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94화
그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용병들과 가디언이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개중엔 아예 뒤로 누워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쉬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드윈의 명령에 의해 록슨시로 소식을 전하고 환자들을 옮길 들것을 요청하기 위해 두 명의 마법사가 록슨시로 뛰어야 했던 것이다.
이드는 힘들게 뛰는 그들을 잠시 바라본 후 몬스터들이 쓰러진 곳 저 뒤쪽, 제법 깨끗한 곳에 서 있는 빈과 라미아를 바라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이드의 등 뒤로 자연스레 오엘이 뒤따랐고, 또 그녀 뒤를 하거스와 나머지 디처의 팀원들이 따랐다.
“수고하셨어요. 이드님.”
“그래, 라미아도. 한 달 만인가요? 오랜만이네요. 아깐 대단했어요. 그 마법.”
“하하… 뭘…. 그보다 난 두 사람이… 이곳에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야.”
이드의 인사말에 빈이 한참을 뛰어 숨이 찬 사람처럼 뛰엄뛰엄 말을 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그에게 그냥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아마도 방금 전 마법진을 이용한 인센디어드 클라우드의 무리한 운용 때문인 듯했다.
“그나저나… 자네들이 영국엔 무슨… 일인가?”
“간단한 여행입니다. 영국에서 찾아볼 것도 있었구요. 그러다가 며칠 전에 우연히 이곳에 들렸는데, 마침 아는 용병 분들이 있길래 같이 머무르다 나온 겁니다.”
“후우… 그런가? 하여간 자네에겐 또 도움을 받았군.”
이어지는 그의 말에 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이드의 시선에 반가운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메른과 저스틴이었다.
메른의 경우 스피릿 가디언으로 뒤쪽에 있어 별달리 피해는 없어 보였지만, 직접 검을 들고 나섰던 저스틴은 가슴에 상처를 입었는지 붉게 물든 붕대를 두툼하게 감고 있었다.
“이야,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라미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말랐답니다.”
“이야, 오랜만이야. 역시나 대단한 실력이던데?”
다가온 두 사람은 각각 인사를 하는 사람이 달랐다. 저스틴은 이드에게 인사를 건넸고, 메른은 라미아에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옛날식의 인사를 건넸다.
확실히 중국에서도 그는 라미아에게 관심을 보이긴 했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관심을 받고 있는 라미아는 무반응이니… 불쌍할 뿐인 메른이었다.
그리고 그때쯤 해서 록슨시 안에 소식이 전해졌는지 몇 대의 차가 록슨시에서 나왔다. 나온 차들은 두 대의 응급차와 다섯 대의 밴으로 모두 환자를 옮기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기진맥진해 있던 빈도 그 차 중 하나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이드는 환자를 태운 차들이 다시 록슨시로 출발하는 모습을 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여관으로 돌아가 볼 참이었다. 그런 이드의 의견에 디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는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었기에 상당히 기분이 찝찝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의 용병 일은 어차피 내일 용병길드로 직접 가서 받으면 되니 더 이상 몬스터의 비린내가 진동하는 이곳에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행들을 막아서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라미아를 놓치고 싶지 않은 메른과 자신 이상의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 하거스와 이드에게 관심을 보이는 드윈,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본의 아니게 이드들의 길을 막게 된 저스틴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이드는 몇 번 거절하다가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들을 따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드와 같이 있는 하거스가 나서 그들의 초대를 딱 잘라 거절해 버린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방금 전까지 엄청난 힘과 검술로 몬스터를 도륙하던 하거스의 말이었기에 세 사람은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다만 나중에라도 시청에 들러달라는 말만을 덧붙였다.
왠지 귀찮아질 듯했던 상황에서 벗어난 그들은 곧 록슨의 입구를 지나 자신들이 머물던 여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 먼저 들른 가디언들에게서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자신들의 집과 가게로 찾아 들어갔다.
“과연 일이 일인만큼 수당이 두둑해서 좋아.”
이드 등 테이블 두 개를 합쳐서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은 여관 문을 열고 싱글벙글 거리며 들어오는 하거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손에는 여덟 개의 하얀 봉투가 달랑이고 있었다. 용병길드에서 나온 디처팀과 이드들의 수당이었다.
전날의 피로를 깨끗이 풀고 쉬고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 하거스 혼자 수당을 받기 위해 용병길드까지 갔다 온 것이었다.
