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95화
“그럼 어디부터 가보고 싶으신가요. 두 분 숙녀분?”
치아르의 물음에 잠시 후 일행은 대영박물관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이드 일행 중 런던에 와서 관광을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말할 필요도 없고, 미국에서 살고 있던 제이나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오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비록 영국인이긴 하지만 런던엔 아무런 친인척도 없고, 청령신한공을 익히기 위해 시간을 보내다 보니 런던에 올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 버스에 오른 네 사람 모두 가벼운 흥분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치아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런던에 초행길인 두 아름다운 숙녀를 안내한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로 인한 기분 좋은 흥분감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두 숙녀를 향해 자신이 버스 창 너머로 보이는 곳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그 두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오엘이란 이름의 한 여성은 한 손에 검을 든 채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는데, 도대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라미아란 이름의 정말 여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확실하긴 한데,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한 살 어려 보이는 비실비실해 보이는 녀석 옆에 꼭 붙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재잘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저런 특등급의 미녀가 꼭 달라붙어 있는데도 시큰둥해 보이는 저 표정이란…
‘비실비실한 녀석이 반반한 얼굴로 관심을 좀 받는 걸 가지고 우쭐해 있는 모양인데… 좋아. 그 능글맞은 표정이 언제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
라미아가 이드를 대하는 태도에 순식간에 그를 적으로 단정지어 버리는 치아르였다.
그런 그의 머릿속엔 이미 이들이 빈의 손님이란 사실이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덕분에 알게 모르게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린 제이나노였지만, 그는 여전히 버스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알게 모르게 치아르가 라미아와 오엘에게 접근하기 위한 노력이 펼쳐졌다.
대영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 사야 하는 입장권을 사 나눠주며 두 여성에게 좋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심도 가지 않았다.
박물관 내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유물 몇 점을 찾아가며 유창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 유물에 관해선 자신보다 더욱 세세하고 오래된 것까지 설명해 대는 이드의 모습에 실패.
오히려 라미아와 오엘, 심지어 주위의 관광객들까지 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박물관을 나서자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
치아르는 그들을 꽤나 알려진 식당으로 안내했다.
자신이 거하게 한턱 쏠 생각이었지만, 라미아가 이드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통에 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행들은 그대로 다음 목적지인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제이나노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곳으로 항상 관광객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여러 가지 구경거리가 많고, 맑은 분수가 두 개나 있어 상당히 시원한 곳이라고 했다.
또한 그 뒤로는 국립미술관이 서 있어 발걸음만 돌리면 멋진 미술품들을 구경할 수도 있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광장은 사람들로 하나가득 시끌벅적했다.
게다가 광장 곳곳에 자리 잡고 묘기나 그림, 또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치아르는 라미아와 오엘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아주 의식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신 주위에 있던 관광객들이나 런던 시민들이 가이디어스의 학생인 자신을 관심 있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자신이 가이디어스의 학생인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에게 있어 가이디어스의 학생이란 점은 관심의 대상이고 동경의 대상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자신은 그런 가이디어스의 5학년.
자기 나이 또래에선 제법 실력자란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드들을 처음 만난 곳이 바로 가디언 중앙지부가 아닌가.
그렇다면 저들도 뭔가 재주가 있거나 가디언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가이디어스의 학생에게 새삼스레 관심을 보일 리 없을 것이다.
사실 이때만은 제이나노도 사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해야 관심을 끌… 수… 있겠군. 너 이놈 잘 걸렸다.’
앞서 가는 네 사람과 제법 멀리 떨어져서 걷던 치아르는 먹음직한 먹이를 발견한 사자와 같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지금 치아르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드들의 한 발짝 뒤에서 서서히 그들에게 접근해 가고 있는 한 남자였다.
보통 때라면 별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어떻게 관심을 끌어보기 위해 눈을 번뜩인 덕분에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소매치기….’
