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6권 – 7화 : 진실이 밝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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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6권 – 7화 : 진실이 밝혀지다


진실이 밝혀지다

호유화의 편지대로 약속한 3월 13일이 되었다. 이 미 군영은 이순신이 한산도로 옮긴 이후라서 좌수영 은 썰렁한 상태였다.

그 좌수영의 뒷산에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어디 선가 한 여인이 나타났다.

길게 늘어뜨린 백발을 지니고 눈이 부실 정도의 아 름다움을 지닌 그 여인은 다름아닌 호유화였다. 호 유화는 지금 멀리 보이는 섬과 푸른 바다를 정신없 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참 아름다워…………. 호호호…….”

호유화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웃다가 또 시무룩해 지곤 했다. 게다가 호유화는 아무런 법력도 발휘하 지 않고 있었으며, 완전히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 다.

그런 호유화의 앞에 슬며시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호유화는 그런 둘의 기척을 못본 듯 계속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호유화…….”

흑호가 한참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리 고 문득 주먹을 쥐며 앞으로 나서려는데태을사자가 얼른 흑호를 저지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 서며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군, 호유화.”

그래도 호유화는 흥 하는 소리를 한 번 내었을 뿐,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내 돌아보지도 않고 쌀 쌀맞게 말했다.

“은동이는 왜 안 오지?”

“아마 안 올 걸세. 오면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으니 까.”

“일을 그르치다니? 은동이가 내 상대가 안 되니까 너희 둘이 대신 온 거야? 호호호…….”

호유화는 싸늘하게 웃더니 다시 매서운 눈초리로 태 을사자를 쏘아 보았다.

“그래, 나는 악한 요물이고 마수보다 더 나쁜 존재 니 너희들 손으로 잡아 없애겠다는 건가?은동이가 직접 오지 않고?”

“은동이가 네 상대가 되었어?”

흑호가 소리치자 호유화는 슬픈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래도 결국 오지 않는 건가?”

호유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을사자가 다그쳤다.

“은동이에게 법력을 준 것은 너지?”

호유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시인한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또다시 물었다.

“은동이가 수련하는 곳의 시간을 빠르게 가게 한 것 도 너지? 그리고 유정스님이나 김덕령의모습으로 둔갑하여 은동을 가르친 것도 바로 너지?”

호유화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대뜸 흑호가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왜 그랬나? 은동이를 꼭 네 손으로 때려잡아야 마음이 풀리겠어, 엉?”

성질 급한 흑호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자 태을사자가 흑호를 말렸다.

“잠깐. 일을 그르치면 안 되네. 호유화와 싸워서는 안 돼.”

“왜? 그러려고 온 거 아니요? 은동이 대신 내가 은 동이 아버지 원수를 갚아주마!”

흑호가 다시 소리치며 나가려 했으나 태사자는 다시 흑호 앞을 막아섰다.

“아닐세! 그럴까 봐 내가 온 것이야!”

그 말에 흑호는 어리둥절해졌다.

“엥? 뭐…… 뭐라구?”

태을사자는 침착한 표정으로 호유화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엽이도 네가 둔갑한 것이지? 맞지?”

그러자 흑호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뭐라구!”

태을사자는 흑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난번 마수들이 이순신을 기습했을 때의 일 기억 나나? 그때 자네는 소야차에게 유인되어나갔고 은 동이는 시백령에게 죽을 위험에 처했는데 오히려 죽은 것은 시백령이었어. 그때뭔가 이상한 것을 느 끼지 못했나?”

“엥? 뭐가?”

“그때 오엽이는 마수에게 쫓겨 은동이에게 뛰어들었 네. 우리가 아는 오엽이는 보통 인간이었어. 그리 고 마수는 보통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도, 느껴지지 도 않네. 어떻게 오엽이가 마수를 보고 놀란 것일까? 그리고 은동이는 그 와중에 언제 성성대룡의 술수를 발해 시백령을죽인 것일까? 또 시백령이 성성대룡의 술법을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소멸되었 어야 옳았네.

그러나 그는 다른 수법으로 거의 죽을 듯 말 듯 하 게 타격을 받고만 있었던 거야. 그냥 소멸되면 우 리가 다른 존재가 나타났는지 의심을 할 테니까. 하 지만 엄청난 법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면 그럴 수 없 지. 또한 호유화가 은동의 곁에 없었더라면, 은동이 물에 뛰어든 것을 어찌 그리 금방 알았겠는가? 호 유화가 둔갑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낌새를 챘을 것이니 호유화도 신통술만으로 은동이 물에 빠진 것 을 알지느냈을 걸세. 그것을 보아도 역시 오엽이가 호유화인 것이 분명하고!”

