공포를 느끼게 되었지. 하지만 호라이즌은 계속해서 서신을 보냈소. 그리고 계속해서 악기를 죽였소.”
마타피 교수는 처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른손은 아 스레일 치퍼티가 든 상자를 꼭 누르고 있었다.
“알겠소, 티르? 호라이즌은 악기를 파괴하지 않아요. 죽여버리지. 그 래서 그를 악기 살해자라고 하는 거요. 그리고 그 악기 살해자가 내게 서신을 보냈소. 이걸, 아스레일 치퍼티를 연주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요. 그리고 다음 달 아흐레에 그가 오는 거지. 티르, 이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겠소?”
나는 스스로에 대해 환상을 품어야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 를 잘 구별하는 편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분명히 후자에 속한다. 하 지만 마타피 교수는 너무도 걱정스러워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전자를 선택했다. 나는 음률과 연주에 깊은 조예를 가졌다는 식의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이해는 됩니다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감동이 없다고요? 저, 교수님께서는 호라이즌이 항상 최고의 연주를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천재인가 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 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미 최고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 에 그 다음 연주가 시원찮게 느껴진 겁니다. 악기가 죽는다느니 하는 말보다는 그게 훨씬 나은 설명인 것 같습니다.”
“다른 어떤 음악가가 도전해도 감동이 없는데?”
“예쁜 소리가 안납니까?”
“아니오! 그 악기들의 소리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잖소. 그 악기들은 예전과 똑같은 소리를 냈소. 다만 감동만 없었을 뿐이오.”
나는 두 손 들었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악기가 바뀐 게 없다면 결국 듣는 사람의 문제잖습니까. 그들은 이 미 최고의 연주를 들었기에 다른 것에서 감동을 못 느낀 겁니다. 간단 하잖습니까? 이런 합리적인 설명이 있는데 악기 살해라는 우스꽝스러 운 말을 택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중에서 호라이즌의 연주를 듣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면?”
“예?”
마타피 교수는 면도하지 않은 턱을 쓸어 만지고는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호라이즌이 연주했을 땐 듣지 못하고 두 번째 연주에만 참석한 사 람들도 있소. 당연하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연주회에 항상 참석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두 번째 연주만 들었던 사람들도 뭔가 빠진 것 같은, 무감동한 음악만 들었단 말이오. 보시오, 티르, 호라이즌이 연주한 명기들을 조사했던 사람들도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래 서 일부러 호라이즌의 연주를 듣지 않았던 대가를 초청하기도 했소. 그런데 그 대가들 전부가 고개를 가로저었단 말입니다.”
이로써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수준의 것뿐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물론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슬퍼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보 다 더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눈보라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건물 바깥에 부딪히는 소리들로도 아직 한창 퍼붓고 있음을 알 수 있 었다. 으르렁거리는 암흑만이 측백나무관을 둘러싼 채 겨울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었다.
난 생각난 듯 몸을 일으켜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불길을 보살피 고 돌아오자 다시 입 안으로 술을 쏟아붓고 있는 마타피 교수의 모습 이 보였다. 난 술병에 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곤 그냥 내버려 두기 로 결정했다.
“교수님, 아직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왜 감동이 없다는 걸까 요?”
“어떤 이들은 호라이즌이 악기의 혼을 죽인다고 말하오. 악기공이 불어넣은 악기의 혼 말이오. 혹은 호라이즌이 악기의 가능성을 다 소 진시켜 버리기 때문에 다른 연주자들은 더 이상 가능성을 끌어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이렇게 태연하게 의인법을 사용해 대니 듣는 사람이 혼란을 일으키 기 딱 알맞다. 난 교수의 화법에 말려들어 가지 않기 위해 가장 상식적 인 인물이 되기로 했다. 요 몇 년 동안 계속해 온 일이 그것이었으므로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교수님, 악기는 생물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주장하겠습니 다. 음악에 대해 잘 안다고 하진 않겠습니다만, 제 생각에 감동은 음악 자체에서, 또는 그 연주자의 솜씨에서 나오는 것이지 악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악기에서 감동이 나온다면 연주자는 아무 소 용이 없게요? 누가 연주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악기에서 감동 이 나온다면 어떤 음악을 연주해도, 그러니까 도레미파만 반복해도 감 동적이겠군요?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감동은 연주자 나 음악에서 나오는 거지 악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다 면 연주자의 실력이 없거나 선곡의 잘못일 겁니다.”
무거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예?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란 말이오. 똑같은 연주자가 똑같은 곡을 다른 악기로 연주했을 때는 감동이 있다면 어쩌시겠소?”
“……그렇게도 조사해봤습니까?”
“그래요. 그러니 악기의 문제요. 호라이즌은 악기를 죽이는 거요.”
결국 나는 호라이즌이 악기를 죽인다는 말을 받아들여야 했다. 더이상 다른 반론을 생각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지내던 칼잡이들 중엔 실수로라도 농담이라곤 하지 않을 것같이 생겼으면서도 아주 엄숙한 얼굴로 ‘칼은 살아있다’ 등의 망발을 하는 녀석도 있었 다. 그것과 비슷한 것이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교수님은 호라이즌이 그 아스레일 치퍼티를 살 해할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티르.”
“젠장,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냥 연주할 수 없다고 말하 세요. 그 살해니 뭐니 하는 말씀은 미덥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걱정스 러우시면 호라이즌에게 연주하게 해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 되잖습니 까”
“어떻게?”
마타피 교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난 약간 짜증스럽게 되쏘아주었다.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입니까. 그 바이올린의 소유자는 당신이잖아 요. 주인이 안 보여주겠다는데 이유가 뭐가 필요하냐는 식으로 말씀하 세요.”
