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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65화


1500화

황궁에 도착한 일행은 일단 별궁에 짐을 풀었다.

듣기로는 다섯 개의 별궁 중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게 괜한 소리는 아닌 듯 하얀 대리석에 화려한 금장식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궁이었다. “명령하신 대로, 최소한의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휴식을 주었습니다.”

병력 배치를 마친 스폴이 돌아왔다.

작은 조각상 하나를 살펴보고 있던 이드가 수고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요. 그런데 꼭 이쪽 병력을 뺄 필요가 있는 겁니까? 황궁에서도 미리 준비를 잘해놓은 것 같던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라일론에선 사신단의 대접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놓은 모습을 여럿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별궁에서 시작해, 하녀들의 빳빳한 옷자락까지. 경비도 두말할 것 없이 철저하고 빵빵했다.

그래서 이드는 모두에게 휴식을 주려 했지만, 스폴은 반대했다. 그녀는 최소한의 경비는 필요하다며 끝끝내 일부 병력을 빼 경비를 서도록 만들었다.

이드는 괜한 고집이라고 생각했지만, 스폴의 행동을 막진 않았다.

그것이 사신단의 안전을 책임진 그녀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길 소영주나 호위 기사들도 잘 돌아갔습니까?”

길 소영주와 다섯의 기사들은 별궁 앞까지 동행했었다. 호위에 대한 교대까지가 임무라면서.

그러고는 별궁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에게 인수인계 후, 짧은 시간이지만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떠나버렸다.

“그런데 뭐, 돌아가고 말고 할 필요가 있나요? 저들에겐 황궁이 집일 텐데. 그보다 이젠 보는 사람도 없잖습니까. 편하게 말해주시면 안 돼요?” 

괜히 예의를 차리려니, 닭살이 돋는다며 팔을 문지르는 스폴이다.

라미아와 일리나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이드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잖아도 좀 어색하던 참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있으면 연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예의를 차리겠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 자리에서 안 하던 예의를 차리려니, 많이 어색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이드가 말을 놓자, 빈틈없던 스폴의 표정도 헤실헤실 풀어지며, 익히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힘들었다며 팔을 축 늘어트렸다.

“역시 조직을 이끄는 건 저한테 어울리지 않나 봐요.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꼼꼼하게 잘했잖아. 꼭 쉴라 단장을 보는 것 같았다고.”

“그랬다면 그건 성공이네요.’

“응?”

“우리 단장은 평소에 어땠을까. 단장이라면 이때 어떻게 했더라. 그렇게 하나하나 떠올려 보고 열심히 흉내를 냈던 거거든요.”

글쎄. 과연 그게 단순히 흉내를 낸다고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일일까.

기본적인 리더쉽이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다시 말해 스폴에겐 조직을 이끌 수 있는 기본적인 자질이 내재되어 있다는 소리다. 따져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은색 기사단의 수석 기사였다.

단장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자리에 있었던 것. 그러니 겨우 기사 일곱과 스물의 병사를 부리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사신단의 호위 단장이라는 직책이 무거웠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걱정하지 말아요. 스폴은 충분히 훌륭했으니까.”

라미아가 스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입가에 슬며시 피어오르는 미소.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절로 흐뭇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데 다른 소식은 없어?”

“어떤 소식이요?”

“아니, 너무 조용해서 말이지. 길 소영주를 마중으로 보내고, 여름 기사단까지 동원한 것에 비해 반응이 너무 조용하잖아.”

“여기 집주인 말씀이시군요?”

“말 그렇게 막 해도 괜찮아?”

아무리 다른 나라라지만, 황제를 두고 집주인이라니. 황궁의 사람이 들었다가는 경을 칠 일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이 잘려도 변명이 통하지 않을 그런 일. 그러나 스폴의 모습은 느긋하다 못해, 태평해 보였다.

“뭐, 어떻습니까?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들이 이드 님께 내어준 별궁을 도청할 리도 없고요.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명예 후작 부인님들.”

“훗, 당연하죠.”

따지고 보면 검후 다음으로 이드 일행의 능력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폴이었다.

에단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 이드 부부 옆을 지킨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 만큼 이드 일행에 대한 어떤 도청 시도도 통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검후의 위엄을 믿고 있기도 했다.

아무렴 검후가 보낸 사신단에 도청을 시도하는 무례를 보이겠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밖에서는 조심해. 여긴 라일론의 황궁이라고.”

