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49화


686화

링스피어에 잘린 머리카락이 날렸다.

마치 데이노스의 얼굴을 쪼개는 것 같아 보였던 공격은 아쉽게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순간 데이노스의 머리가 링스피어에 꿰이는 줄 알고 놀랐던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 사이에서 아쉬움과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얕았어. 아악! 아까워!’

하지만 아장 아쉬운 사람은 누가 뭐래도 케마란이었다. 그녀는 데이노스가 링스피어에 익숙해지기 전, 처음으로 가한 공격이 유의미한 공격을 가할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을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과는 별개로 그녀의 링스피어는 쉬지 않고 회전하며 작은 방패를 타고 넘어 데이노스의 뒤통수를 노렸다.

‘과연, 휘어진 날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가? 재밌는 무기군.’

연속되는 변칙적인 공격에 사나운 미소를 지은 데이노스가 앞으로 나가던 속도와 허리의 탄력으로 링스피어를 밀어내며 동시에 케마란의 허리를 베었다.

쉬쉬쉭!

어중간한 것은 없다는 말대로 그의 검은 빠르고 맹렬했다. 대련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말 허리가 두 동강 날 것 같은 위기감에 저릿한 아랫배에 단단히 힘을 준 케마란이 방패에 밀려난 링스피어를 회전시켜 자루 끝부분을 이용해 검을 막아 냈다.

쩌르릉!

“큭!”

그 순간 손바닥을 찢을 듯한 충격 때문에 본능적으로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은 케마란의 눈에 검의 뒤를 이어 다가오는 방패가 보였다. 

‘이 선배, 후배를 상대로 진짜 너무하네!’

잠시의 틈도 주지 않는 공격에 반사적으로 투덜거린 케마란이 떨리는 링스피어의 자루 끝부분을 차 뒤로 눕히고 날 아랫부분을 잡아 방패를 막았다.

투퉁!

방패를 이용한 타격은 막았지만 방패와 링스피어가 전달하는 힘이 달랐다. 데이노스는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케마란은 두 걸음 물러서며 충격을 해소함과 동시에 허리에서 회전시킨 링스피어를 쏘아 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그녀의 공격은 첫 공격을 제외하고는 데이노스에게 위기감을 안겨 주지 못하고 철저하게 막혔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링스피어가 그녀의 손목과 어깨, 허리와 가슴, 다리 등을 회전했다.

강력한 데이노스의 힘을 상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회전에서 나오는 힘을 빌리지 않고는 그의 공격을 상대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공격의 속도가 늦어져 계속 뒤로 물러나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방의 속도가 올라가면서 링스피어가 마치 그녀의 몸을 감싸는 갑옷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이렇게 넓은 대련장을 잘 사용하는 것도 실력이야.’

데이노스의 공격을 피하고 한 박자 느리게 공격을 시도하며 케마란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리저리 대련장 사방을 들쑤시며 도망 다니는 스스로의 모습이 못나 보여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젠장. 역시 첫 공격에서 한칼 먹여야 했어. 그것만 제대로 들어갔어도 지금 상황이 달라졌을 텐데. 아니, 최소한 지금 모습이 좀 덜 부끄러웠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 어쩌면 이길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자신이 참으로 바보처럼 느껴졌다.

강력하고, 빠르고, 단단하고, 냉정한 이 기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하지만 어쩌겠어. 더글라스 경 탓이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시니까 내가 착각을 한 거 아냐. 그것만 아니었으면 벌써 항복했을 거라고!”

케마란은 그렇지 않아도 네리베르에게 패배해서 절망하고 있는 더글라스에게 책임을 미뤘다.

속으로는 연신 투덜거렸지만 데이노스의 공격을 피해 바닥을 구르고 발딱 일어나 간격을 벌렸다. 데이노스를 살피는 케마란의 눈에서는 링스피어를 사용한다고 따돌림당할 때의 악바리 근성이 이글거렸다.

