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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호라이즌 (Over the Horizon) – 2화 : 겨울 폭풍


겨울폭풍

며칠 동안 계속되던 폭풍이 멎었다. 신전 바깥의 포석은 깨끗하게 씻겨 반짝거렸고 그 위로 싸늘하고 상쾌한 겨울이 얇게 깔려 있었다.

보안관과 내가 가을 내내 짠 스웨터와 털모자, 장갑 등을 받아든 잔 파드로스 신관은 크게 즐거워하며 대형 초를 몇 상자나 선물했다. 너 무 비싼 물건인지라 사양하려 했지만 잔파드로스 신관은 억지로 안겨 주었다.

“대신전에서 꼬박꼬박 보내주는 물건입니다. 제단에 피우라고 보내 주는 물건이지만, 솔직히 제가 제단 돌볼 틈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의 사무실은 겨울에 더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요긴하게 쓰일 곳에 간다 면 신께서도 기뻐하시겠지요.”

하긴 잔파드로스 신관은 그의 고아들 돌보는 일만 해도 눈코 뜰 새 가 없다. 보안관 사무실에서 그에게 편물들을 선물한 것도 그 때문이 다. 그리고 뒤쪽의 말도 사실이다. 할 일 없는 겨울엔 사람들이 분쟁을 더 많이 일으키며, 따라서 겨울은 보안관이 바빠지는 계절이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왼팔에 바구니를 걸친 채 그 모습이 혹 내 위엄을 침해하 진 않나 걱정하며 걸어가야 했다. 장검과 바구니라는 건 어쩐지 어울 리지 않는 배치인 것은 확실하다.

광장에 이르렀을 무렵, 나는 눈길을 끄는 모습을 보고 멈춰섰다. 커다란 대형 마차 두 대에서 몇 사람이 내리고 있었다. 그 화려한 마 차들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 마차에 실려 있는 커다란 가방들이었다. 여행 가방이 아닌, 왠지 그 내 용물이 짐작되는 독특한 가방들이었다.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떠올린 나 는 어쩔까 하다가 좋은 광경을 목격했다.

“율피트, 이리와.”

광장 한구석에서 나를 모르는 척하고 휘파람을 불고 있던 율피트는 차마 도망은 못 가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걸어왔다. 나는 녀석이 다가오자마자 재빨리 바지 뒤를 살펴보고 새을 하나 발견한 다음 압 수했다. 율피트는 어이없어하며 외쳤다.

“그것도 불법 무기예요?”

“아니. 하지만 미레일의 이마를 찢어버리면 불법이 되지. 이거나 들고 따라와”

율피트는 똥 씹은 얼굴을 한 채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급조한 종자를 데리고 기사의 걸음으로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들 제자리에 선 채 허리를 편다, 다리 를 주무른다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중에는 오랜 마차 여행 때문에 옆 사람에게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는 젊은 여자도 보였다. 난 망토를 옆 으로 치워 장검을 잘 보이게 한 다음 그들이 나와 내 종자를 확인할 수 있도록 천천히 걸어갔다. 내 바람대로 그들은 곧 경계 자세와 더불어 약간 공손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던 내종 자는 갑자기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나를 웃겼다. 

“안녕하시오?”

그들 중 가장 늙은 노움이 점잖게 말했다. 노움의 얼굴이 원래 좀 늙 어 보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200살은 넘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보안관 조수인 티르 스트라이크라고 합니다. 여행객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가방엔 물론 악기들만 들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래 도 조사는 해봐야겠습니다.”

며칠 전 루레인이 그랬듯이 그 음악가들은 깡촌의 보안관에게 이런 안목이 다 있는가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내 개인적인 목적과 율피트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제국법이 말하는 장검의 기준을 엄격하게 되풀이했다.

“12센티미터가 넘는 검은 장검으로 취급됩니다. 이 가방은 12센티미

터 장검은 들어갈 것 같군요?”

음악가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제국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긴 하지만, 법률 위반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별 쓸모도 없는 12센티미 터짜리 칼을 제조할 대장장이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12센티미터 장 검이라는 것은 완전한 농담이다. 그러나 그들은 투덜거렸지만 감히 반 대하진 않았고 덕분에 나는 플루트 상자까지 열어보이게 하며 그들 모 두가 어떤 악기를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거의가 현악기였지만 관 악기도 두어 개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악기도 있었다.

조사를 끝낸 나는 어떤 말이 나올지 거의 짐작한 상태에서 질문 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요?” 예상대로였다. 노움은 측백나무관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내 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광장 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제가 안내할 수 있겠군요.”

우리는 모두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마타피 교수 의 마차에 앉아 고삐를 쥐고 있는 루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인사 라도 건넬까 했을 때 노움이 먼저 외쳤다.

“이곳에 와 있었군요, 루레인 양!”

“예, 까자리 씨. 오래간만이군요.”

루레인은 마차에서 내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어떤 이들과는 악수를 하고 어떤 이와는 가볍게 포옹했고 어떤 이와는 초대면인 듯 통성명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대의 이름을 처음 듣는 사 람은 없어 보였다. 모두들 유명한 음악가들인가 보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까자리라고 불린 노움이 말했다.

“호라이즌은 아직 안 왔겠지요?”

“예, 다음 달 아흐레에 도착한다더군요.”

“다행이군. 아, 참. 미안하군. 당신은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지요?”

“물론 그는 연주할 수 없어요. 죄송하지만 나는 여러분들의 여행을

망쳐야겠군요.”

루레인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백발이 희끗희끗한 인간 남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모두가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것은 아니오. 우리들 중 일부 는, 예를 들어서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호라이즌이 연주할 수 없다 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내가 아스레일 치퍼티를 가져갈 테니까.” 루레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레이크필드 남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아. 당신 주장은 잘 알아요, 루레인 양 호라이즌보다 더 오래 남 을 연주자만이 그것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지요? 하지만 나는 이런 점을 지적하고 싶군. 당신은 더 오랜 기간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 에 더 많은 위험이 있소. 당신이 혹 곤궁해지기라도 하면, 글쎄. 호라이 즌에게 그걸 팔아버릴지도 모르지.”

루레인은 더 싸늘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레이크필드 남작, 경이 말하는 위험은 저보다는 오히려 레이크필드 가에 해당하는 위험인 것 같군요. 어떤 가문에도 가문의 재산을 탕진하는 후손은 나오는 법이고, 그런 후손은 대개 문화나 예술적 소양을 갈고 닦을 시간에 그걸 팔아치우느라 혈안이 되곤 하지요.”

레이크필드 남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늙은 노움 까자리 가 다시 끼어들었다.

“자, 자, 그만들 합시다. 광장 한가운데서 이 무슨 볼썽사나운 모습 입니까. 루레인 양, 당신 주장은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또 되풀이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레이크필드 남작, 덕분에 이곳까지 편하게 왔습니 다만 그래도 할 말은 해둬야겠습니다. 마타피 교수는 아스레일 치퍼티 를 판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마타피 교수는 그것을 경에게 팔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훌륭한 연주자인 루레인 양 에게 맡길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니면 호라이즌에게 연주하 게 함으로써 그걸 들으러 이곳까지 온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 겠지요. 하지만 그건 모두 교수가 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만 교수를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레이크필드는 투덜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루레인은 타고 온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교수님 댁에 유숙하고 있지요. 교수님을 도와드릴까 해서 장 을 보러 나온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저를 따라오시면 되겠군요.” 

루레인이 마차에 오르자 음악가들도 모두 마차에 올라탔다. 세 대 의 마차가 떠나고 나서 나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 뒤를 바라보았 다. 문득 옆을 돌아보자 내 종자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난 씩 웃으며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이만 가봐. 수고했다.”

율피트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또래들 을 모아놓고 특히 미레일을 무시하며 자기가 목격한 사건을 떠들어대 기 위해서. 그리고 나 역시 비슷한 일에 착수해야 할 것 같다. 좀 더 어 른다운 방법으로,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파리 보안관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말했다.

“이런 젠장. 이 조그마한 도시에는 너무 안 어울리는 일이군. 내가 똑바로 해석했는지 들어봐라. 그러니까 제국 곳곳에서 쟁쟁한 음악가 들이 이 조그마한 마을로 몰려들고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재산가들이 아직은 하나뿐이지만.”

“아직은?”

“보안관님, 설마 레이크필드 남작 하나뿐이겠어요? 난 아직도 심정 적으로는 회의적이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악기 살해에 대해 진 지한 것 같고, 그런 사람들 중엔 호라이즌이 아스레일 치퍼티를 죽이 기 전에 빨리 사들여야겠다고 판단한 부자나 귀족도 많을 것 같습니다 만.”

