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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56화


693화

“흥!”

허리를 숙여 정수리가 검후에게 드러난 순간, 라울을 노려보던 검후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와 함께 고고한 학처럼 앉은 그녀의 등 뒤로 수십 마리 흰나비들이 날아올랐다. 하얀 방 색깔이 나비들을 가려 마치 보호색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파라라락-

나비처럼 날아오른 그림자들은 곧 나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라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던 라울은 마침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런・・・・・・”

그 모습에 눈이 커진 라울이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황한다고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나비 같던 그림자들의 속도는 말 그대로 섬전. 이런 속도라면 진짜 나비라도 나무에 박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울은 흰 그림자를 피하려고도, 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흰 그림자는 라울의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끼기기기긱-

마치 유리판을 긁으면 날 법한, 귀를 찌르는 기괴한 소리가 텅 빈 공간에서 생겨났다.

뚝!

그와 동시에 하얀 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흰 그림자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추었다. 멈춘 그림자의 정체는 나비가 아닌, 작게 잘라 낸 종이 쪼가리였다. 파르르 떨리는 종이는 움직임이 정지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만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쯧쯧, 요구 사항을 적으라고 드린 것을 이렇게 사용하시다니요.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종이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이 천국의 방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겠군요.”

라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검후를 가둔 방이 휑하게 비어 있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단순히 누군가를 가두는 방이기 때문에 가구가 적은 것이 아니었다. 연락 사항을 적으라고 넣어 준 종이를 무기로 사용한 것처럼 가구 일부나 스푼, 심지어 입고 있는 옷까지. 방에 있는 물품들은 검후의 손에서 무기가 되었고, 그렇게 아홉 명이 죽어 나갔다. 괜히 그녀가 반바지에 티라는 민망한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국의 방이 아니라, 감옥 독방이겠지.”

검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허공에 떠 있는 종이에 집중한 그녀의 말은 길지 않았다. 태연한 표정과 달리 그녀의 정신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사정을 파악한 라울은 오히려 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독방이라니요. 검후님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있고, 검후님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이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하니 천국의 방이 맞지요.”

빙긋 미소를 더한 라울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 허공에 멈춘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허공의 종잇조각과 한 뼘을 남겨 두고 그의 손가락도 멈춰 버리긴 마찬가지. 자신의 손가락을 응시하던 라울은 그 너머 애써 태연한 표정의 검후를 바라보며 유리창에 그림을 그리듯 허공에 멈춘 종잇조각을 따라 움직이며 말했다.

“무한 차원 회랑. 손과 종이의 거리는 한 뼘. 하지만 이 한 뼘 공간의 거리는 무한. 어떤 공격도 무한한 거리를 넘어 닿을 수는 없지요. 이 회랑이 검후님으로부터 절 지켜 준 것이 몇 번째인지. 그만 포기하실 만한데요. 여러 가지로.”

“매번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포기라는 말을 알았다면 검후라 불리는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무한이라고? 이 대륙조차 무한하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 할지라도 한 뼘 안에 무한을 욱여넣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검후의 말은 짐작이 아니고 확신이었다. 당장 허공에 멈춘 듯 보이는 종이지만 그녀와 연결된 내공의 의지는 한없이 멀어져 가며 내공을 급격히 소모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요. 그러나 무한은 아니라 해도 이 한 뼘의 거리가 결코 가볍지는 않습니다. 과연 검후님의 공격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겠습니까? 일 킬로미터? 십 킬로미터? 정확히 모르지만 백 킬로미터를 넘지는 못하겠지요. 하하하.”

속을 뒤집는 웃음소리였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종이를 날려 보낸 비검 수법은 한계가 분명한 수법이었다. 무게가 아무리 가벼운 종이라 해도 지금 검후의 상태로는 일 킬로미터는커녕 그 절반을 넘기도 빠듯하다. 까득.

검후는 조롱을 담은 라울의 말에 이를 갈았다. 동시에 허공에서 뱅글뱅글 도는 손가락이 눈에 거슬렸다. 당장에라도 무한 차원 회랑을 넘어 저놈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종이와 연결된 그녀의 의지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종이와 그녀의 거리가 너무 멀어진 것.

검후가 한없이 나아가려 발버둥 치던 종이를 멈추었다.

“오, 이제 포기하십니까?”

“머리가 나쁘구나. 나는 그 말을 모른다니까.”

라울의 말에 싸늘히 답한 검후는 십여 장의 종이 뭉치를 다시 날렸다. 그리고 뒤에 날린 종이가 허공에 멈추는 순간, 먼저 날린 종이들이 힘없이 땅에 떨어져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내공의 보호를 받지 못한 종이가 빛의 속도로 분열하는 공간의 힘에 의해 부서진 것이다.

그 모습에 라울이 눈을 번뜩였다. 그녀가 앞서 날린 종이를 버리고 두 번째 종이 비검을 날린 이유를 안 것이다.

‘무한 차원 회랑의 유한성뿐 아니라 연속성도 알았는가. 과연 검후, 단순히 무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군.’

무한 차원 회랑은 검후의 말처럼 무한하지 않을뿐더러, 끊이지 않고 연속되는 힘에는 줄어든 공간이 그 상태에서 연속된다. 즉 회랑의 실거리가 십 킬로미터라면, 한 번에 일 킬로미터씩 연이어 열 번을 시도하면 반대쪽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검후는 몇 차례의 실패 속에서 이러한 회랑의 연속성을 알아낸 것이다.