테이블로 다가와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하거스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봉투로 모이는 모습에 봉투에 써 있는 이름에 맞춰 봉투를 건네주었다. 헌데 그런 봉투 중 다른 다섯 개의 봉투보다 훨씬 두툼한 봉투가 세 개 끼어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의 수당을 받아 확인하던 쿠르거가 불똥 튀는 시선으로 봉투를 노려보았다.
“이봐, 대장. 그건 뭐유? 이거 우리들 봉투하고 차이가 너무 나잖아. 서럽게 스리.”
“괜히 눈독들이지마. 임마! 이건 나와 이드, 그리고 여기 있는 제이나노 사제 앞으로 나온 수당이니까.”
하거스의 말에 아직 봉투를 건네받지 못한 이드와 제이나노, 그리고 이미 봉투를 건네받은 다섯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세 개의 두툼한 봉투를 향했다. 부러움과 의아함을 담은 주위의 시선에 하거스는 이드와 제이나노에게 각각 봉투를 건네며 봉투가 두툼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하고 이드는 마지막에 몬스터를 쓰러트린 값이 대한 보너스 수준이고, 여기 제이나노 건 녀석의 치료를 받은 용병들이 조금씩 돈을 끼워준 거라서 저렇게 두둑한 거지. 한마디로 치료 랄까?”
“아하, 이거이거… 전 돈을 보고 치료한 게 아닌데….”
하거스의 말에 돈 봉투를 받고 싱글거리던 제이나노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비록 조금씩이라곤 하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낸 때문인지 거의 다른 사람들이 받은 수당의 배나 되는 금액이었다.
“그냥 받아둬라. 용병들은 자신을 치료해준 값은 꼭 하거든. 너만 그렇게 받은 게 아니라 누군가를 치료해준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조금씩 그렇게 받게되지. 누가 돈을 내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용병들 사이의 예의거든.”
“헷… 그러면 언젠가 세워질 리포제투스님의 신전에 대한 헌금을 받아두죠.”
이드는 제이나노가 봉투를 받아 가방에 넣는 모습을 바라보다 하거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한 사람과 이렇게 자주 부딪히는 걸 보면 이 하거스란 사람과 인연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일도 끝났는데…. 쉬실 거예요?”
“뭐… 몇 일간. 어차피 용병들이 오래 쉴 수 있어야지. 돈 찾아오는 김에 길드에도 말해 뒀으니까 아마 몇 일 후엔 일거리가 생길 거야.”
이드의 뜻 없는 물음에 하거스가 과일 한 조각을 우물거리며 답할 때였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커다란 손이 하거스의 어깨 위로 턱하니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들과 장기계약을 맺어볼 생각 없소?”
별로 크게 말하는 것 같지도 않은 목소리가 여관 식당 전체에 울렸다. 이런 엄청난 성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곳 록슨에선 한 사람 뿐이다. 모두의 시선이 하거스 뒤로 다가와 있는 드윈과 빈에게로 향했다.
“여러분 모두 어제는 수고가 많았습니다.”
빈이 인사 대신 건네는 말에 앉아 있던 모두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어 비토가 내어준 의자에 두 사람이 앉자 하거스가 보통 때의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런데 방금 한 말은 뭡니까? 장기계약이라니?”
“말 그대로네. 어제 본 자네들 실력이 보통의 가디언 이상이라서 말이야. 하지만 가디언이 되기 싫어서 용병일을 하는 거 아닌가?”
드윈의 말에 하거스를 시작해 나머지 세 명의 디처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성격엔 규칙이 있고 상부의 지시가 있는 가디언이란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용하겠다는 것이네. 물론 자네들이 우리에게 고용된다고 해서 가디언들과 똑같은 규율에 매이는 것은 아니야. 자네들은 어디까지나 용병이니까. 수당은 일 하나에 오늘 자네가 받은 수당만큼의 수당을 주겠네. 어떤가? 수당도 그만하면 좋고, 장기계약이라. 또 다른 일자릴 구할 필요도 없고 이만하면 상당히 좋은 조건 아니겠나?”