“그…… 그런 일이…. 그러면 설마……………”

흑호는 말을 더듬었다.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더구나 은동에게 유정을 안내해준 것은 누구였나? 오엽이었네. 더 확실한 증거도 있네. 은동은 틀림 없이 호유화에 의해 오년 사이에 십년의 성장을 했 네. 그러나 오엽이 보통 아이였다면 그 아이는 아직 아이일 걸세.

그러나 오엽이도 은동에 맞추어서 같이 십년의 성장 을 했어. 은동이와 오엽이가 같이 산 것은 아니니 그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네. 오직 호유화만이, 둔 갑의 힘으로 오엽을 그렇게 보이게 할 수 있을 테 지. 안 그러면 은동이 의심을 할 테니까 말이야……”

흑호는 거의 기절할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호유 화는 여전히 꼼짝않고 우울한 얼굴로 바다만 바라 보다가 중얼거렸다.

“역시 뛰어나. 일개 저승사자로는 아까워.”

흑호는 태을사자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왜 인제야 이야기 하는 거유? 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데… 엉? 난 감쪽같이 속았네.”

“사실 나는 전에 그 싸움의 이야기를 듣고 오엽이 를 만나려 나간 적이 있었네. 기억하나? 오엽이가 자네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을 때 말이네. 그러나 도 중에 그만두었지. 호유화의 뜻이 어떤 것인지는 모 르지만, 나는 호유화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네. 아무 리 증거가 많고 아무리 상황이 이상하더라도, 나는 호유화가 은동에 대한 정을 가진 것만은 변하지 않 으리라 여겼기 때문에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모른 체 해온 것이네. 그래서 자네에게 나는 그냥 오엽이 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라고만 해두었지…”

그러고 보니 흑호도 이제야 한 가지 의문이 풀렸다.

은동은 곰 한 마리가 오엽을 공격하는것을 구해주 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땅의 어떤 금수도 은동이 나 오엽을 해치지 못하게 흑호는 이미 엄명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런데 재수없게 어느 미친놈이 오엽이를 덮친 것일 까 하고 흑호는 의심쩍어 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렇 게 되면 문제는 간단하다. 무지무지한 법력을 가진 호유화가 곰 하나쯤 희롱하여 그 정도 장난치는 것 은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허나 호유화는 은동의 아버지를 죽였잖수! 그리고 나와 은동이를 공격하고 또…….”

“가만 좀 있게.”

태을사자는 다시 흑호를 제지하면서 호유화에게 말했다.

“내가 호유화, 네게 묻고 싶은 것은 딱 한 가지뿐이 다. 네가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모든 것을해석할 수 있으니 나 또한 마음이 홀가분하겠다. 네가 아니라 고 한다면 그래도 나는 모든것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못하겠지. 부디 제대로 답해줄 것을 바라네.”

호유화는 여전히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가늘 게 떨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태을사자는천천히, 힘 있는 소리로 다시 말을 건넸다.

“호유화, 우린 동료였어.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목숨을 걸고 같이 싸웠고, 어려운고비를 수 없이 넘겨왔네. 나는 지금도 자네를 믿고 있네. 그 러니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솔직히 답해주게. 나밖 에 중간에 나설 수 없다 생각하여 내가 온 것일세.”

흑호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몹시 긴장하였다. 태을사자가 천천히 물었다.

“호유화, 자네가 정말 은동의 아버지를 죽였는가?”

그 말에 호유화는 이번에는 눈에 띄일 만큼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흑호는 무심결에 주먹을꽉 쥐어 발 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맺혔다. 그러나 한참 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태을사자가 다시 재촉했다.

“정말 중요한 일이네. 나를 믿게. 내 법력은 자네만 못해도 나도 수년동안 계속 생각해서 이제는 진실이 보일 듯하네. 우주 팔계의 모든 일이 자네에게 달렸 다고 나는 생각하네. 자, 말하게.”