영국 내에서도 트라팔가 광장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는 양심에 털 난 사람은 종사하는 직업.
분명 아까 그의 손에 잠깐 반짝이며 보인 것은 날카로운 면도칼이었다.
그 사이 소매치기는 점점 더 네 사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이 그토록 관심을 끌고자 하는 라미아에게로.
‘그래, 그래…. 조금만 더. 네 녀석이 슬쩍 했을 때 내가 나서서 떡 하니….’
턱!!
‘응??!!’
“응??!!”
순간 소매치기와 치아르는 슬쩍 들려지는 팔을 중간에 턱하니 붙잡는 예쁜 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자신은 분명히 즐거워 재잘대는 예쁜이의 뒤로 돌아가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아직 작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
예쁜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린 소매치기와 치아르는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잡히다니!!!’
“잡… 혔다?”
“잘 맞췄어요. 하지만 작업할 상대를 고르는 눈은 별로네요.”
다음 순간 소매치기는 귀여운 얼굴의 남자아이의 빙그레 웃는 얼굴을 봤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공중에 붕 떠 있었고, 또 그대로 낙하해 강렬한 통증과 함께 돌 바닥의 쿠션을 점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로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고통스런 비명뿐이다.
“크아아…..”
“이런, 바닥이 돌인걸 생각 못했군.”
“칫, 비실이는 아닌가 보군.”
치아르는 소매치기의 비명소리에 주위의 시선을 몰리는 것을 보며 자신을 위한 계획인 또다시 저 이드에 의해 산산이 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저 호리호리한 몸매로 소매치기의 팔목만을 잡고 그를 공중으로 던져 버린 것이었다.
‘저 녀석도 뭔가 한가닥 할 만한 걸 익히긴 익힌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는 치아르의 눈에 광장 한쪽에 서 있던 경찰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도 이드들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멀뚱이 떨어져서 지켜 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삑, 삑….
“비켜요. 비켜. 무슨 일입니까? 왜 사람이 이렇게 누워 있는 겁니까?”
경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하는 말에 제이나노가 슬쩍 손을 들어 소매치기의 손을 가리켜 보였다.
“저 사람 손에 들고 있는 거 하나면 모든 상황이 설명될 듯한데요.”
“… 면도칼? 그럼….. 오내, 이 자식 잘 걸렸다. 네가 요즘 여기서 설친 놈이지?”
경찰은 소매치기에게 원한이 많은지 잔인하게 웃으며 사정없이 녀석의 팔을 비틀어 수갑을 채웠다.
아마 이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꽤나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수갑을 채운 경찰은 한 건 해치웠다는 속시원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이드들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녀석 때문에 그동안 피해가 많았는데, 이렇게……”
이드의 손을 잡고 감사를 표하던 경찰의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며 그의 시선이 이드의 허리, 그리고 오엘의 손에 멈추었다.
“…. 음, 무기를… 소지하고 계셨군요. 무기 소지 허가증은 가지고 계신가요?”
그 말에 오엘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뒤적이더니 작은 증명서 하나를 꺼내 보였다.
하지만 이드는 그저 멀뚱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솔직히 허가증 같은 것이 필요한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그였다.
그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치아르는 내심 쾌재를 올렸다.
다시 한번 자신에게 나설 기회가 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가이디어스의 학생의 경우 학생증을 내보이면 어느 정도 잘 넘어갈 수 있다.
그런 생각에 막 치아르가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경찰에게서 허가증을 돌려받던 오엘이 입을 연 것이었다.
“사숙, 가디언이시잖아요. 가디언 면허증 없으세요?”
“가, 가디언!!!”
“가디언????”
오엘의 말에 경찰과 치아르가 동시에 놀라 외쳤다.
경찰은 이런 어린 소년이 특수 사건에 투입되는 가디언이라는데 놀라서, 치아르는 비실비실 하기만 한 줄 알았던 녀석이 자신도 아직 손이 닿지 않는 가디언의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저 오엘 양의 사숙이라니…..