확실히 좋은 조건이었다. 또한 파격적인 조건이기도 했다. 물론 실력이 따라주기에 내걸린 조건이긴 했지만 이만한 조건을 가진 일자린 다시 구하기 힘들다. 그렇게 생각한 하거스는 디처의 나머지 팀원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차피 갑갑하게 명령받는 일만 없다면 가디언 일도 용병일과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거스는 세 명이 동의하자 이번엔 고개를 오엘에게로 돌렸다. 그런 하거스의 시선에 오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거스는 그녀의 행동에 피식 하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어차피 수련이 끝나면 다시 돌아올 거잖아? 그러니 너도 아직 디처팀인 거다. 네 의견도 들어봐야지.”
하거스의 말을 들은 오엘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잘 짓지 않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거스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모두의 의견이 모아지자 드윈을 향해 한쪽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럼, 잘 해 보도록 하죠. 고용주.”
“그러지. 그리고 그냥 드윈이라고 부르게. 자네들에게 고용주라고 불릴 사람은 런던에 따로 있으니까 말이야.”
“…. 그럼 우리도 런던에 가야한단 말입니까?”
드윈과 마주 잡은 손을 슬쩍 놓으며 하거스가 찜찜한 표정으로 물었다.
차를 타면 록슨시에서 그리 멀진 않은 곳이지만, 수도랍시고 상당히 시끄러운 곳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못 갈 정도로 싫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확 트인 곳에서 살다 가보면 왠지 답답함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누가 뭐래도 자네들의 당당한 고용주나리가 거기 있지 않나. 자네들의 일터도 함께 말이야. 인사는 해야지.”
“쳇, 꽤나 깝깝하겠 구만. 그런데 드윈씨….”
“그냥 드윈이라고 부르게.”
“아, 그래요. 드윈. 그런데 왜 여기는 안 물어보는 겁니까? 이쪽은 아직 어린데 비해 나보다 실력이 훨 낳아 보이던데…”
하거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이드를 가리켜 보였다.
사실 어제 이드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이유가 빈이란 사내와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물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팀의 막내인 오엘이 그를 따라다니는 데 정작 자신들은 그런 이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이나마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과연 그의 그런 생각은 통했는지 곧 드윈의 입에서 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나도 그러고 싶음 마음이야 굴뚝같지. 하지만 아무리 탐나는 인재라도 남의 나라에 소속된 가디언을 무턱대고 스카웃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으응? 가디언? 그럼 이드가 가디언이란 말입니까?”
드윈의 말에 오엘과 제이나노, 그리고 디처의 팀원들이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이드를 바라보았다.
허기사 여기저기 가디언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많은 요즘에 외국에 나와 여유 있게 구경하고 다니는 사람을 누가 가디언이라 생각했겠는가.
다들 그렇게 생각할 때 드윈 옆에 앉아있던 빈이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다만, 저번 중국에 일이 있어 가디언들이 파견되었을 때, 여기 이드군과 라미아양이 한국의 가디언들과 함께 왔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뿐이죠.”
이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 주었다.
이제 와서 숨길만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가디언이란 것을 직업으로 가지고 활동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명예직 비슷하게 이름만 받았죠. 사실 중국에 갔을 때도 저는 교관 비슷한 신분이었고 여기 라미아는 가이디어스의 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자네 중국인 아니었나? 왜 한국에서…..”
하거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중국인이면서도 어떻게 한국의 가디언들과 함께 움직이고, 그 나라의 명예 가디언이 된단 말인가.
이드는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궁금하다는 시선까지 합쳐지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처음 신진혁과의 만남에서부터 가이디어스의 입학까지, 그리고 가이디어스에 있을 때 일어났던 일까지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모두 그대로 이해하는 듯 해 보였다. 그의 말 중에 틀린 부분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드의 이야기 가운데 갑작스런 순간이동 현상도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에 마족, 드래곤까지 날아다니는 곳으로 변해 버린 세상에 그런 현상이라고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었다.
“이왕 영국까지 온 거 자네들도 우리와 같이 가지 않겠나? 마침 중국에서 도움을 받은 것도 있으니, 내 확실히 대접해 주지.”
“런던엘… 요?”
“그렇지. 내가 런던에서 구경할 만한 구경거리도 소개시켜 주도록 하지.”
이드는 귀가 솔깃할 만한 빈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빈의 말대로 런던에 들린다고 해서 크게 잘못될 것도 없었다.
이드는 조금 전 하거스가 그랬던 것처럼 일행들의 의견을 물을까 하고 고개를 돌리려다 말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이라면 설령 자신이 가기 싫더라도 가야 할 듯했다.
