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72화
1507화
기사와 병사들이 완전무장을 하고서 대전의 문을 지키고 있다.
사방을 경계하는 눈길 또한 몹시 매서웠다. 허락받지 않은 자는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기세.
물론, 별궁을 나선 이드가 도착하자 이런 기세는 씻은 듯 사라졌다.
문 앞을 막아선 기사들은 한쪽을 비켜서고, 근육질 병사들은 힘을 써 대전의 문을 열었다.
쿠구궁!
묵직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넓고 웅장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대전의 붉은 대지 위에 서 있는 아홉 명.
단 아홉 명뿐이지만, 어째서일까. 넓은 대전에 꽉 찬 느낌이다.
“드시지요.”
시종의 말에 이드는 아홉의 시선을 받으며 대전 안으로 발을 들였고, 라미아와 일리나가 그 뒤를 따랐다.
직후 등 뒤로 열렸던 문이 닫히고, 기사들이 그 앞을 막아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가운데 이드는 묵묵히 대전을 가로질렀다.
그와 함께 점점 강렬해지는 아홉의 시선. 아마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벌써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버렸을 테지만.
이드는 달랐다.
그에 있어 저들 아홉이 가지는 영향력이란 길을 지나다니는 행인 1, 2와 크게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곧게 뻗은 발끝과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손에서는 흔들림 없는 힘과 여유가 묻어났다.
그리고 이런 이드의 태도에 아홉 대공작의 반응은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감탄과 호기심, 그리고 작은 의심.
앞의 둘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째서 의심을 품는 것일까? 그에 대해서 약간 짐작이 가는 이드였다.
‘아마 황제가 혼돈의 파편에 관해서 저들과 미리 의견을 나눴겠지.’
혼돈의 파편과 마인드 마스터, 그 백년 전의 과거에 대해서.
그렇다면 의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사람에게 갑자기 세상의 멸망이 나타났다고 하면, 아, 그러냐며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감히 누가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느냐며 목을 잘랐을 일.
하지만 이야기를 꺼내 놓은 사람은 황제였고.
그 이야기를 날라 온 것은 아나크렌 제국의 명예 후작이었다.
의심해선 안되지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까.
그 사이 황제가 앉아있는 상석 앞에 도착한 이드가 그 자리에 멈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뒤에서 라미아와 일리나가 이드를 따라 몸을 숙였다. “라일론의 지고한 영광이신 황제 폐하께 아나크렌의 명예 후작 이드 예천화가 인사 올립니다.”
“인사 올립니다.”
“인사 올립니다.”
황궁 예법에 따른 절도 있는 모습.
여느 사신처럼 황제를 향한 장황한 미사여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자라 보이지도 않는 그 담백한 모습에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일론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하오. 명예 후작. 그리고.”
이드에게 잠시 머무른 황제의 눈길이 라미아와 일리나를 향한다.
그런 황제의 눈에는 숨기지 못할 호기심이 가득했다.
바로, 아침부터 난리를 피운 황녀 때문이었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황녀가 그렇게 떼를 쓴 것일까.
“두 분 명예 후작 부인의 방문도 진심으로 환영하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영광이옵니다. 폐하.”
“하하하. 그리고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오. 오늘 이 자리가 비공식적이니만큼 굳이 딱딱한 예법에 연연할 생각이 없으니 말이오. 편히 있으시오.”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의 허락이라지만, 황제와 아홉 대공작을 앞에 두고 정말 예법을 무시하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
바로 여기 있었다.
“황제 폐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황궁 예법 때문에 많이 답답했답니다.”
굽혔던 몸을 펴고, 한 손을 허리에 올린 라미아였다.
딱딱하던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고, 입가에는 생글생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이 극적인 변화에는 정작 말을 꺼냈던 황제도 놀라운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 되었지만, 놀라움은 잠깐이었다.
곧 그 얼굴에 즐거움이란 감정이 나타나며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명예 후작 부인이 참으로 화통한 성격이구려.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황제 폐하의 첫인상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답답했던 어떤 분과는 많이 다르신 것 같아요.”
“이런, 이런, 그거 반가운 소리로군요. 하하하하.”
자칫 당돌을 넘어 무례하게 비칠 수도 있는 라미아의 태도였지만.
황제는 오히려 기분이 좋은 듯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진심이면 눈물을 찔끔거릴 정도.
어쩔 수 없었다.
라미아가 말한 어떤 분이 아나크렌의 황제였으니까.