하지만 근성이 좋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두 번이나 더 바닥을 굴러야 했다.

전혀 케마란의 상태를 봐 주지 않는 데이노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드가 봤다면 나려타곤(懶驢打滾)의 고수라고 할 만한 구르기였다.

“젠장! 젠장!”

“입이 거칠다. 투지가 거친 것은 좋지만 기사라면 품위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주의해라.”

한참 바닥을 구르고 거리를 벌려 일어난 케마란을 향해 데이노스가 잠시 공격을 멈추고 말했다. 그의 말은 기사 자격이 없는 수련생을 향한 말이 아니라 기사로 인정한 후배를 향한 말이었다.

“그럼 기사답게 후배도 잘 이끌어 주십시오, 선배님. 너무 엄격하십니다.”

“수련은 실전처럼. 그게 기사다운 거 아니겠나. 그리고 지금 쉬어 주었지 않나. 그럼 다시 시작하지. 나도 그 링스피어라는 물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거든.”

“그거 반갑지 않은 말씀입니다앗!”

케마란은 말과 함께 달려드는 데이노스의 공격을 발악하듯 외치며 막아 냈다.

잠시 쉬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넓은 대련장이 좁다고 느낄 만큼 바쁘게 돌아다니며 공격과 방어에 전념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는 잠시도 투덜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흐아아앗!”

쩌엉! 꽝!

그것은 위험한 상황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한 그녀의 버릇이었다. 어지간한 상대여야 진지하게 집중하지, 지금과 같이 공격과 방어를 생각한 후에 움직여서는 싸울 수 없는 상대에게 그런 방식으로 맞서 봤자 오히려 몸을 굳게 만들 뿐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용병들과 함께 실전을 겪은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손과 뼈에 새겨 놓은 수련의 결과를 믿고 본능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하고 움직이면 이미 늦다 이거야. 최근에 이드 님이 상대해 주면서 이런 경우는 익숙하다고!’

빠악!

“케엑!”

그리고 그렇게 자신한 다음 순간, 옆구리를 가격당한 케마란이 바닥을 굴렀다. 자고로 성급하게 설레발을 쳐서 잘되는 경우가 드문 법이다. 

“에구, 아프겠다.”

지켜보던 여기사 하나가 자신이 당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버텼어. 기특하게.”

“상급 기사를 상대로 저만큼 버틴 것만 해도 충분히 기특해. 그보다 저 링스피어 쓸 만한 것 같지 않아?”

“나도 그 생각했어. 보기보다 위력적인 무기야. 상대에게 낯설다는 이점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도 상급 기사를 상대로 저만큼 버티고 있는 건 링스피어의 역할이 적지 않은 것 같으니까.”

케마란의 선전으로 인해 함께하는 링스피어의 모습에 관심을 보이는 기사들이 생겨났다.

주먹을 쥐고 대련을 지켜보던 네리베르가 그 이야기에 반응했다.

‘선배 기사들이 링스피어를 인정하기 시작한 건가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드 팰러스에 어울리지 않는 무기라고 경원시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급격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케마란 양이 들으면 기뻐할 이야기네요. 어쩐지 제 승리가 빛이 바래는 느낌이지만요.”

하지만 분한 듯 꼭 문 입술은 웃고 있었다.

그 사이 대련장 위에서 미친 것처럼 싸우고 있던 링스피어에 검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리베르는 케마란의 링스피어는 내공을 사용할 때 진짜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신도 이겨 버리세요.”

꽈꽝!

네리베르의 말대로 내공이 깃들기 시작하자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부터 달라졌다. 섬뜩하면서도 강렬한 폭음.

그러나 정작 케마란은 스스로 검기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긴장을 풀고 좀 더 본능적인 움직임을 행하기 위해 떠올리던 잡생각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녀는 어느새 깊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을 쏟아 낸 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데이노스의 일격, 일격에 정신과 몸을 쥐어짜 막아 내기를 반복하던 중에 빠져 버린 고도의 정신 집중 상태였다.