이드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런던에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나만 믿게.”
빈은 이드의 말에 반갑게 말하고는 각자의 짐을 꾸려놓도록 당부했다.
가디언들의 피로와 상처가 풀리는 내일쯤 런던으로 출발할 예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런던으로 갈 땐 그들이 타고 왔던 대형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때 한쪽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피렌셔가 두 사람을 향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제로라는 녀석들에 대해서는 좀 알아보셨습니까?”
그의 말에 밝고 가볍던 분위기는 금세 진지해졌다.
동시에 모든 시선이 드윈과 빈에게 꽂혔다.
그런 시선 중에서 드윈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없어. 녀석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서 수도와 일본 측에 연락해 봤지만…. 전혀 알아낸 게 없어. 그래도 미카란 녀석은 일본에 출생신고가 되어 있긴 한데 그 후의 종적이 전혀 나와 있지 않아. 그 부모는 물론 아무런 추가자료도 없어. 하지만 이 녀석은 그래도 낳은 편이지. 그 재수 없는 마법사 형제 놈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건지 아니면 땅에서 솟았는지 아무런 자료도 없어. 물론 자잘한 모든 나라의 자료를 다 뒤져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그렇네. 정말 생긴 대로 재수 없는 놈들이지.”
“그럼…. 제로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시겠군요.”
“그렇지. 지금까지 그런 이름을 쓴 조직이 몇 있긴 하지만 그건 모두 봉인의 날 이전의 일이고, 현재는 그런 이름을 쓰는 조직조차 없지. 덕분에 그 제로라는 것이 그들 세 명 외에 얼마나 더 되는지. 어떤 녀석들이 모인 건지도 모르고 있는 형편인 거지. 어쨌거나, 그 놈들의 부탁도 있고 또 각국에서 대비하라는 뜻에서 녀석들에 대한 정보를 뛰우긴 했지.”
드윈의 말을 들으며 모두 꽤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그들에 의해 죽을 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는 그런 드윈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바로 중국의 던전에 있던 타카하라와 애송이 마족 보르파였다.
왜 그들이 생각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둘이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기 빈 씨. 혹시 중국에서의 일과 이번 일이…..”
이드의 말에 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두 사건을 연관해서 생각해 봤던 모양이었다.
“아아… 무슨 말일지 아네. 나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중국에서의 일이나 이번 일이나 둘 다 정보가 없어. 뭔가 작은 단서라도 있어야 어떻게 연관을 지어 볼 텐데 말이야. 아직까지는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게 못되지.”
그렇긴 하다.
빈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의 말과 함께 조금 더 진지해져 버린 분위기에 하거스가 짐짓 큰소리를 치며 분위기를 다시 띄웠다.
“자, 자. 뭘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습니까? 나갑시다. 좋은 일거리도 구했겠다. 수당도 들어왔겠다. 내가 오늘 크게 사지. 모두 나가자고요.”
자리에서 일어나 하는 하거스의 말에 모두 자리에서 하나둘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이어진 말에 분위기는 금세 다시 밝아졌다.
“좋아, 그럼 오랜만에 대장한테서 한번 얻어먹어 볼까나?”
“킬킬…. 완전히 벗겨먹자고, 가자!!”
다음날 일행들을 데리러 온 빈을 따라 일행들은 열 명의 가디언들이 타고 있는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버스는 덩치가 크고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일행들은 앞에 앉은 가디언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같은 버스를 탄 이상 최소 이틀 동안은 같은 버스 안에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사로 말을 튼 그들과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각자의 무공이나 특기에서부터 현재 런던의 사정까지.
그들도 이틀 전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이드와 하거스의 실력에 대해서는 놀라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런던에서 생활하게 된 디처를 위해 중간중간 그들에게 숙지해야 할 것들에 대해 설명하는 드윈 덕분에 옆에 있던 이드들도 자연적으로 영국 가디언의 조직이나 배치 등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이야기를 듣고 뭔가 나쁜 일을 할 사람은 없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인 드윈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영국의 가디언은 크게 런던의 중앙지부와 전국에 퍼져 있는 열 개의 지방지부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 상주하고 있는 가디언의 수는 모두 다르지만 대략 집계해 보면, 사백 이상의 가디언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가디언들 중 수준급이란 소리를 듣는 가디언들은 중앙으로 모이게 되는데, 그들은 각 지방에서 해결이 어렵다고 올라오는 일들만을 전문적으로 처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번에 고용되어 올라가는 디처들 역시 위의 가디언들과 같은 일을 맡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틀의 시간을 보낸 그들은 둘째 날 저녁때쯤 런던 외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록 외곽이긴 하지만 영국의 수도답게 꽤나 시끌벅적해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은 버스는 그대로 외곽지역을 지나 금세 도시의 중앙부근으로 들어왔다.