그리어 이어서 이드의 손에 들려나온 작은 면허증의 모습에 경찰은 거수 경계를 붙이고 두말 않고 돌아가 버렸다.
또한 치아르는 어떠한 일에 충격을 먹었는지 타워 브릿지 구경을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이드를 바라보며 고개만 내 저어대기만 했다.
“오늘도 치아르씨가 안내를 해주는 건가요?”
아침부터 식당의 한 테이블을 점거하고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기 보다는 오랜만에 기운이 오른 제이나노의 수다를 들어주고 있던 이드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자신들을 찾아온 치아르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표정은 상당히 퉁명스러워 보여 일부러 일행들의 시선을 피하는 듯도 했다.
이드들은 그런 그를 보며 상당히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대면하던 날 아침은 불만스런 표정이었고 자신들을 안내하던 오전은 더 없이 친절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광장에서 소매치기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는 숙소에 돌아올 때까지 멍한 모습으로 일행들만 따라 다녔었다.
헌데 오늘은 또 퉁명스런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제 저녁 집으로 들어간 치아르는 원수 같은 아빠와 엄마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그 멍한 모습에 자신이 라미아와 오엘에게 보기 좋게 차일 줄 짐작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이어 설명해 주는 이드와 라미아 일행들에 대한 내용은 어제 오전 자신이 했던 짓들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하고 땅을 치고 쪽팔려 하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아빠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질투해 마지않았던 이드는 한국의 명예 가디언으로 검과 정령을 다루는데, 특히 검에 대한 능력이 뛰어나 벌써 검기는 물론 검강까지 능숙하게 다룬다고 했다.
그런 이드의 실력은 열혈 노장 드윈 백작님과 대등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자신이 한눈에 반해 버린 라미아.
그녀는 누가 뭐랄 수 없는 이드의 연인.
어떻게 볼 때마다 붙어 있는 두 사람은 사소한 다툼도 없을 정도로 금술이 좋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이드에 뒤지지 않는 마법사라고.
가이디어스 같은 건 들어갈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엄청난 실력자라고 했다.
한 마디로 그때 소매치기가 다가오는 것만 알았다면 자신이나 이드가 나서지 않더라도 그를 한순간에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실력자라는 말이었다.
거기에 또 다른 한 명의 여성인 오엘.
그녀는 원래 검기를 사용할 줄 아는 용병이었다고 했다.
검기.
솔직히 검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긴 했지만 검기를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몰랐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드와 인연이 닿았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이 사숙과 사질의 관계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드는 연장자의 일이라며 오엘을 데리고 다니며 수련시키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그녀의 검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만 가고 있다고.
처음 보기에 도도하고 자존심이 세 보였는데 확실히 그럴만한 실력을 가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제이나노.
고개를 숙인 채 아빠의 말을 듣던 치아르는 고개를 뻘쭘이 들었다.
자신이 신경도 쓰지 않은 그도 뭔가 제주가 있단 말인가?
그랬다. 그는 리포제투스라고 알려진 새로운 신의 대사제의 신분으로 나이에 맞지 않은 맑고 큰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십여 년 정도 뒤 리포제투스교라는 것이 생긴다면 자신 같은 사람은 얼굴 한번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그 네 명 중 자신이 만만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우선적인 목표로 잡고 있는 아버진가 자신과 비교되지 않는 실력들이라는데…. 두 말 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그날은 그 네 명의 정체에 대한 충격에 어떻게 잠든지 조차 모르게 잠들었었다.
헌데 아침 일찍 그를 깨운 빈은 오늘 하루, 다시 안내를 맞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처음엔 당연히 거절 의사를 표했다.
헌데 이 치사한 아빠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위로금 조로 준비된 돈과 용돈을 가지고 협박을 해온 것이다.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부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싫은 걸음을 옮겨 이드들의 방을 찾았건만 모두 비어 있는 덕분에 이 십 분 가량을 그들을 찾기 위해 헤매어야 했으니….
