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8화


545화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친 에단은 뒤처리까지 마치고 부리나케 뛰어나가 버렸다. 큰 사고를 치기 직전의 꼬마 악동 같은 웃음을 매달고 말이다. 분명 서류 한 장 빼내오는 일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드는 무슨 답이 돌아올지 무서워 차마 묻지는 못하고 에단을 보냈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야? 설마 이 시간에 빼올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도둑질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었다. 범죄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당연하게도 대부분 밤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은 멀었다.

그러나 이드는 다시 에단을 부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에단의 기분이 너무 High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그를 붙잡자니 차마 내키지 않았다. 

“그럼 우리도 나가 볼까요.”

이드가 시선을 거두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짜게 식은 눈으로 에단의 등을 쫓다가 이드의 말에 밝게 대답했다.

[쯧쯧. 저 인간 딴 데 정신 팔려서 아까운 걸 잃었네.]

라미아가 이드의 머리 위에서 불쌍한 눈으로 에단을 봤다.

각각 개성 있고 아름다운 두 후배에게 그가 관심이 있고 어필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항상 멋진 모습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딴 곳에 정신이 팔려서 머리에 꽃 달아 놓은 것처럼 바보 같은 행동이라니.

지금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던,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참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라미아는 생각했다.


케마란은 일전에 그녀가 사용하던 연무장으로 이드를 안내하려고 했다. 외곽에 위치한 작은 연무장이라서 평소 찾는 사람도 적었고, 항상 그녀가 죽치고서 링스피어를 휘둘러대는 통에 이제는 그녀의 전용 연무장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네리베르가 반대했다.

“설마 케마란 양 당신은 여기 두 분을 그냥 서 있게 할 생각인가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네리베르의 눈에 케마란은 입술만 우물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암만 생각해봐도 자신의 연무장에는 앉을 만한 의자나 탁자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도 링스피어를 휘두르다 지치면 그냥 연무장에 드러누워서 쉬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목마를 때를 대비한 물병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르침을 청할 만한 환경은 아니다 싶었다.

케마란은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준비하려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지금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를 대신해 네리베르가 앞장서서 다른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수십 개의 연무장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네리베르는 그 연무장 중 한 곳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케마란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크기에 더 단단하고 잘 다듬어진 돌이 깔려 있는 연무대와 차양막, 그리고 그 아래에 단순하지만 편안해 보이는 의자들과 길쭉한 탁자가 놓여 있었다.

네리베르는 이드와 일리나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귀에 거슬리지 않는 작은 방울 소리가 났다. 당장 이 연무장의 반대편으로만 가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잠시 후 이드들이 열고 들어온 문이 열리면서 연무장을 관리하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네리베르는 그에게 간단한 디저트와 함께 이드와 일리나의 취향을 물어 음료를 주문했다.

“……흑, 부럽다.”

그때까지 싸움에서 패배한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던 케마란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직원을 바라보다 마음속 진심을 속삭이고 말았다.

하지만 바로 곁에 있던 네리베르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이었다. 그녀의 입가로 승자의 배부른 미소가 떠올랐다.

“호호호. 이 연무장은 제가 아버님께 가장 감사하고 있는 부분이죠. 케마란 양도 혹시 필요하다면 말씀하세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할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케마란은 자존심이 상한 듯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스스로 조금 전 했던 말을 떠올려 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자존심을 세우고, 허세를 떨어도 자신의 진심이 어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케마란 스스로도 값비싼 드레스나 화려한 금발은 별로 부럽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런 연무장과 단단한 무기에 대한 부러움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여성 이전에 검사로서, 한 명의 수련자로서의 부러움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돈.”

케마란은 문득 이 돈의 위세를 막지 못한 소드 팰러스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케마란이 아무리 원망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각자가 가진 신분은 땅에 그어진 선 하나만 넘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돈은 땅에 그어진 선을 넘어서도, 저 바다를 넘어서도 꾸준히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 검후라는 절대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평민과 귀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는 그저 개인이 가진 재주와 실력을 중요하게 보았을 뿐이었다.

소드 팰러스에서는 개인의 신분을 보지 않는 룰도 여기서 시작됐다.

하지만 사람은 어차피 먹고 마시고 자야 한다. 그러자면 당연히 돈이 필요했고, 이것은 검후도 도저히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소드 팰러스에 편의 시설이 늘어나고 거주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상주하는 상인이 많아지면서 돈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 연무장은 그런 돈의 힘을 소드 팰러스 안에서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수련을 하자면 자잘한 불편함이 많을 수밖에 없다. 목이 마를 때 마실 물과 땀을 닦을 수건, 땀에 젖어 갈아입을 옷과 부러진 검의 교체 등등.

고수들이 제자를 두는 것은 자신의 재주가 끊어지는 것을 막고 세상에 자신의 깨달음을 알리기 위한 고귀한 것이 아니라 이런 귀찮은 일들을 떠넘기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연무장에서는 이런 귀찮은 모든 일을 대신 해 주고 있었다.

연무장을 일정한 가격을 받고 대여해 주는 조건으로 말이다.

