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52화
689화
도대체 저것이 제국의 후작에게 할 말인가!
‘이, 이러면 후작 각하 앞에서 그를 마인드 마스터에 비유해 가면서까지 극찬했던 내 입장이 뭐가 되냐고!’
벤 자작은 당장에라도 칭찬했던 일을 취소하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이드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놀라기는……………?
이드는 숨넘어갈 듯 컥컥거리는 벤 자작의 숨소리에 혀를 차며 후작을 살폈다. 후작의 입장에서는 무례하게 들렸을 법한 말인데도 그의 얼굴에는 한 점 흔들림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불쾌하지 않은 것인지, 속으로 이를 갈면서 티를 내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벤 자작님은 제 말에 놀라신 모양인데, 후작님은 어떠십니까? 제 말투가 좀 자유분방하지요.”
일반 평민과 귀족 관계였다면 크게 경을 쳤을 일이지만, 후작은 인상 좋게 웃어 보였다.
“후후, 자작은 몰라도 나는 신선해서 그런지 나쁘게 들리지 않는다오. 오히려 제국의 새로운 사검왕과 친해진 것 같아 기쁘군.”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벤 자작의 걱정이 무색한 순간이었다.
“사검왕이라니. 후, 그러지 마십시오. 민망합니다.”
이드가 눈을 가리며 민망해하자 그저 사양하는 뜻이 아님을 안 후작이 매우 이상해하며 물었다.
“공후(公侯)의 자리보다 얻기 힘든 칭호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시오?”
“그것도 있지만 그 이름에 한정되어 묶여 있고 싶지 않습니다.”
“오!”
이드의 말에 후작이 감탄하며 날카롭게 눈을 반짝였다.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자유 기사를 꿈꾸는 자의 낭만적인 말이지만, 정치인인 후작의 귀에는 사검왕 정도로는 자신을 잡을 수 없으니 그 이상을 원한다고 들렸기 때문이다.
“검왕의 칭호를 한계로 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오, 하나, 한편으로 이해하오. 사검왕은 소드 팰러스의 상징으로 한정된 이름. 아무려면, 제국의 영웅인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담기에는 너무 비좁지. 무엇보다 그 앞에 세 명의 검왕도 있고.”
이드는 자신 앞에 삼검왕이 있음을 은근히 거론하며 간을 보는 후작의 말에 내심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런 이유는 사소한 것일 뿐, 진짜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지요.”
“호오, 검왕과 소드 팰러스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언지 궁금하구려.”
“그 이야기를 들으러 오신 건 아니실 텐데요?”
엉뚱한 소리 말고 방문 이유나 밝히라는 이드의 말에도 후작은 느긋하게 미소를 보였다.
“후후, 이것은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경의 잘못이라오. 그리고 우리가 친해지기 위해서도 서로에 대해서 알아 둘 필요가 있지.”
‘히야, 과연. 이런 게 정치적 언변인가? 친구 하자고 한 적도 없는데 저런 말이 술술 나와?’
후작의 유들유들한 말솜씨에 이드는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후작님과 친분을 맺게 되는 것은 영광이지만, 정말 별것 아닌 이유입니다. 사람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법이니까요.”
“내가 듣고 싶은 것이 바로 그거요. 나는 이드 경이 중요히 여기는 것이 무언지가 궁금하다오.”
무심코 흘린 말인데 의외로 끈질겼다. 좀 더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리지요. 후작님께는 정말 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중요히 여기는 것은 수련, 과거와 현재의 인연, 그리고 악당 퇴치입니다.
정말 별것 아니지요?”
“아니오. 충분한 이유요. 수련과 악당 퇴치는 기사도에 따른 의무이며,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과의 인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소.”
그럴듯한 후작의 해석을 들은 이드는 문득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이 떠올라 웃고 말았다.
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벤 자작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당장 사검왕의 자리를 준다면 자신이 가진 기존의 가치는 고사하고 살아온 인생 모두를 부정할 사람이 부지기수다. 물론, 검왕에 어울리는 실력은 고려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사검왕 칭호보다 수련과 악당 퇴치가 더 중요하다고? 벤 자작은 이드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반면 후작은 이드의 말이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이드에 대해서 보고받았던 정보를 기반으로, 직접 만난 후 이드가 보였던 사소한 행동은 물론 말투 하나하나까지 더해서 분석한 결과였다.