“그런 무례한 소리를 어떻게 하라는 거요?”
“교수님은 어제 이미 아인켈의 눈을 완전히 내려 앉혔잖습니까. 그정도 무례 가지고 뭘 그러세요.”
내뱉듯 말하는 내 말을 듣던 마타피 교수는 크게 놀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아인켈을 어떻게 했다고?”
“오늘까지 붓기가 빠지지 않았다더군요. 정말 대단하신데요. 어떻게 트롤이 하루 동안이나 부어 있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젊었을 땐 상당하 셨겠어요. 그나마 트롤이었으니 다행입니다. 아인켈도 고소할 생각보다 는 교수님 걱정을 하고 있다더군요.”
마타피 교수는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어쩐지 주먹이 쑤시 더라’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내놓는 교수를 보며 난 피식 웃었다. “이제 교수님의 명성에 만만찮은 주먹의 전설도 덧붙여지겠지만, 그 건 다음에 생각해 볼 일이군요. 제 말대로 하세요. 그렇게 걱정스러우 시면 그냥 거절하세요. 만일 그게 힘드시면 저나 다른 친구들이 도와 줄 수도 있습니다.”
교수는 ‘그에게 사과해야겠어. 어떻게 사과하지?’ 따위의 말을 중얼 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말 해야 했다. 마타피 교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와주다니?”
“그 호라이즌이라는 친구가 들어오자마자 이 도시에서 줄행랑치게 만들어놓죠. 뭐 어렵겠습니까. 주먹이 근질거려서 자기 코라도 쥐어박 겠다는 녀석들이 있잖습니까. 제가 약간만 손을 쓰면 적당히 시비를 만들어서……”
“당찮은 소릴!”
“아, 꼭 폭력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적당히 겁만 주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소도시에도 개망나니 같은 형제들이 있다. 그런 구제가 필요한 형제들을 동원한다면 외부에서 들어온 이웃을 질리게 만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교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떻게 말이오?”
“예?”
“아아, 이런 뭔가 착각하고 있군. 당신이 꼭 나서겠다면 난 당신과 그 주먹이 근질거린다는 청년들을 걱정해야 될 것 같소. 호라이즌이라 는 그 엘프는 칼 쓰는 일이 지겨워져서, 더이상 적수가 없어서 음악을 시작한 인물이오.”
내 얼굴이 꽤 웃겨 보였던 모양이다. 시름에 잠겨 있던 교수도 부 지불식간에 웃음을 터뜨렸으니까. 그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 었다.
“게다가 그와 주먹이라도 겨뤄볼 기회는 없을 거요. 그렇게 돌아다 니는 연주자에겐 경호원들이 있소. 그리고 따라다니는 제자들만 해도 수십 명이고, 그것뿐인 줄 아시오? 대개 귀족가의 자제들인 그 제자들 에게도 경호원들이나 하인들이 따라다니지. 티르, 당신은 악기를 다뤄 보고 싶다는 열망만 가지고 달려오는 얼굴 하얀 샌님 정도를 생각하나 본데, 미안하게도 완벽한 오해요. 일개 군단에 가까운 귀족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거요.”
또다시 말하지만 이 소도시는 정겨운 작은 공동체다. 그리고 그 구성원은 이런 거창한 일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소박한 사람들이다. 그 분위기에 물씬 젖어 있던 나 역시 그런 거창한 무리들에 대해 상상도 할 수 없다. 맙소사. 그런 어마어마한 무리들이 이 작은 도시 를 찾아온단 말인가?
“아이고, 교수님, 시장님에게 말씀하셨어야지요!”
“음? 어, 그렇군. 내 걱정에 빠져 있어서 그 생각을 못 했군요. 시장님 께서 뭔가 환영 준비를 하셔야겠군.”
마타피 교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이건 결코 대수롭 지 않은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 소식을 시장에게 전해야 하는 보안관 조수에게는 내가 그 소식을 전하면 시장은 왜 이제서야 말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다음 달 아흐레면 이제 3주 남았잖은가.
나는 급히 창문을 돌아보았지만 암담한 전망밖에 볼 수 없었다. 폭 풍은 흉측하게 몰아치고 있었고 그 암흑과 바람을 뚫고 8킬로미터를 걸어가는 것은 내가 내 목숨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일 아침에 갈 수밖에 없다. 또 하루를 까먹는 것 이며 시장은 내 사정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어제 그 소식 을 들었으면서 오늘 전하는 이유를 추궁해 댈 것이다. 아아, 신이여.
눈을 떴을 때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측백나무관 2층의 객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내 위로는 창문에 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어둠을 묽게 만들고 있었다. 고요함과 달빛은 폭풍이 멎었다는 것을 나타냈고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침대에서 일어 났다.
오래 묵은 가구들과 시늉뿐인 청소로는 다 치우지 못한 먼지에서 나오는 냄새가 살살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측백나무관은 ‘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은퇴한 노교수 혼자 살기엔 너무 큰 집이다. 하지만 마타피 교수는 하인을 쓰지 않았다. 그가 하인을 쓸 정 도로 부유하다면 자신에게 맞는 좀더 작은 집을 구입했을 것이다. 이 커다란 집은 교수의 오랜 친구가 그에게 무상으로 준 것이다. 지금까지 는 쓸모없는 방들과 복도들이었지만, 다행히도 집이 크니 호라이즌 패 거리들을 유숙시키는 것은…………….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소스라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자 들이 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몇 시나 되었을지 알아보기 위해 창가 로 달려갔다.