그래도 호유화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몸을 떨었다. 그러자 흑호가 참다 못해 소리를 치려다가 얼른 입 을 다물고 가슴을 쾅쾅 쳤다. 옆에 있던 태을사자 는 우울한 얼굴로 있다가 벼락같이 외쳤다.

“은동이를 위해서라도 어서 말하게!”

그때 호유화는 난데없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흐드러진 백발에 얼굴을 묻으며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난…… 난 안 그랬어! 내가 왜 그런단 말야!”

태을사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긴장이 풀려갔다. 흑호 는 멍하니 입을 헤벌리고 울고 있는 호유화를 보며 얼빠진 듯 중얼거렸다.

“……호유화가・・・・・・ 호호호……호유화도・・・・・・…… 우네?”

태을사자는 서서히 호유화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호유화에게 물었다.

“그렇게 의심을 받는 것이 억울했나? 자네는 은동 의 손에 죽으려 했지? 그래서 일부러 법력을 아낌없이 넣어주고 일부러 공격술법만 가르쳐 주었던거야. 그리고 막판에는 오엽이를납치하는 것처럼 연극까지 꾸미고…………..”

태을사자의 말에 호유화는 마구 울면서 미친 듯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흐느 끼며 말했다.

“너희는 너희는 몰라…………. 내가… 내가 은동 이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은동이가 나를 원수 로・・・・・・ 원수로… 나를 미워한다면………… 나는, 나 는 정말 어떻게… 어떻게 다른방법이…….”

“왜 직접 이야기하지 못했나? 왜 스스로 무고하다고 밝히지 않았지?”

“난…… 난 못해………….. 내가 말한다고………… 은동 이…… 은동이가 믿어주겠어? 난 요물…… 변덕 심 한 요물일 뿐인걸……. 흐흑…… 흑흑…… 난 정말………… 정말 괴로웠어. 나는…… 나는…….”

“그런데 성계에서는 왜 그냥 빠져나왔지?”

“은동이가……… 은동이가 날 요물이랬잖아. 그래 서………… 그래서 사람 모습으로 은동이와 가까이 있으 려고…….”

“역시…. 그랬군. 그러나 은동의 아버지가 죽은 다 음에 괴로워서……”

“그래…………. 너무도 괴로웠어. 하지만 변명하고 싶지 는 않았거든…… 그래서.. 그래서 난은동이 손 에 죽고 싶었어.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었는데…………. 이 망할 놈의 법력이 너무 세서 죽으려 해도 은동 이가 날 죽일 길도 없잖아. 그래서……………”

흑호는 팽 하고 코를 풀어 일부러 멀리 내던졌다. 이제 흑호도 호유화의 결백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누가 지금 울고 있는 호유화가 환계의 일인자이자 우주 제일의 법력을 지닌 여걸이라 믿겠는가? 그 자존심 강하고 콧대 센 호유화가 저렇게 될 정도라 면 그 마음 고생이 얼마나 극심했을까?

비로소 태을사자도 안심할 수 있었다. 태을사자는 전부터 이 일을 크나큰 사건으로 여기고있었다. 그 러나 이것은 중대한 일이었기에 반드시 진실을 확인 한 다음에야 밝힐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수년간이나 모른 척하고 흑호나 하일지달에 게도 속마음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흑호는 이제 야 태을사자가 조금 얄팍한 수법을 쓰면서까지 은동 을 오지 못하게 한 이유도 알수 있었다.

은동에게라면 호유화는 죽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은동이 믿지 않고복수심으로 무작정 호유화를 공격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호유화는 은동의 공격을고스란히 맞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태을사자는 모든 것을 짚어보고 파국을 막기 위해 온 것이었다.

“에잇! 제기럴! 난 역시 모잘러.”

흑호는 쏟아지는 눈물을 마치 벌레를 잡아채듯이 쓱쓱 훑어내었다. 그러다가 순간, 흑호는자신의 눈 을 믿을 수 없었다. 태을사자의 눈에도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태태태… 태을사자가……… 아아아 아무리 양신을 하고 있대도….. 저…… 저승사자가 눈물을 !!”

태을사자는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호유화의 등을 가만히 다독거려주며 말했 다.

“정말 그것뿐인가? 허허…… 은동이와 지내면서 즐 겁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나도 일부러 찾지 않은 것인데……”

“하하… 좋았지. 하지만 맞아 죽으려고 나처럼 이렇듯 애써야 하다니. 그런 이상한 일이어딨었겠 어? 빌어먹을, 거의 저주야, 저주. 그래도 그동안 은…… 하하… 좋았어. 기뻤다구…………….”