이어 차가 멈춘 곳은 십 층에 이르는 대형 빌딩 앞에 형성된 주차장이었다.
십 층의 건물은 척 보기에도 거대해 보였는데, 그 중앙에 만들어진 커다란 문으로는 수십에 이르는 가디언들이 끝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가디언 중앙지부 건물로는 꽤 크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텔이던 곳을 인수받아 개조한 곳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저 안에 가디언들의 숙소와 휴식공간, 그리고 간단한 수련실이 마련되어 있으니…. 클 만도 하고 말이야.”
“숙소라니… 그럼 우리들도 저곳에서 지내게 되는 겁니까?”
드윈의 말에 하거스가 반응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드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는 들었지만 지금의 숙소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자네들을 고용한 거이 우리들이니 우리 쪽에서 숙소를 마련해 줘야지.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방금 말한 대로 원래 호텔이었던 곳인 만큼 숙소하나 정말 기가 막힌 방들로만 준비되어 있지. 더구나 룸 서비스까지 있다면, 두 말할 필요 없겠지?”
일행들은 이어지는 드윈의 말에 그저 황당한 표정으로 건물을 바라보았다.
호텔의 잘 정리된 방에 룸서비스라니. 왠지 그 차별이 기분 나빠진 하거스가 퉁명스레 말을 했다.
“지방에 있는 가디언들은 생각도 못한 생활을 하는 군요. 중앙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중앙에 있는 가디언들은 이런 대접을 받는 대신 지방에서 해결 못하는 어려운 일들만 맡게 되지. 항상 부상을 안고 사는 그들을 위한 작은 특혜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어진 드윈의 말에 하거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의 설명으로 중앙의 가디언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맡게 되는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록슨의 일에 파견된 가디언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중 마법이 아닌 검을 쓰는 사람 중 상처 입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부상과 맞바꾼 특혜라.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특혜 같네요.”
하거스는 그렇게 한마디하고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남은 일행들이 뒤따랐다.
건물 안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밖에서 보면 그냥 굉장히 크다 정도인데 안에 직접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 화려하다가 추가된다. 드윈의 말대로 예전에 호텔로써 사용되었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거대한 로비의 화려함과 크기에 일행들이 놀라는 사이 드윈과 빈은 그런 일행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는 곧장 호텔… 아니, 가디언 중앙지부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책임자를 만나러 가는 듯한 그 분위기에 제이나노가 슬쩍 입을 열었다. 천성적으로 수다스럽고 가벼운 성격인 그로선 무게 잡힌 분위기가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영국 가디언들의 총 책임자를 만나러 가는 것 같은데…. 저희도 꼭 뵈어야 하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몇 일간이지만 이곳에서 머물 거라면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이곳에서 머물러요?”
“하하하…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잘 대접하겠다곤 했지만 나도 이곳에서 살고 있지. 물론 아내와 하나뿐인 아들 녀석도 이곳에 있네. 그러니 내가 자네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겠나? 여기밖에 없지. 그리고 이 주위에서 이곳보다 편하고 좋은 숙소도 찾기 힘드니 그냥 가만히 있게.”
“…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마침 십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띵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그와 함께 보이기 시작한 십 층의 내부는 일층의 로비보다 몇 배는 더 화려하고 비싸 보였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호텔이나 거의 대부분이 최상층을 특실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윈은 앞장서서 걸어 십 층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방 앞에 멈추어 섰다. 푹신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배인 카펫 덕분에 그의 발소리는 물론 그의 뒤를 따라 걸어온 일행들의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 때 문 앞에선 드윈이 점잖게 우아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드윈입니다. 록슨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드윈이 몇 번이나 나무문을 두드려야 했지만 역시 아무 반응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참지 못한 드윈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실내에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뒤를 돌아보며 일행들을 불러 들였지만 누구도 쉽게 들어서진 못했다. 주인도 없는 방을 저렇게 아무렇게 들어가도 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앞서 들어서는 빈의 모습에 모두 방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이미 그들에겐 드윈은 열혈 중년으로, 빈은 조금 어두운 분위기의 차분한 마법사로 찍혀버린 것이었다. 그 중 빈이 들어갔으니 괜찮다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빈을 믿고 들어선 일행들은 들어선 방 아니, 사무실의 분위기와 모습에 절로 감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한쪽에 마련된 벽난로와 오래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장, 그리고 맞은편 벽에 장식된 검과 방패. 하지만 그 것들보다 더욱 일행들의 눈을 끈 것은 중세의 성처럼 돌로 된 벽이었다.