차분히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위로 이 저택의 이름이 된 측백나무들이 희게 반짝이고 있었다. 눈을 가득 뒤집어쓴 측백나무들은 터무니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잠시 지옥에서 오는 호라이즌 패거리와 히스테 리를 카리스마로 착각하는 시장에 대해 잊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 았다.
그때 저 아래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저택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마타피 교수가 문을 열고 나왔다. 교수는 외투나 모자 같은 것은 걸치지 않은 실내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교수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하얀 눈밭 위로 죽 이어진 그의 발자국이 새파랗게 반짝였다. 정원 중앙쯤에 선 교수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무릎까지
휘감기는 눈은 교수를 꽤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잠시 후 허리를 편 교수는 가방을 열어 아스레일 치퍼티를 꺼내었다.
마타피 교수는 가방을 발 옆에 놓고는 아스레일 치퍼티를 턱에 괴었 다. 활을 든 손을 옆으로 가볍게 뿌린 교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나 는 창턱에 팔을 괸 채 부드럽게 웃으며 그 모습을 감상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난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되지 않았다. 바이올린은 빈틈없이 턱에 괴고 있었지만, 활을 쥔 오른손은 다리 옆에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기 다리고 있는 것일까. 청중의 준비? 그는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 른다. 감정이 고조되기를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주위는 차고 희게 반 짝이는 무채색의 밤 풍경뿐이었고 그 속에서 어떻게 감정이 고조될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바람은 멎었지만 기온은 몹시 낮았고 따라 서 가만히 서 있어 봤자 감정이 고조되기는커녕 다리가 얼어붙을 것이 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그는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교 수의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던 내 눈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주위를 방 황하기 시작했다.
그믐달은 어두운 밤하늘에 매달린 고드름이 되어 있었고 그 미약 한빛 말고는 별빛조차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산과 들판과 경작지와 집들과 묘지를 뒤덮은 눈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어 대지를 어둠 위로 떠오르게 했다. 저기 어디쯤 얼어붙은 네펜지스 강이 있겠지만 눈 때 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고요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 나는 시내의 잠 못 이루는 누군가가 침대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을 느꼈다. 혹은 은퇴한 음악 교수의 맥박 소리까지도. 하 지만 그런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교수는 아직까지도 잘못 돋아난 측백나무처럼 서 있었다. 그 모습 엔 온 세계를 가득 채운 고요함 속에서 불안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질적 인 고요함이 있었다. 혹 그대로 얼어붙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무렵, 교수는 턱에 괴고 있던 아스레일 치퍼티를 천천히 떼었다. 그리고 교수는 가방을 열어 바이올린과 활을 집어넣고 천천히 닫았다. 가방을 들어 올린 교수는 느린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걸어왔다. 문소리가 나 고 다시 측백나무관은 고요해졌다.
이파리 보안관은 출근하는 조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뭐야?”
“소란다스 부인이 맛이나 보라며 주더군요.”
“소란다스 부인이 왜?”
“대로에서 아랫도리가 홀랑 벗겨진 채 엉엉 울고 있는 율피트를 발
견해서 집까지 데려다줬거든요.”
“순찰중에 요란하스가에 들러보지. 미레일 맞지?”
“두말하면 잔소리죠.”
난 보안관의 책상 위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파리 보안관은 뜨개질하던 스웨터를 옆에 내려놓고는 그릇 안에 담겨 있던 군밤 을 꺼내어 껍질째 입 안에 던져넣고 우물거렸다.
“어제는 측백나무관에서 잤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토와 장검, 외투 등을 벽걸이에 걸어놓았 다. 그리고 난로 옆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으며 내가 가져온 소식을 어 떻게 하면 가장 자연스럽게 꺼내놓을 것인가 고민했다.
그리고 10분 후 우리 도시의 자랑스러운 보안관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번뇌하기 시작했다.
“악기 살인마라니, 도대체 그게 뭔 소리야? 누가 들으면 사람 머리 위에 피아노를 떨어뜨리는 녀석으로 알겠군.”
“악기 살해자입니다. 그리고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요. 중 요한 건 그 악기 살해자 호라이즌이 수십 명의 귀족 자제들을 양 떼 몰 듯이 몰고 다닌다는 점입니다. 저는 시장님이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서 뛰어가”
“보안관님, 제발 보안관 조수 좀 살려주십시오. 시장님은 저를 잡아 먹으려 할 겁니다. 오늘 아침 8킬로미터나 되는 눈밭을 걸어온 것만 해 도 벌써 힘들다고요. 남은 군밤 다 드릴 테니 좀 봐주십시오.”
이파리 보안관은 투덜거렸지만 사람 좋은 오크답게, 혹은 내가 마지 막에 전략적으로 끼워 넣은 말 때문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군밤을 모 두 쓸어 담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은 보안관은 뭐라 혼잣말을 중얼 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난 보안관이 남겨놓고 간 뜨개질 바구니를 흘끔 쳐다보고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난롯가에 다리를 뻗고 멍 한 표정으로 뜨개바늘을 놀리며 마타피 교수와 아스레일 치퍼티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현듯 나는 마타피 교수와 3000만 렐에 대해 생각해 보고있는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머리를 가로저으며 상상의 고리를 끊어보려 애썼지만, 상상은 진득 한 거미줄처럼 머리에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으로는 봄의 들판을 가볍게 걸어가는 티르 스트라이크와 그의 주머니에 든 3000만 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조그마한 도시에서 이파리 보안관보다 더 칼을 잘 쓰는 사람은 없고, 나밖에 아무도 모르 지만 나는 세 명의 이파리가 동시에 덤빈다 해도 거꾸러뜨릴 수 있다. 이것은 잘난 체하는 것이 아닌 담담한 사실의 토로다. 게으른 고양이 흉내를 내며 몇 년 동안 얌전히 지냈지만 그 고양이는 한때 제국군 제 12군단의 검술사범이었다.