그러자 흑호는 울면서도 웃는 빛으로 소리를 질렀 다.

“제기랄, 이 망할 놈의 저승사자! 나까지 그리 속 이구!”

흑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을사자는 호유화를 달랬다.

“되었네. 이제 안심이네. 괴로운 마음 알겠어. 이제 됐네. 다 잘될 걸세. 다 잘될 거야…….”

그러자 호유화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말했 다.

“너희는 모를 거야. 흑흑………… 솔직히…. 정말 솔직 히 말하면………… 나는…… 나는 사실 죽고싶지 않았 어. 솔직히 나는…… 흑흑…… 도중에 마음이 바뀌 었거든. 은동이와 숨어서 둘이살려고 했어. 은동이 를 홀려서라도 말야… 흑흑…… 그래서…… 솔직히 나는 천기고 뭐고 관심 없었어. 헤헤.. 그래서 잘 될 뻔했는데, 헤헤………….그런데 제기랄… 그 유정 땡초 땜에 망했지 뭐 야…………. 은동이도 조금 있으면 내가 술수를부린 것 을 다 알 테구…………. 그래서 다시 처음대로 죽으려 고………… 기왕이면 은동이 손에 죽으려 했는데………….헤헤…….히히・・・……난 역시 요물이고 요사스러운 가봐. 그치? 머리를 안 쓰려 해도 자동으로 써지는 걸 어떡해………헤헤.”

호유화는 울면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원래 호유화는 아찔할 정도의 미모를 지녔지만그렇게 순 진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호유화의 표정은 냉랭한 태을사자에게도 마치 태양이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 다. 태을사자는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그래. 이해하네……. 괜찮아. 무엇이 요사스러 운가. 이해하네. 충분히…… 충분히…….”

그리고 둘은 전심법을 사용하여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한참 했다. 그것을 보고 흑호가 이유없이 불안해져서 말을 걸었다.

“그…… 근데…….”

흑호가 주저하며 말하자 태을사자는 흑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근데・・・……그럼 도대체 은동이의 아버지를 해친 건 누구유? 그리고 고니시에게 수작을 부린건?”

“이제야 확신이 섰네. 그것은…….”

그때 저쪽에서 길다란 외침 소리가 들렸다. 울고 있 던 흑호와 태을사자는 고개를 돌렸으나호유화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동아!”

하지만 흑호와 태을사자는 깜짝 놀랐다.

“엑? 은동이가 여기 어찌 왔나?”

“아니.. 이순신은 어쩌고!”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은동은 그 일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은동의 마음에는 오직 한가지생각 밖에 는 없었다!

‘호유화는 결백했어!’

은동은 이미 아까부터 이 근방을 서성이며 법력으로 귀를 기울여 그들의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 두 들은 것이다. 더구나 오엽이마저도 실제는 호유 화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은동의 마음은 방망이질을 치는 것 같았다.

마침내 호유화의 진실을 들은 은동은 벅차 오르는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호유화역시 그 짧 은 시간마저 참지 못하고 은동에게 달려가서 은동을 꼭 안았다.

흐드러지게 휘날리는 백발 속에 파묻혀 은동은 호 유화를 비로소 접하고는 감격에 울었다.울고 또 울 었다.

“미안해요…. 미안해! 호유화는 항상 내 곁에 있었는데! 항상 내 곁에서 지켜봐 주었는데…………… 나는……나는…….”

은동은 더 할 나위없이 미안했고 또 더 할 나위없이 기뻤다. 호유화는 은동을 안았던 손을풀고 눈물을 흘리며 은동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나지막 이 은동에게 말했다.

“미안하긴. 하하……, 그래도 난 마지막까지 너를 속였는데………….”

“속이다뇨? 우리 가요. 호유화가 오엽이였죠? 우리 같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아요. 네?”

그러자 호유화는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난 요물이고…. 사람도 아닌데?”

그 말에 은동은 울상을 지었고 호유화는 너무도 기 쁜 듯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로소 호유 화의 다소 요사스러운 기의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사방에 짜랑짜랑 울려퍼지자 흑호는 겸연쩍은 듯 중 얼거렸다.

“히히, 인제 진짜 대요물 호유화답구먼.”

“야! 고양이! 너 뭐라구 했어?”