‘물론 해주기 싫어.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정말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네, 아빠가 오늘 또 바쁜 일이 있으신 가봐요. 무슨 일인지… 록슨에 다녀오시고부터는 아빠는 물론이고, 다른 가디언 팀의 팀장들도 상당히 바쁘게 움직이시더라고요.”
그 말에 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바쁘다면 아마 제로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빈이 자리를 비우는 덕분에 주인 없는 집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이드들이었다.
“그럼 어제에 이어 어디 가보고 싶은 곳은 있으세요?”
치아르의 말에 네 사람은 잠시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제 미국으로 떠날지도 모른다던 빈을 저녁때 볼 수 있었기에 오늘은 그가 안내해 주는 가 하고 생각 없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아니요. 밖은 별로 더 이상 볼만한 게 없을 것 같고… 오늘은 여기 가디언 중앙지부 건물을 돌아봤으면 하는데요. 십 층 짜리 건물이라. 내부에 여러 가지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잠시 의견을 나눈 결과를 말하는 이드의 말에 치아르는 속으로 볼만한 게 없으면 잠이나 자. 라고 외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럼 어디부터 가고 싶은지… 여기서 골라 보세요.”
치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제이나노 옆에 앉아 메뉴판의 제일 뒷장을 넘겨 보였다.
그곳엔 간단하지만 각층에 대한 쓰임새와 설명이 나와 있었다. 그의 말에 따라 그 종이를 눈에 담은 네 사람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열 개의 층 중 한 층, 칠 층에 자리 잡은 수련실(修練室)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치아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건물에서 거기 말고 들러서 구경해 볼 것이 그 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뒤따르는 이드들을 데리고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치아르는 칠 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을 향해 흉악하게 웃어 보이는 가디언의 다른 형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맞아 내가 올라가면 형들에게 엄청 당할 텐데… 그건 안 돼!’
순식간에 처리되는 정보에 반응을 보인 치아르의 몸은 닫히기 직전의 엘리베이터 문을 겨우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이런 치아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일행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치아르는 다시 열리는 문을 보며 멋적은 웃음과 함께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하하… 생각해 보니까. 저는 칠 층엔 출입금지 명령이 걸려 있어서요. 그냥 여러분들끼리 다녀오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수련실이니까요. 그럼… 흡????”
자신이 할 말을 다하고 재빨리 돌아서던 치아르는 순간 자신의 앞에 딱딱한 벽이 생겨나 있음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곧 그것이 한 사람의 가슴임을 인식하고는 급히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여 사과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 눈을 팔다가 그만….”
“뭐,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그런데 출입금지라. 하하하…. 걱정 마라. 치아르, 이미 그 명령이 풀린 지 오래니까 말이야. 그리고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손님을 혼자 보내서야 쓰나. 그럼 올라가 볼까?”
“응…. !!!!”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치아르는 내심 울려 퍼지는 비명을 삼켜 누르며 식은땀을 주르르 쏟아냈다. 눈앞에 있는 이 덩치야말로 자신이 피하고자 했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아닌가. 치아르는 자신을 바라보며 반갑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그 엉성해 보이는 웃음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죽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그 특유의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열렸다. 그와 함께 이드들의 눈에 제일 처음 들어온 것은 타원형의 작은 휴게실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휴게실의 정면, 그곳에 유리로 된 문이 두 개 배치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문에 매직과 스워드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훈련장을 두 개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휴게실에 도착한 덩치는 은근히 치아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이드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록슨에서 활약하신 손님분들이시군. 빈 대장을 따라 왔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 반갑다. 난 여기 중앙에 소속된 나이트 가디언 부룩이다. 말 놔도 되지?”
전혀 거칠 것 없는 그 성격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전 이드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긴 저의 동료들인 라미아, 오엘, 그리고 제이나노예요. 각각 마법사, 검사, 사제죠. 저는 검사구요.”
