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3화
그리고 바람과 같은 부드러운 울림이 울려왔다.
[나는 바람의 근원, 바람의 정령왕 시르드란.]
그러면서 공간의 일렁임이 멈추며 푸른색을 품어내는 듯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가 나타나자 일대에 그녀의 존재감이 퍼지듯 조용해져 갔다. 피어놓은 모닥불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어둡지는 않았다.
그리고 하엘 등도 꼼짝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 바람의 정령왕 시르드란은 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기보단 느낌을 전해왔다.
[나를 소환한 존재여, 그대는 나와 계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 나는 태초의 약속에 따라 그대와의 계약을 인정할 것이다. 그대여, 나와 계약하겠는가?]
이드는 자신에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존재감을 잠시 느끼며 그녀를 보며 답했다.
“예! 그대와 계약을 원합니다.”
[좋아. 나, 시르드란은 태초의 약속에 따라 그대와의 계약을 존중할 것이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지?]
“저는 이드입니다. 본명은 다르지만요. 대게 그 발음은 잘못하더군요.”
[그런가? 별 상관없지. 이드여, 나와의 계약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바람의 다른 정령들과 계약하고 싶은데요.”
[음? 너는 바람의 정령들과 계약하지 않았는가?]
“예, 저는 처음 정령을 소환하는 것이라서.”
[…..무슨. 그럼 내가 그대가 제일 먼저 소환하는 존재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대의 친화력이란.]
“…..”
[후후, 대단하군…. 그렇다면 설명해주지. 너는 바람의 정령왕인 나와 계약했다. 때문에 바람의 정령과 따로 계약할 필요가 없다. 단지 필요한 급의 정령을 부르면 된단다. 후후, 처음 계약한 정령이 정령왕이라….. 다른 정령왕들이 들으면 놀라겠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주위로 한차례 부드러운 바람이 쓸고 지나가자 그녀의 그 존재감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모닥불이 피어났다.
떨썩!!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에 일행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이드가 앉은 자세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드. 괜찮아?”
“이드…..”
“걱정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정령왕이나 되는 존재가 소환되는 바람에 이드님 몸속에 있는 마나가 많이 소모되어 그럴 겁니다.”
일리나의 말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리나 역시 그런 이드를 걱정 반, 놀람 반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으~ 진기가 거의 반 가까이 빠져나가니까 허탈해지는군….. 젠장, 정령왕이라는 존재는 엄청나게 많은 기가 소모되는 건가?… 응? …뭐야…..’
이드는 자신의 몸속에서 웅장한 마나가 자신의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외부의 바람을 통해서도 부드럽게 마나가 유입되어왔다. 두 가지는 별 충돌 없이 이드의 소모된 마나를 보충해주고 있었다.
‘뭐야 이건…… 오히려 진기가 증가되었다…..’
이드는 충만해져 버린 진기에 멍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고는 일리나를 바라보았다.
일리나는 그의 의문에 찬 눈빛을 보며 물었다.
“이드! 왜 그러죠?”
“일리나, 저기, 제가 정령왕을 소환하는 바람에 소모된 마나가 다시 채워지고 있거든요? 어떻게 된 거죠?”
“아! 그거 말이군요…. 저도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장로님께 들은 바로는 정령왕이란 존재를 소환하면 그만큼 마나가 소모되지만, 돌아가고 난 후에는 그 정령왕이 속한 속성에 대한 마나가 소환자의 마나를 회복시켜준다고 하더군요. 어떤 경우에는 마나를 더욱 증폭시켜주기도 하고요. 이런 것이 없다면 정령왕을 소환하는 사람은 없겠죠. 한 번 소환한 후엔 거의 한 달은 누워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런가요? 저는 외부에서 마나가 흘러들기에…..”
일리나는 그런 이드에게 생긋 웃어주고 한마디 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제가 들은 바로는 이드처럼 그렇게 빠르게 회복된다는 말은 없었거든요…..”
이드는 일리나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에게 전달된 두 가지 마나 중 하나에 대해 이해가 갔다.
‘그럼 나머지는 뭐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퍼져나…… 그래, 그게 있었지….. 어마어마한 마나 덩어리, 내가 그걸 잊고 있었군.’
이드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가 생각해낸 것은 드래곤 하트였다. 바로 그래이드론의 드래곤 하트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군…. 이게 한꺼번에 개방됐다면…… 으…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어쨌든 굉장해, 이드. 어떻게 정령왕씩이나……”
“맞아. 녀석이 제법인데..”
“정령왕이라니, 이드! 그 정도면 마법 클래스에서 최상급이야.”
“그만해요. 한 번 소환하는데 이렇게 힘든데 그렇게 자주 소환은 못하죠.”
“야, 그래도 너는 바람의 정령들을 전부 다 부릴 수 있잖아. 그 정도도 대단한 거 아니냐?”
