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3화


540화

문 안쪽은 작은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매우 좁았다.

그리고 문처럼 열린 벽을 제외하고는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닐 틈도 없는 완벽한 밀실이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이 밀실이 만들어진 방법이었다. 이 밀실은 일반 건축물과 같이 벽을 쌓아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의 속을 파내고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였다.

당연히 빈틈이 있을 수가 없는 방이다.

지하 감옥의 독방과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열악하고 삭막함이 흘러넘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곳은 절대 단순한 방이 될 수 없었다. 대륙에 살고 있는 누가 와서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바로 좁은 방의 벽면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범상치 않은 마법진들 때문이었다.

“설마 이런 곳이…….”

데일리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받은 충격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검후에 대해서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다고 자신했던 은색 기사단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부서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공간은 검후가 은색 기사단을 완전히 믿지 못한 증거처럼 데일리에게 다가온 탓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완전히 내보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녀로서는 검후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이드는 다른 사람들을 들이지 않고 먼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수련실의 마법 등으로 인해서 어둡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 밀실 자체가 빛을 발하고 있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는 어느새 라미아가 함께하고 있었다. 마법에 대해서는 그녀가 이 자리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라미아가 마음으로 전해 왔다.

[드래곤의 마법이에요.]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이 바로 드래곤의 그것이다.

이드의 얼굴이 뜻밖의 수확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설마하니 집단 가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의 흔적을 시르피를 찾으러 와서 접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드의 눈이 벽 한쪽에 있는, 방을 만들며 일부분을 남겨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돌 책상을 향했다. 볼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책상 위에는 갈색의 가죽으로 단단하게 마감된 백과사전 크기의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팔랑.

이드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뻣뻣한 가죽 표지를 넘겼다.


‘세레니아 님의 소식이 끊어지고 1년이 지났다.

그분께서 우려하시던 일과 관련하여, 그분의 신상에 어떠한 문제가 벌어진 것은 아닐까 실로 우려…


턱!

표지를 펼친 책의 첫 부분을 읽은 이드는 그대로 책을 덮어 버렸다.

‘빙고!’

혹시나 하던 기대가 제대로 터졌다. 이 두꺼운 책을 이 자리에서 모두 읽을 수는 없어서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여기에는 일리나가 알지 못하던 내용이 들어 있다.

‘세레니아가 우려하던 일이라고 했다.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세레니아에 대한 소식을 전해 줄 때 일리나는 그녀가 게르만이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드는 일리나를 제외하고 모든 인연의 끈이 끊어진 것 같았던 이 세상과 질기게 엮이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당장이라도 시르피의 것으로 짐작되는 이 책을 모조리 읽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 책을 읽어 볼 시간은 나중에라도 많다.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때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생각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좁은 방 안에 놓여 있는 이 두꺼운 책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드 님, 그 책은?”

이드가 책을 손에 들자 데일리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물었다.

“검후님이 직접 쓰신………… 일종의 일기 형식의 기록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책이군요. 어쩌면 검후님의 실종에 대한 단서가 있을 수 있겠군요.’

데일리의 눈이 책 표지를 뚫고 안쪽을 바라보듯 강렬하게 빛났다.

“그런데 어째서 덮으시는 거죠?”

“아무래도 지금 읽어 볼 내용은 아닌 것 같아서요. 지금은 이 방을 살펴보는 것이 먼저인 듯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그 책은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데일리가 당연하든 듯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시르피의 책은 은색 기사단이 보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드도 이 책을 그냥 순순히 넘겨줄 수는 없었다.

앞서의 말대로 시르피의 실종과 관련된 내용이 있을지 모를 이 책이 언제 그녀의 손을 떠나 어떤 곳으로 넘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긴급대책위로 넘어가면 골치 아프지.’

이드는 빨리 책을 넘기라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데일리를 바라보다 말했다.

“당장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만약 허튼소리를 한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전신에서 투기가 피어올랐다. 죽더라도 그냥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세레니아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알지 못하는 이름입니다.”

이드는 책의 첫 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세레니아라는 이름은 구십 년 전 있었던 제국전쟁과 관련해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이름입니다. 이 책에는 그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함부로 밖으로 보여 줄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데일리도 몇 마디 말에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 책 속에 검후에 대한 단서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체 없이 제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은색 기사단의 동료 기사들을 생각하면 속이 탄다.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과 결정은 이드 님이 아니라 검후님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만큼 가볍게 외부에 보일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그런 판단에 따라서, 더욱 그 책을 검후님께서 귀환하실 때까지 우리 은색 기사단에서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 책 속에 있을지 모를 단서를 찾아 검후님을 찾는

일이겠지요. 저희 은색 기사단은 그 일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책이 아니면 죽음을!