보안관은 자신이 이런 고난과 역경을 감내해야 할 만큼 나쁜 일은 한 적이 없다고 한참 동안이나 비장하게 중얼거리다가 오른손으로 오 른쪽 송곳니를 긁으며 말했다.

“내가 그 소식을 전하면 시장은 은퇴해 버리겠다고 떠들겠군.”

이파리 보안관의 추측은 정확했다. 시장은 집에 틀어박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시의회는 입에 거품을 물고 시장에게 출석 하라고 성화를 부렸는데, 그건 시장의 근무 태만을 꾸짖기보다는 시의 회가 시의 대표자가 되는 사태를 결사적으로 막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절대로 ‘시장 탄핵’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 조그마한 도시 의 행정부와 입법부가 이토록 첨예한 대립 구도로 들어가자 시민들은 권력 공백을 우려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 소도시를 실제로 이끄는 사람은 권위의 상징인 장검의 소유자이자 정 의와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인 이파리 보안관과 나라는 것이 더 뚜렷해 졌을 뿐이다.

이파리 보안관은 우울한 얼굴을 한 채 시의회에 들어가 단독으로 의회를 개회한 다음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초니의 밀도살 현장을 급습하여 벌금을 물렸고, 그 벌금으로 공책과 잉크를 사서 잔 파드로스 신관에게 보내었으며, 율피트의 귀를 붙잡고 미레일에게 끌 고가 그녀의 인형을 납치한 것에 대해 사과하게끔 했다. 그리고 그 다 음날은 내가 시장실로 들어가 결재 도장을 꺼내어 네지스 강 나루 터 개수 공사안에 도장을 찍었고, ‘시립 도박장 신설에 관한 안’을 발안 자의 얼굴에 집어 던졌고, 안셀의 시를 차분히 들어주는 친절을 발휘 하여 감동한 그에게서 잔파드로스 신관의 고아원에서 아이들의 글쓰 기를 봐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율피트의 구슬 주머니를 미레일의 책상 속에서 찾아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모두들 권위 있는 자들이 권위가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는 투였다. 게다가 그들은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드는 방문객들에 놀라느라 우리에게 신경 쓸 겨 를이 없었다. 방문객은 가지각색이었다. 다섯 대나 되는 화려한 마차가 동시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기도 했고, 악기 가방 하나만 을 결사적으로 끌어안은 채 죽을 지경이 되어 도착한 음악도가 광장 에 쓰러져 사람들을 기겁하게 하기도 했다.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짧게 의논한 다음 각자 미레일과 율피트를 고 용했다. 우리는 그 꼬마들을 자극할 필요도 없었다. 율피트와 미레일은 각자 상대방에 대한 경쟁의식을 활활 불태우며 정보들을 입수해 왔다. 그 결과 우리 둘은 방문객들을 대충 세 부류로 나눠볼 수 있었다. 그리 고 그건 늙은 노움 까자리가 이미 지적한 사실이다(나는 그 노움이 제린 다 공국의 궁정 악사라는 사실을 알고 기겁했다.). 첫 번째는 루레인과 같은 부류로 그 명기를 목숨 걸고 수호하겠다는 사명 의식에 불타는 연주자 무리였다. 두 번째는 레이크필드 남작과 같은 부류로 그 명기가 사라지 기 전에 빨리 구입하겠다는 재산가, 명기 수집가 부류였다. 그리고 세 번째가 가장 많았는데, 명기의 스완송을 들어보기 위해 찾아온 음악 애호가, 이론가, 연주자, 작곡가 등이었다.

어쨌든 너무나 많은 인사들이 방문하는 바람에 우리의 정겨운 소도 시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측백나무관은 이미 포화 상태였고 겨울철을 심심하게 여기고 있던 우리 시민들은 재 빨리 민박 영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이파리 보안관은 수심에 찬 얼굴이 되어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

“그건 왜 하는 겁니까?”

오래간만에 우리 두 사람이 보안관 사무실에 모인 어느 날 오후, 이 파리 보안관은 사무실 뒤편의 채마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장검을 휘 두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파리 보안관은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우 진 않은 듯했다. 하지만 젊었을 땐 꽤 설치고 돌아다녔는지 경험은 풍 부해 보였고, 게다가 오크 특유의 전투 반사 능력은 보는 사람을 퍽 즐 겁게 만들었다. 이파리는 검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면 꼭 불화가 생기는 법이야. 어떤 사 람들은 모욕을 민감하게 느낌으로써 자기가 명예를 가졌다는 걸 증명 하려 들기도 하지.”

이 오크는 가끔 사람을 꽤 놀라게 한다. 덕분에 나는 아랫단 코 끌 어올리기에 실패했고, 투덜거리며 대바늘을 뒤로 당겼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검사는 철저히 했고, 아무도 무장 은 하고 있지 않아요.”

“칼싸움 걱정은 안 해. 하지만 그 숫자만으로도 이미 위험하지. 골치 아픈 사태가 생겼을 경우, 아무도 안 다치고 사태를 진정시키려면 묘기 비슷한 거라도 좀 보여줘야 될 거다. 그렇잖으면 그 사람들도 위험하고 나도 위험해.”

나는 묵묵히 뜨개질 바구니를 내려놓은 다음 칼을 뽑아 들고 이파리 보안관 옆에 섰다.

그러나 시내는 활기찼다. 우리들에게 겨울이란 고요함이 스스로의 고요함에 질려 자폐증을 일으키는 계절이었다. 겨울이라는 덧칠이 도시라는 그림을 화면 아래로 가라앉히면, 망각된 그림들 속의 인물인 우리들은 서로에게 엉뚱한 짓을, 아주 정신 나간 짓이라도 해주길 간절 히 바라는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장검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보안관 과 보안관 조수에게 신앙에 가까운 존경을 바치는 우리 건전한 시민들 중엔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겨울 동안에도 출산이나 사망 은 일어나고 때론 결혼식도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 하다가 봄이 찾아오고 나서야 그 환희, 혹은 슬픔을 느끼곤 했다.

그러니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 시로 들어오자 우리는 계절 감각에 혼란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사람들 은 작은 일에 큰 감정들을 드러내 보였고 그런 서로를 보며 다시 놀랐 다. 고요가 사라진 도시에 흐르는 음악의 주조음은 흥분인 것 같았다. 만나는 모든 시민들이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흥분 속에서 덤벙 거리고 비틀거리고 꽥꽥거리는 통에 보안관과 나는 더욱더 의기소침해 졌다. 심지어 우리들은 율피트와 미레일이 화해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 도 모른다는 암담한 전망까지 나누곤 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 면 보안관과 나는 ‘이제 그만!’을 외친 다음 이 우주의 부재를 선언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레일과 율피트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 순결한 악의 덩어리들은 언제나 최고의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도시가 기이한 흥분 속에 표류하고 있을 때 거꾸로 우리들의 부표와 등대가 되어주었 다. 그들은 항상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덕분에 나와 보안관은 아직도 세계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여느 때와 같은 침착함으로 마타피 교수의 방문에 응할 수 있었다.

“보안관은 안 계시오, 티르?”

마타피 교수는 보안관 사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 리고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서 문을 닫으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 다. 난 창문을 통해 바깥을 살피는 교수의 등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말 했다.

“보안관은 순찰 나갔습니다. 앉으시죠, 교수님.”

교수는 바깥을 좀 더 살피고 나서야 난로 옆으로 걸어왔다. 의자를 끌어와 앉은 교수는 잠깐 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을지 몰라서가 아니라 숨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 깨를 들먹이며 숨을 쉬고 있었고 이 지방의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다. 나는 뜨개질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난로 위 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뜨거운 차를 따라서 교수에게 건 네었지만, 교수는 내가 건네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곧 교수는 당황한 몸짓으로 찻잔을 받아들었다.

“아, 고맙소, 티르, 보안관이 없단 말이지.”

“예,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렇잖으면 저에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찻잔을 후후 불던 마타피 교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할 말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요즘 시내가 많이 시끄럽지 않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나누자는 식의 서두였지만,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이 그렇게 말하자 교수의 말은 내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교수가 이 소란으로부터 거리감을 두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일단은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예, 하루가 다른 때의 열 배는 되는 것 같습니다. 워낙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서요. 어제 오후만 해도 눈길에 마차가 미끄러져 조난당한 여 행객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이어서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 지요.”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소. 진저 씨 일행 아니오? 그 사람은 하프시 코드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지.”

“그런가요? 하프시코드는 잘 다루는지 몰라도 눈 내린 들판에선 완 전히 넋 나간 듯이 굴더군요. 도시가 눈에 보이는데도 자기가 곧 죽을 거라는 듯이 비탄에 잠겨 있더라고요.”