‘모든 것이 가짜일 가능성도 있지만, 진심이라면 실로 골치 아픈 인사다. 과연, 괜히 삼검왕이 이자를 상대로 고생한 것이 아니구나. 이자를 황제 폐하의 뜻대로 쓰려면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
후작은 이드에 대해서 단정 짓지 않기로 했다. 그가 지금까지 파악한 이드는 목적이 있는 듯하지만 집착하지 않고, 거칠지만 계산된 행동을 보이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드의 본래 성격과 쉴라와 클라인이 쌓은 계획에 따른 모습이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후작은 그저 조심할 뿐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블러디 혼을 꺾은 강력한 힘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리 급하게 이드를 수도로 불러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오날도 후작은 참으로 미리 찾아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이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고자 대화를 길게 이어 갔다. 물론, 그 중간중간 삼검왕과 소드 팰러스에 대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도 빠트리지 않았다.
딸깍.
빈 찻잔을 내린 이드가 입을 닫았다. 선보는 것도 아니고, 잔이 빌 때까지 후작의 비위를 맞춰 줬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러다간 정말 끝이 없겠습니다. 차후 이야기는 다음에 하시고, 후작님이 이 밤에 찾아오신 진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긴 여행의 피로가 적지 않습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이드의 말에 후작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경이 말하는 것을 보면 내 저택에 발도 들이지 못할 뻔한 게 아닌가 싶어 무섭구려.”
“그럴까도 했지만, 친절한 저택의 집사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무서운 표정을 해서 나왔습니다.”
“무어요! 껄껄껄.”
크게 웃어 젖히는 후작의 모습에 이드는 그가 진실을 담은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웃긴가? 웃음 코드가 이상한 후작이네.’
한바탕 웃은 뒤 상쾌한 얼굴을 한 후작은 차게 식은 찻물을 냉수처럼 들이켜고는 호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했던 말처럼 짧은 대화를 통해 서로 친해졌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드가 보기에 이는 후작의 사람 다루는 하나의 방식 같았다. 후작과의 친분을 마다할 자는 없을 테니까. 그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었다면 누구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편으로는 가벼운 흥분으로 말실수와 함께 본심을 내비칠 수도 있을 것이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물론 이드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말이다. 이는 오로지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적당한 방법일 뿐이었다. 후작의 생각은 다른 듯하지만, 이드는 절대 그의 아랫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내가 이 밤에 찾은 것은 경의 탓도 있소. 설마 경이 황궁을 마다하고 이 저택에 머물 줄 내 어찌 알았겠소. 경은 혹시 황궁에 머물게 된다는 의미를 아오?”
“대충은 압니다.”
정말 잘 안다. 오랜 시간 전이지만 이미 황궁에 머문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는 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저택에 온 것이 아니겠소. 황궁에서 지낸다는 것은 단순히 거처를 해결하였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오. 황궁에 머문다는 것은 황제 폐하께서 인정한 손님이라는 뜻이며, 그것은 곧 제국의 이름으로 인정한 귀빈이라는 의미요. 즉 제국의 그 누구도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는 귀빈에게 어떤 위해도 가할 수 없다는 뜻. 이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오? 그리고 무엇보다 황궁의 귀빈으로 가장 큰 혜택은 언제든 허락을 받으면 황제 폐하와 대면할 수 있다는 점이오. 한데 경은 이런 황궁을 싫다 하고 저택에 머물고 있으니, 어떻게 황궁에 머문다는
의미를 안다 하겠소?”
후작이 열변을 토했다.
이드는 그의 반응에 혹시 방을 준비한 것이 후작의 뜻인가 싶었다. 과연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성의를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언짢을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방을 잡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거기다 후작의 말 안에 들어 있는 의미들. 바로 그것 때문에 황궁이 아니라 저택에 머물겠다고 한 것이 아니던가.
“딱 제가 알고 있는 대로의 의미입니다. 뭐,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 후작님의 말씀에 따르면 딱 저에게 맞는 의미군요.”
“확실히 그 의미를 알면서도 거절했다는 말이오?”
까딱거리던 후작의 손이 툭 멈추었다. 속으로 설마 하던 후작은 이번엔 정말 놀라고 말았다. 황궁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은, 작위와는 다르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실체를 가지는 권력이자 힘이었다.