눈이 예쁜 빨강 머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 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빨강 머리에 얹어놓을 값비싼 모자를 꼭 사야 했다. 그런 내 눈에 군수품은 임자 없이 쌓여 있는 노다지 또는 값비싼 모자로 보였다.
나는 쫓겨났고, 빨강 머리는 내가 사준 모자를 쓴 채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사라졌다. 나는 나 자신도 용서했고 빨강 머리도 용서했지 만, 그 빨강 머리의 팔짱을 낀 녀석은 용서하지 못했다. 이미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빨강 머리 때문은 아니다. 어떤 친절한, 혹은 악마 같은 친 구의 도움으로 나는 녀석이 나의 밀고자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아아, 너무도 통속적인, 창의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던 나의 연적이여.
가끔 놈이 왼쪽 눈을 어떻게 가리고 다닐지 궁금해하곤 한다. 나는 정당한 결투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 개척 도시까지 도망친 것은 목숨의 보전 때문이라기보다는 우울한 추억 과의 거리 두기였다.
하지만 추억은 이제 바래지고 있었고 이 소도시는 지긋지긋하다. 이 파리 보안관의 추천장보다는 3000만 렐을 주머니에 넣고 떠나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실로 그러하다. 누가 나를 막고 누가 나를 추적하 겠는가. 은퇴한 음악 교수? 지금쯤 시장에게 박살 나고 있을 보안관? 뜨개질 솜씨는 훌륭하지만 칼 솜씨는 고만고만한 그 늙은 오크가? 뜨 개질을 떠올린 나는 문득 무릎을 내려다보았고 곧 한숨을 쉬었다. 젠 장. 몇 코를 빼먹은 거야? 이파리 보안관이 짜 넣던 정교한 이중 다이 아몬드 무늬가 무참하게 깨져 있었다.
그리고 방문객은, 내가 도로 풀어낸 뜨개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 거릴 때 찾아왔다. 문 여닫는 소리가 났지만 난 실을 감느라 바빴고 그 래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여기가 보안관 사무실인가요?”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기가 보안관 사무실이냐고 묻는 사람이라면 이곳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 추리대로 문 쪽에는 처음 보 는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외투 아래의 몸은 날씬하다기보다 약간 마른 편이었고 검은 털 모자 아래로는 치렁한 금발과 더불어 엘프를 나타내는 삐죽한 귀가 살 짝 나와 있었다. 엘프의 아름다운 얼굴은 이 추위에도 별로 상기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내 눈을 퍽 즐겁게 했다. 여자의 모습을 음미하며
움직이던 내 눈이 여자의 손에서 잠시 멈췄다. 여자는 양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어제 측백나무관에서 본 것과 비슷한 가방 이 들려 있었다. 바이올린 가방이었다.
나는 감던 실뭉치를 바구니 안에 집어넣으며 일어났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보안관 조수 티르 스트라이크라고 합니다. 이 곳 분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걸어와서는 내게 바이올린 가방을 내밀었다.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가방을 받아들고는 다시 여자를 쳐다보았고, 그 러곤 더 놀랐다. 여자는 외투 앞 단추를 풀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엘프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열어보셔야죠?”
“왜요?”
“예? 말씀하셨듯이 저는 외지인이에요. 그러니 무기가 들어 있지 않
나 보셔야지요?”
물론 제국법은 무기 소지 허가에 대해 엄격하며 사람들이 ‘나’라는 인간이 아닌 내가 차고 다니는 장검에서 권위를 느끼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가 말했듯이 이것은 새로운 도시에 들어갈 때의 조처이긴 하다.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바이올린 가방이잖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주시는 것을 보니 안엔 바이올린밖에 없겠군요?”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던 엘프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머? 놀랍군요. 이런 시골에서…… 아, 용서하세요. 내가 앞서 지나온 마을들에선 전부 그게 뭔지 몰라 열어보라고 하더군요. 계속 그 런 경우를 당하다 보니 지겨워져서 아예 처음부터 건네드린 거예요.”
난 그제야 여자의 행동을 이해했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곳까 지오는 동안 이 여자가 지나왔을 마을에선 당연히 이 가방이 뭔지 몰 라 의심했을 것이다(나조차도 어제 이런 가방을 보지 않았으면 똑같이 행동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외투를 벗은 것 역시 장검을 가지지 않았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테고.
내 미소를 본 엘프는 따라 웃으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휙 돌았다. 머 리카락과 치맛자락이 경쾌하게 떠올랐고, 나는 휘파람을 불까 하다가 꾹 참으며 말했다.
“예, 장검은 없으시군요.”
멋지게 한 바퀴 돈 여자는 왼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가방 속은 안 보여드려도 되겠지요?”
여자의 왼손에 들려 있는 것은 그야말로 평범한 가방이었고 제국법 이 금지하는 장검이 들어갈 공간은 없어 보였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가 외투를 다시 걸치기를 기다렸다. 다시 외투를 입은 여 자는 외투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여자가 내민 것은 여행증과 신분증명서였다. 엘프다운 고지식한 처 사라고 생각하며 난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몇 년 전의 나는 여행증 같 은 것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아무 상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안관 조수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정중히 그것을 받아든 다음 꼼꼼히 읽는 척했다.
