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53화
690화
“제국 비전?”
책 제목을 읽은 이드는 어이가 없었다.
동생처럼 작고 귀여운 소녀의 자유를 위해서 선물했던 무공이 제국 비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타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무공이 세상에 널리 퍼졌음을 질리도록 확인했고, 검후의 일기를 통해 그녀의 무공이 황궁에 남아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설마 제국 비전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내 무공이 언제 제국 비전이 된 거야? 진짜 너무하네. 나와의 관계를 선전 문구처럼 써먹으면서 정작 내가 전수한 난화십이식은 자기들 것이라고 포장해 놨네.”
마치 무공을 도둑맞은 것만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평소 아끼던 애장품에 오물이 묻으면 이런 기분일까. 못마땅한 눈으로 책을 살피던 이드가 그 내용을 보기 위해서 책장을 넘기려 했다.
그러나 책장은 마치 한 덩이의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손끝에서 견고하게 조여진 미세한 마력이 느껴졌다.
“봉인되어 있는 책이군요.”
이드가 책에서 손을 떼고 후작을 보고 말했다.
“제국의 보물이니 함부로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소. 게다가 이 책은 원본이 아닌 사본이며, 강제로 열려고 했다간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한다오.”
“후작 각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혹 고위 마법사 중에 봉인을 풀어낼 자가 있지 않겠습니까?”
난화십이식의 등장에 이드보다 놀라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벤 자작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감히 제국의 수도에서 누가 레오날도 후작의 품에 있는 물건을 훔쳐 낼 수 있겠냐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 벤 자작은 제국의 보물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 기쁘면서도 그 보물을 도둑맞게 될까 걱정이 앞섰다.
그런 마음을 읽은 후작이 기꺼운 듯 부드럽게 말했다.
“자작의 제국을 걱정하는 마음이 보기 좋소. 하나 걱정하지 마오. 제국과 내가 하는 일에 빈틈은 없소. 이 사본 안의 내용은 그저 원본의 일부이며 순서 또한 무작위로 나열되어 있소. 이 사본을 읽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오.”
“하하하, 역시 제가 헛된 걱정을 했습니다. 후작 각하.”
벤 자작이 걱정을 덜었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고개를 저으며 이어진 이드의 말에 뚝 끊어지고 말았다.
“후작님의 말씀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오?”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인증에 쓰실 것이니 이 사본은 검후께 전해진 난화십이식의 원본 내용을 담고 있겠지요?”
“당연하오. 그렇지 않다면 검증이 불가능하지 않겠소.”
수없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형된 내용으로 어떻게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검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안다면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말은 곧 제국의 비전을 연구한 자료가 새어 나갔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후작의 확인을 받은 이드는 봉인된 사본을 손에 들고 말했다.
“말씀처럼 이 사본만 가지고 난화십이식을 익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 있는 내용을 통해 다른 무공을 보완하고 살찌울 수는 있습니다. 검후께 전해진 난화십이식의 무언은 하나하나가 깊은 무리를 품고 있으니까요.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은 틀린 것이지요.” 무림만 하더라도 고수의 고언을 한 마디라도 듣기 위해서 간과 쓸개를 내줄 듯 따르는 무인들이 적지 않다.
후작은 이드의 말은 단번에 이해했다. 괜히 황제의 꾀주머니가 아니다.
“과연 경의 말이 틀리지 않소. 본 제국도 원본의 연구를 통해 많은 무공을 만들었으니까 말이오. 분명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겠소.”
이드는 후작이 단번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지나가는 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만약 검후의 난화십이식을 본 천재가 이 사본을 얻을 경우, 난화십이식의 아류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본에 원본 내용의 삼분의 일 이상이 담겨 있어야겠지만 말이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설마………….”
벤 자작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불신의 눈을 했다.
“천재가 왜 천재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천재입니다. 기본 소재가 있다면 더 쉽겠지요.”
이드는 케마란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상이 확실한 말에는 힘이 실린다. 벤 자작의 눈빛이 불신에서 불안으로 바뀌며 후작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후작 각하, 원본 분량의 어느 정도가 이 사본에…”
“경의 말을 듣자니 경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깊어지는구려.”
