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64화
1499화
황제가 거하는 땅 가일라에는 별명이 하나 있다.
제국의 심장.
라일론 땅을 인간으로 쳤을 때 가일라의 위치가 심장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제국은 이런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최고의 안배를 했다. 성벽을 높고 두껍게 쌓고, 병사와 기사를 배치하고, 고급 전력인 마법사와 초인까지 24시간 상시 배치 시키는 등.
말 그대로 철벽을 쌓아, 허락 없이는 누구도 가일라에 발을 들일 수 없게 했다.
당연히 입구에서부터 철저한 검문검색은 인지상정일 테지만.
현실은 달랐다.
가일라는 이런 예상을 대담하게 배신했다.
가일라로 통하는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다. 그 문을 통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쉴 새 없이 드나든다. 마치 심장을 드나드는 혈액처럼 말이다.
물론 검문검색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철저한 편이었다. 다만 그 방법이 비밀일 뿐. 거기에 몇몇의 경우는 결코 검문을 그냥 넘기지 않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전투 병력을 대동한 경우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그 누구도 쉬이 성문을 넘지 못했다.
설사 그 대상이 백작급의 고위 귀족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사신단은 꼼짝없이 검문 대상에 속했다. 기사에 병사까지 대동한 일행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마 검문을 당했다면 마차에 타고 있던 이드와 라미아, 그리고 일리나까지 밖으로 나와조사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가일라의 검문은 철저했다.
하지만 이드가 이런 가일라의 유명한 검문을 경험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바로 그의 마중을 명 받은 길 소영주, 살아있는 통행증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문을 막은 기사에게 미리 준비하고 있던 통행증을 내보였다. 그것도 어중간한 통행증이 아닌, 황성에서 직접 발급된 최고 등급의 통행증이었다. 그것이 있으면 어떠한 검문검색도 없이 가일라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었다.
“통과하십시오. 그리고, 가일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기사에 이드는 의문이 들었다.
“길 소영주, 통행증에 내가 누군지 적혀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통행증 자체는 그저 귀빈용입니다. 대신………… 저와 마찬가지로 궁으로부터 조용히 언질을 받았을 것입니다. 도착할 날짜는 대충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미리 …….”
통행증을 발급했음에도,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무례가 없도록 조치를 했다는 말일까. 길 소영주는 이마에 솟은 땀을 훔치며 말했다.
“대신 정확한 신분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알아도 상관없으니까. 시끄럽고 귀찮은 걸 원하지 않을 뿐, 무조건 정체를 감춰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긴장을 풀라고 건넨 말이었지만, 길 소영주에겐 별다르지 않은 똑같은 소리였다. 이드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귀찮음과 소란은 당연히 따르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성문을 넘어 중앙대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 세 대가 나란히 달려도 공간이 남는 중앙대로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덕분에 기사와 병사들이 애를 쓰고 있음에도 전혀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에 이드는 굳이 애쓰지 말고 조심조심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스폴을 통해 명령을 받은 기사와 병사들은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좀 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주변의 풍경들.
“외국은 외국이구만.”
“확실히 안티로스와 많은 것이 달라.”
“참, 자넨 안티로스에 가 봤다고 했었지? 그렇게 많이 다른가?”
“뭐랄까. 크고 웅장한 건 같은데. 라일론이 좀 더 섬세한 느낌이 있어. 여성스럽다고 할까?”
“그에 무슨 소리야? 도시에 성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아, 느낌이 그렇다는 소리지 않나, 느낌이.”
병사들이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도 창을 열고 라일론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성 밖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도시다.
전체적으로 여성스럽고 섬세하다는 병사의 말에 공감이 갔다. 곧게 뻗은 길과 건물의 형태와 색에서 그런 느낌이 느껴졌다.
“요 앞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느낌이야.”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이드 기준에서야 요 앞이지, 그레센 기준으로 백 년 전이다.
거기에 라미아가 추가 사항을 더한다.
“그리고 그땐 여기 수도의 삼분의 일이 날아간 상태였잖아요. 그때 무너진 걸 전부 새롭게 복구했을 테니까,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죠.”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이드는 혼돈의 파편과의 전투로 폐허로 변했던 가일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 혼돈의 파편의 등장으로 빠르게 달려왔었지만, 상황은 끝난 이후였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돌무더기로 변한 폐허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스폴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며 묻는다.
