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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37화


674화

“어지간히 실망했나 보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네리베르까지 나서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이전이었다면 끝까지 티를 내지 않았을 텐데, 이드와의 만남을 계기로 케마란과 붙어 다니며 네리베르가 그녀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것 같았다.

일리나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구경하는 것보다, 이드를 더 후안무치한 인간으로 몰아가기 전에 소소한 오해를 푸는 게 급해 보였다.

거짓말쟁이 다음으로 쏟아 낼 말을 준비해 둔 듯 삐죽거리는 저 입술을 봐라.

“케마란, 지금 하려는 말 하기 전에 이리로 오세요. 이드가 약속에 늦는 경우는 있어도 거짓말쟁이는 아니니까.”

“하지만 마스터가 황궁으로 갔다면 저희와 한 약속을 어긴 거라고요.”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 내민 케마란이 불만을 숨기지 않고 일리나에게 다가갔다. 화는 났지만 일리나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 선 네리베르가 케마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기대가 무너져 케마란을 따라 속내를 밝히고 말았지만, 은근한 일리나의 말에 자신들이 모르는 뒷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리나 님이 여기 있잖아. 마스터가 그렇게도 사랑하시는 일리나 님을 그냥 두고 가셨을 리가 없지.’

그래서 일리나가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에 자신들도 이드가 떠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케마란도 이런 상황을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최근 들어 익숙해진 네리베르의 옆구리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한 건지, 여전히 오리 주둥이를 했지만 조용히 일리나의 말을 기다렸다.

제법 쿵짝이 맞는 두 사람을 확인한 일리나가 두 사람을 위해 상의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두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약속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두 사람이 아직 그런 큰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 무엇보다 곧 이어질 토벌전 같은 전장에서 두 사람이 혼란하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 특별 수련을 진행하기로 했다는 것.

그것을 위해 이드를 따라 황궁에 가는 일은 뒤로 미루었다는 것 등을 말이다.

“아…….”

이야기를 들은 두 수련생은 수긍할 수밖에 없어서 아쉬운 감정만 쏟아 냈다.

자신들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는 사실은 고맙고 감격스러울 따름이지만, 이드와 함께 황궁에 데뷔한다는 역사에 남고 가문에 남을 거대 이벤트의 참가 기회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너무 아까웠다.

차라리 고집이라도 부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하게도 두 사람 모두 이것이 얼마나 큰 배려인지 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의 은근한 기대를 알지 못했던 일리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실망이 크네요. 준비만 끝나면 곧 이드를 따라갈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감이 사라지면서 힘이 빠졌어요.”

어깨를 축 늘어트린 네리베르와 케마란이 차례로 자신들의 심경을 밝혔다. 일리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호호하고 웃었다.

그녀는 이드가 있을 때는 풀어 두고 있던 검을 손에 쥐고 일어나며 말했다.

“저런, 큰일이네요. 당장 오늘부터 힘쓸 일이 많을 텐데 힘이 빠지다니.”

“하지만 수련은 이미 익숙한걸요.”

케마란이 일리나를 따라 일어나며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평범한 수련이면 특별이라고 말하지 않겠죠? 그리고 두 사람을 위해서 준비한 건 그게 다가 아니에요. 두 사람은 오늘부터 은색 기사단의 일원이 될 테니까 긴장해야 할 거예요.”

“네?”

일리나의 말을 비로 이해하지 못한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한발 늦게 일리나의 말을 이해하고는 일어나다 말고 소파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은색 기사단의 기사라니.

물론 이것은 소드 팰러스의 모든 여수련생들의 목표이며, 두 사람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목표를 갑자기 이루게 될 줄이야!

“저, 정말인가요?”

“후훗,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죠? 오늘부터 저와 함께 화원에서 살아야 하니까 어서 일어나요.”

가벼운 웃음으로 질문에 답한 일리나가 뚜벅뚜벅 걸어 나가자,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허겁지겁 급히 뒤따랐다.

마침 수련장을 돌아보고 온 록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와 말했다.

“꼬맹이들이 벌써 왔군요. 화원으로 가십니까?”

“네. 수업을 위해서 가끔 들르겠지만 수련생들과 저택을 잘 부탁드려요.”

“하하하, 맡겨 주십시오.”

일리나 앞에 호탕한 모습을 보인 록이 슬쩍 목을 꺾어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살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흐흐, 좋은 시절은 이제 끝이다. 이 꼬맹이들, 각오 단단히 하고 덤벼들도록.”

“네, 넵. 선배님.”

“빨리 따라가 봐.”

경고인지 격려인지 헷갈리는 말에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이 급히 일리나를 따라갔다.

록은 그 모습을 훈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끼는 후배들의 성장은 언제나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록은 까칠해지기 시작한 턱을 북북 긁으며 말했다.

“그런데 마스터가 떠난 일이 벌써 꼬맹이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말이지. 감시하던 놈들의 입을 탔다고 해도 너무 빨리 퍼지는데.”

에단이 소드 팰러스의 소식통이라고 칭할 만큼 소문에 빠삭한 록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이상이었다.

“결국 누가 일부러 뿌렸다는 이야기인데… 저택 관리로 시간도 많이 비니 한번 쑤셔 볼까? 혹시 뱀의 꼬리가 나올지 모르지.”

오랜만에 정보통으로서의 감이 작동한 록이 발걸음도 가볍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일리나 님, 혹시 저희들의 은색 기사단 입단이 마스터 때문인가요?”

말없이 일리나의 뒤를 따르다가 겨우 생각을 정리한 듯 네리베르가 물었다.

