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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47화


호유화는 멍해졌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한 참 동안 호유화는말을 하지 못하고 얼빠진 듯이 서 있었다. 그러다가 은동이 다시 한번 요물이라 외치 자 호유화는 더 참지 못하고 은동의 뺨을 후려쳤다. 

“너・・・・・・ 너 정말 그럴 거야?”

그러나 은동은 여전히 화난 기색이었다. 그것을 보고 호유화는 화가 치밀어서 다시 한 대 때리려다가 손을 내리며 탄식했다.

“그래. 그래. 너는 정말 올바르고 흠잡을 데 하 나 없는 인간이구나. 그래, 나는 요물이야. 못된 여 우고 요물일 뿐이야.”

호유화는 갑자기 멍청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고 흑호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은동은 냉랭하게 외쳤다.

“어서 빼내서 그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줘요!”

호유화는 대답하지 않고 법력을 집중하여 은동의 어 깨에 대었다가위로 확 뻗쳤다. 그러자 은동의 몸에 서 화살 같은 기운이 휙 뽑혀져나왔다. 그것은 바로 은동의 몸에 갇혀 있던 이십 명의 영혼들이 분명했 다. 그 영혼들에게 누구도 질문을 하지는 않았으나 이제 사태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태을사자의 말이 틀렸다 함은 그의 논리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의말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이렇듯 인간의 영혼이실제로 은동의 몸 에서 나온 것은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되는 셈이었다. 그것을 보고 삼신대모가 흠 하고 탄식하며 지팡이로 바닥을 한번 내리쳤다.

“무명령! 흑무유자! 하실 말씀이 더 있소?”

그러자 염라대왕도 대노하여 소리쳤다.

“아니! 그렇다면 정말 사계에 마계의 존재들이 침입했단 말인가!”

증성악신인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나섰다.

“대왕, 그러면 사계의 영혼의 숫자는 어찌된 것이 오? 마계의 존재가침입하여 조작한 것이 아니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소! 아아…………… 내 이 무슨 불찰인가? 면목이 없소이다.”

염라대왕이 허탈해하자 성성대룡이 되받았다.

“부끄러워하실 것 없소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저 들에게 속을 뻔하지 않았소?”

장내 분위기가 급속도로 바뀌어가자 흑호는 호유화 와 은동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찌되었든 단순한 흑호는 일단 큰 문제가 해결된 것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고는 은동과 호유화가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였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허허허’ 웃으면서 은동의 어깨를 탁 쳤다. 은동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 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눈치가 빠른 아이라 일이 잘 풀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은동은 휴하 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잘된 건가요?”

“그려그려. 잘되었다. 다 네 덕이야.”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어떻게 내 덕이에요?

좌우간 빨리 가야할텐데………….”

“뭐가 그리 급하니? 허허………..”

“지금 여긴 세상… 음, 생계보다 수백 배나 시간 이 빨리 간대요.

그러니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알겠 어요?”

흑호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느끼는 바가 없는 듯싶 었으나, 막 구체에서 빠져나오려는 태을사자는 깜짝 놀랐다.

“뭐라구, 은동아? 그것이 정말이냐?”

“난……… 하일지달이라는 누나에게 들었는데…! 그러자 태을사자는 급히 삼신대모에게 얼굴을 돌렸다.

“삼신대모님, 저 아이의 말이 정말입니까?”

“왜 그러는가? 그 말이 맞네. 여기는 중간계인데

시간이 좀 빨리 가는 곳이지. 팔계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삼신대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을사자는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아뿔싸!”

눈을 둥그렇게 뜨고 흑호가 물었다.

“대체 왜 그러우? 이제 일이 잘될 것 같은데?”

“큰일이야. 그 사이 조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찌 알겠나?”

“앗! 그러고 보니 정말!”

흑호도 놀랐다. 지금 조선이라는 생계의 작은 나라 에 신경을 쓰는다른 계의 존재들은 없었다. 여기서 재판을 하는 동안 이미 생계에서는 여러 날이 흘러 갔을지도 몰랐다. 그러자 삼신대모는 지팡이를 다시 굴렸다.

“무명령! 흑무유자! 당신들은 여기에서 나갈 수 없소!”

그러자 태을사자가 외쳤다.

“우리를 어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조선에서는 지금…….”

삼신대모가 근엄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아직은 아니 되오! 생계에서 시간이 흘렀다 해도 며칠 되지 않을것이니 괜찮을 것이오. 더구나 마계 나 유계는 여기서의 일을 모를 것인즉.”