“음… 이미 들었지. 근데 뭘 그렇게 말을 높이냐? 너도 그냥 편하게 말 놔! 뒤에 있는 사제님과 두 아가씨도! 자, 그럼 구경하러 왔으면 구경해야겠지? 들어가자.”
그 말과 함께 부룩이 몸을 돌려 스워드라고 적힌 유리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사색이 돼가던 치아르는 최후의 발악을 해 보았다.
“저, 저기…. 혀, 형. 나, 난 그만 내려가 볼까 하는데…..”
“무슨 말을…. 널 기다리는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데.”
“으윽….”
덜컹.
꽤나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유리문이었다. 부룩을 따라서 들어선 내부는 건물의 절반을 나누어 수련실로 쓰는 만큼 그 크기가 넉넉하고 꽤나 컸다. 하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디언들을 보면 그리 큰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이 곳 가디언들의 수련실은 말이 수련실이지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방 같았다.
바닥에 그 흔한 매트리스도 깔려 있지 않았다. 다만 천정에 설치된 전등만이 제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일행들의 눈을 끈 것은 수련실의 사방 벽과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빽빽한 룬어들과 마법진들이었다.
그 모습을 봤는지 앞서 가던 부룩이 혼자 떠들 듯 중얼거렸다.
“방어용 마법진이야. 가디언들의 수련실인 만큼 공간이 작더라도 그게 필수지. 그렇지 않으면 작은 기술 하나에도 부서져 내리거든. 덕분에 일부러 방을 두 개로 나눴지. 저쪽 방엔 마법적 공격에 대한 마법진, 이쪽 방엔 물리적 공격에 대한 마법진. 두 개를 같이 쓰면 반발력이 생긴다던가? 이봐들! 여기 누가 왔나 한번 봐! 우리 귀염둥이가 손님들을 모셔왔거든?”
순간 착각이었을까. 이드들은 순간이지만 고개를 돌리는 가디언들의 시선이 치아르에게 다가오면서 번쩍 빛을 발한다고 느낀 것은.
“호오~ 이게 누구야. 귀.염.둥.이. 치아르가 아닌가.”
“…. 잘 왔다.”
“왜 그 동안 그렇게 뜸했냐? 너 같은 귀염둥이가 없으면 이 삭막한 곳이 더 삭막해지는데 말이야.”
모두 부룩에게 다가오며 한 마디씩 했다. 헌데… 저 말이 죽여버리겠다는 욕설로 들린 것도 착각인가? 그때 다가오던 가디언 중 한 명이 부룩 뒤에 가려 있는 이드들을 발견했는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런데 뒤에 분들은 누구시냐?”
그 말에 부룩은 옆으로 슬쩍 비켜나며 일행들을 소개했는데, 그 소개 말이 상당히 특이했다.
“아주 고마운 손님들이지. 다름 아닌 록슨에서 활약하고 치아르를 몰.고.와. 주신 아주 고마운 손님들이시지.”
“오~ 그런 고마울 때가. 치아르를 데리고…. 아니, 아니…. 록슨에서 저희 동료들에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 무슨 존대 말이냐? 그냥 편하게 말해.”
한 사람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감사의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수련실에 있는 가디언들은 라미아의 미모에도 반응하지 않고 치아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꺼낸 말에 다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여전히 부룩의 팔에 어깨가 걸려 있는 치아르는 사색이 되었다.
“자, 그럼 손님들도 왔겠다. 이곳에서 어떻게 수.련.하는지 구경을 시켜드려야겠지? 오랜만에 상대 좀 해줘야겠다. 치.아.르.!!”
“으……”
“자, 저 녀석이 부르잖냐. 어서 나가봐. 임마.”
