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0화
537화
화원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은기사는 본래 소드 팰러스의 사람이다. 화원을 지키고 있는 업무 특성상 소드 팰러스의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많지는 않지만, 실력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은 다 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오로지 기본기만으로 자신과 검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중에 이드와 같은 얼굴은 없었다. 또한 그런 실력을 지닌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다는 소식 같은 것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소드 팰러스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 점이 가장 의심스러우면서도 은기사에게 확신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도대체 저만한 실력을 지닌 자가 신분을 감추고 화원에 들어올 일이 뭐란 말인가?
그리고 검후님이 실종되신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지?
은기사는 그 모든 의문과 의혹을 뭉쳐 부딪쳤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체와 목적을 밝혀라.”
단단한 목소리에 이드는 그가 정말 마지막으로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드도 떳떳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처지였다. 비록 상대가 긴급대책위에서 준비한 인물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아직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라미아, 갑옷은 좀 살펴봤어?’
이드가 라미아를 불렀다. 그녀는 이드의 공격이 실패한 순간부터 눈을 반짝이며 은기사의 갑옷을 살피고 있었다.
[완벽한 마법 갑옷이에요. 이전에도 마법 갑옷은 있었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물건이에요. 특히 공격 수법에 따른 방어 마법이 떡칠이 되어 있는데, 언뜻 보기에도 30개가 넘어요. 아무리 풀플레이트 메일이라지만 정말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마법진을 새겨 놓은 것 같아요.] 라미아의 목소리에 감탄성이 흘렀다.
[어중간한 기사들의 공격은 방어할 필요도 없겠어요.]
‘과연 혼자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만큼 믿는 구석이 있단 말이지.’
솔직히 장공이 그렇게 쉽게 뒤로 미끄러져 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특별한 기공에서 파생된 절초는 아니지만, 그 기본이 되는 경력의 운용
자체가 가볍지 않은 수법인데 말이다.
특유의 화경(經)을 장기로 삼는 무당파의 사람들에게는 악마의 물건과 같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피땀 흘려 수련한 후에야 다룰 수 있는 경지가 단순히 갑옷 한 장으로 해결된다니 말이다.
하지만 무당파의 무학이 높다 하지만 무적이 아니듯, 저 마법 갑옷 역시 무적은 아닐 것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기사들이 파츠 아머를 걸치고 있지 않았겠지. 라미아, 해결 방법은?”
[이드 말대로 무적은 아니에요. 마법 갑옷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으면 부서질 테니까요. 강기로 부숴 버리세요.]
마법 갑옷이 대세가 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제작에 들어가는 정성과 돈에 비해서 실력자들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이드는 순식간에 라미아와 마음을 주고받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은기사에게 물었다.
“그쪽부터 정체를 밝혀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은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로 편한 입장에서 정체를 듣도록 하자. 하아아아아!”
고개를 끄덕인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과 함께 날카로운 은기사의 기합성이 울렸다.
화르르륵.
이어서 검결을 따라 흐르는 은기사의 검에 강기가 타오르듯 생겨났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짧은 기합성을 타고 검 끝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이드를 조여들었다. 그것은 극도의 쾌검으로, 그 하나하나가 허상이 아니라 실체였다. 좀 전과는 다른 살기가 흐르는 검초였다.
하지만 이드에게는 그 검초를 쉽게 제압하고 공격까지 가능한 초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게 되면 그냥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드는 은백의 검강을 뽑아 올리며 수라삼검의 검초를 낱낱이 해체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비록 형태를 버렸으나 그 뜻은 담겨 있고, 원래부터 수라삼검은 검초보다 기세를 중시하는 무공이었다.
오히려 근본을 드러낸 수라삼검은 철창 밖으로 풀려난 맹수처럼 잔인하고 포악하게 은기사를 조여 가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야수의 발톱처럼 뿜어진 검초가 은기사의 검초를 헤치고 갑옷을 긁으며 머리가 삐죽 서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은기사는 상대의 공격을 무시하고 연이어 초식을 쏟아냈다.
마법 갑옷을 믿고 있기 때문인지 방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중원으로 친다면 한 초식, 한 초식이 동귀어진의 수법과 같았다. ‘이런 수법은 또 처음이군.’
상대가 입고 있는 마법 갑옷의 강도를 살피고 있던 이드는 두 개의 초식에 연이어 발걸음을 물리고 말았다. 하지만 딱 두 초식까지였다.
그 두 개의 초식이 오가는 동안 이드는 검초 하나하나에 스무 단계로 힘을 나누어 마법 갑옷을 두드렸고, 갑옷 속에 든 기사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마법 갑옷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의 정도를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한 이드의 공격이 바로 이어졌다. 이드는 해체된 수라삼검에서 순식간에 하나의 초식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수라삼검을 바닥 끝까지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의 섬광인(閃光刃)!”
은백 검강의 끝에서 빛이 어른거린다 싶은 다음 순간, 빛은 어느새 은기사의 갑옷을 베고 지나가고 있었다.
쩌저적-
그리고 그 후에야 마법 갑옷에 손톱만 한 흔적 수십 개가 생겨났다.
“심의 단혼(斷魂), 마령(魔嶺). 수라(修羅).”
뒤이어 이드가 순간에 조립한 초식들이 연이어지며 마법 갑옷에 빼곡히 칼자국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은기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몇 번의 공격을 이어 갔지만 이드에게 적중시킨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중간에 막히고 절묘하게 피해 버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녀는 이드가 자신의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 혼자로는 힘들다.’