덕분에 나는 그 여자가 그레올 산맥 부근에서 태어난 루레인이라는 이름의 엘프이며 방년 194세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엘프의 10년을 인 간의 1년 정도로 보면 되니까 방년은 방년이지만, 그래도 난 그 부분에 서 약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행증에는 벨킨 공작의 이름으 로 그녀가 벨킨 공작령에서 이곳까지 여행하는 것을 인정하며 후원한 다는 내용이 고풍스럽게 적혀 있었다.
나는 짐짓 관료다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여행증과 신분증명서, 그리고 바이올린 가방을 돌려주었다.
“더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루레인 양? 목적지가 어디신지요?”
“예, 랜돌 마타피 교수님 댁이 어딘지 알려주시겠어요?”
바이올린 가방을 봤을 때부터 이런 질문이 나올 거라 짐작했기 때 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약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고지식한 엘프가 방문 예고도 없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하군요. 저는 바로 어제 교수님을 뵈었는데 누가 찾아올 거란 말씀은 없으시던데요. 아, 물론 어제 교수님이 여러 가지로 불안한 상 태이긴 하셨습니다만.”
루레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 저는 워낙 다급해서 미리 서신을 보낼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불안해하신다고요? 혹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분께 무 슨 편지가 오지 않았나요?”
나는 뭔가가 맞아돌아간다는, 하지만 동시에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호라이즌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루레인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보낸 사람 이름까지 아시죠? 티르 씨는 교수님과 가까운 분이신가요?”
“아니요. 하지만 말씀하셨듯이 여기는 시골이고 이런 곳에선 다 가 족 같답니다.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아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솔 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어젯밤 그분과 술 한잔하면서 그 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가 언제 온다고…… 아니, 교수님께 여쭤보면 되겠 군요. 교수님 댁은 어디죠?”
난 보안관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서 측백나무관으로 가는 길을 상 세히 가르쳐주었다. 루레인은 인사하고 눈 덮인 대로를 지나 저편으로 떠났다.
이파리 보안관은 시장에게 박살이 난 다음 오후 늦게야 풀이 죽은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요란하스 가에 들러 미레일에게서 바지와 속옷 을 회수하여 소란다스 가에 돌려주고 오느라 시간이 더 지체되기도 했 다. 그동안 나는 스웨터의 앞판을 다 떠놓고 뒤판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난롯가에 무거운 몸을 앉히며 중얼거렸다.
“별일 없었냐”
“어쩌기로 했습니까?”
“이 도시가 생긴 이래 최고의 연주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오래 살다보니 별 걸 다 구경하게 되었군.”
난 뜨개질감을 내려놓고 보안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구 맘대로 그걸 결정했다는 거죠?”
젖은 장화를 힘겹게 벗던 늙은 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난 대바늘 하나를 들어 올려 측백나무관이 있는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아스레일 치퍼티는 교수의 물건이라고요. 마타피 교수가 허락하지 않으면 호라이즌은 거기에 손도 댈 수 없어요. 그리고 교수는 호라이즌 이 악기 살해자라고 믿기 때문에 그걸 내주지 않으려 할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마타피 교수는 안 내어줄 수 없다고 생각 한다며? 그게 음악가들의 예의라고…………….”
나는 잠시 보안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모든 사실을 정 확하게 전했지만, 내가 전한 건 사실들뿐인 모양이다. 나는 이 사태에 관련된 사람들(그래봐야 마타피 교수 한 명뿐이지만)의 심리적인 면에 대 한 내 해석은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황한 시장이 ‘귀하신 분들이 친히 왕림하사 이 소도시에서 연주를 하고자 하니 훌륭한 연 주회가 되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판단해 버렸다고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추리를 대충 들려주었고 보안관은 자기 송곳니를 톡톡 두 드리며 내 말을 경청했다. 그러곤 진중하게 말했다.
“좋아, 티르, 넌 자기 생각을 똑바로 전달하는 걸 잘 못 하니 내가 도와주지 교수를 도와야 될 것 같으냐? 그게 옳은 일인 것 같나?”
“교수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마타피 교수가요. 그리 고 그 호라이즌이라는 친구는 아스레일 치퍼티를 연주하지 못하게 되 더라도 별 손해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훌륭한 연주자라면 지금까 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른 명기를 찾아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 면 우리가 누굴 도와야 될 것 같습니까.”
“망할 녀석, 넌 아침에 그런 말 안 했잖아?”
“말씀하셨다시피 전 제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까요.”
보안관은 잇소리를 좀 내면서 다리를 죽 뻗었다. 내가 대바늘로 등 을 긁으며 보안관의 우람한 발톱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파리 보안 관은 벽에 걸린 낡은 그림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 그림은 안셀이 자 신에게 화가의 자질이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무렵 강제로 구입하게 만든 물건이고, 안셀의 그림들 중에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하 다. 다른 사람들은 억지로 떠맡게 된 그림들을 분실하거나 파괴해 버렸 지만 보안관은 아직도 사무실 벽에 걸어두고 있다. 안셀과의 의리 때문 이 아니라 사무실의 내부 장식에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 서 비록 그의 조그마한 눈이 그 그림을 향해 있을지언정 그가 보고 있 는 것은 그림이 아닌 자기 내면일 것이었다. 그 속에서 이 늙은이는 해 묵은 기억들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판례집을 펼쳐 이 상황에 어울리는 판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판례집이라는 것이 별로 거창한 것 은 못 된다. 예를 들자면 ‘미크루가 스니의 닭을 죽였을 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더라?’ 하는 식이다. 노인들이 말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라는 건 대개 이런 것을 말한다. 젊은이는 과거가 없기에 신념에 기대고 늙은이는 미래가 없기에 경험에 기댄다.
