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1화


538화

“……”

네리베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파르르 떨렸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그녀의 눈동자는 한 치 앞에서 날을 세우고 있는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곧 그녀의 눈이 손끝을 따라 올라갔다. 중간에 팔꿈치를 누르고 있는 이드의 손을 지나 어깨를 지나 독하게 번쩍이는 데일리의 얼굴이 들어왔다. 네리베르의 시선이 다시 손끝으로 돌아왔다. 분명 죽일 생각으로 날아든 손이다. 심장이 직격당하지 않는 한, 설령 목을 찌르더라도 마법과 신성력의 도움이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심장을 부수거나 머리를 날려 버리면 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맨손으로 머리통을 부숴 버릴 만한 파괴력을 낼 수 없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눈을 통해서 뇌를 휘저어 버리는 방법이다.

특히나 이 방법은 죽이는 것에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눈 하나는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아직 어린 그녀들은 알고 있어도 그 잔인함에 감히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수법 자체는 알고 있기 때문에 데일리가 얼마나 독한 수단을 택했는지 바로 파악한 네리베르의 충격은 컸다.

갑옷이 부서지며 나타난 데일리의 모습에 번개처럼 달려올 만큼 그녀와 교감이 컸던 그녀로서는 상대가 감히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내는 네리베르의 참혹한 얼굴과 데일리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침묵이 깔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에단이 데일리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하하. 경, 오해입니다.”

“……?”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갑작스러운 웃음에 이어진 에단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좌중의 시선을 받은 에단의 어깨가 가볍게 으쓱거린다.

“경의 소문은 익히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오해로 인한 실수십니다.”

분노에 불타던 데일리의 얼굴이 울상이 되고, 석벽이라도 뚫어 버릴 칼날 같던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데일리 셰인.

29세의 젊은 나이로 은색 기사단 서열 4위에 오른 천재 여기사다.

그녀는 두 가지로 유명했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천재적인 검 실력이다.

그녀가 속한 은색 기사단은 소드 팰러스의 상징과 같은 오색 기사단 중에서도 그 구성과 위치가 특별했다. 모든 기사단원이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은색 기사단은 검후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것은 검후와 같은 여성이라는 특성을 살린 임무였다.

덕분에 검후를 존경하는 수많은 여검사들이 가장 입단하고 싶어 하는, 지원 영순위의 기사단이 되었다. 또 검후의 곁에 머무는 만큼 대우도 최고였고, 장비도 최고였다.

검후의 곁에 머물고 있는 그녀들이 후줄근해 보여서는 망신이라는 소드 팰러스와 황궁의 주장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은색 기사단의 발언권은 강했다. 특히 검후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그녀들의 의견이 최우선이었다. 검후와 가장 가까이 머물고 있는 만큼 검후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장비도 좋고, 대우도 좋고, 우상인 검후도 바로 곁에서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위치에 머물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실력이 되어야 하기에 훈련은 고되고 살벌하다.

덕분에 대부분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다른 기사단에 전력으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 속에서 4위의 실력을 가졌다는 것은 엄청난 실력자라는 의미였다. 최고만 모였다는 수십, 수백의 사람들 중에 4번째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것도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에 말이다. 흔한 말로 검술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녀를 정말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성격이다.

에단도 그녀의 실력에 대해서는 곁다리로 들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검술 실력보다도, 정작 그녀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쇠심줄 같은 똥고집과 덤벙대는 성격이었다.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 끈기라고 포장된 똥고집과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실수 연발의 덤벙대는 성격.

기사도와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시무시한 포스를 뿜어내는 기사단의 상위 서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갭이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단발머리에 밝은 성격, 그리고 은색 기사단 4위의 실력자이면서도 그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모습들이 은밀하게 소드 팰러스 안에 그녀의 팬을 만들었다.

최근 록과 붙어 다니며 그동안 듣지 못한 소드 팰러스의 소식을 접하는 중에 유명인에 대한 소개를 들으면서 데일리에 대한 정보를 접한 에단이었다.

그는 눈치 빠르게 네리베르가 그녀를 부르는 걸 통해서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고, 이어진 그녀의 말과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한 후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이다.


“면목 없다. 네리베르, 날 용서해 주렴.”

데일리의 고개가 무겁게 숙여져 있다.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알려진 만큼 데일리도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에단의 오해라는 말에 자신이 섣부른 판단으로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 비록 실수는 하지만 상황 판단이 느리지 않은 데일리는 평소 아끼던 동생에게 살수를 펼쳤다는 사실에 절망해 버렸다.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어진 에단과 케마란의 설명이 그녀의 실수에 확인 도장을 찍어 버렸다.

비록 고집도 강하고 덤벙대다가 실수도 하지만, 솔직한 성격의 그녀는 바로 네리베르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괜찮아요, 언니. 지금 상황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네리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몰래 잠입한 순간 무단 침입 확정이고, 안내하는 사람이 외부인이면 배신자 확정이다. 너무 편협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가능성 높은 이야기다.

하지만 데일리로서는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해와 실수로 사람을 죽일 뻔했다. 그것도 지인을 말이다.

“아니다. 그래도 앞뒤를 잘 살펴야 했어. 이 성격 때문에 내가 화원에 남았는데, 또 같은 실수를 했어. 널 보기가 부끄럽구나.”

“괜찮아요, 언니. 아마 평소라면 언니도 이러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검후님의 일로 마음에 여유가 없으시잖아요. 그 때문이에요.” 