일행들은 그 벽을 손으로 만져보고 가볍게 검으로 두드려 보며 그것이 정말 돌이란 것을 확인하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 참! 돌벽이라니… 이렇게나 화려한 호텔에 돌로 된 투박한 방이라… 확실히 개성은 있지만 호텔 측에서 택할 만한 것은 아니고…. 빈씨 이건 여기 책임자란 분의 취향인 겁니까?”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던 피렌셔가 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대답은 일행들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나는 화려한 것보다는 이런 투박한 중세의 멋을 좋아하니까. 그래, 자네들이 이번에 드랜의 추천으로 고용된 용병들인가?”
편안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음성에 일행들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은 정문 바로 옆쪽으로 거기엔 또 다른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나와 있는 한 사람.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영국 가디언들의 총 책임자인 듯한 노년의 인물이 서 있었다.
한국의 계량한복처럼 편안해 보이는 옷에 하나로 묶어 넘긴 반백의 머리. 그리고 웃고 있으면서도 하나하나 일행들을 살피는 듯한 날카로운 눈.
전체적으로 옆집 할아버지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가디언들을 이끌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확 드는 사람이었다.
그때 다시 드윈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록슨에서의 일을 모두 마치고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페미럴 공작님.”
그의 말에 이드들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공작이라 불린 인물을 바라보았다.
공작이라니… 저 사람은 단순한 가디언들의 총 책임자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럴이라 불린 그는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일행들의 시선을 받으며 우선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의 사무실 중앙에는 긴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페미럴은 그 상석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하고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데도. 아, 자네들 내가 공작이라 불려 궁금하겠군. 내 원래 작위는 후작이라네. 현 여황의 삼촌 격이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거지. 그러던 중에 내가 이런 큰 자리까지 맡게 되다 보니 자연적으로 작위가 한 계 올라간 것뿐이지. 하지만 지금 세상에 작위를 따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편하게 페미럴이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그건 그렇고, 자네들이 이번에 드윈이 적극 추천해 고용하자고 결정하게 된 용병들인가? 하지만 인원이 좀 많군. 내가 듣기론 네 명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의 말에 드윈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빈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아, 이쪽은 제가 초대한 손님들입니다. 일전에 보고 드렸던 중국의 던전 발굴 작업에 관한 보고서에 언급했던 이드 군과 라미아 양, 그리고 그 동료인 리포제투스 님의 사제인 제이나노와 이드 군의 사질 뻘 되는 오엘 양입니다. 이번 록슨의 일에서도 생각도 못한 도움을 받아서 제가 대접할까 해서 데려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게. 내 여기 빈 군의 보고를 통해 두 사람의 이름은 익히 들어봤지. 그런데 이번에도 도움을 주었다니… 이거 귀빈 대접을 톡톡히 해야겠구만.”
“아니요.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이드는 이어진 공작의 말에 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로 옆에 놓인 전화기를 통해 이드들이 묵을 방을 준비해 놓으란 명령까지 내려버리는 것이었다.
그 후 페미럴의 시선은 다시 하거스 등에게로 넘어갔다.
잠시 디처의 팀원들을 바라보던 그는 정확하게 하거스를 집어내어 말을 걸었다. 직위가 직위인 만큼 사람 보는 눈이 확실한 모양이었다.
“그래, 자네가 하거스겠군. 내 들어보니 여기 드윈과도 비슷한 실력을 가졌다지?”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
“물론입니다. 공작님. 게다가 이 녀석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검술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 실력이 좋습니다.”
하거스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끼어 들어 그의 칭찬을 늘어놓는 드윈이었다.
자신이 추천한 인물인 만큼 확실히 챙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페미럴과 하거스의 대화라기보단 페미럴과 드윈의 대화가 끝나자 페미럴은 주위의 분위기를 조금 안정시키며 록슨에서의 일을 보고받았다.