벤 자작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후작이 다른 소리를 했다. 그 모습에 벤 자작은 끙끙거리며 괜히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의외로 재밌는 사람이란 말이야.’
이드는 미어캣이 떠오르는 모습에 헛웃음을 짓고는 후작을 보았다.
“그렇다면 아직 확신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이 책을 가져오신 뜻은 황제 폐하 이전에 그 확신을 확인으로 만들고 싶으신 거고요.”
“바로 그렇소. 개인적으로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으나,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불민한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다오.”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사칭한 자를 벌하면 그뿐인데, 곤란할 것은 무엇일까? 이드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저에 대해서 황제 폐하께서 뜻하신 바가 있나 봅니다.”
“잘 보았소.”
“그런 논의할 일이 바로 그것이겠군요.”
“경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오. 황제 폐하께서는 경을 귀히 쓰시려 하오. 이전 마인드 마스터께서 제국에 베푼 만큼 말이오.”
대륙을 지배하는 삼대 제국 중 한 곳의 황제가 귀하게 여기겠단다. 거기다 선대의 공까지 적립해서 아마 이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격했을까?
‘모르지. 찾아보면 그런 호구가 있을지도. 하지만 최소한 나는 아니야. 이것들이 생각하는 꼴이 괘씸하네. 공이 있으면 상부터 줘도 모자를 판에 황제 밑으로 들어오라고?”
사실 공으로 따지면 90년 전 차기 황제를 구하고, 무공을 전수한 것만으로도 억만금을 내어 줄 판에 부하로 잘 쓰겠다고? 종을 가축처럼 여기던 과거 지구에서도 큰 공을 세우면 면천시켜 주었고, 주인을 위해 죽으면 제사까지 지내 주었다.
그런데 그렇게는 못할망정 오히려 부하로 부리겠단다.
애초에 황제에게 기대한 것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없던 반감도 생기는 법이다.
툭!
이드는 손에 든 사본을 탁자 위에 던져 버리고는 말했다.
“황제 폐하의 뜻은 감사하나 저는 원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기분이 조금 나쁘군요. 선대가 선의를 베풀었는데, 그 후대를 신하로 부려 은혜를 갚다니요. 뭔가 틀려먹은 것 같지 않습니까?”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감추지 않아 말이 거칠어졌지만, 후작은 그것을 탓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경의 말이 맞소. 그래서 황제 폐하의 뜻도 경을 단순히 신하로 부리는 것이 아니라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제국의 영광을 함께하려 함이오. 가족으로서 황제 폐하와 뜻을 함께함이 어찌 신하와 같겠소?”
“가………… 가족 말입니까?”
혹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이드는 귀를 파고 다시 물었지만 후작의 고개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움직였다.
“허…… 헐!”
“헐? 그건 무슨 뜻이오?”
“기가 막혀 어이가 없을 때 비명처럼 조건반사적으로 나오는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제게 아내가 있다는 건 알고 하시는 말입니까?” 이드는 어쩌면 이 후작이라는 양반이 자신에 대한 보고를 대충 읽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후작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경에 대해 알아보는 중에 이상한 것이 있었소. 바로 시온에서부터 동행하다 국경도시에서 사라진 엘프 여성과, 새롭게 동행하게 된 경의 아내에 대한 것이오.”
대답 대신 들려온 말에 이드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사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중간에 갑자기 동행인이 바뀌었는데, 국가의 정보기관이 그걸 모른다면 말이 안 된다. 언젠가 누가 되었든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것과 황제 폐하의 뜻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엘프와 경의 부인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있소.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타난 시점이 너무 절묘하기 때문이오.”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경은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을, 부인은 마인드 마스터의 연인으로 알려진 엘프의 이름을 이었소. 경 부부가 쓰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이름이기에 나는 이런 가설을 세웠소. 혹 선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니라 이복 남매가 아닐까 하고 말이오.”