연이어진 네리베르의 위로에 데일리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네리베르를 확인한 그녀는 다시 주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중 케미란은 알지만 나머지는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검후님의 실종은 어떻게 알았니?”

이미 밑 빠진 장독처럼 기밀이 술술 새어 나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아직 네리베르까지 닿을 정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건 이들의 목적과 에단의 소개 정도였다.

네리베르는 그 질문에 이드를 바라봤다.

“언니에게 말해도 될까요?”

아마, 이드의 정체에 대해서일 것이다. 이드도 은색 기사단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다. 특히 긴급대책위에는 은색 기사단이 끼어 있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자기소개부터 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네리베르가 이드와의 일을 핵심만 정리해서 간단히 이야기했다.

“죽일 놈들. 감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데일리의 감상평이었다. 그녀도 네리베르와 마찬가지로 이드의 정체에 놀라워했지만, 소드 팰러스의 행태에 가장 격하게 반응했다.

데일리의 입장에서 소드 팰러스의 태도는 검후에 대한 배신으로 보일 정도였다.

“데일리 경이라고 했지요. 제가 몇 가지 물어도 될까요.”

푹푹 화를 내던 데일리는 이드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퍽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검후님께서 옛 이야기를 하실 때 항상 보고 싶어 하시던 얼굴인데. 제가 아는 건 모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소드 팰러스가 아니라 화원으로 올 것을 잘못했군요.”

이드는 데일리의 반응에 문득 말해 버렸다.

“화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드 님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데일리 경은 어째서 혼자 화원을 지키고 있는 겁니까? 제가 소드 팰러스에 도착했을 때는 은색 기사단장도 보지 못했고, 듣기로 검후님을 보좌해서 수련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아픈 곳을 찌른 질문인 듯했다. 이빨을 앙 다문 데일리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검후님의 실종은 은색 기사단 최대 최악의 사건입니다. 검후님의 가장 가까이에 머물고 있으면서 그분이 어떻게 사라지셨는지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으로 단장님께서는 검후님의 수색에 제일 앞장섰고, 소드 팰러스에 대한 수색이 끝난 이후에는 밖으로 수색 범위를 넓혔습니다. 지금도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은 제국을 곳곳을 수색하고 있을 겁니다. 그중에서 저는 부끄럽지만 성격적으로 수색과는 맞지 않아 화원을 지키는 임무를 받게 되었습니다. 혹시 검후님의 실종과 관련 있는 정보를 얻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식을 다른 단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지요.” 

데일리는 부서진 갑옷과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확인하고 이어 말했다.

“은밀한 임무였기 때문에 제가 화원에 있다는 것은 소드 팰러스의 클라인 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검후님이 실종된 한 달 동안 화원을 찾던 사람들도 이후에는 오지 않았고, 가끔 바보들만 화원에 숨어들었죠. 그래서 이드 님께서 나타나셨을 때는 틀림없이 검후님의 실종과 관련된 범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비상 마법진을 발동시켜서 화원 침입자가 있다는 신호가 소드 팰러스에 갔을 겁니다.” 

[괜찮아요. 그건 막았으니까 걱정 말아요.]

이드와 긴급대책위의 관계에 대해서 들은 데일리가 아차 하고는 급하게 말하자 라미아가 대답했다. 그때까지 신경 쓰지 못하던 은백의 새가 말을 하자 데일리의 눈이 커졌다.

“일리나 님의 아티팩트예요.”

케마란이 자랑하듯 말했다.

사실은 절대 단순한 아티팩트 따위로 취급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말하지 않았다. 다만 라미아가 한 가지 사실만을 정정해 주었다.

[정확히는 일리나가 아니라 이드 소속이에요. 그런데 아직 신호가 발신되고 있는데, 이거 작동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

갑옷과 연동된 보조 마법진은 멈추었지만 소드 팰러스에 신호를 보내는 마법진은 은밀하게 작동 중이었다.

“예비가 있어요.”

신기한 듯 라미아를 바라보던 데일리가 일어났다. 처음 그녀와 마주 서 있던 풀플레이트 메일이 만약을 위한 예비 마법 갑옷인 듯했다. 그녀는 갑옷에서 장갑과 신발을 떼서 신었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타이즈에 두 손과 발에만 갑옷을 걸친 모습은 묘한 섹시함으로 에단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검후님을 위해!”

차차차착!

짧은 시동어가 떨어지자 바닥에 놓여 있던 갑옷이 은과 청으로 빛나며 데일리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쌌다. 데일리는 그 상태에서 활성화시킨 마법진을 정지시키고 투구와 장갑을 벗었다.

“검후님의 흔적을 찾고 있다고 하셨으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데일리는 소리 없이 앞장서서 움직였다.

괜히 마법 갑옷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 듯, 조금만 움직여도 요란한 소리가 날 것 같은 갑옷은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았다.

데일리는 2층에 있는 어떤 방의 문을 열면서 말했다.

“이곳이 검후님의 방입니다.”

커다란 두 개의 문이 열리자 방에 저절로 마법 등이 밝혀졌다.

하얀색을 기본으로 한 검후의 방은 아름답고 기품 있었다.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바닥 전체에 깔린 푹신한 카펫, 벽면을 따라 이어진 섬세한 조각.

황궁에 있는 황후의 침실 못지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었다. 그중 가장 중앙에 제일 크게 걸려 있는 세 장의 그림이 있었다. 하나는 시르피의 어린 시절 가족을 그린 그림이었고, 다른 한 장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아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

“나네!”

이드는 마지막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멍청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