일리나가 걸음을 멈추고 네리베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진지했다. 

“그렇게 생각해요?”

“현재의 상황과 특별 수련을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요?”

“만약 그런 이유라면 저희가 은색 기사단에 입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호하게 끊어 말하는 네리베르의 얼굴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보였다.

“……”

나란히 걷고 있던 케마란은 신음하며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네리베르와 달리 일단 찾아온 기회는 잡고 보자는 쪽이었다. 정말 입단의 사유가 그러하다면 이후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된다. 굳이 많은 사람의 배려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쩐지 이제 제법 마음이 맞는 친구의 고집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취향이 아니라는 것뿐, 자존심을 챙기는 모습이 싫은 것은 아니니까.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지 자존심과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케마란이다.

그냥 뒀다가는 당장 저택으로 돌아갈 기세에 일리나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물론 전혀 관계가 없진 않아요. 하지만 이드는 계기일 뿐이고, 실제 두 사람의 입단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짧은 시간 크게 성장한 실력을 스폴 경과 데일리 경이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오해하지 않아도 돼요.”

“언니들이요? 역시!”

케마란이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그녀도 어느새 사적인 자리에서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을 언니라고 살갑게 부르고 있었다.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던 네리베르도 어느새 얼굴을 풀었다.

“그래도 마냥 좋아하진 말아요. 은색 기사단의 기사가 된 이상 더는 귀여운 동생으로만 취급해 주진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누가요?”

“쉴라 경이요.”

“…..”

일리나를 통해 전해진 쉴라의 말에 네리베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과연 그렇겠지요. 더 이상 아는 동생이 아니라, 같은 기사단의 동료가 될 테니. 그냥 귀여워만 해 주지는 않으시겠죠. 기사단 훈련 때처럼 우리들에게도 엄하게 가르치는 게 당연해요.’

그녀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케마란은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 듯했지만, 개구멍을 통해 화원에 기어들었던 그녀는 쉴라의 말뜻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락을 받아 가끔 볼 수 있었던 은색 기사단의 철저한 훈련과 그때 적용되는 냉혹한 규율이란!

평소 자신과 장난치던 것이 정말 동생으로 생각하고 귀여워해 주기만 한 것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그 속에 속하게 된다.

네리베르는 긴장과 함께 은근한 두려움으로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왜 그래?”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둥그런 눈으로 돌아보는 케마란이 이때만은 참 부러웠다.

“당신의 무지가 때론 부럽군요.”

“이 좋은 날 왜 뜬금없이 시비야?”

“화원에 가면 자연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쉴라 단장님이 하셨다는 말씀 들었죠. 마음의 준비나 단단히 하세요.”

“음, 알았어.”

평소라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을 다툼거리였지만, 과연 이 정도 되면 케마란도 느끼는 바가 있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나는 긴장한 둘과 함께 화원에 도착했다.

화원을 지키던 기사들은 일리나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 주었다.

평소라면 반갑게 맞아 주었을 기사들의 딱딱하고 강렬한 눈길에 쉴라가 했다는 말이 떠올라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문을 넘어 들어선 화원 안에서는 기사들이 나와 각자의 무구를 손질하고 있어 여기저기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꼭…… 전장에 나가는 것 같네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 네리베르가 감상을 말했다.

“잘 봤다. 곧 큰 전투가 있을 거다. 우리들은 지금 그 준비 중이고, 전장에서 무구는 또 다른 자신. 갈고닦아 최상의 상태로 전장에 서야지.”

기사들 사이로 걸어 나온 쉴라가 네리베르의 말에 답해 주었다.

“잘 오셨습니다, 일리나 님.”

“반겨 주셔서 고마워요.”

일리나와 인사를 주고받은 쉴라가 그녀 뒤에 서 있던 네리베르와 케마란을 바라보았다.

자상하게 느껴지던 평소와 달리 덤덤하고 무거운 눈빛을 받은 두 사람의 동작이 저절로 굳어지더니 어깨와 등이 펴지며 가슴도 쭉 펴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쉴라의 눈빛이 마법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몸은 저절로 움직여 버렸다.

‘과연, 이것이 진짜 은색 기사단장님의 위엄!’

분명 무섭지만, 이런 사람이 지휘하는 기사단의 기사가 된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쉴라는 자동으로 부동자세가 된 두 수련생들을 한참을 지긋이 바라보다 긴장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리나 님이 해 주시는 설명은 들었나?”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이미 너희가 은색 기사단과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나도 너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오늘부터 너희는 우리 은색 기사단의 수련 기사다.”

“…..!”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무슨 문제 있나?”

있다. 수련 기사라니.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던 케마란이 말했다.

“수…………련 기사라고 듣지 못했습니다.”

“당연하다. 너희의 실력이 뛰어남은 인정하지만, 실전도 치르지 않은 애송이를 누가 단번에 기사로 인정하겠는가. 한 번의 전장을 통과하기 전까지 너희는 수련 기사다. 그리고 현재 너희가 할 것은 실전을 통과하기 위한 특별 수련이다.”

“아………..”

이드에 이어, 은색 기사단에서까지!

“미안해요. 말 전달을 잘못했나 봐요.”

일리나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두 번 연속 기대감을 허무는 기운 빠지는 소리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다.

그 모습을 웃어넘긴 쉴라가 뒤에 서 있던 스폴을 향해 신호하자 그녀가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어깨를 잡아끌고는 기사들을 향해 던지며 외쳤다. 

“신병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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