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50화
“호…… 호유화…………….”
은동이 멍청하게 서 있자 흑호와 태을사자가 놀라서 호유화에게 달려갔고 삼신대모를 비롯한 팔계의 대 표자들도 모여들었다. 특히 성성대룡은 예전에호유 화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듯, 사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비통하게 소리를 쳤다.
“누님! 으아아………… 왜? 도대체 왜! 이런 하찮은 꼬 마 때문에 어째서누님이!!!”
성성대룡이 소리치고 독기 서린 눈으로 은동을 쏘아 보았다. 그러나은동은 그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고서 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성성대룡이 노려보 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성성대룡이 화가 나서 몸을 움직이려는데 삼신대모가 조용히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는사이 흑호가 다시 슬프게 어흥 하 면서 포효했다.
“호유화! 정신 차려! 천하 제일이라더니 이게 무슨 꼴이여! 어서 눈을 뜨라구! 어서!”
흑호는 어느새 눈이 벌개졌지만 영혼의 상태라 눈물 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생계에서라면 눈물을 폭포 처럼 쏟아냈을 것이다. 무뚝뚝한태을사자마저도 비 통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인간과 비슷한 감각을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라 가능한 것인 지도 몰랐다.
호유화의 얼굴에는 방긋 미소가 감돌고 있었지만, 몸이 소멸되려는듯 점점 투명해져가고 있었다.
“고양이… 왜 그래? 역시 너는 아직 수양이 덜 되었구나.”
호유화는 억지로 힘을 내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초점 없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애쓰면서 은 동을 바라보려 했다. 그것을 보고 흑호는 은동을 주 욱 끌어당겨 호유화의 곁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은 동은 그때까지도 정신이 나간 듯, 표정 없는 얼굴이 었다. 호유화가힘겹게 손을 뻗어서 은동의 소매를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했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너에게 몹쓸 짓만 한 것 같아 서…… 미안해.”
그러나 은동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호유화를 바라보 았다. 보다 못한 태을사자가 은동의 손을 호유화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만치에서 염라 대왕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호유화는은 동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정말 너에게는… 뭔가 잘 해주고 싶었어. 뭔가…………….”
은동은 여전히 정신이 멍했다. 아무 것도 실감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주변에 누가 있는 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호유화만이 보이고, 호 유화만이 느껴졌을 뿐… 그때 태을사자가 나직하 게 말했다.
“호유화………, 은동이는 너무 어렸고, 당신은 너무 성급했소.”
태을사자도 억지로 내색을 않고 있었지만 안타까워 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방금 태을사자는 저승사자의 독특한 수법을 써서 무방비상태인은동의 마음을 읽 어 자신이 없는 동안 호유화와 은동에게 있었던 일 들을 모두 알아낸 것이다. 이 수법은 저승사자가 인 간에게만 사용할 수있는 것으로, 원래는 저승에서 이승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인간들의 영혼을 다그치 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하여간 은동의 마음을 읽어 그간의 일을 알게 되고 호유화가 목숨까지 걸고 은동을 구한 것을 본 뒤, 예리한 태을사자는 호유화의 마음을 분명히 알게 되 었다. 호유화가 은동에게 정을 주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믿을 수 없는 일이었을 뿐… ……. 삼천 년 이상을 묵은 환계의 명예서 열일 위인 대환수(大)가 고작열살짜리 아이에 게 애정을 느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호유화는 그러했다.
‘호유화는 너무 오랫동안 홀로 있었던 거야. 그리고 은동은 너무도총명하고 너무도 곧은 아이였기에 게다가 호유화의 법력이 너무높았기 때문에…….이리 된 것이다. 아아…………’
호유화가 만약 법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면 은동을 한낱 인간 어린아이로 얕보았을 것이니 애정 같은 것은 아예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 호유화가 천사 백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을 뇌옥에 갇혀 혼자지내 지 않았다면 그렇게 치기 어리게 은동과 어울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불행은 은동이 남녀간의 정 같은 것을 알지못하는 어린 나이였다는 데 있는 것 이 분명했다. 은동이 이토록 어리지 않았다면 호유 화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고, 호유화의 마음에 이렇 듯상처를 주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은동은 너무도어려서 호유화의 이러한 변덕을 단지 요물이어서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방금까지도 은동은 어린아이 특유의 오기로 호유화에게 쌀쌀맞게 대했을 뿐, 호유화에게 근본적 인 악의를 가진 것은아니었다.
지금 은동은 거의 제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은상태였다. 태을사자는 물론이고 울고 있 는 흑호도, 성성대룡도 은동보다 더 놀라고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터였다.
‘누구를 탓할 문제도 아니다. 인연이 너무도 깊고 복잡한 게로구나. 아 아……..’
그때, 호유화는 힘이 빠지는 듯 서서히 눈을 감았 다. 그리고 조용히말했다.
“유화궁……………은 잘 간직해 주겠지? 은동아…… 널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동안 정 말 즐거웠단다. 정말…….”
“누님!”
성성대룡이 소리치자 호유화는 빙긋 웃었다.
“소룡, 그러지 마. 나는 후회하지 않아………….”
그러다가 힘겹게 숨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잘 있어. ……나는 약속을 다 지키지 못했어. 미안 해, 은동아……”
갑자기 은동이 으아아 하고 기이한 소리를 질렀다. 우는 소리 같기도 했고, 웃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비통하여 내지르는 소리거나 화를내는 것도 같은, 인간의 목소리 같지 않은 기이한 소리였다. 은동은 울지조차 못하고 목이 메어 컥컥대다가 마침내 몸을 덜덜 떨었다. 순간은동의 입에서 조금씩 말소리 같 은 것이 흘러나왔다.
“안 돼, 안돼…. 죽으면…… 죽으면 안 돼.”
은동이 호유화에게 덥썩 달려들어 호유화의 손을 꽉 잡았다.
“안 돼요! 안 돼! 호유화……, 안 돼요. 안 돼……”
은동은 안 된다는 말만 끊임없이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호유화의몸이 점점 투명해져만 갔다. 마침내
은동은 악을 썼다.
“호유화! 나하고 약속했잖아! 계속 같이 지내면서 놀자구 말야! 내소원도 들어주겠다고 했잖아! 거짓 말쟁이! 거짓말쟁이!”
소리를 지르면서 은동은 작은 손으로 호유화의 멱살 을 잡고 마구흔들어 댔다. 그 광경이 너무나 참담하 여성성대룡과 삼신대모는 끝내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약속을 지켜! 내 소원이야! 죽지 마! 죽지 맛!”
그때였다. 별안간 맑은 울림이 사방에 울려퍼졌다. 무어라 형언할수 없는 울림이었는데, 누가 소리를 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삼신대모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신계………신계의 존재가!”
그 이상한 울림은 재판정 전체에서 울려나오는 듯했 다. 그것은 말도 아니었고 전심법도 아니었다. 다만 단순한 울림에 불과할 뿐…….
그러나 무엇인가 엄청난 뜻과 말과 가르침이 들어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울림이었다.
태을사자나 흑호는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증성악신인이나 성성대룡, 염라대왕도 알 수 없 는 듯했다. 단 둘, 삼신대모가 놀란얼굴을 했고 광 계의 비추무나리가 갑자기 번쩍거리며 마치 말을 하 는것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가 돌연 호유화의 투명해지던 것이 멈추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투명해지던무화(無化 상태가 멎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