“히히……………, 내가 뭘?”

흑호는 웃으면서 태을사자에게 말을 건넸다.

“어찌되었건 잘 풀렸네. 은동이도 이젠 어른이 되 었구, 어울리는 한 쌍이 비로소 되었군그려. 신부가 나이가 좀 너무 많긴 헌데……………. 신랑 나이의 백 배? 이백배?”

대뜸 호유화가 흑호에게 눈을 흘겼다.

“너, 죽을래?”

그러자 흑호는 우하하 웃으며 은동과 호유화에게 다 가와 은동의 등을 호되게 한 번 철썩 후려갈기고는 호유화에게 손(앞발)을 내밀었다.

“호유화, 반갑수! 허허………….”

호유화도 흑호를 바라보며 정말 아찔할 정도로 밝게 웃어 보였다. 흑호조차도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흑호는 힘있게 호유화의 손을 꽉 쥐었다가 휙 뿌리치며 중얼거렸다.

“제길, 여우냄새가 배겠네.”

“저 고양이가?”

능청스럽게 흑호는 껄껄 웃으며 휙 하니 몇 걸음을 뛰어 피했다. 그러다가 다시 흠흠 하더니 입을 열

었다.

“그런데 아까 하던 이야기인데… 시간이 없으니 어서 이야기하지 뭐 하슈?”

“무엇 말인가?”

“은동이 아버님을 해친 진짜 흉수 말이여.”

그 말을 듣자 호유화가 다시 긴장했다. 태을사자는 호유화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였으나 호유화는 갑자 기 다시 슬픈 빛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흑호는 어 리둥절했고 은동은 갑자기 분노가 솟구치는지 소리 를 쳤다.

“그게 누구죠? 도대체 누가………”

태을사자는 서둘러 말을 돌려 은동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 이순신은 어쩌고 왔느냐?”

순간 운동은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은동은 그날이 다가오자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을 잊고 이리 로 달려온 것이다.

곁에 있던 흑호가 신안을 동원하여 한양 쪽을 보고 는 놀라 펄쩍 뛰었다.

“어이쿠! 이순신이 국문을 당하네!”

“네?”

은동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하필이면 보름동안 아 무 일 없다가 지금 은동이 여기 온 그날에 이순신 이 국문을 당하다니. 태을사자가 엄한 소리로 말했다.

“은동아,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없단다. 만약 이순신 이 죽으면 마수들의 음모가 성공하는 것이야. 너는 아직도 그것을 바라느냐? 아직도 어떤 일에도 간섭 하기 싫고 혼자 지내고 싶으냐? 너는 천기를 원망 했지만, 천기가 과연 그른 것이더냐?”

그 말에 은동은 숙연해졌다.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 다.

그 모습을 보며 태을사자는 근엄한 표정을 풀고 빙 긋 웃으면서 말했다.

“어서 가라. 아직 늦지는 않았느니. 어서 이순신을 구하거라.”

호유화 역시 은동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데려다 줄게 어서 가자. 이순신이 죽으면 안되지. 마수들은 나도 싫어. 싫고도 지긋지긋하단다.”

“어어? 호유화가 도력을 빌려주면 안 되는 거 아뉴?”

흑호의 말에 호유화는 딱 잘라 말했다.

“지아비를 돕는 건데 안 되긴 뭐가 안 돼! 안 된다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그러더니 호유화는 날렵하게 은동을 허리에 안고 둔갑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때 은동이말했다.

“그런데 호유화, 지난번 태을사자와 흑호 등이 마수 를 많이 없앴다고 했는데………..”

“그건 내가 없앤 거야, 호호……. 그런데 너 자꾸 나한테 존대할래? 오엽이었을 때는 반말도잘만 하 던데?”

그 말을 듣고 흑호는 반가워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뭐? 그새 마수를 많이 없앴다구?”

어느새 호유화는 은동을 안고 사라지면서 한 마디만을 남겼다.

“세 마리!”

흑호는 입을 헤벌리고 히죽거렸다.

“역시 호유화가 대단하긴 허우.”

“정말 그렇군. 지난번 려를 잡으러 갔을 때 분명 려 말고도 인면지주라는 마수가 있었네. 그놈이 어디 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바로 호유화가 잡아 없앤 것이군・・・・・・・ 그리고 그때 은동이가 쏜 화살도 호유화의 힘 때문에 그리 강하게….”