교수는 겨우 웃었다. 그는 진저 씨가 귀족 가의 살롱이나 대형 연주 회장을 주무대로 삼는 사람이므로 황량한 설원에서 당혹해 버린 것은 이해해 줘야 된다는 내용의 변호를 한참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뜨개 질을 계속하며 틈틈이 그의 말에 맞장구쳐 주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 고, 그가 나에 대한 애타는 사랑을 고백한다 해도 부드럽게 웃으며 그 러시냐고 대답해 줄 마음가짐을 갖추었지만, 교수가 제대로 된 말을 꺼 낸 건 내가 난로 안에 석탄 한 삽을 더 퍼넣었을 때였다.

“조금 전 내 모습이 이상했지 않소?”

“귀찮게 구는 사람이 많은가 보군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찾아오신 겁니까?”

“그들은 나를 압박하고 있지.”

나는 그들이 누구냐고 묻는 대신 그들을 갈라놓았다.

“세 가지 정도의 압박이겠군요. 지킬 수 없을 테니 내놓으라는 사람, 역시 지킬 수 없을 테니 팔라는 사람, 지키지 말고 내주라는 사람. 왜 그렇게들 안달복달이지요?”

“그러게 말이오. 언젠가 내가 3000만 렐이라는 말을 했을 거요. 나 는 바로 어제 2억 렐을 내놓겠다는 제안을 들었소.”

나는 내 눈이 경악 때문에 크게 떠진 것처럼 비춰지길 애타게 바라며 말했다.

“2억이라고요? 아니, 일곱 배 아닙니까!”

다행히도 마타피 교수는 내가 놀란 건 그 액수 때문이지 그걸 훔치 려는 자의 희열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자신도 그 액수에 놀란 것이 틀림없다.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렇소. 난 그걸 판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떠올리지 못한 건 데, 그동안 호라이즌이 명기들을 너무 많이 죽여서 남아 있는 명기의 가치가 상상할 수 없이 뛴 모양이요. 2억 렐이라니, 맙소사. 나는 그런 돈은 상상도 할 수 없소. 당신이 저질스러운 농담 어쩌고 했는데, 이젠 내가 그런 기분을 느낀다오.”

나 또한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내 경우는 악기의 가격 구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지만, 생각해 보니 당연한 말이다. 희소가치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격을 더 빨리 상승시키는 법이니까.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난 그걸 안 팔 테니까.”

“어, 글쎄요. 호라이즌에게 내주어 그걸 죽일 바에야 2억 렐을 건지 는 편이 낫잖습니까? 게다가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기막힌 액수 를 내놓는다면 그 돈이 아까워서라도 아스레일 치퍼티를 열심히 지키 지 않을까요? 절대로 호라이즌이 손을 못 대게 할 겁니다. 그 사람들은 능력이 있을 테니까…………….”

“그건 또 다른 의미의 악기 살해요, 티르, 악기를 악기가 아닌 재산 으로 여기고 보관할 사람에게 악기를 준다고? 말이 되지 않소. 악기는 연주자의 손에 쥐어져야 하오.”

마타피 교수는 더할 수 없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입맛을 다 시며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럼 연주자에게 내어주시겠습니까? 아까 말했던 첫 번째 부류, 훌 륭한 연주자들 말입니다. 그자들은 자신의 직업적 자부심을 가지고서 호라이즌의 접근에서 아스레일 치퍼티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던데요. 그 사람들의 경우엔 실력이 있으니까…………….”

나는 어리둥절해서 말을 멈췄다. 이번에 마타피 교수의 얼굴에 떠오 른 것은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실력이라고 했소, 티르? 나는 누가 최고인지 알고 있다오. 그리고 그자들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마음속으로는 나에게 동의할걸.”

그렇다면 루레인은 인정받지 못한 모양이다. 내가 잠깐 그녀를 동정 하는 동안 마타피 교수는 다시 부드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나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소. 누가 최고인지 뻔히 알면서 두 번째나 세 번째 연주자에게 그걸 내준다면 그건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완벽 한 자기기만이겠지. 그들이 자부심으로 그것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 지만, 내가 어떻게 실력은 없고 자부심만 가진 연주자에게 그것을 주겠 소. 그건 실력은 없고 돈만 가진 재산가들에게 주는 것과 똑같다오. 물 론 내가 이 말을 연주자들 앞에서 할 수야 없겠지. 당신이니까 하는 말 이요.”

음악의 ‘음’자도 모르니까 말이지. 나는 상처 입지는 않았다. 그건 당연한 사실이니까. 그래서 난 세 번째 가능성을 말해 보았다. 

“그럼 호라이즌에게 내주실 겁니까?”

마타피 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코를 늘리기 위해 실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것도 안 된다는 것이군요.”

“그게 진짜 악기 살해니까.”

교수의 얼굴은 피로해 보였다. 흘러내린 땀이 말라붙어 교수의 얼굴 은 지저분했고 그 위로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덤불 같은 그 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덤불 어디에도 희망의 과일은 자 라지 않는 것 같았다. 교수는 신음처럼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소.”

나는 다시 차를 마실까 하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안 셀이 자신을 노련한 양조가라고 생각하던 시절 최고의 술이라며 건네 주었던 포도주병을 벽장에서 꺼내왔다. 이 술 또한 안셀의 다른 결과물 과 마찬가지로 간신히 견딜 수 있는 수준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다른 결과물보다 나은 점은 있었다. 취하긴 하는 것이다.

나는 교수의 찻잔에 포도주를 부어주곤 내 찻잔에도 따랐다. 교수 는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눈빛도 아닌 멍한 눈으 로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잔에 가볍게 잔을 부딪친 다음 한 모금 들이켰다.

“교수님, 제가 정리해 보겠습니다. 돈에 팔 수도 없지요. 명기가 아 닌 명품이 될 테니까. 2인자에게 줄 수도 없고요. 1인자가 엄존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1인자에게도 줄 수 없지요. 명기를 결딴내니까. 맞습니 까?”

교수는 다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석탄 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안 주면 되잖습니까. 며칠 전에도 말한 거지 만 교수님이 가지고 있으세요.”

“티르, 나 또한 몇 번이나 말한 건데, 연주되지 않는 악기가 무슨 소 용이 있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악기 살해요.”

‘그럼 당신이 연주하시오’라고 말해 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끝내 활 을 들어 올리지 못한 채 어둠을 바라보고 있던 어떤 노교수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았고 마타피 교수를 동정했 다. 그는 자신에게 왜 훌륭한 연주 실력이 없는가를 슬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방법은 두 가지뿐이군요. 호라이즌보다 더 우수하지만 악기를 죽이지는 않는 자를 기다려 그에게 그것을 주거나, 그렇잖으면 호라이즌이 이번만은 악기를 죽이지 않기를 바라며 연주하게끔 해줘야 되겠군요.”

마타피 교수는 실망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점잖은 이는 언성을 높여 나를 바보 취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숨을 쉬며 자조적 으로 말했다.

“전자는 어렵겠고 후자 쪽을 바라는 편이 낫겠군. 하지만 그래 가지 고선 나를 압박하는 자들을 만족시키긴 어렵겠는데.”

나도 그들이 만족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퍽이나 빨리 확인되었다. 이파리 보안관과 내가 두 사람 중 누가 늦은 점심 식사를 만들 것인지를 놓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어느 오후, 보안관 사무실의 문이 왈칵 열리며 뭔가 시커먼 것이 뛰어들어 왔다. 미레일이었다.

“보안관님!”

저 계집애는 내가 율피트의 고용주라는 것을 안 이후로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초니 씨가 빨리 보안관님을 데려오라고 그랬어요! 싸움이에요!”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장검은 허리에 차는 대신 손에 들었다. 그 편이 잘 보일 것 같았고 달릴 때 걸리지 않아서 더 좋았다. 단숨에 초니의 주점에 도착한 우리들은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람들이 주점 밖에 몰려서 안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사태를 단숨에 장악하기 위해 유명한 오크의 전투 함성을 외쳤다.

“크르르렁!”

피가 식는 듯한 울부짖음이었다. 검술 사범 노릇을 할 땐 전투 함성 을 지르는 오크 병사들에게 비웃음을 보내며 ‘그것밖에 못해?’라고 비아냥거려 주는 배짱도 부렸지만, 이파리의 조수가 된 후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리고 구경꾼 들은 움찔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 중 몇몇 소심한 종족들은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좌우로 쫙 갈라졌고 이파 리 보안관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보안관의 뒤를 경계하며 따라 들어갔다.