부룩은 사색이 된 치아르를 수련실의 중앙으로 냅다 떠밀어 버린 후 이드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처음부터 궁금한 것을 참고 있던 제이나노가 이제 눈에 뛰게 벌벌 떨고 있는 치아르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 치아르가 무슨 잘못을 한 모양이죠? 여기 사람들의 원념이 담긴 프레스가 대단한데요.”
그 말에 부룩은 씨익 웃으며 한 쪽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들도 그를 따라 자리에 앉자 그의 입이 열렸다.
“크큭… 당연하지. 저 놈 때문에 피해를 본 게 얼만데….”
그의 말에 더욱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 이드들이었다.
“저 녀석이 빈 대장의 아들이란 건 알고 있지?”
끄덕끄덕.
“몇 년 전이던가? 저 녀석이 여기 놀러와서는 자신과 겨루자는 거야. 그때 저 녀석은 가이디어스에서 마검사를 전공하던 모양인데. 우리가 보기엔 말 그대로 어린애 장난 정도인 실력이지. 그래서 대충 귀여워 해줬더니, 녀석이 손도 휘둘러보지 못한 게 분했던 모양이야. 그대로 빈 대장에게 쫓아가서는 울며불며 우리들이 제 놈들을 괴롭혔다고 말해 버린 거지. 당연히 화가 난 대장이 와서 한바탕 한 덕분에 우리가 그때 꽤나 고생했지.”
부룩은 자신이 말하며 그때가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몇 년이나 지난 일 아닙니까? 그걸 가지고 저러진 않을 것 같은데….”
“하하하… 당연하지. 우리가 무슨 밴댕이 소갈딱지라고 몇 년 전의 일로 이러겠어? 문제는 이 주일 정도 전의 일인데. 저놈이 여기 그려진 마법진을 연구한답시고 들어와서는 제 맘대로 손을 댄 거야. 우린 마법에 대해 모르니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 녀석이 가고 나서 한 명이 검기를 사용하는 순간 녀석이 만지던 마법진을 중심으로 빛이 나더니 한 쪽 벽이 날아가 버리더구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그런데 문제는 그 벽이 날아가 버린 일을 우리가 뒤집어쓰게 됐다는 거지.”
마법진을 다시 그리고 벽을 만들어 세운 비용이 우리 돈에서 나갔으니…. 또 그게 한두 푼이겠냐? 대장들한테 설교는 설교대로 듣고 돈은 도대로 깨지고…. 이만하면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일행들은 부룩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그런 일을 당했다면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 사이 치아르는 한 가디언이 휘두르는 철심이 박힌 목검을 피해 두 발에 땀띠 나도록 도망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황도 오래가진 못했다. 서서히 체력이 떨어진 치아르가 한 대, 두 대 맞기 시작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바닥을 구르는 것이었다.
덕분에 제이나노가 나서서 치아르의 상처를 치료해 줬지만, 그것은 치아르에겐 오히려 독이었다. 상처가 사라지자 아까와 같은 상황이 다른 가디언에 의해 다시 펼쳐진 것이었다.
그렇게 치료되고 두드려 맞고를 몇 차례 하고 나자 치아르는 제이나노에게 치료를 받았음에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뻗어 버렸다. 그때쯤 가디언들도 분이 풀렸는지 손을 쓰던 것을 멈추었다. 그러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부룩은 바닥에 쓰러진 치아르를 달랑 들어 구석에 있는 유일한 매트리스 위에 던져두고 이드를 향해 호기 있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가디언의 수련실까지 왔으니, 실력 발휘를 해 봐야겠지?”
이드도 그의 호탕한 기세가 맘에 들었는지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실 중앙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나서자 다른 가디언들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 역시 열혈노장 드윈 이상이라는 이드의 실력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부룩은 수련실의 한쪽에 세워져 있는 목검 두 자루를 가져와 이드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그 실력 한번 보자고.”