“그런데………… 아까 왜 말을 하다가 말꼬리를 돌렸 수? 진짜 흉수 말유.”

그러자 태을사자는 나직이 되받았다.

“이것은 너무도 중대한 일이라 아직 은동이가 들어 서는 안 될 듯싶어 그런 것이네. 아직은안 돼. 아 마 호유화가 말해줄 것이지만…”

“중요? 나도 궁금해 죽겠수. 대체 흉수가 누구인데 그러슈?”

태을사자는 또박또박하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내 결론을 믿기 힘들군. 그러나 분명하네. 이 모든 일의 흉수는 바로 성성대룡이네.”

“그럴 리가! 성성대룡이 어찌!”

한양으로 날 듯이 둔갑법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은동 은 깜짝 놀라 자칫 땅으로 떨어질 뻔했다. 호유화는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모든 것이 얽혀서 풀기가 어려웠어. 그러나…… 이제는 나는마음을 정 했단다.”

성성대룡은 이미 아득한 오래 전부터 호유화와 같이 지내온 사이였다. 호유화는 성성대룡을소룡이라고 불렀고, 성성대룡은 호유화를 누님이라 부르며 친근 히 지냈다.

그러다가 호유화가 성계에 들어가 시투력주를 동화 시켜 재판을 받자 성성대룡은 몹시 괴로워했다. 그 자신은 환계의 대표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어쩔 수는 없었으나호유화를 몹시 좋아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천년 동안 호유화가 저승 뇌옥에 갇혀 있 으라는 판결이 떨어지자 성성대룡은 성계와 광계 등 모두에게 마음 깊이 원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성성대룡이 모반을 꾸민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일은 중간계의재판에서 벌 어졌다.

자신이 연모하던 호유화가 은동을 감싸려고 죽음의 위기를 맞자 성성대룡은 겉으로는 차마호유화의 눈 치를 보아 표출하지 못했으나 은동을 몹시 증오하게 되었다.

그때 나갈 곳이 없어 쫓기던 흑무유자는 성성대룡의 그런 마음을 알아채고 그에게 달라붙었다. 분노했던 성성대룡은 그만 흑무유자의 마기에 유혹되고 말았으며, 흑무유자는 성성대룡의 몸안에 숨어서 생계 로 나아간 것이다.

그 때문에 광계와 성계의 전사들이 중간계를 이잡 듯 뒤졌어도 흑무유자를 잡을 수 없었던것이다.

“그・・・・・・ 그럴 수가…………….”

“나도 나중에 알았어. 좌우간 그러니 흑무유자가 귀신같이 생계로 도망칠 수 있었던 거야.그러니 성 성대룡이 그때 태을사자와 흑호를 바래다 준 것도 호의로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흑무유자를 탈출시키 기 위해 그랬던 거지.”

“그러면・・・・・・ 성성대룡이 아버지를 해쳤단 거예요?”

“그래………. 사실 소룡은 흑무유자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었어. 흑무유자는 나를 완치시킬 술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는데, 생계로 내려가 버리자 숨어 버렸지. 그런데 나는 너를 찾아 아무도 모르게 숨어 내려와 버렸으니 소룡은 화가 난 거야. 내가 자기 마 음은 몰라주고 너만좋아하니…..

그리고 마계에서도 속임을 당하고 나는 간 곳이 없 고・・・・・・・ 그래서 소룡은 이런 생각을 한거야. 내 마 음을 너한테서 돌릴 수는 없으니 네 마음을 나한테 서 돌리려고 말야. 그래서 나로 둔갑하여 그런 짓 을 꾸민 거란다………. 나도 그때는 몰랐어.”

“그런 치졸한 짓을! 대룡은 위대한 존재로 알았는 데・・・・・・ 그건……”

“환계의 존재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야. 인간과 오히려 흡사한 정반사반의 존재란다. 다른 계들과는 달라 우리들에게는 정도 있고 감정도 있단 다. 나도 그렇지 않니?”

“좌우간 그래서 아버지를 해쳤단 거예요? 성성대룡이?”