그런 자리인 만큼 이드들과 디쳐들은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대화 도중 불쑥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옆에서 가만히 지겨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는 만큼 보고할 것이라곤 록슨에서 있었던 전투의 개요뿐이었던 것이다.
그 일이 끝난 후 일행들은 페미럴과 작별하고,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그런 사무실 밖엔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호텔의 안내원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준비된 방으로 일행들을 안내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방을 찾아가려 했던 참이었기에 이드들과 빈, 디쳐들과 드윈은 각기 준비되어 있는 방으로 가면서 한 시간 후 삼층에 있는 식당으로 모이기로 했다.
호텔이라 방이 많은 때문인지 각각 1인실로 준비된 네 개의 방은 한쪽 복도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과연 페미럴이 귀빈으로 모신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상당히 고급스러운 방임과 동시에 런던 시내가 한눈에 보일 듯한 경관 좋은 방이었다.
이드는 잠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더니 곧 몸을 돌려 방에 들어오기 전 라미아에게서 건네받은 작은 옷 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가방을 뒤적이던 이드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록슨의 정보 길드에서 사 온 두 장의 정보지였다.
이드는 그중 한 장의 귀퉁이 부분을 잠시 바라보더니 빙긋 웃는 얼굴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런 이드의 손에 들린 종이의 한 부분, 방금 전 이드가 바라보던 그 곳에는 붉은 글씨로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절대 금지.
아래 두 지역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드래곤의 레어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라 짐작되는 곳이다. 혹시라도 심기가 거슬린 드래곤이 날 뛰게 된다면 상상할 수 없는 피해가 예상됨으로 절대 접근하지 말 것.
그런 글과 함께 친절하게도 지도에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지명 이름이 적혀있었다.
“좋아, 좋아. 목적지도 정해졌겠다. 나름대로 여기서 몇 일 푹 쉬고 움직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미안한 표정으로 찾아온 빈의 말에 일행들은 정말 이드의 말대로 푹 쉬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정말 미안하네. 갑자기 그런 일이 터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괜찮아요. 게다가 어디 그게 빈씨 잘못인가요.”
이드와 리마아들은 지금 자신들의 앞에서 연신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하고 있는 빈의 태도에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어제 저녁 식사를 하며 다음날, 그러니까 오늘 관광할 런던의 명소들을 즐겁게 이야기하며 몇 개 골라두었었다. 물론 그 안내는 빈이 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새벽에 일이 터지고만 것이었다.
덕분에 급히 회의가 소집되고 이래저래 바쁜 상황이 되다 보니, 런던 시내를 안내해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그 사건이란 것이 다름 아닌 미국에 출현한 제로에 관한 것임에야. 잘못하면 그들과 직접 맞닥뜨렸던 드윈과 빈이 직접 미국으로 가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제이나노가 물었다. 제로를 직접 겪어 본 그들로서는 그 일을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런 사실을 알기에 빈은 자신이 페미럴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간추려 말해 주었다.
“아무래도 록슨 때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편지로 항복 권유를 한 모양인데, 당연히 당시엔 콧방귀를 뀌었다는군. 그 편지엔 록슨 때처럼 몬스터로 공격하겠다는 말도 없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다행히 공격 하루 전에 우리들이 뛴 내용이 전 세계에 도착했고, 다행히 미국도 부랴부랴 뛰어난 실력을 가진 가디언들을 끌어모아 놈들이 항복 권유를 한 플로리다의 탬파로 보낸 모양이더군. 덕분에 탬파가 그 녀석들 손에 넘어가는 일은 없었지만…..”
마지막 말에서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빈이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워낙 심각해 네 사람 중 누구도 재촉하지 않고서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열린 그의 입에선 놀라운 사실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을 제로라고 밝힌 다섯 명의 인원에게 참패를 당한 모양이야. 다행히 사망자는 없지만 중상을 입은 사람이 꽤나 많다고 하더군.”
“….. 미국에서 나선 가디언들은 몇 명이었는데요?”
“우리 때보단 좀 많지. 오십 명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직접 그들과 손을 섞은 가디언은 스무 명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삼십 명은 앞서 싸운 스무 명보다 실력이 좀 떨어지거든.
