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99화
마치 그레센 대륙에 존재하는 여관 중 하나를 떼어다 놓은 듯한 고풍스런 여관. 입구에는 굵은 글씨로 여관의 이름이 써 있었다.
‘만남이 있는 곳’
“특이한 이름이네.”
여관 이름을 읽은 이드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제이나노는 그게 뭐 어떠냐는 표정으로 여관의 정문을 열었다.
“저는 좋은데요. 게다가 저런 이름은 찻집이나 카페에서 상당히 선호하는 이름인 걸요. 그런 곳에선 이런저런 ‘만남’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이 여관도 마찬가지구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활기찬 여관을 고른 것 같네요.”
그 말과 동시에 제이나노가 열어놓은 문 안쪽으로부터 왁자지껄한 소리가 떠들썩하게 흘러나왔다. 열려진 문을 통해 보이는 여관의 내부는 실내등과 햇살로 환했는데 그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잠시 실내를 바라보던 오엘은 뭔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 저으며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나머진 모르겠지만 거의 절반이 용병들인 것 같은데… 오늘 하루를 조용히 쉬려면 다른 여관을 찾는 게 좋겠어요.”
바로 얼마 전까지 용병이었던 오엘답게 여관 안에서 떠들어대는 용병들을 알아보고는 자신의 의견을 내 놓았다. 같은 용병이었던 만큼 그들이 이렇게 모여 떠들어댄다면 그게 얼마나 시끄러운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지 잘 알기에 내 놓은 의견이었다. 더구나 술에 취해있을 것이 당연한 용병들이 자신이나 라미아에게 집적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 자신이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지만 잘못해서 라미아라도 건들 경우 그녀 뒤에 있는 저 엄청난 실력의 사숙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라미아와 같은 여성으로서야 그런 놈들이 얼마나 두들겨 맞던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용병이라고 그들이 다치는 일은 염려해서 내놓은 의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오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숙이라는 배분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모습으로-오엘에겐 그렇게 보였다.- 빼꼼이 여관 안을 들여다보던 이드는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으로 일행들을 여관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닌가.
“괜찮아, 괜찮아. 시끄러운 거야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겠지, 그래도 않되면 사일런스 마법을 걸면 되고. 오히려 저렇게 사람이 많으면, 벤네비스산이나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드의 말에 세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면서도 제이나노는 한마디하는 걸 빼놓지 않았다.
“네, 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제발 그 드래곤이란 말은 좀 자제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그 무시무시한 생물을 찾아가는 길이란 걸 알고 부터 순간순간 발길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구요.”
이드는 그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농담도 아니고 드래곤의 레어를 찾아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드래곤이란 생물에 대해 마음대로 씹어댈 사람은 없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그 말을 듣는 즉시 발길을 돌리는 것이 보통 사람의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데르치른의 늪지에 들어서기 직전 라미아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들은 제이나노와 오엘은 경악성과 함께 강렬한 반대의견을 내놓긴 했지만 이드들과 따로 떨어지거나 발길을 돌리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고집이 대단한데다, 이미 이드와 라미아를 따라 다니며, 만날 수 없다는 엘프를 만났다는 사실이 작용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과 같은 이런 반응이 당연한 것이다.
여관 안으로 들어선 일행들은 여관 입구 쪽에 마련된 카운터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저기 뒤엉켜 떠들어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을 것이다. 이드는 자신들이 들어선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주인을 부르기 위해 손바닥으로 카운터를 내려쳤다.
팡! 팡!! 팡!!!
생각지 않게 소리가 컸던가 보다. 확자지껄한 소리를 헤치고서도 잘도 퍼지는 소리에 여관 내부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드들에게 모여 들었다. 일행들에게 쏠리는 많은 눈길에 이드는 조금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방을 잡으려고 하는데요.”
“아…. 내가 주인이에요. 내가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미안해요. 그래 방을 잡을 거라구요?”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중앙의 자리에서 탐스러운 옥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제법 후덕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성이 일어나 카운터 앞으로 나왔다. 그녀가 나서자 다시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중 몇 명 젊은 남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일행들에 멈추어 있었다.
그들로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미녀인 라미아와 오엘에게서 쉽게 눈을 떨 수 없었던 것이다.