다시 뜨개질을 시작한 내가 스웨터 뒤판을 신나게 짜올리고 있을 때 이파리는 트림을 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티르, 아무래도 확답을 받아야겠다. 우리가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 려고 해도 그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되지 않겠냐. 그렇잖으면 주제넘게 나서는 일이 될 뿐이지. 가서 교수를 좀 모셔와 초니의 술집 에서 친구들끼리 카드나 하며 이야기 좀 해보자고.”
“어렵겠습니다. 오늘 교수에게 손님이 찾아왔어요.”
나는 루레인의 방문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이파리는 또 다 른 음악가가 찾아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곧 시골 보안관다운 결정을 내렸다.
“그럼 뭐 먹을 거라도 좀 싸들고 우리가 찾아가야겠구나. 교수의 살 림이 얼마나 궁색한데 우리가 그의 손님 맞이를 도와야지. 난 나가서 친구들을 좀 모아야겠다. 참, 그 엘프 아가씨는 귀족처럼 보였어?” “귀족이면 혼자 여행하진 않았겠지요.”
이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일찌감치 사무실 문을 닫은 우리는 오랜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측백 나무관으로 걸어갔다. 이 오랜 친구들을 유지라거나 상류층이라고 여 길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터줏대감들이 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며, 우리들에 비하면 차라리 마타피 교수가 상류층에 가깝다. 어쨌든 우리들 중 보안관과 나 이외엔 권력자는 아 무도 없었고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을 권력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 안관과 나는 상류층도 중류층도 하류층도 아닌 층위를 초월한 존재이 며, 다시 한번 강조해 두지만 오로지 ‘정의와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술집 주인 초니, 우체국장 아인켈, 시인 안 셀(이 말은 안셀이 요즘 들어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버나드 교장이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동안 버나드 교장 은 미레일과 율피트가 학교에서 벌인 장난들을 이야기해 주며 우릴 웃 겼다. 그리고 안셀은 그 이야기에서 시상을 얻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 리를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측백나무관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을 때였다.
안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그가 또 뭔가를 보고 시상 을 떠올렸겠거니 생각하며 농담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안셀은 입술에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소리가 들리는데.”
“뮤즈의 속삭임이?”
“농담이 아냐, 측백나무관 쪽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는데.”
우리는 눈을 끔뻑거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 귀에는 아무 소리 도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들 중 그 그레이 엘프보다 더 귀가 좋은 사람 은 없었다. 난 음악가가 둘이나 있으니 뭐 연주 소리쯤 들려오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고 말했고, 일행은 내 추리에 찬성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가장 귀가 어두운 아인켈도 바이올린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측백나무관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우리는 모두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이 눈앞에 들어왔다. 하인이 없는 마타피 교 수는 눈을 치우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을 테고, 어차피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는 만큼 그냥 내버려 뒀을 것이다. 그 새파랄 정도로 하얀 눈밭 가운데서 작고 검은 여인이 서 있었다. 루레인이었다. 낮에 보았던 검은 외투는 걸치고 있었지만, 모자는 없었고 그래서 그녀의 치렁치렁한 머 릿결이 마음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 금발로 기억하지만, 눈밭의 흰 반사광 속에서 그 머릿결은 연보랏빛으로 물결쳤다. 그리고 그녀의 턱 에는 바이올린이 괴어져 있었다. 루레인은 우리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건물을 향해 연주하고 있었다. 현관 앞 계단에는 마타피 교수의 웅크 린 모습이 보였다. 교수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루레인의 연주를 듣고 있는 듯했다.
커다란 측백나무관 어디에도 불빛은 없었고 그 건물의 검고 거대한 모습은 어둠 속으로 물러나 있었다. 달빛도 별빛도 없는 가운데 빛은 모두 땅에서, 흰 눈밭에서 쏟아져 올라오는 빛뿐이었다. 밤하늘은 보이 지 않았고 측백나무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눈밭과 그 끄트머리에 있는 계단, 그리고 루레인과 마타피 교수뿐이었 다. 검은 우주 속에 오직 눈밭과 계단과 그들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음악이 있었다.
우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치즈와 포도주, 그리고 시드 케이크 따위의 야식거리들이 쓸데없는 잉 여물, 가당찮은 모욕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봉헌 예물이 될 수 없었고, 우리들이 조금 전에 본 제의(그것이 아니면 뭐라 불러야 할 까?)에 어울릴 봉헌 예물이 어떤 것일지 추측해 내는 것은 내 능력 밖 의 일이었다. 장대한 우주의 비밀이 얼핏 드러났던 것만 같은 그 순간 에 버나드 부인의 (약간 탄) 시드 케이크라니. 연주가 끝나고 마타피 교 수가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면 우린 밤새도록 그렇게 서 있다가 아침 햇 살에 모두 녹아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못된 눈도깨비처럼.
“모두들 웬일이시오?”
정신을 차리자 우리는 측백나무관의 식당에 모여앉아 있었다. 마타피 교수는 식당의 벽난로를 지피고 있었고 우리는 벌을 기다리 는 학생들이나 된 것처럼 무릎을 바싹 붙인 채 커다란 식탁 주위에 모 여앉아 있었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 마타피 교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우리들이 가져간 음식물들을 펼쳐놓았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왜 그렇게들 뭉쳐 앉아 계시오?”