안에는 두 여자가 대치 중이었고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사 람의 얼굴은 볼 틈이 없었다. 서 있는 사람 중 한 명은 지데라는 이름 의 위어울프였다. 이파리 보안관은 그녀가 은팔찌를 차고 있는 것을 확 인했고, 그것도 모자라 은팔찌를 푼 모습을 보인 순간 즉각 사살당해 도 아무 말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게끔 한 다음에야 도시에 들어오도 록 했다. 그리고 지데와 대치 중인 사람은 놀랍게도 엘프 루레인이었다. 루레인은 어울리지 않게 깨진 술병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고 지데는 의 자를 들고 있었다. 참으로 수치스럽다 할 만한 광경이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어깨의 털을 꼿꼿이 세운 채 낮게 그르렁거렸다. 

“두 사람 모두 즉각 멈추시오.”

우리 시민들이라면 보안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 싸움을 포기하고 서로에게 사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보안관이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그 말을 못 들었다는 듯이 계속 서로를 노려보았다. 분노한 보안관이 다시 뭐라 외치려 할 때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모습을 보았다.

지데가 의자를 집어 던지고는 은팔찌를 풀어냈다.


지데는 한쪽 팔찌를 풀어낸 다음에야 우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녀는 나머지 팔찌를 움켜쥐고 있었고 절대로 사과하는 얼굴은 아니었 다. 그 위어울프의 얼굴은 다치기 싫으면 빨리 피하라고 권유하는 얼굴 이었다. 위어울프 특유의 우아하게 그늘진 얼굴에 그 표정이 떠오르자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즉각 칼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바 뒤에 숨어 있던 초니는 칼을 뽑아 드는 보안관을 보 자그만 기절해 버렸지만 보안관은 그쪽엔 신경 쓰지 않았다.

“지데 양, 다시 팔찌를 착용하시오. 사태를 그렇게 막무가내로 몰아 가지 마시오. 내일이나 모레쯤, 아니 언제라도 후회하게 될 게 뻔한 일 은 삼가시오.”

이파리 보안관은 그 순간에도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안관, 나가서 구경꾼들을 대피시키시죠.”

“왜 그러는 거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런 끔찍한 선택밖에 없다는 겁니까?”

“이 여자가 한 짓을 보면 알 거 아닙니까!”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를 보았다. 그는 지데와 같이 왔던 케이토라는 이름의 위어울프였다. 설마 루레인이 저 건장한 사내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놨단 말인가? 이파리 보안관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루레인에게 송곳니를 돌렸다.

“루레인 양?”

루레인은 약간 구부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제야 그녀의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보았다. 이파리 보안관은 그 모습에 당황하며 말했다.

“루레인 양, 당신이 이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까?”

“예. 그리고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자들은 나에게 약을 먹였어요. 그렇잖으면 내가 왜 각혈을 하겠어요?”

참으로 점입가경이다. 나와 보안관은 다시 지데를 바라보았고 지데 는 격노한 듯 외쳤다.

“허튼소리! 누구에게 그런 모함을 네가 결핵인가 보지! 누가 독약 을 먹였다고……”

“엘프는 결핵에 걸리지 않아, 지데. 그리고 독약은 아니지. 수면제였 지?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약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그래서 각혈하게 되는 거야. 누구에게 쓸 건지 말하지 않고 샀으니 그런 주의사항도 못 들었겠지.”

어쩐지 루레인의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하지만 루레인 양, 저들이 왜 당신에게 수면제를 먹인단 말입니까?”

“내가 아스레일 치퍼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자들은 나를 납치한 다음, 라이칸스롭 병을 옮긴다는 계획을 세웠겠지요. 자기 말을 듣도록”

주점 바깥에서 신음과 분노의 외침들이 들려왔다. 지데를 본 나는 루레인의 말이 사실이라고 느꼈다. 지데는 부인하려는 표정이었지만 꾸 민 기색이 너무 드러나는 서푼짜리 연기였다. 이파리 보안관 역시 나와 같은 판단을 내린 듯 검을 지데에게 겨냥하며 말했다.

“잘잘못은 명명백백하게 가려질 것이오. 두 사람 모두 체포하겠소. 공공장소에서의 소란과 상해 혐의로 기물 파손도 추가되겠군. 지데 양, 빨리 팔찌를 도로 차시오. 그리고 루레인 양? 그걸 내려놓고 티르 군에 게 협조하시오.”

그 순간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태가 일어났다.

지데가 나머지 팔찌까지 벗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괴성을 지르며 달 려들었지만 지데 역시 대비하고 있었던 듯 벗은 팔찌를 보안관에게 집 어 던졌다. 보안관은 팔찌를 피하느라 약간 지체했고 그 사이 지데는 저편 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뛰어나왔을 때 그녀는 이 미 늑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게 뻗은 발톱들이 보안관의 머리를 겨냥하여 내려쳐지고 있었다. 보안관은 필사적으로 옆으로 피했고 나 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지데의 정면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내 왼쪽 허벅지가 베이는 데 1초, 어깨가 두 번 찢어지는 데 3초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4초째에 나는 거친 욕설과 함께 그녀의 머리를 천장까지 날려 올렸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보안관 사무실의 난롯가에 앉아 있었다. 내 어 깨의 붕대를 다 묶은 이파리 보안관은 엄숙한 얼굴을 한 채 의자를 끌 어와 앉고서는 내게 셔츠를 던졌다. 그리고 저편의 방문을 흘끔 쳐다보 고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사고가 하나도 없을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젠장. 이런 대형 사고 가 날 줄이야. 두 사람이 다치고 한 사람이 죽어 나가다니.” 

“변신한 위어울프를 안전하게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알아, 너를 탓하는 건 아냐. 위어울프가 변신했는데 죽은 건 하나 뿐이니 오히려 널 칭찬해야 마땅할 일이다. 초니도 그렇게 말하더군. 나 는 이 상황에 대해 짜증 내는 중이야. 그녀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건데. 내 불찰이다.”

나는 웃으며 보안관의 무릎을 몇 번 두드렸다.

“불찰은 무슨 불찰입니까. 그렇게 각서까지 쓴 주제에 변신하다니, 그녀의 잘못입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새삼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어디서 뭐하고 굴러먹던 놈이냐? 그런 건 생전 처음봤다.”

“묘기를 보여줘야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나는 싱거운 소리를 하며 웃었고 보안관 역시 괘념치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얌전히 지냈으니, 네 가 구제가 안 되는 녀석이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칼 쓸 일, 안 쓸 일 정도는 구분하는 놈으로 믿겠다. 그거면 충분해.”

“고맙습니다.”

저편의 문이 열리며 소란다스 부인과 요란하스 부인이 걸어나왔다. 그 자녀들의 전설적인 반목을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두 부인 은 매우 각별한 친구 사이다. 그리고 그 선량한 부인네들 사이로 어깨 에 큰 숄을 두른 루레인이 파리한 얼굴로 걸어왔다. 보안관은 의자에 서 일어나며 두 부인에게 정중하게 감사했다.

“두 분 도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부인은 별로 도움된 것 없다고, 매일같이 미레일과 율피트가 보 안관과 보안관 조수를 괴롭혀드리니 미안한 건 자신들이라고 말하며 조용히 사무실을 떠나갔다. 문밖까지 그들을 배웅해 준 보안관은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난롯가로 돌아왔다.

“치료는 잘 받았습니까, 루레인 양?”

루레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말했다.

“부인들의 솜씨가 아주 좋으시더군요. 그런데 케이토는 어떻게 됐죠?”

“그 위어울프 말입니까? 감옥에 처박아뒀습니다. 변신 한번 하고 나 면 나을 테니까요. 아, 감옥은 변신한 위어울프도 어쩌지 못할 만큼 튼튼합니다. 며칠 뒤에 놔줄 생각입니다.”

“며칠?”

“사실 그들의 범죄라곤 수면제를 먹인 것뿐이지요. 루레인 양을 잠 재운 다음 무슨 짓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아가씨가 잠들지 않았고, 그 래서 지금으로선 약사법밖에 저촉되지 않는군요. 문제는 오히려 아가 씨 쪽입니다. 그 케이토라는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친구 도 낯짝이 있으면 고발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보안관님은?”

“예? 아, 나도 고발하지 않아요. 정당방위로 생각되니까. 그런데 도대 체 그 건장한 남자를 어떻게 상대한 겁니까?”

“운이었어요. 수면제를 먹었다는 걸 느낀 순간 졸리는 척했지요. 그리고 케이토에게 기대는 척하며 술병으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어요. 케이토는 쓰러졌고, 병은 깨졌고, 그 다음은 여러분이 본 대로예요. 불 쌍한 지데…….”

“잘 아는 사이입니까?”