그녀가 장식처럼 위장하고 이 자리를 지킨 것은 화원을 수호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검후의 실종과 연관된 자가 다시 이곳을 찾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이 순간.
후자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신 혼자만 남은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녀는 눈앞의 애송이가 검후의 실종과 관계가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놓치고 만다. 실력 차이는 확연하다.’
그렇다고 겨우 잡은 검후님에 대한 단서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지금 은기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은기사는 줄곧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동어를 외웠다.
“라스트 버진!”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탈처녀 선언에 반사적으로 소리치던 이드는 이어지는 이펙트에 작게 감탄했다.
휘이잉-
은기사의 갑옷이 청백으로 빛나고, 홀의 벽과 바닥에 선명한 마법진이 나타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드는 자신을 제약하는 마나의 흐름을 몸으로 느껴야 했다. 이드는 이 흐름이 혹시 화원 밖으로까지 이어질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라미아!”
[문제없어요. 벌써 궁전을 외부와 단절시켜 뒀어요. 밖으로는 어떤 신호도 나가지 못해요. 그리고 방금 그 웃기는 시동어로 홀에 마법 장벽이 생기고 이드에게는 제약이, 저 기사에게는 보조 마법이 작용하기 시작했어요. 해제 방법은 앞서와 똑같아요. 갑옷만 제거하면 홀과 연계된 마법은 자동적으로 풀려요. 아니면 제가 할까요?]
라미아의 은근한 물음에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라미아의 실력이라면 마법을 해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똑같이 자신이 해도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다.
이드는 내공을 운용하며 제약을 떨쳐 내고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은기사와 다시 부딪혔다.
은기사는 보조 마법으로 강화되어 이드의 공격을 갑옷으로 막아 내고 공격해 들어왔다. 이드는 다시 검초를 나누어 오십 단계에 걸친 확인 작업 이후에 은기사의 마법 갑옷을 깎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은기사는 목숨을 내어놓은 듯 마법 갑옷이 이드의 공격에 대해 방어를 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검술을 펼쳐냈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가 없고, 직선적이며 실전적인 검술이었다.
하지만 그 검술로 이드를 상대하기에는 그녀의 역량이 너무 모자랐다. 비록 마법을 통해서 속도를 올리고 힘을 더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근본적인 실력 차이를 메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마법이라도 무공에 대한 깊은 경지를 뛰어넘는 힘과 속도를 은기사에게 줄 수는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드는 생각보다 좀 더 시간을 투자한 후에야 은기사의 갑옷을 깨부술 수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녀가 펼쳐 내는 열두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술에서 익숙한 초식의 운영을 찾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화십이식이다.’
그것은 이드가 어린 시르피에게 선물한 검법이었다.
물론 오리지날의 난화십이식은 아니었다. 그 완성도는 난화십이식에 미치지 못하는, 다운그레이드된 검술이었다.
하지만 장점도 있었다. 화려한 변초와 허초를 버리고 단순하고 실전적으로 변하면서, 오히려 검법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수라삼검의 검의가 언뜻 드러나게 만들었다.
정말 난화십이식을 적절하게 잘 변형시켜 만든 검술이다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할 사람은 시르피뿐이라는 사실을 짐작한 이드는 좀 더 은기사가 다치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그가 펼치는 검술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시르피가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었구나.’
하지만 언제까지 은기사의 검술을 구경할 수는 없는 노릇.
이드는 은기사의 마법 갑옷에 마지막 일 검을 가했고, 그의 갑옷은 자동차의 유리가 깨어지듯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커흑!”
그리고 그 속에서 나온 것은 몸에 착 달라붙는 반팔 반바지에 검은색 타이즈를 걸친 짧은 머리의 여기사였다.
여기사는 마법 갑옷이 다 막아내지 못한 검강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마법 갑옷이 깨어지면서 마력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반쯤 감긴 눈으로 비명을 토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네리베르의 비명과 같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데일리 언니!”
비명과 동시에 뛰어나오는 네리베르의 모습에 이드는 반사적으로 쓰러지는 은기사, 데일리를 안아 들었다.
“네리베르 양이 아는 분입니까?”
번개처럼 달려온 네리베르를 보고 이드가 물었다.
데일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분은 검후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은색 기사단의 기사세요.”
“은색 기사단이라.”
그러고 보면 다른 기사단 단장들의 얼굴을 봤지만 은색 기사단만은 보지 못했다.
“은색 기사단은 소드 팰러스에 없는 게 아니었습니까?”
네리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검후님과 함께 수련을 떠났다고 알려졌죠. 소드 팰러스에서도 은색 기사단의 언니들은 한 분도 뵌 적이 없었어요. 이드 님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정말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럼 이분은 왜 여기에 혼자 있는 겁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일리나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이드, 네리베르 양의 지인분인 것 같은데, 일단 치료가 먼저가 아닐까요. 이리 눕혀 주세요.”
이드는 일리나의 말에 따라 바닥에 모포를 깔고 데일리를 눕혔다. 그 옆으로 일리나가 치료 주문을 외우며 상세를 살폈다.
다행히 강대한 마나의 흐름이 깨지면서 받은 충격으로 가벼운 내상을 입은 것일 뿐 큰 상처는 없었다. 일리나의 처치로 마나가 안정되자 얼마지나지 않아 그녀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녀는 누운 채로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네리베르에게 멈추자 네리베르가 급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데일리 언니.”
“네리베르………… 설마 네가 감히…..”
걱정스러운 얼굴의 네리베르를 바라보는 데일리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가 어렸다.
“언니?”
“죽엇!”
다음 순간 못난 살기가 폭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