“자, 이건 라미아와 오엘의 방 열쇠. 어쩔까? 먼저 식사부터 할래? 시간을 보니…. 어차피 저녁시간도 가까워 오는데 말이야.”
이드는 주인 아주머니에게서 받아든 두 개의 열쇠 중 하나를 라미아에게 건네주면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별로 생각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뭐, 텔레포트 해 온 덕분에 피곤하거나 허기진 것도 없는 걸요. 그냥 나중에 느긋하게 식사하도록 하죠.”
“흐음… 그럼, 그럴까?”
오엘은 일행이 이 곳 식당에 있음으로 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의견을 내놓았다.
또 사실이 그렇기도 했기에 세 사람은 그녀의 의견에 따라 주인 아주머니가 알려준 방이 있는 삼층으로 향했다.
삼층으로 올라가며 살펴본 여관은 상당히 잘 꾸며져 있었다.
여관 외부와 식당을 하고 있는 일층의 모습만 본다면 그레센의 여느 여관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층부터는 꽤나 현대식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더구나 그 중심 뼈대는 나무인 덕분에 무조건 현대식인 것보다 느낌이 좋았다.
일행들의 방은 삼층의 복도 끝에 자리한 이웃한 방이었다.
“흐음…. 꽤나 좋은 여관은 잡은 것 같은데…”
이드는 방안을 둘러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중간 중간 보이는 나무 기둥과 갈색 톤의 벽.
그리고 나무로 짜여진 듯한 침상 두 개는 산 속 별장 같은 느낌으로 꾸며진 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시설을 가지고 있으니 일층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의 모습이 이해가 됐다.
그렇게 이드가 방안을 둘러보는 사이 제이나노는 자신의 짐을 한쪽에 챙겨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라도 할 모양이었다.
제이나노가 욕실로 들어가자 이드는 걸치듯 입고 있는 얇은 조끼 모양의 옷을 벗어 창문 바로 앞에 붙여놓은 작은 테이블 위에 던지듯 벗어둔 후 일라이져를 꺼내 들고 의자에 앉았다.
그 손엔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새하얀 백색의 천이 들려 있었다.
오랜만에 일라이져를 손질해 줄 생각인 이드였다.
물론 몇 십, 몇 백 년을 손질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할 검도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정성들여 검신을 손질하고 막 화려하다 못해 예술품과 같은 검집을 집어들었을 때였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라미아와 오엘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곧 방안을 한번 둘러보고는 이드에게로 다가왔다.
특히 오엘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일라이져를 보았는지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다가왔다.
“검 손질하고 계셨네요. 저기… 제가 검을 좀 봐도 되죠?”
“어….”
마치 먹음직한 먹이를 덥치는 기세로 말하는 오엘이었다.
이드가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하지만 허락을 구하는 말과는 달리 일라이져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이다.
오엘은 손바닥을 통해 착착 휘감기 듯 느껴지는 검의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터트렸다.
이드와 함께 다니며 가까이 서 자주 보긴 했지만, 지금처럼 직접 손에 들어보기는 그녀로서도 오늘이 처음인 것이었다.
검사가 좋은 검만큼 탐내는 것이 없듯이 오엘 역시 검사이기에 성검이란 칭호-비록 여신에겐 전정용이지만-를 받고 있는 일라이져가 전해 주는 감각이 너무도 좋았던 것이다.
같은 검사로서 그런 오엘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이드는 손에 들고 있던 검집과 천까지 오엘에게 넘겨 버렸다.
검 손질을 오엘에게 넘겨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엘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로 이드가 넘겨주는 것을 슬쩍 받아들여 조심스레 검집을 닦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해서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사라졌다.
이어 잠시 동안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며 욕실의 문이 슬쩍 열렸다.
가벼운 옷을 대충 걸치고 한 손엔 사제복을 들고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대충 닦으며 나오던 제이나노는 오엘과 라미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순간 움찔하더니 급히 뒤로 돌아 머리를 털어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그는 두 사람이 들어선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먼저 씻느라 두 분이 오신 걸 몰랐네요.”
멋적게 웃어 보이는 제이나노의 말이었다.
라미아는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다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린 이드의 팔을 들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엔 이드님이 씻으실 차례네요. 자자… 어서 들어가세요. 제가 뽀득뽀득 씻겨 드릴게요.”