덕분에 대여 비용은 비싸지만 신청자는 줄을 서 있는 실정이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 소드 팰러스를 찾는 사람들 중에 돈이 궁한 사람은 많지 않은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케마란은 연무장을 사용할 돈도 신청 순서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부러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케마란은 마음을 고쳐먹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그래, 이런 좋은 연무장으로 네리베르가 안내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금으로 장식된 황제의 연무장도 오늘은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야!”

케마란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콧김을 킁킁 뿜어 내고는 이드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어서요!”

“어, 그래.”

마치 빌려준 돈 받으러 온 사람 같은 박력에 밀려 이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마란은 그 모습에 어떠냐는 듯 네리베르를 바라보았다.

네리베르는 작게 혀를 차고는 일리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케마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또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리베르도 무작정 이 상황을 지켜만 볼 생각은 없었다.

“일리나 님, 이 케익을 드셔보시겠어요?”

“어머나, 예뻐라.”

“연무장을 운영하는 비오비 상단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제품이랍니다. 호호호.”

네리베르는 화려하게 장식된 달콤한 조각 케익을 보고 살그머니 볼을 붉히는 일리나의 모습에 마주 웃으며 마음속으로 불끈 주먹을 쥐었다.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쏘랬지. 목적을 위해서 상대의 가족을 공략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케마란 넌 가르침을 거래로 따냈지만, 난 친분으로 따내면 되는 거 아니겠니?’

꾹꾹.

그렇게 네리베르가 마음속으로 득의할 때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네리베르의 눈에 보인 것은 한껏 도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미아였다.

[나는?]

“…….”

이 순간 네리베르는 위기라는 것을 느꼈다.

설마 쏴야 할 말이 두 마리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던 그녀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네리베르는 금속으로 된 말을 잡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이드는 다시 직원을 불러 가져온 창을 가볍게 휘둘렀다.

좀 더 쉽게 케마란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면 그녀의 링스피어와 비슷한 무기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워낙 검을 고집하는 소드 팰러스라서 검을 제외한 다른 무기가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 염려가 무색하게 연무장을 운영하는 비오비 상단에는 없는 무기가 없었다.

이드가 창을 가지고 연무장에 올라서자 케마란이 기대 어린 얼굴로 말했다.

“뭐부터 할까요? 제가 수련한 기술을 보여 드릴까요? 아니면, 바로 대련을?”

뭐가 그리 급한지.

이드는 사탕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 같은 모습에 끌끌 웃고는 링스피어를 건네받고 창을 내밀었다.

“링스피어를 이용해서 싸우는 모습은 일전에 충분히 봐서 따로 볼 필요는 없어. 대신 창술을 좀 보자. 아무래도 링스피어를 다루기 위해서는 창술도 배웠겠지?”

“네. 창술뿐만 아니라. 핼버드와 팔치온도 반년씩 배웠어요.”

“그럴 테지.”

“물론 배운 것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링스피어는 창이나 팔치온과는 달라요.”

“당연하지.”

이드가 자신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케마란은 신이 났다. 그녀는 자신이 링스피어를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링스피어를 수련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이드는 케마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케마란의 링스피어를 바라봤다.

길이는 2.5m가량에 날은 85cm 정도. 전체적으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날 끝이 특히 굽어 있다. 분류를 하면 미첨도지만 이드가 알고 있는 모습과도 조금 다르다.

물론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도 아니고, 만드는 장인의 생각과 기술에 따라 모든 무기는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봐도 일반적인 미첨도와는 조금 다르다.

확실히 미첨도가 아니라 링스피어다.

검에 소질이 없지만 인생을 검에 빼앗긴 검을 사랑하는 소녀가 창술의 재능을 가지고 만들어 낸 무기였다.

“그래서 결국 크고 작은 원을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링스피어를 수련했습니다. 링스피어라는 이름도 이 끝없이 이어지는 원의 모습을 따라지었어요. 원래 이름은 윙소드였거든요.”

“윙소드.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이름이네.”

윙소드면 어떻고, 링스피어면 어떤가.

검을 사랑하는 소녀의 꿈을 먹고 태어난 무기다. 그녀가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여도 분명히 어울릴 것이 당연하다.

이드가 링스피어를 손목에서 한 바퀴 굴리자 링스피어가 그 원을 따라 어깨를 넘고 가슴을 지나 허리에 감기다 섰다. 마치 물이 흐르는 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네 생각은 옳아. 원래 링스피어를 사용하는 방법의 가장 큰 틀이 바로 그 원이지.”

지금까지 오로지 본인의 생각만으로 달려온 케마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링스피어라는 무기를 만들어 낸 것도 그러하고, 링스피어를 수련할 가장 중요한 맥락을 잡은 것도 그렇지만 너는 링스피어에 있어서는 천재다. 하지만 천재도 실수는 하고, 길을 잘못 들기도 하지. 기초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천재에게도 크다. 그리고 링스피어의 기본은 창에 있지. 그러니 기초를 좀 보자. 기초를 보고 나갈 방향을 정하자.”

“넵!”

전 이드가 자신에게 천재라고 말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창을 받아 든 케마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간 케마란은 수년 전 배웠던 창술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펼쳐내기 시작했다.


이드가 케마란을 가르치고 있다.

이드를 감시하라고 붙여 놓은 요원에게서 보고를 받은 클라인 백작은 급하게 뛰어와 연무장을 내려다보다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이 아니라 창술이란 말이지. 애매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