“….죄송하지만, 좀 웃겠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한 이드는 방이 떠나가라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이복 남매라니! 일리나와 라미아가 직접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도대체 선대와 이름이 같다는 것으로 어떻게 저런 해석이 나오는 걸까.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 죽을 때까지 아마 이보다 우습고 어이없는 말은 듣지 못할 것 같았다.
쪼르르륵.
하도 웃어 목이 탄 이드는 차를 따라 시원하게 한입에 털어 넣고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멀끔하게 생긴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이 튀어나온 것일까.
의외로 에단처럼 제대로 짚어 내는 인물이 적은 것 같았다. 어쩌면 환경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현장에서 작전을 진행하는 에단은 기발하면서 한계를 두지 않는 쪽으로, 수도에서 정치를 하던 후작은 귀족들이 흔히 만들어 내는 출생의 비밀 쪽으로,
“너무 시끄럽게 웃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무래도 내 가설이 그만큼 경을 어이없게 만든 탓이겠지. 나야말로 민망하구려. 진짜 부부를 두고 남매라니. 하면 시온 숲을 나온 엘프와 현재 경의 부인이 동일 인물인 것만 맞은 모양이오.”
이드는 민망한 표정으로 마지막에 숨겨진 후작의 사실 확인에 흐늘흐늘 풀어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이복 남매라는 말을 꺼낸 건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거였나?”
레오날도 후작에 대해 들었던 것과 여태까지 경험한 후작의 이야기 방식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거의 확신하는 사실을 본인에게 직접 확인할 만한 사람은 아니니까.
“방금 실수는 잊고, 다시 이야기를 하자면 황제 폐하께서도 이미 인정하고 있소. 경에게는 특별히 황실의 가족이 된 후에 다른 부인을 두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오.”
‘이것 봐라. 일리나에 대해 물을 줄 알았는데 다른 이야기가 나왔잖아.’
예상 답안을 준비했던 이드는 허탈하게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왜 일리나에 대해서 묻지 않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일. 미묘한 패배감을 느낀 이드가 말했다.
“참 마음이 넓으신 배려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좁아 지금 있는 두 아내 이외에 다른 사람을 더 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허, 경에게 부인이 더 있으셨소? 모르던 사실이구려.”
후작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관심을 보이자, 이드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있고말고. 어디 백날 찾아봐라. 찾을 수 있나, 크하하!’
그렇지 않아도 이드가 어디서 왔는지 조사하고 있을 후작에게 또 하나의 궁리거리를 던져 주었다. 그의 수에 넘어간 것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아무튼 경의 뜻은 황제 폐하께 전하도록 하겠소.”
“……그걸로 끝입니까?”
너무 쉽게 물러서자 이것도 혹시 이복 남매 가설처럼 다른 사실 확인을 위한 미끼인가 싶다.
하지만 후작은 따로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소. 경이 분명한 뜻을 밝히지 않았소. 그리고 결혼은 하나의 수단일 뿐. 우리에게 앞으로 많은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만들어 나가면 될 일이오. 지금은 경에 대한 검증부터 끝내는 것이 먼저요.”
후작은 말이 끝나자마자 책 위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외웠다.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무한한 번영의 문을 여노라.”
츠즈즈즈ᅳ
그의 말에 따라 책과 그의 손에 낀 반지가 공명하며 희미하게 빛났다.
찰칵.
그리고 작은 소리와 함께 책의 모서리에서 작은 바늘이 튀어나왔고, 후작이 그 바늘에 손가락을 찔렀다.
송골송골 솟아오르는 작은 핏방울에 반응한 바늘이 사라지고, 미묘하던 마나의 공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봉인 마법이 해제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벤 자작이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의 피를 닦았다.
“후작 각하, 어찌 귀한 옥체에 피를………….”
“사본이라 하나 제국의 보물을 지키는 일에 당연한 일이 아닌가.”
후작은 자신의 말에 은근히 감동한 벤 자작을 두고 이드에게 말했다.
“그럼 경의 검증을 시작합시다.”
“그런데 그 검증 말입니다만, 제가 꼭 거쳐야 합니까?”
이드가 진중하게 무게를 잡은 후작을 보며,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뜬 후작과 벤 자작의 모습을 빙글거리며 만족스럽게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