“후..후.. 그래이, 솔직히 말해봐라. 부럽지?”
이드가 살짝 웃으면서 그래이에게 물었다.
“그래, 임마. 솔직히 말해 부럽다. 정령왕이라니. 검술도 잘하는 놈이 정령왕까지… 가만, 그럼 너 이제 정령검사네….”
“임마, 그게 뭐 대단하다고..”
“맞아, 그래이. 내가 들은 걸로도 정령검사는 흔하다구.”
“하엘, 내가 말하는 건 질이라구. 그런 녀석들하고 이 녀석은 질적으로 다른 거잖아.”
그렇게 일행들이 떠들어대고 있을 때, 라이델프가 중재에 나섰다.
“이 녀석들아 그만 좀 해라. 시간도 좀 됐으니 자자! 내일 또 출발해야 할 것 아니냐!”
“음~ 그럴까요. 그럼 불침번은 누구~~~”
“그래이 바로 너야.”
“너, 또 딴사람한테 떠넘길 생각하지 마.”
“으윽~~~”
그래이는 인상을 구긴 채 불가에 가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침낭으로 들어갔다.
“하아암~~ 으아 잘 잤다.”
이드는 일어나 앉으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저쪽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라인델프가 보였다.
“잘 잤나?”
“예! 라인델프는 고생하셨겠네요.”
“뭐! 별로…..”
이드는 그 말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리나는 이드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듯 저쪽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고 하엘은 저쪽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자고 있는 사람은 그래이와 일란이었다.
“참나! 이 양반은 메모라이즈라는 것도 해야 하면서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일어나요. 일란, 일란.”
그리고 그래이도 깨웠다.
어수선한 아침식사 후.
“그런데 다음 마을은 언제쯤 도착하는 거야, 그래이?”
“대충 지도를 보니까 오후 늦게 저녁쯤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자~ 그만 출발들 하세.”
일란이 그의 뒤에 라인델프를 태우고 앞서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드들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타타앙…..촹앙. 검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 그것도 상당히 많은 인원이듯 했다. 그리고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소음….
“무슨 소리죠? 비명소리도 나는 것 같고,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드가 일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근처에 가서 말에서 내려다가 가세나. 이드와 그래이는 제일 앞에, 그리고 중앙에 나와 하엘. 그리고 그 옆으로 일리나와 라인델프. 이 정도로 하고 모두 가자. 그리고 힘들 것 같으면 후퇴해야 돼….. 괜히 혈기 부리지 말고.”
“알았어요.”
그리고는 일행은 작은 숲의 반대편으로 다가가서 말을 매어두고 조심스럽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보이는 상황은 중앙에 마차를 두고 대치 중인 두 무리였다. 한 무리는 마차를 지키고 있는 듯한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었다. 인원은 많이 줄어든 듯 5명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이들은 검은색 갑옷과 복면을 한 십여 명의 인물들과 인간이 아닌 돼지 머리를 한 몬스터인 오크였다.
그리고 한쪽에 이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두건을 쓴 두 인물이 있었다. 이들은 거의 승리를 확신한 듯 적극적으로 덤비고 있지는 않았다. 거의 남아 있는 다섯 명의 기사를 놀리는 듯했다.
“일란, 저들은 누구죠?….저는 잘 모르겠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 복면을 쓰고 문장 하나 없는 검은 갑옷이라니. 거기다가 오크까지 포섭해서 쓰고 있어….. 그런데 저 마차와 기사들의 갑옷에 있는 문장, 저 그리폰의 문장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이 잘 나질 않거든?….”
일란의 말을 들으며 이드가 조용히 말했다.
“일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빨리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저기 두목으로 보이는 작자가 공격명령을 내리는 것 같거든요.”
이드의 말대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7명이 앞으로 나서며 각자 기사를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드가 모두에게 말했다.
“그래이, 라인델프가 절 따라오고, 일란과 일리나는 여기서 마법으로 견제해주세요. 자, 가자.”
이드는 말과 함께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래이 역시 그것만은 못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라인델프는 아무리 보법이 있다지만 그 다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래이보다는 늦어졌다.
이드는 먼저 뒤로 물러나 있던 나머지 기사들과 오크들을 베기로 했다. 방심하고 있는 지라 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허리에 걸린 라미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적들을 향해 검을 날렸다. 그의 검은 빠르게 들어가서 순식간에 세 명의 척추를 끊어 놓았다.
그리고 그때쯤 도착한 그래이와 라인델프가 공격에 가담했다. 적들은 갑자기 나타난 일행들에 당황했지만 숫자가 적음을 확인하고 숫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향해 저쪽에서 파이어볼이 날아와 명중했다. 그로 인해 모여 있던 인물들 중 2명 정도는 그 자리에서 재로 변해버리고 나머지는 몸에 불이 붙어 땅에 굴렀다.