유혹적이라기 보단 귀엽기만 한 라미아의 목소리였다.
또한 남이 들으면 민망할 만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이나노와 오엘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이드와 라미아를 연인 사이로 보고 있었고, 저런 모습을 몇 번 보았던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적응이 됐다고 할까.
그럼 이 두 사람보다 더 오랫동안 직접 당해온 이드는?
“다음에….”
그렇게 한마디를 하고는 라미아에게 잡힌 팔을 스륵 빼서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를 바라보고는 귀엽게 혀를 내밀어 보였다.
한 시간 여가 지난 후 이드들의 네 사람은 식사를 위해 식당을 하고 있는 일층으로 향했다.
이미 해는 완전히 떨어져 여관 복도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원래는 좀 더 일찍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이드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 덕분에 이렇게 늦어진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드를 깨우기 위해 떡 하니 욕실로 들어온 라미아와의 작은 소동도 있었고 말이다.
이드들이 식당에 내려왔을 때는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의 수가 들어 올 때의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
아마 시간이 되어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이 여관이나 주위 여관에 묶는 용병들만 남은 듯했다.
그렇고 보면 오엘이 정확하게 용병들을 알아 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떠들어대는 소음은 그대로인 듯했다.
특히 두 곳에선 술 취한 노랫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아직도 꽤나 요란한데….”
“그럼 방으로 요리를 올려달라고 할까요?”
이드의 말에 오엘이 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기에 용병들과 제일 많이 떨어진 제일 안쪽 자리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대신하는 일행들이었다.
“저녁들이 늦네요. 주문해요.”
일행들이 내려오는 모습에 카운터에 앉아 있다 뒤따라온 여관 주인이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제이나노와 오엘은 순간이나마 황당한 느낌이었다.
여관 주인이 너무 말짱해 보였던 것이다.
자신들이 알기에 이 여인은 그들이 여관에 들어설 때까지 저 용병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썩여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또한 그것을 증명해 주는 톡 쏘는 주향(酒香)이 그녀의 옷에 한가득 배어 나오고 있었다.
헌데 그녀는 얼굴 하나 붉히고 있지 않고 있다.
주위에 아무리 술이 세 보이는 용병들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데 말이다.
‘그럼 도대 이 아주머니 주량이 얼마나 된다는 소리야?’
주위 분위기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엉뚱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드와 라미아의 주문에 곧 궁금함을 덮어둔 채 자신들의 식사를 주문했다.
“근에 이 마을은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용병들이 많은 것 같네요.”
제이나노가 앞에 놓인 물 잔을 손에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설 땐 워낙 시끄러워 몰랐는데 이곳은 그들이 지나온 다른 여관들보다 머물고 있는 용병들의 수가 많았다.
“저 크고 유명한 벤네비스산 바로 아래 형성된 마을이니까 그렇겠죠.”
제이나노는 오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그게 정답이었다.
위험하고 몬스터가 많아서 드래곤의 레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되는 벤네비스산이 바로 앞에 있는 만큼 몬스터의 출현도 잦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도 자연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왜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는 걸까요?”
“그건 모르죠. 각자 사정이 있어서 일수도 있고, 떠나고 싶지 않아서 일수도 있죠.
그리고 지금 당장 모두 죽음에 직면한 것처럼 위험한 건 아니잖아요.
저도 용병일 하면서 이 마을과 비슷한 곳을 몇 군데 본 적이 있거든요.”
이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꽤 인생 경험이 희귀한 쪽으로 풍부한 자신이지만 지금과 같은 제이나노의 말에 대답할 뚜렷한 대답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오엘과 라미아 사이로 엄청난 크기의 술잔을 든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술잔을 테이블 위에 턱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이유는 무슨. 그냥 살고 싶어 사는 거지. 거 이쁜 아가씨 말대로 당장 죽인다고 달려든 몬스터가 코앞에서 으르렁거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근데 거 예쁜 아가씨도 용병이요?”
꽤나 거침없는 말투에 칼칼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일행들의 눈에 술에 취한 듯 눈까지 붉은 빛이 감도는 이십대 중반의 남자가 벙긋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술 취한 듯한 모습과는 달리 눈동자는 또렷이 빛나고 있어 지금 이 남자가 술 주정을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런 남자의 등장에 일행들이 잠시 당황하는 사이 오엘이 그의 말을 받았다.