그녀는 그와 같은 상태에서 기묘한 환상을 보고 있었다. 데이노스의 찌르기 앞에 다양한 형태를 취한 수십 명의 자신이 늘어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자신의 모습이 일순간 하나로 합쳐지며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데이노스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저기에서는 저렇게 하면 됐었구나. 왜 지금까지 몰랐지?’

그녀는 마냥 신기했다. 그리고 마냥 신기한 그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데이노스와 자신이 작아지고, 대신 공격과 방어 등의 다양한 자세를 취한 자신의 수가 늘어났다. 수십에서 백으로, 또 백에서 수백으로, 그리고 수백에서 수천으로.

‘어, 근데 내 대련은? 진 건가? 그럼 이건 꿈? 꿈이라서 검기까지 쓰는 거야?’

그 기묘한 재미에 빠진 케마란은 대련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지만, 곧 쉽게 넘겨 버렸다. 제삼자의 자신이 되어 자신의 대련을 지켜보는 이 기묘한 순간.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평한 마음이 그녀의 집중력을 더욱 크게 키웠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그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검기를 발현한 그녀에 의해 지켜보던 기사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가장 놀란 사람은 데이노스였다.

아무리 남자가 여자보다 강해도 검기를 사용하는 이를 맨몸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황급히 검기가 넘실거리는 링스피어를 막아 낸 데이노스가 고요하게 잠들었던 내공을 일으켰다.

우르르릉.

전신이 가늘게 떨리는 기분 좋은 진동이 느껴졌다.

“이것 참 건방진 후배님이구먼.”

데이노스는 맨몸으로 검기를 막아 내느라 뻐근한 팔을 뒤틀며 스위트를 바라보았다.

검기를 사용한 대련.

그것은 큰일을 앞두고 있다는 말로 암묵적으로 검기 사용을 금지한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을 받은 스위트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판단으로는 당연히 대련을 막아야 한다는 쪽이었지만, 어쩐지 케마란의 상태가 기묘했기 때문이다.

그때 쉴라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련을 계속 진행하라는 신호를 보내 왔다. 스위트는 단장의 얼굴에 떠오른 기묘한 기대감을 보고 자신의 느낌대로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속행한다!”

애초에 멈춘 적도 없지만!

“데이노스 경의 공격이 거칠어서 위험할 수도 있는데, 괜찮을까요?”

과연 내공을 사용한 대련과 그렇지 않은 대련은 달랐다. 앞서와 속도, 박력, 그리고 폭음까지 모두 확연히 달라진 대련장의 모습에 스폴이 눈을 돌리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괜찮아. 만약의 사태에는 내가 나설 테니까. 다치기는 해도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다치는 것과 위험한 것이 뭐가 다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말에 스폴이 잠시 멈칫한 사이 쉴라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과연 스폴 경이라면 멈출 수 있겠어?”

그냥 스위트에게 대련 중지를 명령하면 되는 일을 어째서 묻는 것일까. 하지만 스폴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기합과 신음도 없이 무표정한 듯 몽롱하지만 한없이 깊게 침잠한 케마란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좀 고민되네요.”

“호호호, 그렇지? 케마란 경은 지금 깊게 집중한 상태야. 대련에 미친 듯 집중해도 운이 없으면 찾아오지 않는 기회잖아? 저 순간을 잘만 지나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지.”

“그래서 고민됩니다.”

위험하다고 멈추기에는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아깝다. 저와 같은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걱정하고는 있지만 이미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기대해, 대련에서 기회를 얻은 것도 그녀의 행운이야. 데이노스 경이 잘 처리해 줄 거야.”

쉴라의 말에 스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데이노스가 그 말을 들었다면 지나친 기대는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더럽게 걸렸구나.”

쉴라의 기대와 달리 데이노스는 현재 상황이 난감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