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58화


695화

라울이 사라지고 불투명하던 문이 다시 검어졌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검후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어깨가 한 뼘이나 내려갔다. 비록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내공의 힘이 사라지자 지독한 몸살 같은 탈력감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라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감금된 입장의 검후에게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그 앞에서는 참고 있다가 홀로 남은 후에야 단단히 조이고 있던 마음과 몸을 푼 것이다.

“목을 끊지는 못했지만………… 그놈의 구겨진 얼굴을 보니 좋구나.”

검후는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너무 늘어진 모습이지만, 볼 사람도 올 사람도 없으니 가릴 것이 없었다. 공격을 유도하는 시험이나 찾아온 이들의 반응을 보면 지켜보는 눈이 없는 것은 확실했다.

깊지 않은 마법적 지식을 통해 그녀가 추론하기로는 공간 간섭형의 마법으로 형성된 방이기 때문에 임의로 들여다보는 일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 꾸준히 감시하는 시선이 있었다면?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런 치욕은 절대 사양이었다.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편히 생활할 수 있겠는가. 목욕은? 화장실은? 또 잠자리는 어쩌라고.

남자도 그렇지만 특히 여성으로, 그것도 존귀한 황족에 검의 절대자로 존경받던 검후에게 그것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는 환경이다.

어쩌면 마법의 사용 이전에 저들도 그런 사실을 짐작하고 감시 자체를 포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회유하겠다는 놈의 얼굴하고는 지가 똑똑한 줄 알지만 아직은 덜 여물었어.”

검후는 파르르 떨리는 얼굴로 자신의 봉인을 단단히 조이던 라울을 떠올렸다.

매번 나타나 협력하라고 어르고 달래던 놈이, 뜻밖의 공격으로 피를 보자 시퍼런 살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모습이라니.

진짜 오래 묵은 능구렁이였다면 엄지를 추켜올리고 태연히 웃으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협력하지는 않겠지만, 다시 보기는 했겠지. 역시 초인의 고질적인 문제야. 너무 어려.”

오랜 시간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완성되는 무인과 달리, 초인은 한순간의 각성으로 만들어진다. 고민도 고생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어렸다.

갑자기 큰 힘을 얻게 된 그들은 칼을 손에 쥔 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경험과 지혜가 생기겠지만, 그 이전에는 대부분 천둥벌거숭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검후가 보기에 이는 초인의 큰 단점이었다. 당장 라울만 보아도 그랬다. 태도나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감금한 초인 세력의 핵심 인물인 것 같지만, 그에 비해 경험과 인내가 모자랐다.

당장 검후를 공격해서 납치하고 감금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물론 라울이 속한 곳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런 공격적인 접근보다는 버서커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차근차근 친분과 명분을 쌓아 접근하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얻을 걸 모두 얻은 후 마지막에 가서 납치든, 감금이든 하는 거지, 호호홋.”

검후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웃긴지 소리 내어 웃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한 것일 뿐이지만, 말해 놓고 보니 토사구팽의 전형과 같은 흉악한 짓이었다.

“으스스하네. 진짜 그런 식으로 접근했으면……… 꼼짝없이 골수까지 빨렸겠어.”

지금이야 이런 상황이니 온전히 믿지 않지만, 소드 팰러스의 검후라는 위치에 있었을 때 버서커의 증가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나타나며 협조를 요청했다면 넘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때는 초인과의 융합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검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정말 자기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었으면, 불행을 넘어 비참해서 갇혀 있을 수도 없었을 것 같았다.

흉흉한 생각을 털어 버린 검후는 곧 라울이 마지막으로 말했던 이드라는 인물에 대해 떠올렸다. 이드를 생각하는 검후의 눈빛은 굉장히 복잡했다. 이드와의 인연은 단순히 무공을 가르치고 배운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공이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드와의 인연은 세상이 모르는 거대한 비밀과의 접촉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가 납치에 이은 감금이라는 꼴을 당하고도 목숨을 끊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은밀한 비밀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비밀을 가장 전하고 싶은 사람의 후예가 나타났다. 그것도 그 사람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후예가.

“그런데 과연 진짜 후예일까?”

양손으로 턱을 괸 검후가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자의 이름을 듣는 그 순간 그녀가 가장 크게 의심했던 부분이었다. 

“당장 나만 해도 이렇게 젊은 몸을 유지하고 있어. 이드라면 더 어려 보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드래곤 로드와 관련된 사람인데 일, 이백 년 정도 젊게 살지 못할까. 만약 이드라는 자가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이드라면………….”

검후는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는 희망과 통쾌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그라면 날 찾아 주겠지.”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지금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흔적을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 아니라 진짜 그 후예라 해도 괜찮다. 그 역시 자신을 찾을 테니까. 무엇보다 소드 팰러스에 머물면서 쉴라를 만났다면 쉴라가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 아이라면 날 찾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을 테니까.”

쉴라를 떠올린 검후의 눈가에 흐뭇함과 미안함이 아른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아이에게 숲속 오두막을 비밀로 하는 것이 아닌데………….”

이제와 후회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라울이 던져둔 떡밥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검후는 하얀 침대에 몸을 누였다.

이전보다 강해진 봉인으로 몸이 두 배나 무거워졌다. 이번 봉인을 풀어내려면 어지간히 고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니야. 봉인을 해제하면서 내공의 경지와 운용술이 늘고 있으니까.”

