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5화
호유화(花)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공간.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어둠만이 모든 것 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깊숙한 공간의 안쪽이었다. 그 텅 빈 공간 속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나는 저승사자와 비슷한 복색을 하고 있었으며 다 른 하나는 갑주에 대검(劍)을 찬 무사 차림의 신 장神 같았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둘 다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둘이 쓰고 있는 붉은 가면 에서 어딘가 모르게 요기(妖氣)가 풍겨났다.
둘은 무릎 한 번 굽히지 않고 뻣뻣이 선 채텅빈 공간 속을 스스르이동해 갔다. 폭과 길이를 알 수 없는 무(無)의 공간인지라, 그들이 어디를 목표로 하여 가는지, 얼마나 왔고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느낌을 향해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둘의 이동 속도 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러나 옷깃 하나 펄럭이지 않 았고, 그것은 그들이 범상치 않은 영적인 존재들임 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신장 차림이 입을 열었다.
“호유화가 술수를 부려 놓았군. 분명 어느 지점엔가 들어갈 통로가있을 터인데?”
그러나 저승사자 복장은 아무 대꾸 없이 그냥 어느 지점을 향해 이동해 가고만 있었다. 신장 모습을 한 자가 화가 나는 듯 다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 것이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그제서야 저승사자 복색을 한 자가 대답했다.
“계속 갑시다. 또다시 성화를 부린다면 나는 절대 안내해 주지 않겠소.”
신장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흥! 누구 마음대로? 그래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을 텐데?”
저승사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 다. 무척 화가 난듯했으나 이내 저승사자는 침착을 되찾고 말했다.
“시투력주(透力珠)를 얻기 싫다면 마음대로 하시 오.”
“시투력주를 얻지 못한다면 그대야말로 각오하는 것 이 좋을걸? 소멸까지야 되지 않더라도 영원히 고통 을 받으며 지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문제가 되는 쪽은 그대란 말이오. 핫하 …….”
저승사자는 노여움에 또다시 몸을 떨다가, 결국 체 념한 듯 고개를떨구었다. 신장이 다시 말했다.
“좌우간 이 점을 잘 명심해 두시오. 우리는 협력해 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가는 둘 다 곤란 한 지경에 처하지 않겠소이까? 허허…………. 그나저나 호유화는 뇌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 불과한데, 어째서 우리가 이토록 쩔쩔 매야 하는 거지?”
저승사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 뇌옥의 안은 호유화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오. 뇌 옥은 넓이나 깊이가 무한정이며, 하나의 거대한 세 계라고 할 수 있소. 호유화를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인데, 그 안에서 우리가 무슨 행 동을 하거나 관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얘기란 말이 외다.”
“제길. 그래봐야 환계의 구미호에 불과한데 저승의 뇌옥에 갇혀서까지 옥 안의 세계를 전부 지배한단 말이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호유화의 환술(幻術)은 사계(死界)만이 아니라 성 계(聖界)에까지 미칠 수 있을 정도로 고명하오. 호유 화의 진을 돌파하는 방법은 나밖에 알지 못했소. 그 런데 진을 또 바꾼 모양이오. 혹시 호유화가 우리를 만나고 싶어한다면 또 모르지만…….”
신장은 자신의 얼굴에 찬 붉은 가면을 만지며 중얼 거렸다.
“정안면구(精眼面具)를 착용했는데도 진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다니・・・・ 확실히 호유화의 환술은 대단하군.”
그때 갑자기 낭랑한 여자의 웃음 소리가 사방을 메 웠다. 그와 동시에 주변이 온통 푸른 색으로 물들면 서 눈앞에 흐릿한 형체가 두 개나타났다.
“그래. 대단한 줄 이제 아셨나? 호호호…….”
신장과 저승사자는 둘 다 영적인 존재들이라 감정의 기복이 인간보다 훨씬 적은 편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 앞에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앞에 돌연 등장한 두 개의 형체는 붉은 정안면 구를 쓰고 있는 저승사자와 신장의 모습이 아닌가? 거울에 비친것처럼 자신들과 똑같은 형체가 나타나 자 둘은 놀랄 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시투력주를 그렇게 갖고 싶나? 400년 뒤의 일밖 에 볼 수 없는 물건인데 뭐가 그리 탐나는 거지? 아무튼 좋아. 내, 그것을 그냥 내주기로 하지. 단, 두 가지 물건만 준다면 말씀이야.”
분신들이 동시에 말했다. 그러자 본래의 신장이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주면 시투력주를 주겠느냐?”
간드러진 웃음 소리와 함께 두 분신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그게 뭐나고? 멍청한 것들! 이 호유화 님에게 감 히 무엇을 빼앗을생각을 했다니, 내놓을게 너희 두 놈의 목숨밖에 더 있겠느냐?”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분신은 원래의 신장과 저승사 자를 향해 덤벼들었다.
저승사자의 분신은 가느다란 쇠털 같은 것을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빽빽하게, 그것도 무서운 속도로 쏘아냈다. 그리고 신장의 분신은 자신의 법기인 듯 한 거대한 쇠뭉치 같은 것을 어느 결엔가 빼어들고 원래의 신장을 덮쳐 갔다. 실로 재빠른 동작이었다. 원래의 신장도 자신의 법기인 대검을 뽑아들고 위로 휘둘러 그 쇠뭉치 같은 것을막아내려고 했지만, 그 쇠뭉치처럼 생긴 물건은 대검에 닿으려는 순간 휘청 부드러운 댓살처럼 휘어지면서 그대로 원래 신장의 머리에박혀들었다.
