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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11화


생각하며 호유화는 일부러 엄살을 부렸다. 사실 법 력을 극도로 소모하여 탈진상태가 되기는 했지만 몸 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은동이 일단 관심을 보이자 호유화는 은동이 조금 더 관심을보여주기를 바라게 되어 꾀병을 부리게 된 것이다.

“괜찮아? 아이구. 얼굴이 하얗게 되었네.”

은동의 말에 호유화는 얼굴이 곧 정상으로 되돌아 올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급히 법력을 머리로 몰아 올렸다. 그러자 호유화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가 빨갛게 되었다가를 반복하게 되었다. 호유화는 법력 을 머리로 너무 밀어올리자 골이 띵해졌으나 은동이 자꾸 신경을 쓰자 마음이 흐뭇해져서 계속 엄살을 부리느라 법력을 빼지 않았다. 사실 호유화는 자신 도 모르는 새 은동에게 대해 약간의 연애감정을 지 니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 었다면 이제 막 코흘리개를 간신히 면한 은동에게 그런 감정을 품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호유화는 원래 사람도 아니었고 수천년을 거의 홀로 지내온 터라 나이 같은 것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호유화는 수천년을 살면서 조금도 늙지 않을 수 있 었고 둔갑에 능하여 겉모양이야 갓난아기로부터 늙 은이까지 마음대로 변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호유화는 외형이나 나이 같은 것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득도한 고승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중생’으로볼 수 있는 것 과 다소 흡사한 것이 다만 호유화는 그 대상이 어 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남성’으로 보게 된 것만이 달랐다. 다만 호유화는 본래 인간이 아닌데 다가 도를 닦는데 주력했기 때문에 인간의 남녀관계 의 일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같이 이렇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 음욕을 지닌 것은 아 니었다. 좌우간 호유화는 은동이 자신을 걱정하며 쩔쩔매는 것을 보며 흐뭇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호호호. 이거 정말 기분이 좋구나. 흐뭇하고 몸이 둥둥 뜨는 것 같군그래. 이 아이는 어리긴 하지만 기개가 있고 총명하니 훌륭한 인물이 될거야. 지금 은 비록 어리지만 십 년만 지나면 헌헌장부가 될테 니… 그러면…’

호유화는 결코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변태적인 성격 은 아니었다. 다만경우가 다를 뿐이었다. 백 년도 못사는 인간이 십 년을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었지만 수천년을 살아오고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도 모르는 호유화로서는 그까짓 십 년을 기다리는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호유화는 다른 생각 에 몸을 흠칫했다.

‘가만. 그런데 은동이가 십년이 지나서 아무리 잘 나게 되더라도 또 이십년이 지나면 아저씨가 될 것 이고 거기에 또 이십년이 지나면 영감탱이가될 것 아닌가? 또 이십년이 지나면 그야말로 꼬부랑 할아 범이 될 것이고또 이십년이 지나면… 아하. 그때까 지는 살아 있지도 못하겠구나. 에잇. 그러면 정을 준다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니 허황된 것 아니겠나? 안되겠구나.’

호유화는 갑자기 마음이 차가워졌다. 호유화는 걱 정하는 은동을 택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난 아무 일 없어! 걱정하지 마.”

“어…”

그러자 운동은 갑자기 서글픈 눈이 되었다. 호유화 는 마음이 모질어서수천명을 죽이더라도 눈하나 깜 짝 하지 않을 성격이었지만 지금 은동이 서글픈 눈 을 하자 갑자기 마음이 스르르 약해졌다. 호유화는 또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은동이가 죽으면 어때? 그때는 저승으로 치 고 들어가서 은동이를 꺼내오면 그만이다. 어느 놈 이 감히 나를 막겠어? 그래서 은동이를 데리고 환 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리면 염라대왕이고 나발 이고 찾을 수없을거야. 그러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생각한 호유화는 다시 아픈 척하며 은동을 자극했다. 은동은나이가 어렸고 원래 남을 좀 쉽게 믿는 선량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호유화가 이랬다저 랬다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좌우간 걱정이 되 어서 한참동안 호유화를 돌보아 주었다. 호유화는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승아의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 다.

“자자. 이제 됐어. 괜찮아 졌어.”

“정말?”

은동은 아직도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호유화는 속으로 운동을 순진하다 못해 바보같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은동이 좋아보이기도 했 다.

“정말 괜찮아. 좌우간 나랑 놀자구. 이깐 활 연습해서 뭘해?”

“하지만..”

그러자 호유화는 다시 화가 났다. 호유화는 소리를 빽 질렀다.

“놀자면 놀자니까! 나는 맹세를 지키려고 이 고생 을 하는데 너는 네가한 맹세를 안지키겠다는 거 야?”