물론 검후의 공격이 닿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줄 생각은 없지만, 포기하지 않는 근성에는 라울도 감탄했다.

그러나 감탄은 감탄으로 두고, 굳이 회랑의 연속성과 유한성을 확신시켜 줄 필요는 없다. 라울은 손장난을 하던 손을 들어 커다란 황금 수레바퀴를 만들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 방의 바닥과 천장, 그리고 양 벽에 녹아들어 일체화되었다.

“검후님의 놀라운 무공은 이후에 다시 보도록 하지요. 아무래도 원만한 대화를 위해서는 좀 진정하실 필요가 있어 보이니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라울의 손이 빙글 돌자, 수레바퀴가 우르릉하고 회전했다.

그 모습에 검후의 고운 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조급함을 드러냈다. 저 바퀴가 나타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빨리, 조금만 더 빨리! 놈이 말한 대로 정말 백 킬로미터는 아닐 터. 어서 끝을 보여라.’

검후는 이를 악물고 종이 비검을 날리는 데 온 내공을 집중하며 회랑의 거리를 줄여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달리 회랑을 건너는 것보다 라울의 조치가 먼저였다.

“곧 편해질 겁니다.”

부우우우-

라울의 말과 함께 깊은 비다 속 고래의 노랫소리 같은 진동이 방과 검후의 몸을 진동시켰다. 그리고 그 진동수가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흡!”

검후가 전신에 수 톤의 압력을 느끼며 숨을 토했다. 압력을 참아 내기 위해 붉어진 그녀의 목덜미에 핏줄이 솟았다.

그러나 애쓰는 것도 잠시.

라울이 수레바퀴를 조종하자 사방에서 투명한 중력파가 쏘아져 검후의 삼백육십 대혈에 닿아 기묘한 황금빛 문양을 만들었다. 그러자 한없이 뿜어지던 검후의 내공이 순식간에 힘과 통제력을 잃고 흩어졌다.

‘결국 이번에도!’

검후가 그 순간을 버티기 위해 질끈 입술을 깨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중복된 봉인으로 인해 전력의 70%만 겨우 사용하는 상황. 기존의 봉인과 합쳐진 새로운 봉인은 검후가 온전히 감당하고 견딜 만한 힘이 아니었다.

푸스스스—

결국 허공을 날던 종이와 함께 검후가 손에 쥐고 있던 수십 장의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말 빌어먹을 일이야.”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검후의 말에 라울이 수레바퀴에서 손을 뗐다. 동시에 중력파가 사라지고 황금빛 문양이 피부 아래로 녹아 사라졌다.

“너무 분하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감탄스러우니까요. 어떻게 그리도 매번 제가 걸어 놓은 봉인을 풀어내시는지. 과연・・・・・・ 검후님의 힘은 대단하군요.”

“그러는 네놈은 매번 다른 봉인을 잘도 걸어 두는구나.”

“하지만 검후님은 제가 다음에 오기 전에 봉인을 풀어 두시겠지요. 얼마나 빨리, 얼마나 완벽히 풀어낼지 기대하겠습니다.”

“흥!”

검후가 냉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기대한다는 라울의 말은 완벽히 진심이었다. 천국의 방과 검후의 몸이 동기화되는 공간. 진동을 매개로 라울의 초인기 진리를 훔쳐보는 황금안, 골드아이를 통해 전달되는 검후의 내공 운용은 매번 새로웠다.

어떻게 그런 기기묘묘한 길을 찾아 자신의 봉인을 무효화시키는지. 그 기발함과 교묘함은 보고서도 쉽게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반대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고도의 내공 운용을 담고 있기에, 검후의 무공을 연구하고 초인파에서 보유한 무공을 보완하는 연구 재료로써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럴수록 검후의 능력이 탐났다. 이리 오랜 시간 그녀를 가두고 끊임없이 회유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그녀의 정신과 육체를 약과 마법으로 주물러 얻을 것만 얻어 내고 처리했을 것이다.

‘무공에 관련한 그녀의 해석력과 연구 능력, 그리고 직관력은 굉장하다. 초인의 이유 모를 폭주를 막고, 완전한 부흥을 위해서 우리는 그녀의 능력을 꼭 손에 넣어야 한다.’

라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검후를 이렇게 두고 있는 것에 대한 내부적인 반대를 무시한 일은 확실히 의미가 있었다.

“이제 그만 고집을 거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대로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나쁘지 않아. 나보다는 네놈들에게 애타는 시간일 테니까.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지.”

검후가 실패했다는 절망을 한숨으로 털어 내며 다리를 꼬았다. 백 살이 넘는 나이와 중년으로 보이는 인상이 무색하게, 탄력적이고 육감적인 육체가 요염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염기(艶氣)에 홀려 단숨에 목이 떨어진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라울은 아예 그런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협력만 해 주신다면 제가 말했던 모든 조건이 그대로 이행될 겁니다. 검후님께 절대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납치 감금범의 약속을 믿을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다.”

“그러나 믿지 않아도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소드 팰러스를 생각하시죠.”

“흥, 소드 팰러스가 아직 멀쩡히 자리하고 있었나? 놀랍군.”

소드 팰러스가 언급되자 검후는 어느 때보다 강력한 살기를 내비쳤다. 그리고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선 내 앞에 배신자들의 목을 들고 오지그래? 그걸 이 탁자 올려둔다면 네놈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아…… 또 그겁니까.”

검후를 탐내던 라울의 의욕이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보통 검후는 배신자에 대해 언급한 뒤에 입을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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