그러자 복면인들이 잠시 물러서서 지휘관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쪽에서 갑옷을 입지 않은 인물이 앞으로 나와 일란 등이 있는 곳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복면인들이 다시 이드들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를 기해 저쪽에서 불길이 날아왔다. 그러자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그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워터 애로우.”
그러자 3발 정도의 워터 애로우가 날아 파이어볼과 충돌함으로써 소멸하였다.
“이드, 저 녀석 마법사야.”
“임마! 말 안 해도 알아…”
‘이제 마법공격은 포기하고 우리가 이 녀석들을 맡아야 하나?’
그러면서 이드는 자신의 앞에 있는 복면인을 일검에 허리를 날려버렸다.
‘아니지, 꼭 일란의 마법이 아니라도 마법은……’
“야! 그래이, 네가 가지고 있는 검, 그거 언제 쓸 거야? 이럴 때 안 쓰고 빨리 날려버려.”
“그렇지….!!”
“라이트닝 볼트…”
꽈꽈광 치직….
마법검에서 날아간 라이트닝 볼트가 복면인들을 향해 뿌려졌다.
그러자 그 모습을 저쪽에서 보고 있던 기사가 검을 들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마법검을 들고 있는 그래이를 노리는 듯했다.
‘그래이보다 실력이 좋겠는데… 그래이 실력으로는 힘들겠어.’
그렇게 생각한 이드는 그 복면인의 진로를 가로막아섰다.
그러자 그는 그런 이드를 보고 가소롭다는 듯 검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드가 그의 검을 막고는 그대로 튕겨 내버리며 곧바로 자신에게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을 날린 뒤라 방어하지 못하고 급하게 물러났다.
그리고 그때 뒤쪽에서 다른 복면인이 이드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드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바람의 검에 의해 튕겨 나가버렸다.
저쪽에서 보고 있던 일리나가 급하게 마법의 검을 날린 것이었다.
“일리나, 고마워요. 그런데 그렇게 신경 쓸 건 없어요.”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검에 마나를 주입하고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검에서 검기가 날아가 오크 두 마리를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 검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검에 날려 주지, 진천일검.”
그 복면 검사는 이드의 검을 겨우 막아냈다.
그러나 그 뒤에 따르는 검기는 막아내지 못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얀색의 검기.
그것이 그 검사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그 사내를 처리한 이드는 동료들이 혼전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군마락!!!”
이드가 뛰어오르며 검기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대다수 몰려있던 복면인들과 오크는 비 오는 듯한 검기를 막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그리고 일부는 겁을 먹었는지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란을 상대하고 있던 마법사 역시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듯 빠르게 주문을 외워 텔레포트 해버렸다.
그러자 일대는 조용해져버렸다.
“그래이, 괜찮아? 모두 괜찮아요?”
하엘이 숲에서 나오며 외쳤다.
그러자 그래이가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이드 곁으로 다가오며 이드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드, 실력 굉장하던데… 그리고 네가 가르쳐준 보법 있잖아. 그거 신기하더라. 그 덕분에 검은 하나도 안 맞았어.”
과연 그의 말대로 그에게는 검이 스친 흔적도 없었다.
여러 명이 섞여 혼전하는 틈에서, 그렇게 뛰어난 검 실력을 지니지 않은 그가 긁힌 상처 하나 없는 것이다.
“당연하지. 내가 쓸데없는 걸 가르쳤겠어?”
그렇게 대화를 접고, 우선 다친 기사들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마차 앞에는 다섯 명의 기사가 있었는데, 세 명은 땅에 쓰러져 있었고 두 명은 힘든 듯 했으나 서 있었다.
하엘이 사제답게 부상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가 치료한 것은 한 명뿐이었다.
두 명은 이미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성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 지치긴 했으나 그래도 온전한 듯한 기사가 일행들을 보며 감사해했다.
“위험할 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나크렌 제국의 황실기사단 중 대지의 기사단 단장, 라크린 유 로크라트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두 기사 역시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기사단원으로 검은머리의 길렌트와 금발의 라일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그런 그들에게 일란이 물었다.
“그렇군요. 그리폰 문장, 어디서 봤다 했더니… 그런데 아나크렌 제국의 기사분들께서 왜 이런 곳에서 공격을…”
일란의 질문에 기사단장이라는 라크린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는 짧은 금발에 괜찮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에서 덩치가 가장 좋았다.
“저희들을 도와주셨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한 분을 호위 중인데, 그분께서 이곳 일리나스를 돌아보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전부터 정체 불명의 복면인들에게 공격당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후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안은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마차 안에는 한 명의 소년이 누워 있었다.
아니, 기절해 있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저분이 저희가 호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제 저희의 불찰로 인해 화살을 맞으셨습니다.