“같은 대학을 다녔어요. 지데는 항상 상식이라는 말을 몰랐지요. 그 녀는 모닥불을 끄기 위해 제방을 무너뜨리는 성격이죠. 이번에도 그런 조야하고 거친 수단에 호소했고, 일이 파탄 나자 다른 사람이 뭔가 깨 닫기 전에 변신해서 나를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것도 제대로 안 되니까 여러분들도 다 죽여버리면 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런 끝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마지막 말은 뜨개질 실뭉치를 가지고 놀던 나를 향한 것 같았다. 난 입술 끝으로만 웃으며 루레인의 말을 반복했다.

“운이었지요. 그럼 그자들도 아스레일 치퍼티를 원하는 겁니까?”

루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실뭉치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가 막히는군요. 악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야 되다니. 그자들은 왜 그렇게 다급한 수단에 호소한 겁니까?”

“아실 텐데요? 아스레일 치퍼티를 손에 넣기 위해서지요.”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경까지 오고 보니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그것 때문이라니…………, 당신은 아스레일 치퍼티가 죽기 전에 그 것을 넘겨받기 위해 교수에게 자신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참, 교수 님께 인정은 못 받으신 모양이지요?”

루레인은 얼굴을 약간 굳히며 말했다. 

“노력하고 있어요.”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했지만 난 그녀의 실력이 대단할 거라 생각한다. 죽은 지데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 바 아니지만 그녀가 우 수한 음악가였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루레인에게 아 스레일 치퍼티를 받을 정도의 실력이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건 믿는 편 이 좋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리고 레이크필드 같은 사람은 아스레일 치퍼티가 죽기 전에 그것을 사려고 애쓰고, 그 지데는 아스레일 치퍼티가 죽기 전에 손에 넣기 위해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하다가 죽어가고…………. 그리고 아스 레일 치퍼티가 죽어가는 것을 보려고 온 사람들도 있고요. 모두가 아스레일 치퍼티가 위험하기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지요?”

루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화가 나서 실뭉치를 뜨개질 바구니 속에 집어 던졌다.

“그러면 그 호라이즌이라는 자에게 연주 못 한다고 딱 잘라 거절하 면 되잖습니까. 조금 전에 상식 어쩌고 하셨습니다만 내 생각에 그게 가장 상식적인 해결 방안 같은데요? 교수님이 호라이즌에게 거절하면 이 모든 짓거리들이 필요 없잖습니까.”

“어떻게요?”

“교수님이 남의 손에 내줄 수 없을 만큼 아스레일 치퍼티를 사랑한 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잖습니까?”

“연주되지 않는 악기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티르 씨, 아무리 훌륭 한 악기라도 연주되지 않으면 명기가 아닐뿐더러 악기라고 할 수도 없 어요. 그건 같은 부피의 나무토막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것이 되죠.” 

“그럼 부서졌다거나 도둑맞았다고 거짓말을 하면?”

“이해를 못 하는군요, 티르 씨. 그건 너무 사랑해서 내주지 못하겠 다는 것과 똑같잖아요.”

고결하다, 음악가들이여, 그대들의 양심이 그토록이나 깨끗할진대 그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쯤이야 대수롭잖은 문제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정말 도둑맞는 것은 어떤가.

나는 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보았다. 어디 있는지도 알고 철사도 준비되어 있으며, 봄에 떠나기 전까지 어디에 숨겨둘지도 결정되어 있 다. 게다가 별로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것은 절도가 아닌 일종의 구원이 될 수도 있는 문제로 바뀌었다. 한 가지 사소한 문제만 해결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측백나무관에 머 무르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어깨에 딱지가 앉기도 전에 두 번째 사건이 터졌다.

율피트 소란다스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시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 꼬마는 지데 사건에서 미레일이 수행한 역할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 나이에 비해선 분명히 지나치게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눈에 불을 켠 채 분쟁의 냄새를 맡고 돌아다녔다. 소란다스 부인은 분쟁 거리를 찾아 다니는 그 행동에 많은 우려를 표명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율피트는 카콘브리드 백작과 안도지프 백작 분쟁의 최초 목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련한 미레일 요란하스는 세상의 파멸을 본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돌 아다니게 되었다.).

사태는 마타피 교수가 식료품을 사기 위해 시내에 나타난 것에서부 터 시작되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것은 카콘브리드 백작이었고, 먼저 교 수의 팔짱을 낀 것은 안도지프 백작이었던 모양이다. 이 둘은 똑같이 악기 수집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둘 사이에 동호인의 우정 따위는 존 재하지 않았다. 어쨌든 후자는 전자에게 득의만면한 웃음을 흘렸다. 하 지만 그 경우 그 웃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 웃음에 격 분한 카콘브리드 백작은 신사의 예의도 망각한 채 마타피 교수에게 다 가가 뻔뻔스럽게도 반대쪽 팔짱을 끼었다. 이 무례하고 몰상식한 행위 에 대해 안도지프 백작은 주의를 주었고 카콘브리드 백작은 노련하게 응수했다.

그리고 불쌍한 마타피 교수는 그만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누가 먼저 말소리를 높였고 누가 먼저 상대방을 돈밖에 없는 백치라고 불렀는 지는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것은 카콘브리드 백작이 재미있는 지팡이 를 가지고 있었고 안도지프 백작은 그 속에서 나온 긴 장검에 당황했 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 율피트는 이미 행동을 개시했고 우리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도착하여 안도지프 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격분한 이파리 보안관은 카콘브리드 백작의 면전에서 지팡이 검을 부러뜨리고는 분노와 수치심과 공포로 새파랗게 질린 백작의 목에 자 신의 장검을 겨누었다. “불법 무기 소지, 공무집행 방해, 보안관 우롱, 그리고 명예 훼손에 살인 미수!” 죄상을 나열할 때마다 장검은 점점 백 작의 목젖을 파고들었다. 물론 이파리 보안관은 다른 자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거친 행동을 취한 것이지만, 격분한 오크의 그런 행동을 견뎌내기엔 카콘브리드 백작의 신경이 너무 가늘었던 모 양이다. 백작은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고 그러자 백작의 하인들은 살 기등등한 기세로 우리를 에워쌌다.

피를 보고야 말 것 같은 식은땀 나는 순간 우리를 구원한 것은 케이 토였다. 근처 술집에서 뛰쳐나온 케이토는 지데가 죽기 직전에 했던 행 동을 그대로 취해 보였다. 은팔찌 하나를 벗어던진 다음 남은 팔찌를 쥐고서, 케이토는 백작의 하인들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몰염치한 것들. 폐하의 관료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그들을 다 결박한 다 음 입맞춤이라도 해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케이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케이토는 보안관과 악수하는 대신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 가 조용히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백작의 하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보다 더 공포스러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

“지데는 내 약혼녀였소.”

케이토가 떠나고 나서 이파리 보안관은 나를 죽은 사람 보듯이 쳐 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시선에 항의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카콘브 리드 백작과 그의 하인들은 엉뚱한 분풀이에 몹시 분노했다. 그들은 분 노하고 항의하고 펄쩍펄쩍 뛰기까지 했지만, 보안관과 나는 그들의 엉 덩이를 걷어차며 감옥에 집어넣었다. 우리도 꽤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측백나무 숲 사이에서 새벽 속에 드리워진 측백나무관의 그 림자를 바라보며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낼 때까지도 내 화는 가라 앉지 않았다.

측백나무관의 지붕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앞마당 쪽은 그렇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서 그런지 마당에 쌓인 눈은 말라붙은 비누 거품처럼 지저분하게 이리저리 이겨져 있었다. 측 백나무관에 유숙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엔 늦게까지 잠들지 않는 사람도 있으리라 여겼기에 나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 했다. 그럼에도 측백나무관에 도착했을 때 몇 군데서 새어 나오는 불빛 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측백나무관을 째려보고는 푸념하며 나무에 기대섰다. 싸늘한 숲속에서 차가운 나무에 등을 기대고 두 시간 동안 서 있는 것은 어쨌건 권장할 일은 못 된다. 거기에 우리 고장의 별스러운 북서풍이 더해 지면 5분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바람은 자신에게 자해를 가하며 해괴망측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무들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내가 보건대 저 측백나무 들은 우주의 비밀을 깨달아버린 듯했다. 그게 아니고선 저런 미친 웃 음소리를 설명할 수 없다. 얼어붙은 얼굴엔 눈이 와 부딪혀도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고드름 늘어진 사념의 갱도 속으로 뻗은 사고 의 협궤는 추위 속에 평행성을 상실하여 때론 꼬이고, 때론 교차하기 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발가락을 잔뜩 굽히 고 두 손으로 쉼 없이 온몸을 문질러대고 빨강 머리에 대한 생각을 계 속하며(따스한 추억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증오가 필요했기에) 두 시간 동안 버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북서풍이 부는 날을 선택한 것은 내가 낼지도 모를 소음들을 북서 풍이 덮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서풍이 실어오는 눈은 눈 밭 위에 남게 될 내 발자국을 지워줄 것이다. 하지만 난 불안한 전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두 시간 동안 숲 속에 서 있느라 기진 맥진해 버렸고 그런 상황에서 눈보라를 뚫고 8킬로미터를 걸어가는 것 은 자살 기도자들에게나 호평받을 산책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얼어서 요상한 소리를 내는 손수건을 털며 우울한 눈으로 측백나무관을 바라보았다.