우리는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 여섯 명은 모두 식탁 왼 편에 모여앉아 있었고 반대편에는 교수뿐이었다. 특히 가관인 것은 아 인켈이었는데, 아인켈은 식탁 저편에 트롤 손님용의 큰 의자가 있음에 도 작은 의자에 몸을 구겨 넣다시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그제야 루레인이 이 자리에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교 수에게 질문했다.
“루레인 양은 어디 계시지요?”
“어라? 티르, 어떻게 이름을 아시오?”
나는 낮의 일을 간략히 말했고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녀는 응접실에 있을 거요. 수고스럽지만 나가서 좀 불러와주겠소?”
루레인은 응접실의 의자에 앉아서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 는 헛기침을 했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레인은 나를 올려다보곤 살짝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티르입니다. 낮에 뵈었지요.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식당으로 오시지 않고서.”
루레인은 턱으로 창가를 가리켜 보였고 그곳엔 그녀의 바이올린 상 자가 열린 채 놓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고 루레인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급격한 온도 차는 바이올린에게 안 좋아요. 다른 때는 괜찮지만 겨 울철엔 실내외의 온도 차가 커서 여러 가지로 조심해야 해요. 저건 조 금 전까지 차가운 바깥에 있었으니, 잠시 저대로 뒀다가 내 방에 옮겨 놓고 나서 식당으로 갈 생각이었어요.”
나는 그녀의 건너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만지작 거리는 것이 활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활털을 느슨하 게 해놓는 것 같았다. 내가 질문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연주가 끝나면 이렇게 해놓아야 해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악기인가 보군요. 아, 참. 연주 정말 잘 들었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왜 바깥에서 연주하셨습니까? 말씀하셨듯이 추운데요. 바 이올린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루레인 양에 대해서는 확실히 걱정되더군 요.”
“사정이 있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이 응접실은 건물 안이긴 했 지만 불을 피우지 않아 싸늘했다. 루레인의 말마따나 외부와의 급격한 온도 차를 피하는 데는 좋겠지만 앉아 있기엔 좀 힘든 자리였다. 하지 만루레인은 엘프답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고 나는 왠지 물어 볼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루레인 양이 음악가이시니 묻겠습니다만 혹 호라이즌에 대해 아십니까?”
루레인은 활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자는 아스레일 치퍼티를 연주할 수 없을 거예요.”
“왜지요?”
“내가 그것을 가져갈 테니까.”
먼 곳, 네펜지스 강 하류 어디에서부터 다시 북서풍이 불어오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한 표정으로 창문을 쳐다보았지만, 그곳엔 밤하늘로 추정되는 캄캄함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걸 구입하실 겁니까? 3000만 렐이라고 들었는데, 루레인 양은 부유하신가 보군요.”
“그런 돈은 없어요. 그리고 돈으로 사려면 아무리 많은 돈도 모자랄테고. 하지만 나는 교수님보다는 그걸 잘 보호할 수 있어요. 호라이즌 으로부터 말이에요.”
“어떻게요?”
“나도 연주자니까요. 그리고 호라이즌과 마찬가지로 엘프고. 나는 몇백 년 동안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어요. 호라이즌이 죽을 때까지.”
나는 뒤통수가 약간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의 인생으로 아스레일 치퍼티를 사겠다는 겁니까?”
루레인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가늘게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 냥 내가 다른 연주자들보다 나은 점을 가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거죠. 다른 연주자들도 거절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호라이즌보다 먼 저 죽게 될지도 모르지요. 나의 경우엔 사고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없어요.”
“왜 연주자는 호라이즌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거죠?”
“예? 아……, 아스레일 치퍼티를 소유한 사람이 단순히 소유자라면, 호라이즌은 좋은 악기는 좋은 연주자를 만나야 한다는 점을 들어 그 걸 만져보고 싶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스레일 치퍼티를 소 유한 사람이 같은 연주자라면, 그것도 제법 이름이 난 연주자라면 호 라이즌은 그런 말을 할 수 없겠지요. 내가 당신보다는 잘 연주할 수 있 다고 말한다면 그게 설령 사실일지 몰라도 너무 무례한 말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가 무례를 무릅쓰고 그렇게 말한다 해도 그 경우엔 내가 격노하여 거절할 수 있겠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듯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 전……?”
“예. 조금 전 저 바깥에서 연주했던 것은 그 때문이지요.”
나는 루레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레인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 며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교수님은 이제 내가 아스레일 치퍼티를 가질 만한 연주자인지 판단 해야 될 거예요. 여러분들이 오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대답을 들었 겠지요. 뭐, 여러분들이 오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대답 을 좀 천천히 들었으면 하니까.”
아스레일 치퍼티가 무엇이고 악기 살해는 대관절 무엇이기에 이 여 자는 이렇게 그것을 막으려 드는가. 마타피 교수의 태도나 루레인의 태 도 앞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악기 살해가 사람들의 착각이라는 식의 견해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모양이다. 호라이즌은 정말로 악기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것은 없 앨 수 없다. 악기는 무생물인데 왜 죽인다는 말을 쓴단 말인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긴 한 모양이지만, 살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말 아야 한다. 듣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호라이즌은 악기의 무엇을 죽인단 말입니까?”
“생명”
“악기는 생명이 없어요. 그건 그냥 물건입니다. 파괴라고 해야 해요.”
“호라이즌은 악기의 어떤 부분도 파괴하지 않아요. 그건 초보 연주 자도 저지르지 않는 실수예요. 만일 그가 자신이 연주했던 악기의 가 장 작은 부분이라도 파괴했다면 재정 파탄을 일으킬 엄청난 손해 배상 을 치러야 했을걸요. 그건 최고의 악기들이었어요. 그는 악기의 생명만 태워버려요.”