“바로 얼마 전 까지는요. 지금은 잠시 쉬고 있긴 하지만 말이죠. 헌데 무슨 일이죠?”
오엘은 남자를 향해 딱딱 끊어 말했다.
이 남자의 눈동자가 바르긴 하지만 술을 마신 건 사실이니 괜히 추근대지 않게 확실히 해 두려는 생각으로 그녀가 용병일을 하고 있을 때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남자도 그런 오엘의 생각을 알았는지 씨익 웃으며 한 손을 내 저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참… 초면에 데게 딱딱하네… 오랜만에 이곳엔 온 사람들이라 이야기나 좀 할까 해서 그런 건데 말이요. 보면 알겠지만, 같이 마시던 놈들이 죄다 뻗어 버렸거든.”
슬쩍 한쪽을 가리키는 남자의 한 손을 따라 일행들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 곳엔 두 개의 테이블을 붙이고 앉아 있는 여섯 명의 헤롱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양새가 제각각이었으며 또한 그 테이블 위에 쌓인 엄청난 수의 병들과 잔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남자에게 돌아온 일행들의 시선이 담고 있는 뜻은 한 가지였다.
“실례지만…. 주량이 얼맙니까?”
“하하…. 사제님이시군요. 그 사제복이면…. 보자… 리포제… 투스? 그래, 리포제투스님을 섬기시는 분이군요.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한번 뵌 적이 있지요. 이거 반갑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 주량은 저도 모릅니다.
돈이 없다 보니, 완전히 취할 때까지 술을 사 마실 수가 있어야죠.”
그 말을 시작으로 서로 간의 분위기가 편하게 풀려갔다.
그는 제이나노와 오엘 사이에 앉았다.
눈치로 보아 자신이 처음 얼굴을 들이민 라미아와 오엘 사이에 앉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처음 말을 건 제이나노가 바로 자신 옆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루칼트라고 소개한 그는 용병으로 길드의 소개로 두 달 전부터 이 마을 너비스에서 용병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의 용병들은 이곳에서 공짜로 지급되는 거주지에서 식사를 해결하며 몬스터가 습격해 올 때만 싸우고 그때그때 돈을 받는 방법으로 일한다고 했다.
“꽤나 돈벌이 되는 곳이죠. 근데 거 이쁜 아가씨는 어디서 용병 일을 하셨…. 아우!! 누구야!!”
팡!
철판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루칼트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작은 비명성을 질렀다.
“나다 임마! 손님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가.”
루칼트 뒤로는 이드들이 주문한 요리들을 두 개의 커다란 쟁반에 나둬 들고 있는 주인 아줌마가 서 있었다.
루칼트의 머리를 때린 것도 아마 저 커다란 쟁반일 것이다.
루칼트는 그녀를 확인하고 맞은 자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리듯 빈정댔다.
“우씨, 누가 귀찮게 했다고 사람을 쳐요? 치길. 그러니 그 나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가지.”
“뭐야!! 이 녀석이 정말…..”
“히익…..”
루칼트의 말에 그녀의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갔고, 순간 말을 잘 못 했다는 판단에 루칼트는 의자에 앉은 채 엉덩이를 뒤로 빼고 언제든 도망칠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관의 주인이었다.
차마 손님들이 주문한 요리를 집어던지지 못하고 다음에 보자는 듯 노려만 볼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재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드는 자신이 시킨 요리를 받아 들며 쥐와 고양이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에 대해 슬쩍 물었다.
“근데…. 듣기로는 벤네비스산에 무슨 드래곤의 레어가 있다던데… 사실이 예요?”
이드의 말에 루칼트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며 답했다.
“아아… 그거? 나도 용병일 하면서 듣긴 했는게 믿지마. 믿을 만한 이야기가 못 돼니까.”
“그래, 믿지 말아요. 이곳에 몬스터가 많고 산 가까이만 가면 몬스터가 공격해 대니까 그런 소문이 난 모양인데.
택도 없는 소리죠. 드래곤이 직접 나온 것도 아니고… 몬스터 같은 게 많이 나왔다고 드래곤이라니… 말도 안 되지.”