“안지키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호유화는 화가 나서 은동의 어깨를 잡고 휙 돌려 세웠다. 그리고는 은동의 눈을 손으로 찰싹찰싹, 두 번 때렸다. 은동은 갑자기 얻어맞자 아프기도 했지 만 갑자기 양 눈이 화끈하며 열기가 치밀어 오르자 놀라서 눈을감쌌다.

“어어…”

“가만 있어. 지금 나는 법력으로 네 심안(心眼)을 띄워 준거야. 너는기운도 좀 있고 하니 심안만 뜨고 나면 무엇을 쏘아도 백발백중이 될거라구!”

지금 호유화가 쓴 술법은 심안통(心眼)이라 하여 높은 법력으로 다른 자의 눈을 밝게 띄워주는 것이었다. 그외 특별한 효능은 없었지만 눈의잠재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그러면 시력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움직임에민감해지고 피로해지지 않아 수십년 무 술을 익힌 사람만큼의 눈썰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 다. 심안통을 이렇게 신속하게 다른 사람에게 걸어 주려면적어도 이백년 이상의 법력이나 내공이 있어 야 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런 술법을 쓸 수조차 없을 것이었지만 호유화에게 이백년 법력쯤은 우스운 것이었다. 은동은 처음에는 아프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호유화의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다. 정말 잠시 후에 눈을 뜨고 보니 세 상 만물이 너무도 또렷하고 바람결에 흩날리는 작은 먼지까지도똑똑히 보이는 것이 아닌가! 유화궁을 집어들고 몇 발을 쏘니 은동의 신력에다가 시력이 조화되어 쏘는 대로 백발백중이었다. 은동은 너무도 기뻐서 승아의 모습을 한 호유화에게 절을 했다.

“고마워! 고마워!”

그러자 호유화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본래 술법을 남에게 걸어주는 것은 자신의 법력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심안통의 술법은 이백년의 법력이있어야 하며 이십년의 법력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지 간한 이유가 없다면 호유화의 법력이 아무리 남아 돌더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호유화는 은동이 몹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호유화는 벌써 유화궁에 이십년, 심안통에 이십년을 합하여 사십년의 법력을 은동때문에 소모한 셈이 되는 것이 다.

“고마우면 빨리 놀자구! 인제 궁술연습이니 뭐니 할 생각말구 나랑만노는거야. 알았지?”

호유화의 심안통은 확실히 궁술에 효험이 있었지만 시력이 밝아지는것은 그 외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택견같은 권각법을 사용함에 있어서도눈이 날카로운 것이 유리하고, 하다못해 사방을 둘러볼 때에도 큰 도움이되어 이후 은동에게 많은 도움이 되게 된다. 좌우간 운동은 매우 기쁜 나머지 승아와 함께 놀기 로 했다. 그런데 무엇을 하고 놀아야 승아가 좋아할 지 은동은 알 수가 없었다. 어두워져서 술래잡기는 할 수 없었다. 조금 더생각해보니 은동이 어디 숨어 도 호유화가 그것을 못찾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은동은 사내아이라 주로 장치기나 타구, 병정놀이 같은 몸으로 하는놀이를 좋아했지만 승아는 호유화 의 분신이니 그런 몸으로 하는 놀이는 필경 고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그런 놀이는 해보아야 김만 빠질 것 같았다.

‘그러면 운수로 되는 놀이를 해야지. 더구나 승아 는 계집아이니 여자들이 좋아하는 앉아서 하는 놀이 를 해야겠다.’

당시 여자들이 주로 하던 놀이는 투호, 쌍륙, 승경 도, 바둑, 장기 등등이 있었다. 그 중 투호는 화살 을 멀리서 던져 항아리에 넣는 놀이니 법력고수인 승아에게는 할 가지조차 없을 것이고 바둑이나 장 기, 쌍륙은 은동이 별로 능하지 못했다. 은동은 그 래서 윷을 놀자고 했다. 승아는 말만 듣고 곧 두꺼 운 나뭇가지를 꺾어 머리카락으로 한 번 휙 쓰다듬 자 네 개의반듯한 윷이 눈깜짝 할 사이에 만들어졌 다. 그런데 조금 놀다보니 승아가조금 요령이 없어 뒤지게 되었다. 더구나 은동이 윷을 두 번이나 연달 아쳐서 말이 저만치 앞서가게 되었다. 그러자 승아 는 오기가 나서 법력을 조금윷에 넣었다. 그러자 곧 모가 연달아 나왔고 열네번이나 연속으로 나왔다. 더 볼 것도 없이 모든 말이 다 들어가게 되자 은동 은 조금 얼이 빠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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