부룩은 그 말과 함께 이드와 거리를 벌리더니 목검을 거꾸로 꼬나 잡고서 뒤로 돌리고 나머지 빈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이드가 그 특이한 자세에 고개를 갸웃거려 보이는데, 부룩의 설명이 들려왔다.
“나는 주로 주먹과 발을 쓰지. 검이나 도 같은 건 보조적으로 휘두를 뿐이야.”
그 말과 함께 앞으로 내민 그의 손에 짙은 푸른색의 기운이 옅게 일어났다. 이드는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검을 멀찍이 던져 버리고, 양 주먹을 말아 쥐어 한 손을 뒤로 당기고 다른 한 손을 구부려 어깨에 붙이는 묘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지금 뭐하는 거지? 넌 검을 쓴다고 들었는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함부로 믿을 게 못 되죠.”
우우웅….
순간 빛을 흡수할 듯한 칠 흙의 권기가 이드의 주먹에서 팔꿈치까지 맺혀 흘렀다. 그 모습에 부룩도 마주 웃으며 손에 반대쪽 손에 든 목검을 내 던져 버렸다.
“확실히 그렇군. 그나저나…. 상당히 오랜만이야. 권으로만 상대하는 건. 간다. 쿠아압!!”
말이 끝나는 순간 순식간에 이드와의 거리를 좁혀 푸르게 물든 손을 내 뻗었다. 그가 좁혀온 거리라면 충분히 이드의 몸에 격중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드의 몸은 어느새 저 뒤로 빠져나가 있었다.
하지만 부룩도 권기를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 뻗어내던 주먹에 재차 힘이 가해지는 순간 보이지 않는 무형의 압력이 생기며 이드를 향해 날아갔다.
이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형의 기운을 느끼며 구부려 두었다. 팔을 휘둘렀다. 순간 손등 쪽으로 강한 압력이 느껴지며 무형의 기운이 폭발했다. 이드는 그 순간의 반탄력으로 아까보다 더욱 빠르게 부룩에게로 덥쳐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순간 이드의 주먹이 뻗어나갔다.
“철황십사격(鐵荒十四擊)!!”
순간 부룩의 면전을 열네 개의 거대한 주먹이 가득 메웠다. 그 모습에 이드와 같은 초절한 신법을 가지지 못한 그는 자신의 주먹을 마주 쳐올려 열네 개의 주먹에 맞서 갔다. 이어 마지막 주먹 그림자를 쳐올리는 것과 동시에 뻗어나가는 부룩의 다리.
그렇게 박력 있는 두 사람의 비무는 잠시 후 물러나는 부룩을 향해 날아간 철황유성탄(鐵荒流星彈)의 일초에 부룩이 쓰러지면서 끝나 버렸다. 실전이 아닌 만큼 위력이 현저히 줄어든 그 한 초식에 부룩이 일어나지 못할 리는 없지만 찰나에 거리를 좁혀 달려온 이드의 주먹이 그의 머리 바로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 대단한 실력이야. 검법에 권법까지. 이거 정말 열혈노장 드윈 영감보다 세겠는데.”
부룩이 그렇게 말하고 뒤로 빠지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다른 가디언들이 대련을 신청해 왔다. 하지만 이드는 손을 흔들어 그들을 진정시키고 한 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엘을 불러 부룩에게 대련해 줄 것을 부탁했고, 부룩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다시 검과 권의 충돌이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검기와 권기를 사용하는 만큼 막상막하의 시합을 보였지만 잠시 후 아직 검법의 모든 초식을 발휘하지 못하는 오엘이 반 초 차이로 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드에게 대련을 신청하려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모여 들었다.
그들도 이제서야 라미아와 오엘의 미모가 눈에 들어왔고, 이왕 할 거 예쁜 아가씨와 하겠다는 생각들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날 오엘은 정말 땀 나는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녀에게 실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드가 계속해서 대련을 주선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쪽에 쓰러져 기진맥진한 채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치아르는 어제와 오늘이 자신에게 있어 최악의 날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오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