주인 아주머니도 한 소리 거들고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쪽 이야기가 흥미가 있는지 쟁반을 옆 테이블에 놓고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이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어 몇 번 오간 이야기로 두 사람이 벤네비스에 드래곤이 있다는 걸 절대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어진 주인 아주머니의 충고가 뒤따랐다.
드래곤에 대한 엉뚱한 호기심으로 벤네비스산 가까이 가지 말라는.
그녀가 이곳에 살며 드래곤이란 말에 혹해 벤네비스에 다가갔던 모험가들 중 목숨이나마 건져 돌아온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이야기에 오엘과 제이나노는 이드를 슬쩍 바라보았다.
드래곤을 찾는 것에 반대하고 나서던 두 사람이었던 만큼, 이드가 여기서 발길을 돌렸으면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정작 이드와 라미아는 그들과 또 달랐다.
루칼트와 주인 아주머니가 없다고 주장하곤 있지만 직접 벤네비스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우기 드래곤이 자신이 어디 있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 아닌 이상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봉인이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때 함부로 날뛰고 다니는 바보 드래곤은 더더욱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게 주인 아주머니의 충고를 들으며 요리의 반을 비웠을 때였다.
쿠당탕!! 쿠웅!!
뭔가 커다란 것이 뒤집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자연 일행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거기엔 루칼트의 동료라던 사람 둘이 앉은 의자째 뒤로 벌렁 뒤집어져 있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술에 얼마나 취했는지 그렇게 뒤집혔음에도 그들은 신음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쯧쯧… 하여간 저 놈들은 술만 먹었다 하면… 뭐해? 빨리 가서 정리해야지.”
“젠장. 술 센 게 무슨 죄라고 뒤처리를 항상 내가 해야 하는 거야? 쩝, 그럼 거 이쁜 두 아가씨는 내일 또 봅시다.”
주인 아주머니의 재촉에 루칼트는 자신이 마시던 술잔을 그대로 둔 채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시작으로 한 번에 두 명을 안아 들고 여관방으로 향했다.
그런 루칼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라미아가 다시 한 번 기가 막힌다는 모습으로 주인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
“근데 저 사람들 저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 건가요? 이럴 때 갑자기 몬스터라도 습격해 오면 어쩌려고…”
“호호… 괜찮아. 솔직히 이런 상황이 한 두 번 있긴 했지만, 모두 별일 없이 넘어 갔거든.
너비스에 있는 용병들이 저 녀석들뿐인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상황이 정 급하다 싶으면 마법이나 신성력을 사용해서 술을 깨우는 방법도 있고…. 해서 별탈은 없지.”
어느새 오간 대화로 편하게 대답하는 주인 아주머니였다.
“그리고 내 말 명심해. 함부로 벤네비스에 오르면 안돼. 네 명이서 다니는 걸 보면 보통 실력을 아닌 것 같긴 한데, 벤네비스에 오른 사람들 중엔 너희들 정도의 실력자도 꽤나 있었거든.
그리고 그래도 가겠다면 좀 머물렀다가 가.”
“그건… 왜요?”
“조만간 몬스터들이 습격할 것 같거든. 그러니까 그때 습격해 오는 몬스터들과 싸워보고 가란 말이지.
그곳엔 그런 몬스터들이 수두룩할 테니 미리 겪어보란 거야. 그러고도 가고 싶어지나.”
그녀의 말에 이드가 묘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주머닌 몬스터가 습격하는 걸 어떻게 아세요?”
“호호호… 경험으로 인해 생긴 단순한 예감이야. 그런 데로 높은 확률을 보이고 있지. 그럼 편히 들 쉬어.”
마치 미스테리 물의 한 장면을 흉내내는 듯한 어설퍼 보이는 모습을 보인 주인 아주머니는 비어있는 식기들을 챙겨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일행들은 각자 피로를 푼다는 이유를 달고서 최대한 늦장을 부렸다.
하지만 실제로 침대에서 뒹구는 것은 제이나노뿐이었다.
도대체 사제이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의외이다.
나머지 피곤과 거리가 먼 세 사람은 평소대로 아침을 맞았다.
오엘은 운기조식 후 여관 뒤에 마련된 작은 공터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 주위로는 몇 명의 용병들이 어제의 술기운을 쫓기 위해서인지 같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신한검령에 따른 검술을 펼치는 오엘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검술이 저렇게 정확하고 강렬하지 않았다면 몇몇 슬쩍 접근해 보려는 인물이 적잖이 있었을 것이다.