“그래……. 사실 소룡도 불쌍한 존재야. 그는 나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했단다. 모두가 나를 위해서 이니 자신의 마음을 받아달라고 말야. 그래서 나는 더 괴로웠지…”

“호유화도….. 성성대룡을 좋아했나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너하고는 다른 감정이 야. 좌우간 나는 그놈을 마구 구박해서 쫓아 버렸 지. 더 따라오면 죽어 버리겠다고 했더니 순순히 가더군. 좌우간 그놈도 나 때문에그리된 것 아니겠 어? 내 마음이 좋을 리야 없지……………”

“마음이…………… 아픈가요?”

은동이 걱정스럽게 묻자 호유화는 다시 은동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깔깔 웃었다.

“내가 누구냐? 대요물 구미호인 호유화가 그깟놈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구? 하하, 천만에! 네가 백만 배 천만배 더 중요해. 놈은 네 옷섶에 묻은 티끌만 큼의 가치도 없어. 그놈은 이미 마계에 영혼을 팔아 먹었어. 나를 위해서라구? 흥! 내가 그런 것을 좋 아할 것 같아? 놈은 바보고, 바보는 바보대접을 해 줘야지……”

그러다가 호유화는 갑자기 조용히 말했다.

“나는 네게 할 말이 없어. 따지고 보면 그것도 전부 나 때문이 아니겠니? 사실 너에게 죽고싶었던 것은 그것 때문에도 그랬어. 지금이라도 분이 풀리지 않 으면 언제든……”

호유화가 갑자기 우울한 얼굴로 말하자 은동은 크게 소리를 쳤다.

“그런 소리는 말아요! 호유화가 나쁜 건 아니잖아요. 항상 나를 옆에서 보살피고 지켜주었는데………….그리고 나쁜 건 성성대룡이에요.”

“고마워. 정말…..

정말 나를 용서해 주는 거지?

미워하지 않는 거지?”

“내가 어떻게 호유화를 미워하겠어요?”

그 말에 호유화는 배시시 웃으며 살짝 눈을 흘겼다.

“사실 네가 그럴 줄 알고 말한 거라 해도?”

그러자 은동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호유화가 다시 말했다.

“나는 요물이고 아무리 애를 써도 좀 사악한가 봐. 너는 정말 이해할 수 있니? 이런 나도……. 괜 찮아?”

호유화를 보며 은동이 웃었다.

“그럼 나도 차라리 요물이 되죠, 뭐.”

호유화는 깔깔깔 웃으며 은동에게 샐쭉거렸다.

“근데 너 자꾸 나한테 존댓말 할래?”

“아…… 아…… 그건……. 아니, 안 그럴게.”

“좋아! 그래야지! 자, 거의 다 왔다. 어서 이순신이나 구해. 좌우간 일은 마무리지어야지.”

잠시 머뭇거리던 은동이 호유화에게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요.”

“또 존댓말! 덩치도 커다란 것이 자꾸 그럴래? 이젠 그래봐야 귀엽지도 않아.”

“아차, 왜 지금 나와 같이 가서 둘이만 지내자고 하지 않지?”

은동이가 쑥쓰러운 듯이 말을 하자 호유화는 잠시 멈추어 서서 은동을 바라보았다.

“기억나니? 돌산도에서 네가 사람들을 치료해 주던 …….”

그때 호유화는 오엽으로 변하여 은동을 도왔다. 그 때의 오엽이의 너무도 진지한 표정을 은동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거짓이나 둔갑이 아니 었던 것이다.

“네……. 아니, 으응.”

호유화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지었다.

“나도 기억해. 그래, 그때 너는 너무 바빴지. 그리 고 사람들은 더럽고, 때투성이에다가 악다구니들을 쓰고 있었지. 참 더럽게도 힘들고 귀찮고 피곤했지. 그러나 나는 거기서 정말 뭔가느꼈어. 생명이 이런 것이구나. 생계에서의 삶이란게 이런 것이구나……

인간은 참 힘들고 비참하게 살고 또 수명도 짧아. 그러나 수명이 짧으니 오히려 그들은 열심히 살고, 힘든 만큼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하지. 수천 수만년씩 아득하게 사는 우리들은 그런 것을 몰라. 얼마나 사람이 아름답고 반짝이는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 른 것은 다 제쳐두고라도 산다는 것, 그리고 살아 가려고 애쓴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말이야……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어. 너를 좋아하게 되면서 나는 네가 살던 이 땅과 너와 같이 살던 이 사람들을 모두 좋아하게 되었단다…………..은동아, 우주 팔계에 법력이 높고 신기한 존재는 얼 마든지 있단다. 그러나 분명 생계가 바로우주의 중 심이라고 나는 믿어. 우주의 진리는 모두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계에 있단다……. 나는 너에게 서 그것을 배운 거야. 홀로 천년 이상을 있으면 서 내가 생각했던것…………. 어리고 순진한 생계의 인 간인 너에게서 나는 진정한 천국을 볼 수 있었단 …….”