어쨌든 단 다섯 명만으로 그 세 배에 이르는 인원을 쓰러뜨린 거지. 다행히 그런 덕분에 그들도 지쳤기에 이길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탬파가 어떻게 됐을지.”
“…..”
“덕분에 지금 세계적으로 아주 난리야. 녀석들에 대한 정보는 모습을 보이는 녀석들의 이름뿐이고 그 외 단서랄 만한 것은 손톱만큼도 없으니.
더구나 이동도 텔레포트 스크롤로 하는 모양인지 추적도 불가능해.”
“상당히 요란하게 소란을 떤 모양이군요. 그렇게 되면, 드미렐이란 녀석이 하고 간 말이 맞는 게 되는 건가요? 록슨의 일은 이름 알리기라는 말이.”
“아무래도….”
그렇게 대화가 오고가는 사이 분위기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이미 런던 시내 관광이란 흥분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듯했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엔 제로란 이름과 드미렐의 얼굴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이야길 전한 빈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흠흠, 아무튼 그 일은 그 일이고, 자네들이 관광하는 건 관광하는 거지. 내가 안내하지 못하게 됐으니 대신 할 사람을 불러놨어. 아마 곧 올 거야.”
“아니요. 그러실 필요는….”
다시 한번 사과하는 빈의 말에 이드가 괜찮다고 했지만 상대는 막무가내였다.
“자네들을 끌고 온 것도 나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지. 아, 마침 저기 오는군. 여기다. 이리 와라. 치아르!”
그런 빈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가이디어스의 학생복을 당당히 걸친 십팔, 구세 정도의 소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딘가 빈과 닮은 모습이기도 했지만 그와는 다른 환한 금발 덕에 가볍고 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런 소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꼭 무슨 불만에 가득 찬 듯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내 아들 녀석이지. 이름은 치아르 에플렉일세. 자네들 나이를 생각해서 아직 어린 이 녀석에게 내 대신 안내를 부탁했네.”
“아빠, 내가 왜 관광안내…”
하지만 그건 빈의 생각일 뿐 그의 아들 치아르는 전혀 다른 생각인지 그의 말에 멍뚱히 다른 곳을 바라보던 시선을 홱 돌려 따지고 들기 위해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소리치던 도중 그의 눈에 들어온 두 명의 여성의 모습에 그의 고함 소리는 갑자기 뚝 끊기고 말았다.
이어 확인하듯 일행을 한번 바라보고는 어이진 말의 내용을 급히 바꾸었다.
그런 치아르의 얼굴엔 불만이란 감정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 당연히 해야죠. 아빠 손님이라니까. 제가 책임지고 런던의 유명 명소들을 안내할 테니 걱정 마세요.”
갑자기 바뀌어 버린 아들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빈은 곧 그 시선 안에 라미아와 오엘을 눈에 담고 피식 웃어버렸다.
이어 위로의 감정이 담긴 손길로 아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가 보기엔 아들이 노리는 듯한 라미아와 오엘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래, 그래. 내 너만 믿으마. 대신 아버지의 손님들이니 만큼 무례하게 굴어선 안 된다. 그리고 네가 돌아오면… 용돈을 조금 올려주마.”
깨끗하게 차일 아들에 대한 위로금 차원의 용돈이다.
보통 이럴 때 부모들은 속상한다고 하지만, 평소 오만하던 아들이 차일 거란 걸 생각하니 오히려 재밌기만 한 빈이었다.
다시 한번 복잡한 심정으로 아들을 바라본 빈은 이드들에게도 즐겁게 즐기라는 말을 남기고는 뒤로 돌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빈이 가고 나자 치아르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어깨를 넓게 벌려 돌아서며 빠르게 라미아와 오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라미아를 눈에 담으며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올해 열아홉 살로 현재 가이디어스의 최고 학년인 5학년에 재학 중인 치아르 에플렉이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관광 안내를 맡게 됐으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스윽 라미아를 향해 손을 내밀어 보이는 치아르였다.
반대로 이드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치아르의 인사를 받았고, 라미아 역시 별 생각 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아 흔들어 주었다.
사실 지금 치아르와 같은 시선은 라미아와 있으면 한두 번 받아보는 것이 아닌 일행이었다.
덕분에 익숙해졌다고 할까? 별로 그런 시선에 신경 쓰지 않게 된 이드들이었던 것이다.
“그럼 어디부터 가보고 싶으신가요? 두 분 숙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