황제는 금방 알아차렸다.
세상에, 자국의 황제를 답답하다 말하고, 두 제국의 황제를 비교하는 여인이라니. 그것도 황제인 자신을 면전에 두고서 말이다.
세상에 맹세코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불쾌함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통쾌해서 웃음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유쾌했다.
그렇게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황제는 뒤이어 조금은 차분하게 라미아와 일리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사람의 얼굴이었다.
‘허어!’
황제의 눈에 들어온 두 사람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것도 그냥 미인이 아니라, 제국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이 황궁에서조차 몇 번 본 적 없을 정도로 뛰어난 미인.
하지만 황제를 진정 감탄케 한 것은 두 사람의 외모가 아니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뽐내고 있는 개성과 독특한 분위기였다.
우선 자신 앞에서도 대담할 정도로 당당했던 라미아.
황제가 본 그녀는 붉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당당한 어깨에 세상 지혜를 모아 놓은 듯 반짝이는 두 눈은 보고 있으면 마치 빨려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옆.
한 그루 나무처럼 곧게 선 일리나.
여느 귀부인들처럼 화려한 장신구를 하지 않은 그녀에게서는 세상 탈속한 분위기가 흘렀다. 마치 깊은 숲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
예사롭지 않은 인상의 두 여인.
황제는 자연스럽게 저들에 관한 보고를 떠올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있었던 귀여운 딸의 개인적인 감상도.
‘보고서가 부실했구나.’
명예 후작을 조사하면 함께 첨부된 두 아내에 대한 보고, 거기에도 분명 뛰어난 여인들이라는 평이 적혔지만, 글쎄, 저들은 직접 대면한 황제가 느끼기에 보고서의 내용은 너무 부실했다.
평가가 너무 박하다고 할까.
저런 이들을 두고 그저 뛰어난 마법사에 검사라니. 명예 후작의 그림자에 가려져서 그런지 몰라도 과소평가도 이런 과소평가가 없다. 이래서야 공주 마법사에 공주 기사라고 말하는 딸아이의 평가가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중에 유독 눈이 가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일리나였다.
보고서도 딸아이도 그녀를 두고서 검사이고, 기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그녀는 어떠한가.
아무리 봐도 검사로 보이지 않는다.
‘검사보다는 현자의 깊은 눈에 가깝지 않은가.’
물론 과거와 달리 무공을 깊이 익힌 기사들의 경우 거칠고 강인한 힘을 뽐내는 대신 깊은 눈빛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하지만 일리나는 그런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깊이 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위기.
차분하고 고요하다. 아무리 봐도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저건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을 익혔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리나 개인의 개성인 것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었다.
“명예 후작은 혼인을 아주 잘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두 분 후작 부인 모두 세상에 또 보기 드물 정도로 뛰어나 보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아닌 철없이 혈기 넘치던 황태자 시절이었다면, 저 뛰어난 여인들을 빼앗고 싶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런 황제의 진심을 느낀 이드는 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렇게 보셨다니, 황공합니다. 저도 이 두 사람이 저와 함께 해주는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고 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 같아서는 황후와 내 딸들에게 두 분 명예 후작 부인을 소개시켜 주고 싶지만.”
특히 아직 어린 딸들이 라미아와 일리나처럼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참도록 하겠소.”
말과 함께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는 황제.
조금 전 소탈하고 수다스러운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커다란 위엄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드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라미아와 일리나를 황후에게 보내라고 했다면 거절해야 했을 테니까. 아무리 다시 볼 일이 없더라도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황제의 부탁을 거절해서 좋을 건 없으니 말이다.
“전날 나는 그대에게서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소.”
그렇게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황제.
그는 이드와 아홉의 대공작의 표정을 살핀 후 곧장 말을 이었다.
“그대의 이야기를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 잘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소. 그만큼 위중하고 충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오.”
“……”
이드는 내심 웃음이 났다.
분명 지난밤에는 심각하게 듣기는 했지만, 동시에 흥미진진하게 경청했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심각하게 충격적인 내용이라고 말하는 지금 모습과는 많이 달랐던 모습. 과연 여기 아홉 대공작들 중 몇이나 그런 황제의 모습을 보았을까. “해서, 나는 홀로 이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내가 믿고 신뢰하는 공작들을 불러 함께 의논하고자 하오.”
“현명하신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두 명이 알아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오.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대공작들 앞에서 어제 내가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해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저는 그러기 위해 온 것이니까요’
이드는 대답과 함께 한 걸을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