“으아악!!”
길게 소리를 지르면서 원래 신장의 머리 부분이 깨 어져 버렸다. 물론 신장은 영적인 존재였으므로 피 가 튀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런데놀랍게도 원래 신 장의 머리는 박살이 나면서 녹색의 체액(體液)을 사 방에 뿌렸다.
그러나 저승사자 쪽은 녹록하지 않았다. 원래의 저 승사자가 기합을 넣으며 소맷자락을 휘두르자 저승사 자의 분신이 쏜 가느다란 침들은모조리 방향을 바꾸 어 원래 저승사자의 소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다음 순간, 머리가 깨어진 원래 신장이 몸을 홱 비틀면서 몸부림을 치자 신장의 모습은 갑주 차림의 인간형태 가 아니라 녹색의 털이 돋은야수의 모습으로 변했 다.
“마수(魔獸)! 마계의 졸개가 여기에 오다니!”
소리침과 동시에, 분신인 신장과 저승사자는 원래의 저승사자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분신 신장은 여전히 쇠뭉치 같은 법기를 휘두르며 덤벼들었고 분신 저승사자는 뾰족한 철간(쇠낚싯대) 같은 법기를 날카롭게 휘둘렀다. 그러나 원래의 저 승사자는 법기를 꺼내지도 않은 채, 양손의 소맷자 락을 휘둘러 쇠뭉치 같은 법기와 철간을 모두 막아 냈다. 철간과 쇠뭉치는 소맷자락에 부딪치자 교묘하 게 휘어지면서 두 번째 공격을 가했지만, 소맷자락 은 둥글게 말리면서 그 교묘한 공세마저도 막아냈 다.
순간, 원래 저승사자의 소맷자락 속에서 아까 거두 어 들였던 바늘들이 와르르 쏟아졌는데, 그것들은 바늘이 아니라 순백색의 털이었다. 그 털들은 쏟아 져 나오자마자 자석에 쇳가루가 끌리듯 분신 저승사 자의 철간에 달라 붙었다가 다시 원래의 저승사자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소맷자락을 휘두르던 원래의 저승사자는 훌쩍 뒤로 몸을 날려 아슬아슬하게 그 날카로운 바늘들을 피했 다. 그러면서 원래의 저승사자는 경악한 듯, 소리를 질렀다.
“미모침(尾毛針) 이구나! 너희는 호유화의 꼬리들이 군!”
목표물을 놓친 바들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공중을 선회하여 원래저승사자의 뒤를 노리고 쏘아져 들어 가다가, 원래 저승사자의 방금한 말을 듣고는 다시 방향을 틀어 분신 저승사자의 철간에 달라 붙어흡수 되듯이 사라져 버렸다. 분신 저승사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너는 마계의 어떤 놈이기에 내 수법을 알지? 내가 호유화의 꼬리분신이란 걸 어떻게 눈치챘지? 그것 은 사계에 있는 자들밖에 모르는데…………….”
그러나 원래의 저승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 다.
순간, 분신인 저승사자와 신장, 그리고 철간과 쇠뭉 치가 스르르 녹아들더니 순식간에 네 여자의 모습으 로 바뀌었다. 넷 다 똑같이 생겼는데, 길게 드리운 백발 사이로 비치는 얼굴은 화사하고 요염하기 그지 없었다. 눈썹이 다소 치켜 올라가고 눈가가 푸르죽 죽한 것이 물씬요기를 풍기고는 있었지만, 퍽 아름 다운 얼굴이었다.
“내 꼬리 넷의 합공을 받아낼 수 있을 정도라면 보통 실력이 아니다……………. 너는 사계의 존재렸다? 그것도 꽤 높은 신분이고? 그런데 왜일개 사자 따위로
변장했지?”
역시 저승사자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호유화는 계속물었다.
“너의 도력은 보통이 아닌데, 왜 저런 하잘 것 없는 마계의 졸때기에게 협박을 받고 있지? 시투력주는 사계의 존재에게는 쓸모가 없을텐데 왜 욕심을 내는 거지?”
저승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밝힐 수 없다. 지금은 이쯤 해서 끝내고 다음에 다 시 보기로 하자.”
“잠깐…….”
그러나 호유화가 말릴 틈도 없이, 청아한 쇳소리가 울리더니 저승사자의 몸체가 희미하게 사라지기 시 작했다.
호유화는 흠칫 하였으나, 저승사자가 사라지는 굳이 막으려 하지는않았다.
‘시투력주는 천기를 읽는 성계의 보물이다. 내게 그것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리 고 그걸로 뭘 하려는 것일까?’
호유화는 잠시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가, 얼굴을 들었다. 괜한 생각들로 골치를 썩이는 일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던 것이다.호유화는 지금 세 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이 여기에서 지내야 할 시간이 생 계의 시간으로 400년이라는 것만 염두에 두었다. 너무나 긴 시간이다.
호유화는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후련한 기분을 느끼 고 있었다. 지루한 나날만 지속되던 중에 아까 벌였 던 대결이 다소 갑갑증을 달래주었던 것이다. 호유화의 눈초리가 번뜩였다.다음 순간 호유화는, 아니 호유화의 꼬리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자신만 의 은신처로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