그것이라도 없었으면 이 휑한 공간을 참고 있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식사 시간이 되자 방 안으로 식기가 들어왔다.

식사를 가져오던 자가 그녀의 손에 죽은 후 식기는 황송하게도 공간 이동을 통해 방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식기를 받아 들어 확인하니 평소 한쪽에 보이던 흰 종이가 보이지 않았다. 빼겠다고 하더니 정말 빼 버린 모양이었다. 공격용 이외에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비와 새, 꽃 등을 접는 일에도 썼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어져 버렸다.

“좀생이 같은 놈. 유일한 놀 거리를 뺏어 가다니. 제발 이드가 내 대신 네놈 멱을 따 주기를 기도하마. 그 의미에서 내 질문을 대신 이드에게 물어다오. 꼭!”

검후는 수프를 마시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라울이 자신의 말을 전달해 주겠다는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대신 정말 의미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한 번쯤 이드와 직접 대면할 뜻을 가지고 있다면 대신 물어볼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훌훌, 앗! 호호호호.”

기쁜 상상에 절로 튀어나온 할머니 같은 웃음에, 검후는 급히 입을 가리고 아무도 없는 방을 괜히 돌아본 후 요염하게 웃었다.

검후를 찾아다니는 이들이 본다면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모습에 생명의 위협보다 정신 상태의 위협을 걱정할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레오날도 후작은 이른 아침부터 황제를 알현했다.

무시로 황제를 대면할 수 있을 만큼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그였지만,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이른 시간 알현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당황하지 않고 기꺼이 후작을 불러 대면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다니 드문 일이군. 식사는 했나?”

언제나 전력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는 후작을 향한 황제의 말에는 격이 없었다.

“황공하지만, 아직 식전입니다.”

“그럼 같이 들지. 나도 아직 식전이거든. 여봐라.”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불러 후작과의 식사를 준비시킨 황제는 후작과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찾아온 것을 보면 어제 일이 우리 뜻대로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황제의 은근한 물음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이드에게 말했던 대로 후작이 이드를 만난 것은 황제와 이야기가 된 일이었다.

“직접 만나 보니 어리다고 해서 쉬운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삼검왕의 이름 앞에 진즉 허리를 숙였겠지. 하지만 그를 부른 것은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진짜 삼검왕 아래 허리를 굽혔다면 황제가 그를 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라는 황제의 재촉에 후작은 전날 이드와 만나며 겪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허! 기가 막히는군. 검증받을 이유가 없다니!”

모든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유는 분명 있었습니다.”

“있기는 있지. 하나, 고작 그런 것들 때문에 돈과 권력과 명예를 단번에 움켜쥘 기회를 거부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기가 막히지 않나.”

황제는 황궁에 머무는 것을 마다한 것보다, 가짜를 만들려 했던 것을 알아챈 사실보다, 검증 자체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가장 놀라워했다.

“그럼 이른 아침에 날 찾은 것은 검증을 받게 하기 위한 조건 때문이겠군. 알현은 오늘 오후로 잡혀 있으니까.”

“당연히 폐하 뜻에 따를 일입니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줘. 대신 적당히 여론을 형성해 그자의 힘이 탐나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이 아닌가. 그 이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후작은 황제가 원하는 바를 바로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소리가 생기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럼 이제 식사하러 가지.”

후작의 대답이 마음에 든 황제가 흡족하다는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후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결국 사전 검증은 못 한 거군. 어때, 진짜 같던가?”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러했습니다.”

“진짜가 아니라면?”

“하면 오늘 감히 제국과 폐하를 기만한 죄로 목이 떨어질 것입니다.”

후작이 고개를 숙이며 단호히 말했다.

“그럼 우리가 계획한 일들을 포기해야 하지 않나?”

“그저 그자가 없었던 때로 돌아갈 뿐이옵니다. 동시에 가짜를 분간하지 못한 삼검왕만 망신당할 일입니다. 무엇보다 폐하의 어명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자이니, 진짜가 아니라면 차라리 목이 잘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그렇지. 가짜 주제에 후작 앞에 그렇게 당당했다면 목을 잘라야지!”

황제는 아주 즐겁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이드가 가짜일 것이라는 가능성은 급격히 작아졌다.

후작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이드가 거짓말을 한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저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을 테니까.

황제는 재미있는 선물을 기다리느라 오늘 하루가 아주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구, 오늘은 아침부터 누가 또 내 이야기를 하나.”

이드가 간질거리는 귀를 잡고 말했다.

“어제 후작을 그렇게 물 먹였으니 조용히 있겠어요?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고개 돌려 봐요.”

촤르르륵.

이드의 어깨에 오른 라미아가 쇠꼬챙이처럼 변한 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 귀지는 없을 텐데………… 것보다 그런 걸로는 귀 못 파!”

“없기는 왜 없어요. 조금이라도 있으니까 가렵지. 육감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거기다 누가 귀를 하나하나 긁어서 판대요?”

새침한 말과 동시에 쇠꼬챙이에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매달리더니 천천히 회전했다.

“능력이 있으면 써야죠. 이걸로 티끌도 남기지 않고 촉촉하게 끝낼 수 있다니까요. 얼른 돌려 봐요.”

뭔가 굉장히 우쭐한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얌전히 귀를 내밀어야 했다.

황궁과 마찬가지로 아침이 차려진 식탁 앞에서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