화살에 독이 있어서 응급조치는 하였으나 완전히 해독하지 못해 저렇게 의식을 잃고 계십니다.
사제분이 계시니…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그러면서 하엘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소년의 이마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발휘했다.
그런 하엘을 보면서 일란이 물었다.
“그런데 공격하던 그자들이 누굽니까?”
“모르겠습니다.
저분을 노리고 공격한 것 같은데, 저분이 여행 중이라는 것은 비밀이기에 거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훈련을 받은 인물들 같은지라… 도적 때라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황실기사단 분들께서 호위하시는 저분은… 왕자…이십니까?”
그러자 묵묵히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라크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은 본국의 왕자이신 라한트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일란이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크린이 급하게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알 거 없다는 듯 말했겠으나,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닌데다가 이들에게 도움까지 받은 이상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저분은… 서자…이십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자 일란이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옆에서 듣고 있던 이드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이상해… 왠지… 둘러대는 것 같기도 하고…’
잠시 후 하엘이 왕자의 치료를 마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려왔다. 다친 병사에다 그 왕자까지 치료하느라 꽤 힘든 모양이었다.
“치료가 끝났어요. 하지만 많이 지친 상태라 좀 있어야 깨어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사제님.”
“별 말씀을요. 제가 할 일인걸요.”
그다음 일행은 시체들을 쌓은 후 불을 붙이고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움직이다가 쉴 만한 작은 샘 옆에 멈춰섰다. 거기서 일행은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일란이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될 수 있는 한 제국으로 빨리 돌아가야겠지요.”
“음~…”
그러자 라크린이 일행들을 바라보고 뭔가 말할 것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그러나 꽤 어려운 부탁인 듯 쉽게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저…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무슨…”
‘이 상황에서 부탁이라 봐야 하나뿐이지… 물어볼 게 뭐 있어요, 일란.’
일란의 물음에 라크린이 일행들을 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제가 부탁할 것은 여러분들이 저희와 함께 행동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일 줄은 알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그건 쉽게 결정할 것이… 잠시만…”
그렇게 말하고 일란은 눈짓으로 우리를 불렀다. 일행은 잠시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일란, 그건 일리나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지금 이동하는 건 일리나 때문이니까요.”
이드의 말에 일리나가 말했다.
“저는 그렇게 급하지 않습니다. 아직 몇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저는 여러분들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죠.”
일리나가 이렇게 의견을 밝히자 그래이와 하엘이 찬성에 표를 던졌다. 그래이는 기사가 목표이기 때문에 기사도 정신이고, 하엘은 사제로서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은 사람은 셋이었다.
“그럼 따라가지, 어떤가 이드? 어차피 레이논 산맥으로 향하기 위해선 국경선을 건너야 하는데 저들과 함께라면 문제없을 거야.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닐 거고 말이야.”
“그렇게 하죠. 저야말로 급할 것 없거든요.”
“좋아, 그럼 그렇게 결정을… 음?”
“이봐, 내 의견은 어떻게 듣지도 않는 건가?”
“이봐! 라인델프, 자네야 어차피 나를 따라온 거잖아. 그리고 자네가 어떻게 곤경에 처한 이들을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 안 그런가? 카르스 누멘을 소시하는 자네가 말일세.”
“아무렴,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그냥 넘겨? 당연히 도와야지.”
“그럼 끝났군. 돌아가자.”
이드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일행 중 라인델프를 바라보았다.
‘참 단순하신 분이군…’
일행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일행들의 입(일란)이 결정된 바를 라크린에게 전했다.
“좋습니다. 저희들 역시 그쪽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니 동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꼭 보상하겠습니다.”
“아니요. 저희는 그렇게 그런 걸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라크린은 일행들의 결정에 상당히 감사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 공격을 당했으니 또 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 데 이렇게 도와준다고 하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는 라크린은 보통의 기사처럼 거만하거나 잘난 체하는 것은 없었다.
모두들 식사를 마쳤을 무렵에서야 의심스럽지만 라한트라는 왕자가 깨어났다. 그러자 라크린이 급히 다가가 물을 건네고 상태를 물었다.
그러자 그 왕자는 살짝 웃으며 괜찮다는 답을 하고는 기사단들에게 신경을 써주었다. 그리고 기사단의 피해가 상당하다는 말에 기사단장인 그에게 위로의 말까지 건넸다.
‘인품이 괜찮은 것 같군. 중원에서도 관직에 있는 이들은 거만하기 마련이거늘…’
“일란, 저 왕자라는 아이, 의외로 성격이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렇군, 이드 군. 정확히 본 듯해. 보통의 왕자들 같으면 깨어나자마자 짜증부터 냈을 텐데 말일세.”
일란의 말을 들으며 다른 동료들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