결행한다면, 8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한다. 해가 뜨기 전까지 돌아가야 하므로 부리나케 도망쳐야 한다. 결행하지 않는다면, 그냥 걸어가서 문을 두드린 다음 적당한 핑계를 대고 하룻밤 쉬게 해달라고 말하면 된다. 얼어붙은 내 몸은 화주 한 잔 마시고 푹 잠들게 해달라고 애원과 협박을 보내오고 있었다. 교수는 이런 밤에 찾아간 이에게 화주 한잔 내놓는 것을 자연법칙으로 여기는 신사다. 따스한 벽난로, 화주 한 잔, 소란 속에 버무려지는 걱정과 위로의 말들. 아아, 왜 그러지 말아야 하 는가.

나는 손수건을 얼굴에 갖다 댔다. 그리고 그 끝을 머리 뒤로 돌려서 묶었다.

얼어붙은 얼굴은 복면의 감촉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난 잠시 당 황했다. 코와 얼굴을 더듬어보고 복면이 똑바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주머니칼을 꺼내 들고 측백나무관의 창문 쪽으로 다 가갔다. 현관문에는 빗장이 질러져 있을 것이다. 북서풍에 문이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복잡한 열쇠보다 그런 단순한 빗장이 더 처 리하기 귀찮다. 창문에도 물론 비슷한 것이 있지만 현관문에 걸려 있는 큼직한 것보다는 다루기가 덜 까다로울 것이다.

덜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었다. 창문 틈으로 칼을 쑤셔 넣어 위로 밀 어 올리자 빗장은 반 바퀴 돌았고 눈앞으로 거실의 모습이 펼쳐졌다. 나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간 다음 창문을 도로 닫았다.

그러곤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보내었다. 나는 눈이 들이쳐 바닥을 적 실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창문 아래의 벽에 기대앉은 나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집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사나운 북서풍이 건물 벽을 문질러대는 소리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 다. 이 지붕 아래 남보다 월등히 귀 밝은 음악가들이 침대마다 누워 있 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모두가 꿈꾸고 있을 물건을 향해 조심스럽 게 걸어갔다.

계단을 저벅저벅. 통로를 성큼성큼. 그러자 교수의 침실 앞이었다. 춥고 길고 어두운 통로에 선 나는, 먼저 장갑을 벗고 얼어붙은 손가 락들을 입 앞으로 가져왔다. 입김을 불자 어둠 속에서도 허연 김이 보 일 지경이었다. 입김은 손가락들을 녹였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갈라지 는 기분도 선사했다. 신음을 흘리고 싶었지만 대신 이를 좀 악물었다. 손가락이 충분히 녹고 나서 나는 침실문에 귀를 대고 방 안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물론 바람 소리 외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빌어먹을 북 서풍 손끝으로 열쇠 구멍을 찾은 다음 그 속으로 조심스럽게 철사를 쑤셔 넣었다. 눈을 감고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차라리 코바 늘이 나았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 다음, 문을 열고 교수의 침실로 들 어섰다. 좋은 밤이죠? 저는 동성애에 빠진 인쿠부스입니다.’

마타피 교수는 후광과도 같은 은은한 빛에 감싸여 성자 같은 모습 으로 고요히 누워 있었을까? 천만에. 둘둘 말린 시트를 다리 사이에 끼고 상반신과 하반신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한 채 침대에 처박혀 있었다. 이런 날씨에 저 지경을 하고서도 잘만 자는 것을 보니 아무래 도 잠들기 전에 화끈한 걸 마신 모양이다. 그 증거로 교수는 요란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군대의 기상나팔 대용으로 사용해도 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중후한 음색이었다.

장식장을 돌아보자 며칠 전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열고 안에 있는 바이올린을 확인하 기까지 아무런 장애도 없었기에 난 겁이 날 지경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낙천적인 도둑을 위해 준비된 가짜 아닐까? 나는 미심쩍다는 표정으 로 상자 속에 누워 있는 바이올린을 노려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 가 시간에 바이올린을 심문하는 방법이라도 좀 익혀둘걸. 나는 고개를 조금 내저은 다음 바이올린과 활을 집어 들었다. 내일 아침 교수에게 물어보면 되리라. 

‘도둑맞으신 것이 뭐지요?’

‘가짜 아스레일 치퍼티입 니다, 음하하’ 

‘음하하, 기쁜 노릇입니다.’

준비해 간 천으로 아스레일 치퍼티와 활을 감싸고 그것을 배낭 속 에 집어넣었다. 상자를 제자리에 놓아둔 다음 배낭끈을 단단히 조이며 나는 침대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그 자세로 물끄러미 침 대를 바라보았다.

침실로 새어들어 오는 묽고 가냘픈 빛 속에 침대는 원근감을 상실 한 평면적인 물체가 되어 벽에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부분부분 덧댄 듯한 교수의 몸은 입체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 위에 누워 있었다. 깊이 감이 왜곡된 기이한 모습.

나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의 가슴께까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기에.

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다. 그는 술 냄새를 풍기며 잠들어 있다. 내가 본 것은 어둠이 비춰준 나 자신의 양심이다’ 등의 변명이나 위로는 필요 없었다. 나는 그냥 물끄러미 어둠에 덮인 교수의 얼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차례 바람이 자신을 찢으며 소리 높이 비명을 질렀을 때 몸을 돌려 침실을 나섰다.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와 거실을 가로지르고 다시 창문을 닫는 데 5분, 그리고 8킬로미터의 숲길을 걸어오는 데 500년이 걸렸다. 그 500년을 버티기 위해 빨강 머리에 대한 추억이 꽤 많이 필요했다. 아스 레일 치퍼티를 숨겨놓고 집으로 돌아와 몸에 술을 뿌릴 때쯤 나는 그 녀의 왼쪽 새끼발가락에까지 저주를 내리고 있었다. 무좀과 피부병과 묵직한 물체의 불가해한 추락이 영원하라고


“일어나, 티르! 이런, 술 냄새, 코가 떨어져 나가겠군. 얼마나 퍼마신거야?”

“케이토냐? 덤벼라! 슬픔 때문에 흉측한 얼굴로 바뀌었다고 해서 봐줄 줄 아느냐? 그런데 정말 못생기게 변했구나.”

이파리 보안관은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냅다 휘둘러 내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나는 말벌에 쏘인 망아지처럼 펄쩍 뛰어올라 엉덩이를 움 켜쥔 채 이파리 보안관을 바라보았다.

“뭐, 뭡니까?”

“밤새도록 퍼마셨나 보군. 그래 가지고선 케이토가 정말 찾아와 목을 따가도 모르겠다. 일어나서 씻고 옷 챙겨입어.”

몸에 술을 뿌린 것은 바라는 대로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북서풍 속에서 왕복 16킬로미터 를 걸은 것이 아니라 위어울프의 약혼자를 죽인 자가 당연히 취했을 과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조금 더 도와주기로 했다. 이파리 보안관은 장갑을 발에 끼려 애쓰는 나를 보며 위엄 있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의 조언에 따라 장갑을 손에 끼며 투덜거렸다.

“늦잠자서 미안합니다. 술을 좀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찾아오신 겁니까?”

“내가 왜? 출근하고 나서 혼쭐내 줘도 되는데, 사건이 터졌다.”

“무슨 사건이요? 케이토가 티르를 죽인 건 아닌 거 같은데, 잠깐, 저 살아 있죠?”

“집어치우고 일어나. 어쩌면 우리 둘이 보안관과 보안관 조수 노릇 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겠다. 아스레일 치퍼티가 없어졌다.” 

다시 올려다본 보안관의 얼굴은 끔찍했다. 따라서 나는 그 표정을 흉내 내기만 하면 되었다.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근무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보안관의 말은 물 론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이 도시에서 이파리 하드투스와 내가 아니 면 누가 장검을 빗겨 차고 상식의 화신인 것처럼 굴 수 있단 말인가(한 때 안셀이 자신을 타고난 보안관 조수라고 여겼던 적이 있긴 하지만 그는 정확히 이틀 만에 장검을 반납하고 포충망을 들어 올린 다음 나비를 쫓아 달려가 버렸 다.). 따라서 보안관이 저 말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미래 에 대한 불안감이 아닌, 그 사건 자체의 심각성뿐이다.