마차의 창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 이드와 두 아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뭐, 전부 옛날이야기죠. 동시에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고.”
“어째서요?”
“쉐어 가든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아? 아!”
쉐어 가든이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스폴이 작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쉐어 가든이라는 말에 가일라의 삼분의 일이 날아갔다는 말도 단숨에 이해한 모습이었다. 그녀 역시 쉐어 가든이 무너지던 그날,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길 소영주.
그때, 같은 곳을 바라보던 호위 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요?”
“궁금합니까?”
“솔직히 저분의 모든 것이 궁금합니다.”
호위 기사가 멋쩍은 얼굴을 숨기지 않고서 답했다. 그 역시 와이번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았던 사람. 하지만 그의 반응은 여름 기사단과 달랐다.
‘과연 로열 나이트는 다른가.’
지금은 자신의 호위 기사로 있지만, 이들의 진짜 정체는 황궁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로열 나이트의 일원들.
아무렴 황제가 사신단의 마중에 아무나 보냈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이들의 임무는 단순히 호위와 마중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호위인 동시에 감시자들이다. 황궁에 돌아가는 순간 이들이 그간 보고 들은 모든 것은 황제에게 보고된다.
“아쉽기도 합니다. 그날 그 광경을 본 이후, 저분의 실력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내심 바랐는데.”
진짜 겁도 없이 큰일 날 소리를 하는 기사였다.
이드가 직접 나서는 상황이면, 여름 기사단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외국의 사신단이 자국 내에서, 그것도 호위를 받는 와중에 그런 일을 겪게 만들다니. 그건 라일론 제국에 있어서도 수치스러운 일. 그러나 길 소영주는 이런 기사를 탓하지 않았다. 실제 그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고, 잠시 후면 임무는 끝이 나기 때문이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다양하다. 그러나 기사는 그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보고 듣는 것을 철저히 입 밖에 내지 않는 로열 나이트다운 자세였다.
‘내 임무도 곧 끝난다.’
길 소영주는 내심 시원섭섭했다. 명예 후작으로부터 자신이 범한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고, 두 눈으로 목격한 힘의 격차는 아찔할 정도였다.
그런 인물이 사신으로 오며 가져온 소식은 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최근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직무는 어디까지나 파리네르 백작의 보좌. 굳이 그런 복잡한 일에 직접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안에 직접 발을 담그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럼으로써 왕실 중앙에 더 깊이 발을 들이고 싶은 욕심이랄까.
‘・・・・・・ 좋아, 돌아가면 보고서와 함께 백작 각하께 이번 일에 참여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려보자.’
결국 욕심으로 마음이 기운 길 소영주였다.
일전 라미아를 알아보고 과감하게 습격을 결심한 바로 그때의 결단력이 다시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반짝인 결단력은 일을 아주 잘못 짚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혼돈의 파편이라니. 그건 감히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슬슬 황궁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
사각사각.
모든 외부 소음이 차단된 조용한 집무실.
황제는 책상 위에 두껍게 쌓인 서류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오늘의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서류는 상당한 양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제국의 운영에 필요한 서류라고 한다면 결코 많은 양은 아니다. 무엇보다 매일 업무를 보는 황제에게는 익숙한 업무량. 그렇게 서류를 한 장 한 장 쳐내던 중이었다.
똑똑.
얌전한 노크 소리가 황제의 집중을 깨트렸다.
“들어오라.”
허락이 떨어지고 곧 한 인물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에서 일정한 거리에 멈춰 선 인물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라일론의 지고한 영광을 뵈옵니다.”
“그대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파리네르.”
황제의 업무를 방해한 것은 다름 아닌 파리네르 백작이었다. 아마람 공작을 도와 제국의 정보를 통괄하는 자.
“검후의 사신단이 지금 막 성문을 통과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왔는가. 여름 기사단은?”
“가일라 외곽에서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고생했군.”
황제는 들고 있던 펜을 놓고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한눈에 들어오는 가일라의 전경. 저곳 어딘가에 사신단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황제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어떤 소식을 가져왔을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