황궁에 오래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고위 귀족을 포함한 황족과 인연이 깊다는 뜻이고, 그것은 절대 권력자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증거이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처럼 큰 의미를 가진, 황궁에 머무는 일을 그냥 결정할 리 없죠. 저는 이유 없이 그런 부담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허허, 이유라니………”
후작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한쪽에서 숨죽이고 귀를 기울이던 벤 자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하는 일에 이유를 찾다니. 그리고 이유가 없기는 왜 없다는 말인가?
“경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아니오? 황제 폐하께서 황궁의 손님으로 청하는 데 그보다 큰 이유가 있겠소?”
“아직 인정받지 못한 신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황제 폐하를 한 번도 알현하지 못한 제가 황궁에 머물다니…………… 이상한 일이지요. 전 복잡한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 낸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으음…….”
후작은 작게 신음했다. 이드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있지만, 결국 그가 황궁에 경계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 탓이다.
“경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리하시오. 그러나 경은 아마 조만간 황궁에서 머물고 싶어 할 것이오. 경의 수도 방문이 알려지면 적지 않은 귀족들이 경을 만나려고 할 테니 말이오.”
강권하는 것도 옳지 않다 생각한 후작이 짓궂은 미소를 보였다.
“내가 이 밤에 경을 찾은 것은 내일 경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여 하게 될 일을 사전에 논의하기 위해서라오.”
“논의할 일이 따로 있습니까?”
황제를 알현하고,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로 인증을 받는 일에 무슨 논의가 필요할까?
“물론이오.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지 않소. 특히 그 자리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임을 인증하는 자리라면 말이오. 그 인증이 잘못될 경우 참으로 곤란한 일들이 생기지 않겠소. 황제 폐하께서는 경이 꼭 인증을 통과하기를 바라신다오.”
그러지 않으면 너를 중심으로 상당히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협박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드는 그런 협박보다 후작의 묘한 말투에 의심이 들었다. 황제가 꼭 통과하기를 바란다? 그럼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아니라도 인증만 통과하면 된다는 말인가?
“황제 폐하께서도 신경을 써 주신다니 참으로 망극한 일입니다. 하면 논의할 일이란 것도 인증에 관한 것입니까?”
“그렇소. 또한 확인이기도 하오.”
“확인이라…….”
이드가 말의 의미를 곱씹는 사이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내 알기로 소드 팰러스에서는 경이 소유한 일라이져를 확인했으나, 그 외의 증거가 없어 판단을 유보하였소.”
“정확히는 증거를 원했지만 제가 보이지 않았지요.”
“그 또한 알고 있다오.”
후작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삼검왕과 이드간 불화의 시작이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면 후작께서도 제가 보이지 않았던 증거를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황제의 인정은 둘째 문제일 뿐, 이드도 황궁이 가진 확인 수단이 궁금하기는 했다.
이드가 관심을 보이자 후작은 조금 느긋해진 어조로 말했다.
“삼검왕에게 보였다는 일라이져를 내게도 보여 줄 수 있겠소?”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렇지 않아도 혹시나 해서 가지고 왔었다.
이드는 준비한 두 자루의 검을 후작 앞에 올려두었다.
일라이져와 나란히 놓인 검은 롱소드를 보고 가볍게 웃은 후작이 꽃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일라이져를 살폈다. 검에 조예가 깊지 않은 후작의 손길은 서툴지만 예술품을 감상하는 듯 조심스러웠다.
“일라이져는 본래 신전에 받쳐진 검으로, 향을 품고 있다 들었소.”
“뽑아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신전에 어울리는 고고한 향이지요. 가끔은 적을 베는 것이 미안할 정도입니다.”
조심스러운 후작의 태도가 마음에 든 이드가 권했다.
“그것은 황제 폐하께서 확인하시는 게 먼저일 듯하오.”
아쉬운 듯 손을 거둔 후작은 품에 손을 넣어 단단히 봉인된 한 권의 책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소드 팰러스에서는 여러 증거를 원했을지 모르지만, 황궁은 다르다오. 황제 폐하께서는 이것을 통해 경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지 확인할 것이오.”
“이 책이 무엇입니까?”
예상치 못한 물건의 등장에 이드가 고개를 내밀자 후작이 책을 덮고 있던 손을 치웠다. 그에 따라 황금을 녹여 만든 글자가 나타났다.
아나크렌 제국 비전, 난화십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