은동은 호유화의 말을 홀린 듯이 듣고 있었다. 갑자 기호유화는 씩 웃더니 은동을 툭 밀었다.

“빨리 가라! 네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왜 란종결자가 저기 있잖아!”

은동은 별안간 공중에서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져 버 렸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훌쩍 땅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이미 수백년의 법 력을 가진 은동으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호유화가 자신에게 둔갑을 걸어주었는지 의 정부의 뜰에 내려섰는데도 은동을 알아보는 자는 아 무도 없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은동은 거 리낌없이 이순신을 살폈다.

이순신은 이미 주리를 틀리고 압슬을 당해 거의 혼 절해 있었다. 조금만 더 은동이 늦어서형을 당했으 면 이미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은동은 혀를 차면서 이순신의 고통을 줄이도록 법력을 구사 하였다.

‘죄송합니다, 이장군님. 제 불찰로………… 제 불찰로 이장군님이 이렇게………….’

은동은 아무리 급했다고는 하나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이순신이 자칫하면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이순신만은 무슨 일 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다시한 번 다짐했다.

그날 밤 이순신은 다시 옥으로 옮겨졌는데 비록 이후의 고문은 은동의 법력으로 보이지 않게 다 막아 내었다고는 하나 이순신의 고통은 극심했다.

은동은 암암리에 다시 이순신의 곁에서 이순신을 구 완하다가 누가 오면 술법을 써서 귀신같이 숨기를 되풀이하였는데 밤이 되자 누군가가 이순신을 찾아 왔다.

은동이 얼른 몸을 숨기자 그 사람은 서슴없이 문지기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로 영의정이었던 서애 유성룡이었다.

“이보게, 괜찮은가?”

그러자 이순신은 가냘픈 숨소리를 흘렸다.

“서애 유성룡의 호)인가? 왜 나를 찾았는가……. 나 는 이제 틀린 몸인데…….”

“약한 소리하여서는 아니 되네. 자네가 아니면 누가 왜적을 막는단 말인가?”

“허허………. 나는 이제 다 되었네. 왜 나를 더 고생 을 시키려는가. 나는 이제 할 만큼 다 하였네…..”

이순신은 이제 아무런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은 모양 이었다. 유성룡은 눈물을 삼키면서 이순신에게 말 했다.

“아니네. 내 자네의 모습을 보니 차마 말하지 못하 겠으나 할 수 없네. 정신을 차리게, 꼭 살아야 하 네.”

이순신은 고통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더 바라는가? 나는 할 만큼 했네. 이제 죽으면 이 고생도 끝이지. 더이상 책임 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네. 정말… 정말 힘이 든단 말일세…….”

이순신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이 격무와 근심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기에 저럴까생각하자 은동은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유성룡 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죽일 놈일세. 면목이 없네. 그러나 할 수 없 네. 조정중론을 이미 상감께서는 듣지 않으시네. 자 네는 살아야 하네. 반드시 살게. 사직과 백성을 위 해 그 길밖에는 없네. 의지만 가지고 조금만 더 버 티면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니 나를 믿게.”

그러나 이순신은 듣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지옥에 몰아넣으려 하지 말게. 내 할일은 다했네. 수군도 정비되었고 이번에는 난리가 났다 해도 녹록히 당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순신의 말에 유성룡은 침통하게 말했다.

“아닐세…………. 자네가 살아야 하네, 반드시… 원 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네……”

그러자 이순신은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에서 피가 번지고 우두둑 하는 참혹한 소리가 났지만 이순신은 그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순간 이순신은 미친 사람처럼 중 얼거렸다.

“안 돼…………… 안 돼………그것만은…… 그것만은 안돼 ・・・・・・.”

유성룡은 흐흑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상감이 완고하셔서 다른 방법이 없네…………. 자네의 우려가 사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대비 를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순신은 유성룡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수군들・・・・・・ 백성들・・・・・・・ 그들은…… 그들은 이제 어떡하라는 말인가. 틀렸구나……….., 이제 모든 일은 틀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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