그러나 보안관도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표현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측백나무관에 도착한 우리들은 건물 바깥에서부터 아찔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검 칼자루로 문 을 두드렸다.

문이 벌컥 열리며 나타난 것은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트롤이었다.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잠시 동안 말을 잊은 채 그 무시무시한 트롤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하지만 트롤은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안쪽을 향해 외쳤다.

“보안관이 왔소! 보안관이오! 드디어 오셨군. 잘됐소. 이젠 문에서 비켜도 되겠군.”

이파리 보안관은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떠올린 듯했다.

“문을 막고 계셨소, 올바이드 남작?”

“물론이오. 아무도 못 나가게 막고 있었소. 자, 어서 들어오시오. 그리고 저 중에서 파렴치한 도둑을 잡아주시오!”

이파리 보안관이 뭐라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안쪽에서 또 다른 누 군가의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은근슬쩍 자기 자신을 제외하진 말아줬으면 하는군요, 남작님! 당 신이 그 문을 막는 것을 찬성한 이유는 당신이 트롤이기 때문이지 당 신이 결백하다고 믿기 때문은 아니에요!”

올바이드 남작은 그 톱날 같은 이빨을 바드득 갈아대며 건물 안쪽 을 쳐다보았다. 이파리 보안관은 그가 뭐라 외치기 전에 ‘실례하겠습니 다 어쩌고 하며 재빨리 장검을 들어 올려 남작을 밀어붙였다. 남작은 옆으로 비켜섰고 우리는 그제야 건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거실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종족 색을 뚜렷이 하는 얼굴로 서로를 미심쩍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타피 교수는 그 가운데서 지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파리 보 안관은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교수님, 도난 신고를 받았습니다만.”

마타피 교수는 고개를 들어 보안관을 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 다. 그리고 그는 오늘 아침 손님들 중 누군가가 그걸 구경하게 해달라 고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아들여 상자를 열어보았지만, 상자 속은 텅 비어 있었다는 내용을 띄엄띄엄 말했다. 조금이라도 늦게 발각되도록 일부러 상자를 남겨둔 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군. 계속해서 교수는 아스레일 치퍼티가 어제 오후까진 분명히 제자리에 있었으므로 사라 진 것은 밤 중의 일일 거라고 말했다. 그는 말하는 도중 몇 번 나를 쳐 다보았지만, 그 눈길은 사정이 이렇소, 티르’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연 스러웠다.

사람들은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별 신 경 쓸 것 없는 그 내용들은 도난 시간이 밤중이라는 점, 이 건물 내에 는 그걸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 그리고 이 측백나무관이 시내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므로 다른 누군가가 올 리는 없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말에 대해서만 고개를 끄덕이며 찬 성해 주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런 조건들을 놓고 볼 때 도둑은 분명 건 물 내의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보안관은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시내 쪽에도 그걸 탐내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측백나무관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 중엔 16킬로미터 정도 눈보라 속을 걸을 수 있는 종족도 있을 테고요. 가능성은 그게 어떤 것이든 함부로 포기해선 안 되겠지요.”

별 생각 없이 말한 것이겠지만 이로써 보안관은 사람들에게 신중하 고 끈질긴 수사관의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럼으로 인해 서 사람들은 정오의 종이 울릴 때 보안관이 범인을 지목하기라도 할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게 된 것은 별개의 문제다. 보안관은 이 기대 에 찬 시선들 속에 당황해하다가 현장을 보자는 말을 중얼거리며 도망 치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그 시선들 속 에서 보안관은 노련하고 기민하며 명석한 명탐정의 표정을 계속 유지 하느라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그를 도와 야 했다. 발자국이 훼손될지도 모르니 아무도 나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다음 나는 그와 둘이서 뒷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둘만 남자 이파리 보안관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주물렀 다. 측백나무관의 창문들마다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한 눈초리들이 우 릴 보고 있었기에, 그는 바닥을 꼼꼼히 살펴보는 척하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좀 살겠군. 네 생각은 어떠냐? 저 안의 누가 그랬을 것 같냐?”

나 역시 바닥을 내려다보며 가끔 죄 없는 눈밭에 손가락질해서 창문 안쪽의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어주며 말했다.

“동기만 가지고 조사한다면 용의자가 수십 명도 넘을 겁니다. 저 사람들, 그리고 시내에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그것 때문에 이 겨울에 이 곳까지 온 사람들이니까요.”

“좋은 걸 지적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걸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것을요?”

“교수 자신”

“마타피 교수님이요?”

이파리 보안관은 허리를 펴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간단한 해결책 아니겠냐? 지금까지 나는 그가 그걸 팔고 싶어 한 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팔기도 싫고 주기도 싫고 호라이즌에게 내 주기도 싫다면, 그걸 숨겨놓고 도둑맞았다고 주장하는 건 아주 간단한 해결책 아니냐. 게다가 네 말대로 그런 동기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 을 때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그 사람들을 의심하지 교수를 의심하지는 않을 테고.”

나는 찬성하지 않았다. 왜 그런 얼빠진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교수에게 있어 자기기만일 겁니다, 보안관님. 그럴 바엔 무례 를 무릅쓰고 아무에게도 안 준다고 선언하는 편이 낫잖습니까.”

“하지만 교수는 인간이고 오크나 인간은 그렇게 이성적인 동물이 아냐 입이 찢어져도 ‘내가 그러고 싶어서’라고 말 못 하는 종족을 열 거해 보면 인간은 꼭 들어갈걸.”

“내가 그러고 싶어서? 무슨 말입니까?”

“그게 정의여서, 그게 당연한 이치거나 관습이어서, 혹은 그게 사람 사는 도리여서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내가 그러고 싶어서’라고는 말 못 한다는 거야. 자기를 작게 보는 종족들이거든. 그래서 오크나 인간 은 신념이나 자기주장이라는 말에 경외감을 품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불의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는 기사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라. ‘그게 정의니까!’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기는 하 겠지만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라고는 말 못 한다. 그것은 무례한 자나 범죄자의 화법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대화 두 가지가 그걸 증명한다. ‘시대의 이름으로 그를 죽였다’ ‘당신의 정의감은 알겠으나 그래도 살인은……………’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인간과 오크는 저 정도밖에 안 되는 것들이다. 이야기가 많이 빗나 간 듯하지만, 어쨌든 이파리 보안관은 인간인 마타피 교수가 ‘내가 주 기 싫어서’라고는 말 못 하니까 ‘도둑맞아서’라고 말하려 한다고 의심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럭저럭 통찰력 있는 판단이지만, 나는 고개를 가 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는 다릅니다.”

보안관은 별 대답 없이 다시 눈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밤새 내린 눈은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였고 그 속에서 어떤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공정해서라기보다는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보안관을 방해하 지 않았고 그의 명령을 열심히 수행하긴 했지만, 자발적인 행동을 하지 는 않았다. 그리고 보안관은 도난에 관련된 어떤 증거도 포착하지 못했다. 그가 약간만 객관적이었다면 창문에 남은 칼자국을 찾을 수 있었 을지도 모르지만, 보안관은 교수 범인론을 떨쳐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 지만 보안관은 일단 관련자 신문을 하기로 결정했고, 늦은 오후에 방 하나를 잡은 다음 측백나무관에 있던 사람을 하나씩 방 안으로 불러 들였다. 그동안 나는 혹 일어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도주를 막기 위 해 건물 밖에서 파수를 서기로 했다. 현명한 조처였다. 범인은 어디로 도 달아날 수 있겠지만 나에게선 달아나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뒷마당 한쪽의 소각장에 의자를 내놓고 앉았다. 손님 들이 많아서인지 쓰레기도 많았고, 그래서 연료는 충분했다. 난 쓰레 기들을 태워 모닥불을 만든 다음 두 손에 쬐며 겨울 숲을 바라보았다. 잠이 모자란 데다 불 옆에 앉아 희고 고요한 겨울 풍경을 보고 있으니 졸음이 절로 찾아왔다.

뒷문으로 루레인이 걸어 나왔다.

루레인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도 하지 않고 곧장 나에게 걸어왔다. 난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앉아 있던 나뭇등걸에서 옆으로 조금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주었지만, 루레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선 채모 닥불을 향해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우리 둘은 잠시 측백나무가 지에서 덩어리진 눈이 떨어지는 소리와 쓰레기 불타는 소리를 들으며 침묵했다.

열기에 휘말린 종잇조각이 위로 떠 올랐다. 루레인은 그걸 가볍게 낚아채선 다시 불 속으로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아스레일 치퍼티는 살았군요.”

“예?”

“아스레일 치퍼티는 이제 장물이 되었으니까 한동안은 세상의 수면 위로 떠 오르지 않은 채 물 밑을 떠다니겠지요. 귓속말과 밀거래 사이 에서 고독하게 방랑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호라이즌은 거기에 대해 신 경 쓰기보단 다른 명기들을 향해 달려갈 테고.”