라미아는 언제나 그렇듯 이드 옆에 붙어 있었다.
이미 오엘과 아침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서 찻잔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과는 달리 식당에 나와 있는 시선들 중 꽤나 많은 수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모여 있었다.
술이 깬 덕에 라미아의 미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여관의 용병들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라미아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드를 향해 방실거리는 모습으로 이미 임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저쪽에서 눈을 부라리는 주인 아주머니의 눈총 때문에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용병들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테이블 앞의 의자 중 하나를 빼내 거꾸로 앉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침부터 너무 분위기가 좋은걸? 여기 있는 외로운 늑대들이 서러워 할 만큼 말이야. 잘들 쉬었나?”
“아, 잘 주무셨어요? 루칼트씨.”
“….술도 세지만 숙취도 없는 것 같네요.”
이드는 술에 정말 강해 보이는 루칼트를 보며 보고 있던 날짜 지난 신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신문은 자연스레 방금 전까지 이드와 라미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보고 있던 면을 햇살 아래 환히 드러내고 있었다.
‘….. 의문의 단체 제로(무(無):없다.)의 활동이 세계적으로 활발하다.
스스로를 제로라 하며 영국의 록슨시에 처음 모습을 내보인 이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특수 능력자들이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근거지와 인원, 조직체계는 물론 조직원들에 대한 신원확인까지 전혀 알 수 없는 말 그대로 의문의 단체다.
그들은 스스로 국가를 부정하며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표명하고 있다. 국가란 틀이 사람을 하나의 틀에 묶고 있으며, 국경을 만들어 서로를 경계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며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런 그들의 전투력은 실로 대단해서 실제 미국 미시시피의 잭슨과 위스콘신의 라크로스, 중국의 나취, 카이쩌, 라사, 스웨덴의 팔룬과 순토스발 등 몇몇 도시는 그들에게 넘어간 상태다.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가디언과 용병들뿐이며 또한 그들의 행동반경이 워낙 넓어 대응하기가 어려워 그 피해는 점점 커져만 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에 의해 점령된 도시들이다. 제로는 도시를 점령할 때도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점령한 후에도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여전히 자유로웠으며, 언제든 도시를 떠나고 들어올 수 있다. 오히려 도시에 남겨진 제로의 능력자로 인해 도시의 치안이 더욱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선 제로의 이러한 행동이 시민들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유를 떠나 시민들에게 피해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영역에 있을 때보다 한 가지라도 생활 환경이 나아졌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 쉽게 도시 재탈환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재탈환 시 시민들에게 피해가 갈 경우 그 원성이 그대로 국가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대체 이들 제로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며……’
다름아닌 제로에 대한 기사였다. 록슨의 일을 시작으로 이드들이 이곳 너비스에 오는 동안 제로라는 이름이 전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에게 점령된 도시들의 이야기도 큰 이야기 거리였다.
신문을 잠시 들여다보던 루칼트는 쩝 입맛을 다시며 제로에 대한 것을 다룬 부분을 툭툭 치며 입맛을 다셨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뭐하는 놈들이지? 하는 짓을 봐서는 딱 ‘정의의 사도’구만.
이 놈들이 그렇게 센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보통 이상으로 강하긴 해요.”
“응?”
답을 바라지 않은 중얼거림에 이드가 대답을 하자 루칼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드가 자신의 말에 상당히 재밌는 표정을 짓고 있는 루칼트의 모습에 마주 웃어 보이며 향긋한 차를 입안에 머금었다.
주인 아줌마의 실력인지 이곳의 차는 꽤나 맛이 좋았다.
“여기 너비스로 오기 전에 록슨에 들른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봤죠. 뭐,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본 건 아니지만….
그만한 몬스터를 수족처럼 움직였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실력 증명은 한 셈이니까요.”
이드의 말을 들은 루칼트는 다시 시선을 돌려 기사와 함께 실린 제로에 점령된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혀 바뀐 것 없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
루칼트는 그 사진을 보며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그도 싸움을 찾아다니는 용병인 만큼 이들과 부딪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배로부터 꾸르륵거리는 다음 행동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