“보여주십시오.”
“예?”
“악기의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아니면 그걸 죽이는 모습이 라도. 그렇게 말로만 하는 건 뭐든 가능합니다. 입증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내가 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경배해야 할 겁니다. 그럴 수 있습니 까?”
루레인은 약간 피곤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의자 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서는 바이올린 상자 속에 활을 집 어넣고 상자를 닫았다. 폭풍은 네펜지스 강을 따라 달려오고 있는 듯 했고 온통 새카맣던 하늘에서도 조금씩 폭풍의 숨결이 불그스름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바이올린 상자를 집어든 루레인은 나에게 걸어왔다. 그러곤 주춤, 뭔가 떠오른 얼굴을 하고선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래로 떨 어진 뭔가를 집어 올리려는 것처럼 허리를 숙이던 루레인은, 갑자기 그 가상의 분실물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 몸을 일으켜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한참 후에야 내가 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경배를 받은 훌륭한 신임에도 불구하고 신격 티르는 불의 전차에 올라타 벼락의 말채 찍을 휘두르는 대신 두 다리로 일어서 식당으로 걸어가야 했다.
훌륭한 터줏대감들은 결국 자신의 목적을 망각한 채 먹고 마시고 웃는 행위로 모든 시간을 쓸어버렸다. 이파리 보안관은 몇 번이나 아 스레일 치퍼티와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그때마다 안셀 이나 버나드가 끼어들어 그들의 혀에 화제를 걸어 아주 머나먼 곳으로 쏘아버렸다. 보안관은 넌더리를 내며 다시 그 화제를 주우러 헐레벌떡 달려갔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수다의 궁사들은 이미 자리를 옮긴 이 후였다. 저녁 내내 그런 일이 반복되었고, 그건 이 마을의 겨울밤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가장 많은 단어를 소비하여 가장 적은 내용만 주고받 는 재주는 기나긴 겨울밤에 대항하는 이 사람들의 지혜다. 그리고 폭 풍이 시작되자마자, 즉 오늘 밤 돌아가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이 서자마 자 또 다른 지혜가 발휘되었고, 안셀과 버나드, 초니, 아인켈, 심지어 보 안관까지도 그러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카드를 쥐 어 들었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난 알량한 보안관 조 수의 봉급을 보전하기 위해 양해를 구한 다음 그 자리에서 점잖게 물 러나왔다. 포도주 한 잔과 치즈 조각을 집어 들고 나는 식당을 빠져나 왔다.
그러나 객실로 들어가긴 했지만 침대에 누워 치즈와 포도주를 냠냠 거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것들을 고색창연한 가구들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문소리를 내지 않으려 주의하며 방을 나왔다.
복도 벽에 등을 기대었을 때야 내가 간과한 문제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마타피 교수의 침실이 어디 있는지는 잘 알지만, 루레인 의 객실이 어딘지는 알지 못했다. 마타피 교수가 루레인을 어느 정도 의 손님으로 생각하는지를 알면 추리에 도움이 되겠지만, 난 그 두 사 람을 따로따로 본 시간은 많아도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곤란하군. 결국, 나는 루레인이 교수와 같은 음악 가이며 또한 숙녀이므로 마타피 교수는 가장 좋은 객실에 그녀를 머물 게 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측백나무관에서 가장 좋은 객실은 겨 울 여왕의 방이다. 벽에 걸려 있는 대형 그림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그 방은 마타피 교수의 침실과 충분히 떨어져 있다. 엘프의 예리한 귀 로도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게다가 거세진 폭풍은 커다 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나는 곧장 교수의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마타피 교수의 침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간과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밤 내로 제발 열 개를 넘지는 말기를 교수 의 침실은 잠겨 있었다. 혼자 사는 교수가 설마 자신의 침실을 잠그고 다니겠냐고 생각했던 나는 소리 없이 혀를 차며 침실 문을 노려보았다. 이 고저택의 방문 자물쇠라는 건 투박하기 짝이 없는 물건인지라도 둑이나 열쇠 기술자의 솜씨가 아니라도 열 수는 있겠지만, 그러려면 몇 가지 장비가 필요하다. 가늘고 단단한 철사, 그러니까 머리핀 같은 것. 루레인을 찾아가 머리핀 좀 빌려달라고 말하면 그녀는 내가 새로운 머리 모양을 시험하려 한다고 생각해 줄까?
문득 겉옷 주머니에 들어갔던 내 손이 그 안의 잡동사니들 중에서 괜찮은 물건을 낚아올렸다. 뜨개질용 코바늘은 철사에 비해 좀 지나치 게 뭉툭하지만 예리하게 세워져 있는 코는 퍽 고무적으로 보였다. 나는 코바늘을 커다란 열쇠 구멍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엮기 위한 바늘이 잠긴 문을 풀었다. 그 패러독스는 재미있었지만, 다음에는 철사를 준비 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홀아비 냄새 같은 것은 별로 나지 않았다. 교수의 침실은 정갈하고 고요했다. 나는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그러곤 약간 실망해 버렸다. 비밀 금고나 비밀방(이런 고색창연한 고저택이라면 실로 있음직하지 않은가.) 까지도 각오하고 왔지만 아스레일 치퍼티의 가방은 침대 옆의 장식장 에 곱게 놓여 있었다. 고결한 마타피 교수는 그 엉성한 침실 자물쇠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 소도시의 가족적 분위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나는 가방을 열어보았고 그 속에 있는 바이올린을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 도로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침실을 나왔다.
그리고 내 객실로 돌아와 밤새도록 폭풍 소리를 들으며 뒤척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