다급한 목소리로 태을사자가 커다랗게 외쳤다. 

“아니오! 흑무유자는 방금 몰래 공간을 일그러뜨렸 소이다! 내가 보았소! 그는 분명 여기서의 재판결 과를 외부에 알린 것이 분명하오! 무엇인가 일을 꾸미려….”

그 순간, 무명령이 갑자기 움직이며 태을사자를 향 해 뛰어들려고했다. 아무 말도, 경고도 없었다. 무 명령은 양손에서 검은 안개 같을것을 확확, 무서운 속도로 내쏘았다. 그 기운은 여덟 가닥으로 갈라져 서 호유화와 영혼들을 덮쳐갔다. 위기감을 느낀 성 성대룡이 그 앞을막았다.

“어딜!”

거대한 성성대룡이 똬리를 틀더니 그 기운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입에서 불길을 내뿜었다. 그중 하나의 기운이 뻗쳐나가 구체에서 빠져나오려던 태을사자에 게로 날아갔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거대한 입을 벌 려 그 기운을 꿀꺽 삼켜 버렸다. 성성대룡이 뿜어낸 불길을 무명령이훌쩍 뛰어 피하는 순간, 흑무유자를 둘러싼 검은 구름 속에서 갑자기시커먼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태을사자를 노리 고 길게 뻗어나갔다.

삼신대모가 노갈하면서 그 손을 지팡이로 쳐내었지 만 그 손은 순식간에 가지를 뻗어 수십 개로 불어나 면서 계속 태을사자 쪽을 노리고달려들었다. 증성악 신인이 그 앞을 막으려 했고 흑호도 그 앞을 막아서 려 했으나 놀랍게도 그 둘은 무서운 법력을 지녔는 데도 가볍게 퉁겨져 밀려나 버렸다.

하지만 태을사자는 마침 은동과 호유화의 뒤에 있어 서 호유화와 은동이 태을사자보다 먼저 그 손에 얻 어맞을 것 같았다. 손 하나가 은동에게 달려드는 순간, 호유화는 놀라서 은동의 몸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은동은 화가 난 듯, 호유화의 손을 뿌리쳤 다. 은동은 호유화가 막아섰기 때문에 흑무유자가 뻗어낸 손이 다가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다. 그 순간, 호유화의 눈이 커졌다. 호유화는 몸으 로 은동을거칠게 밀어내며 은동을 쓰러뜨렸다. 느닷없이 밝은 광채가 솟구쳐 나왔다. 그와 동시에 흑무유자가 뻗어냈던 검은 손이 사라져 버렸다. 그 리고 한켠에서는 무명령이 크악하는 소리를 내며 바 닥에 털썩 떨어졌다. 광계의 비추무나리가 빛을발한 것이다. 다만 빛을 발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 는데도 무명령은 나가떨어지고 흑무유자는 순식간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삼신대모는 원통 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이런! 흑무유자가 도망쳐 버렸소! 비추무나리, 어 찌 좀더 일찍 움직이지 않았소!”

서둘러 삼신대모는 지팡이를 크게 굴렸다. 그러자 곧 수십 명에 달하는 성계의 신장들이 나타났다. 삼 신대모가 외쳤다.

“흑무유자를 잡아라! 지금 당장!”

증성악신인도 팔신장을 불러 성계의 신장들을 돕도 록 했고 염라대왕과 성성대룡도 각각 수하들을 불렀 다. 그때 태을사자가 소리쳤다.

“우리를 어서 가게 해주시오! 마수들을 막아야….” 태을사자가 다음 말을 잇기 전, 놀라운 일이 벌어졌 다. 호유화가 서서히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호유화 가 쓰러지자 호유화의 등에 커다랗게 구멍이 나 있 는 것이 보였다. 바로 조금 전에 흑무유자의 공격때 문에 받은 상처였다. 호유화는 은동이 쌀쌀맞게 대 하자 충격을 받아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했던 데다가 은동을 구하려고 스스로의 몸을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다른 자들도 모두 놀랐으나 특히 성성대룡은 길게 소리를 질렀다.

“누님! 이…………… 이런…….”

이게 무슨 일이오! 왜…… 어째서 그러나 가장 놀란 것은 은동이었다. 은동의 머릿속 이 갑자기 텅 빈것 같아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호유화의쓰러지는 모습만이 생생하게 눈 속에 각인되듯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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