이드는 극단적인 데일리의 말에 이 여자를 기절시키고 책을 취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상대를 죽이지 않는 이상 그렇게 넘어갈 수도 없는 일.

“데일리 경의 단단한 결의에 존경을 표합니다. 좋습니다. 저도 이 책의 소유권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 책에 적혀 있는 정보를 원할 뿐이지요. 이렇게 합시다. 제가 먼저 이 책을 보고 넘겨 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찾을 수 있었으니, 그 정도의 배려는 부탁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서 함부로 외부인에게 보여 줄 수 없는 내용이라고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으셨나요?”

“하하. 분명히 그랬지요. 하지만 이 책 첫 장에 적혀 있는 세레니아라는 이름의 관계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요. 저기 있는 일리나를 포함해서요. 무엇보다 저희들도 검후님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점을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엘프인 일리나의 이름과 이드들의 목적을 상기한 데일리도 무조건 자기주장만 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이드 님이 이 책을 먼저 읽어 보시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저도 함께해야 하고, 그때까지 이 책은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책의 내용을 일차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아직 이 방의 탐색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 앞, 어떤 급박한 일이 발생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책의 안전을 맡기기에는 데일리의 실력이 좀 딸렸다.

결국 책은 일리나의 손에 맡겨졌다.

이드에게 깨진 데일리로서는 돌발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이드의 말에 반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이드의 말처럼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고 그 상황에서 책을 잃어버리는 것은 데일리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일리나였다.

이드의 일행인데 이드에게 넘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냐 싶겠지만, 데일리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녀에게 일리나는 이드의 동료 이전에 검후와 직접적인 친분을 가진 엘프였기 때문이었다.

너무 좁은 방 안은 따로 살펴볼 부분이 없다시피 했다. 책을 제외하고 나니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마법진뿐이었다. 이드와 일리나, 그리고 라미아가 마법진을 살폈다. 그중 실제 마법진을 분석하는 것은 오롯이 라미아의 몫이었다.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마법진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밖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대로 속을 내보인 마법진의 분석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라미아가 드래곤의 마법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방에 있는 마법진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예요. 소소한 기능들도 있지만 그건 이 방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공기를 정화하고, 빛을 만들어 내는 것들이라 크게 상관은 없다고 봐요.]

끄덕끄덕.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공기 정화 기능에는 관심이 없었다. 창문만 열어도 신선한 공기는 가득하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뭔데?”

[첫째는 이 방에 대한 완전한 은폐예요. 그 수준이 얼마나 광적인지 문이 닫혀 있을 때 이 방은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예요. 제가 장담하는데 마법적으로 이 방을 탐색하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그래서 그만큼 안전하기도 해요. 모르긴 몰라도 이 성이 무너져도 이 안에 있으면 안전해요.]

검후의 흔적을 찾아 수많은 사람이 왔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그냥 돌아간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마법진. 이게 핵심이에요. 제가 봤을 때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공간이동을 위한 마법진이거든요.]

“어, 그럼 혹시 검후님이 진짜 실종된 곳이 이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야?”

[맞아요.]

라미아의 확인에 짧은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이드가 다시 말했다.

“그럼 우리도 이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을까?”

[충분히요. 마법진의 해석이 끝났다는 말은 작동 방법을 알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구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머지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럼 빠질 사람은………… 없겠고.”

이드는 자신의 말에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 사람들의 모습에 말을 삼켰다.

“좋아. 그럼 바로 움직이자.”

라미아가 막아 놓기는 했지만 긴급대책위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법진의 작동 방법은 비밀 문을 여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곤란한 점은 마법진의 시동을 위해서는 방의 문이 닫혀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좁은 공간에 6명의 인원이 비좁게 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익! 선배, 손!”

“아, 미안, 미안. 좁아서 어쩔 수 없다고!”

흐뭇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에단의 목소리와 함께 방 안의 마법진은 은은하게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숲 속에 서 있었다.

“이게・・・・・・”

“아아…………… 검후님……”

털썩!

빛이 사라지고 달빛과 별빛의 도움으로 어둠이 눈에 익자 일행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폐허였다.

산산이 부서져 집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는 집터와 불타고 잘려 나간 나무와 뒤집어진 흙더미.

처참한 그 흔적에 데일리가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