“당연히 그런 구분을 철저하죠. 저도 라일론의 감옥에 갇히고 싶진 않으니까요. 아무튼 제가 따로 전달받은 내용은 아직 없습니다. 생각과 달리 여기 황제께선 큰 호기심이 없으신가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해? 보통 도착 당일에는 휴식을 주잖아.”

“에이, 그거야 급할 일이 없을 때 이야기고요. 황제가 관심을 가지는 일에 있어서는 그런 거 없습니다. 이드 님도 그래서 물으신 거잖아요.”

그 말이 옳다.

사실 이드는 검후가 황제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제법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장이었다. 그래서 도착과 동시에 황제가 자신들을 부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런 부름 없이 바로 별궁으로 안내된 것이다.

물론 이건 호기심에 몸이 달아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는 생각일 뿐이었다.

이드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황제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정말 검후가 보낸 서신에 큰 호기심이 없는 것이라면 앞으로 나눠야 할 이야기가 상당히 빡빡해질 수 있다 싶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괜히 수락한 것일까 하는 후회가 자연스레 살짝 일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별궁의 시종장이 은쟁반에 황제의 친필 서한을 담아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에 늘어져 있던 스폴이 곧장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 사신단 여러분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시종장은 그 말과 함께 은쟁반을 내밀었다. 이드는 쟁반 위에 놓인 카드를 들어 펼쳤다. 거기에는 길지 않은 글이 짧게 적혀 있었다.

글을 읽은 이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저녁이라면 만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찬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번 초대는 극히 사적인 식사 초대로 알고 있습니다.”

즉, 대외적인 요식행위가 아니라, 진솔한 대화를 위한 자리라는 말이다.

역시 황제는 검후가 보낸 서신에 호기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호기심이 너무 강해서 쓸데없는 허례허식이 방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흐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초대인데, 거부할 수 없지요. 영광으로 알고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그럼 6시 정각에 모시겠습니다. 의상은 저희가 준비할 것이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아무리 허례허식을 피한 자리라지만, 기본적인 예의라는 것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옷. 황제의 초대인 만큼 그걸 황궁에서 책임지겠다는 말이었다. 아마도 최고의 옷감에 보석이 박힌 옷일 테지만.

정복이 불편하기만 한 이드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리였다. 그렇다고 이를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

“잘 부탁드리죠. 최대한 단순한 형태의 정복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명예 후작님의 요청 사항은 꼭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은쟁반을 든 시종장이 소리 없이 물러갔다.

대리석 바닥을 걷고 있음에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그가 얼마나 유능한 시종인지 알게 해준다.

아무튼 그렇게 시종장이 물러가고 문이 닫힌 직후였다.

스폴이 엄근진한 태도를 날려 버리고는 호들갑을 떨어댔다.

“세상에 황제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시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다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럼요! 엄청 놀랄 일입니다! 파격적인 초대라고요. 만찬도 아니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는 건, 독대를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진데. 황제와 독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특히 독대 상대가 외국의 사신이라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스폴은 놀라운 일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그녀의 말도 딱히 틀린 구석은 없었다. 평소 크게 믿고 있는 신하라면 쉽게 얼굴을 마주하는 경우는 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는?

어렵다. 황제에 있어 독대를 허락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그중 가장 큰 요소는 상대에 대한 신뢰다. 언제 암살자로 돌변할지 모르는 타인과 단둘이 마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최소한의 믿음은 있다는 반증.

그런데 지금 황제는 자국의 귀족들도 얻기 힘든 그 믿음을 한 번도 본적 없는 외국의 사신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을 겁니다. 어쩌면 식사 자리에 기사들이 가득할지도 몰라요.”

“혹시 경험담?”

“설마요. 검후 님은 독대를 허락받는 쪽이 아니라, 허락해 주시는 쪽인데요. 무엇보다 감히 어떤 놈이 있어서 검후 님께 검을 들이밀겠습니까? 평소 검후 님의 독대 자리엔 저희 은색 기사단도 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검후가 아니다.

그러니 만약을 대비한 기사들이 호위로서 그 자리를 함께할 것이다. 스폴은 그렇게 확신했지만.

‘스폴이 틀렸네.’

시간에 맞춰 나타난 시종장을 따라간 곳에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제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그것도 먼저 도착한 황제가 이드를 기다리고 있는 형태로 말이다.

“라일론에 온 것을 환영하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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