“그런가요. 다행이라고 말하려는 겁니까?”

“아니요.”

“아니라고요?”

“악기는 연주되어야 하지요. 세상을 향해 노래해야 하지요. 그림자 속을 숨어다니는 대신 큰소리로, 가장 큰소리로 외쳐야 하지요.” 

“그리고 그 교태 어린 음성으로 무수한 이들을 죽음으로 이끌어야 합니까?”

루레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불꽃을 노려 보며 말했다.

“불꽃이 아름다운 건 타 죽는 나방이 있기 때문이고 사이렌의 노랫 소리가 기막힌 것은 빠져 죽는 뱃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스레일 치퍼티도 마찬가지잖습니까? 하물며 위협받고 있는 악기라는 건 얼마나 매력적일까요. 그 자신마저도 호라이즌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아스레일 치퍼티는 불꽃이나 사이렌의 노랫소리와는 비교도 되 지 않을 만큼 매혹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입니까?” 

“나 또한 그런 매혹에 희생될 뻔했으니, 그렇지 않다고 말하긴 힘들 군요. 예, 스러질 것 같은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건 찾기 어렵겠지요. 죽음 바로 곁까지 다가가지 않은 미학은 미학이 아니겠지요.”

“그런 건 연주될 필요 없습니다. 조용히 입 닫아야 됩니다.”

“왜지요?”

“사람을 죽이니까.”

“가장 빠른 말을 타고 세상의 끝까지 달려간 다음 그곳에서 기다리 던 죽음을 만난 폭군의 이야기는 당신도 들었을 텐데요. 숨기고 감추 고 달아난다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거꾸로 말해서 죽음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해서 숨기고 감추고 달아나는 건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일 텐데요.”

“하지만 거기에 해골 표시를 붙이고 옷장 위에 올려놓은 다음 어린 애들에게 해골표시를 피하라고 주의 줄 수는 있습니다. 그렇잖으면 당 신 말처럼 귓속말과 밀거래 사이에서 고독하게 방랑하게끔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루레인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녀는 내 곁에 앉을 듯이 몸을 숙였다. 하지만 그녀는 나뭇등걸에 앉는 대신 내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동작은 느릿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지만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내 외투 속에서 손수건을 꺼낸 루레인은 다시 똑바로 섰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입 앞으로 가져가 복면을 만들어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 았다. 그것은 불필요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배웅이라도 하듯 손수건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나뭇등걸에 앉은 채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에게서 가장 느린 속도로 멀리 떠나왔다.

0의 속도로 멀어지는 나를 배웅하던 루레인은 손수건을 내렸다. 그 리고 그것을 두 손으로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윳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 그럴 수 없어요. 노래는 계속되어야 해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져야 해요.”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손수건을 둘둘 말 고 있었다. 그녀는 긴 끈 모양이 된 손수건을 목 뒤로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려면 살아 있어야겠지요.”

루레인은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 대신 그녀의 긴 머리채를 질끈 묶고 있는 내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루레인은 희미하 게 미소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 노래는 막을 수 없어요. 아무리 숨겨둔다고 해도. 그러니 걱정하 지 않겠어요. 나는 노래를 믿어요.”

그녀는 모닥불 가를 떠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장검 칼자루를 만지 작거리며 내가 유예를 얻은 건지 용서를 얻은 건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 작했다. 엘프들은 왜 한 가지로 해석할 수 없게 말하는지에 대해 투덜 거리며.

보안관은 결국 범인을 찾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은 보안관에게서 나 태나 무능력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보안관은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 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필사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측백나무관 안 에서나 손님들의 짐에서는 아스레일 치퍼티가 발견되지 않았다. 보안 관은 외부인의 소행 쪽으로 수사 방향을 바꿔보았지만 그 또한 난관에 봉착했는데, 다른 때라면 몰라도 요즘 같은 때 시민들을 붙잡고 낯선 사람을 보지 못 했느냐고 묻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아 아, 오늘은 한 대여섯 명 봤지요. 어제는 얼마 봤더라?’ 결국 보안관은 ‘무수한 방문객들 사이에 숨어 들어온 절도 전문가가 아스레일 치퍼티 를 훔쳐 달아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방문객들은 탄 식을 내뱉으며 그 결론을 수용했다.

마타피 교수가 아스레일 치퍼티의 도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그 자신도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아스레일 치퍼티를 도둑맞은 데 대해 슬퍼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죽지 않게 되었다는 데서 안도 감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보다 불 가항력적인 선택에 더 안도감을 느끼는지에 대해 조용히 고민하기 시 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고민하기보다는 행동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수집가들의 무리였다. 그들은 아스레일 치퍼티가 도둑맞았다면 다시 나타날 곳은 도시의 암시장일 거라 판단하고 황급 히 떠나갔다. 몹시나 다급했던 그들은 떠나가기도 전에 고향에 있는 대 리인들이나 부하들에게 아스레일 치퍼티의 소식을 추적하라는 편지를 보내었고 우리의 우체국장 아인켈은 폭주하는 우편 행정에 골머리를 썩이는 대신 안셀로 하여금 스스로를 타고난 우편 행정가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안셀이 도왔는데도 아인켈은 꽤 정신없는 나날을 보 내야 했다.

그리고 음악가들이 떠나갔다. 아스레일 치퍼티의 승계자가 되기 위 해 찾아온 음악가들과 자신의 실력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저 아스레일 치퍼티의 스완송을 듣기 위해 찾아온 음악가들 모두 한탄하고 탄식하 며 고요히 떠나갔다. 하지만 음악가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남기로 결정 했다. 나는 케이토에게서 그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호라이즌은 희대의 연주자고, 그를 만나 이야기라도 나눠보 는 것은 명기의 스완송을 듣는 것 못지않게 유익한 일이 될 수 있을 테 지. 게다가 명예로운 일이기도 하고.”

케이토의 얼굴엔 아직 지데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두웠지만, 그 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그의 술잔이 빈 것을 보고는 초니에게 손 가락을 튕겨 보였다. 하지만 케이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네, 티르. 나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더 이상의 술은 내 자제력을 약화시킬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나는 어리석 게도 지데가 죽었다는 사실과 자네가 살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 실을 양립할 수 없는 사실들로 여기게 될지도 모르고.”

내게 이렇게 점잖은 경고를 말한 녀석이 또 있었던가? 나는 즉각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미안해, 케이토.”

“됐어……. 무의미한 말은 하지 마. 미안하다는 말은 다음에는 안 그러겠다는 말이겠지만, 만약 다음에 그런 일이 또 벌어지면 자넨 똑같 이 행동할 거잖아? 그러니 그건 무의미한 말이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럽게 나는 루레인에게 수면제를 먹인 것 이 두 사람의 공모의 결과였는지 지데의 단독 범행이었는지 묻고 싶어 졌다. 하지만 결국 묻지 않기로 했다. 죽은 약혼자의 명예 앞에서 그를 시험대에 올리는 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이리라.

케이토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 도시엔 호라이즌의 관심을 끌 만한 명기가 남아 있지 않 은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가 그를 기다려준 음악가들을 위해 보통 악 기로 연주해 주는 친절을 베풀 수도 있잖나? 그렇게만 된다면 남아 있 는 건 충분히 보람 있는 일이지. 이곳에 남은 음악가들 중엔 명기라고 까진 할 수 없어도 꽤 괜찮은 악기를 가진 사람이 많아. 호라이즌의 연 주를 듣는 대가라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자네도 그걸 듣기 위해 남았나?”

“그렇게만 되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글쎄. 악기 살해자 호라이 즌이 그런 악기를 연주할 마음이 들지 회의적이군. 미식만을 먹어온 사 람이라면 보통 음식에도 욕지기를 느낄 수 있겠지.”

“그렇다면 뭘 바라고 남은 건가?”

“만나서 짧게 이야기라도 나눠봤으면 하네. 음악에 대한 서로의 의 견과 이상과 꿈을 교환…………, 이런 건 헛소리겠지. 예술가는 학자가 아 냐 나를 포함해서 그들은 모두 자기 멋에 사는 사람들이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의 손이 닿은 악기가 왜 죽는 건지가 가장 궁금하다네.”

“그건 나도 궁금하군.”

그리고 루레인도 남았다. 그녀는 이제 한결 조용해진 측백나무관에 서 교수와 더불어 연주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며 조용히 호라이 즌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찾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연 주를 들려줬지만, 그녀가 내게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몸짓이나 말을 건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 았기 때문에 우리는 별로 많은 말을 나누지는 못했다.

그리고 두어 번의 폭풍이 더 몰아치고 나서, 호라이즌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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