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59화
696화
식사를 마친 이드는 여유로웠다.
당장 몇 시간 후 황제를 만나야 했지만 그에 대한 부담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하게 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쉬울 것 없는 그이기에 황제라고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힘에서 밀리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제국 전체와 싸울 수는 없어도, 도망은 칠 수 있다는 실력에서 나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물론 이드도 황제를 앞에 두고 이런 모습을 보일 생각은 없다. 황제는 가진 힘 이전에 한 나라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자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믿고 따르는 자라면 그 하나만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있는 이드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드 경은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일이 전혀 걱정되지 않으신가 봅니다?”
바로 사무엘과 이그렌이었다. 두 사람은 여유롭다 못해 나태해 보이는 이드와 극명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속에 뱀을 품은 음흉한 사무엘조차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이며, 이그렌은 굳은 표정으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 사는 곤충들이 갑자기 시작된 지진에 놀라 목숨을 건 탈출을 시작하고 있을 것이 확실할 정도의 진동이었다.
“그러는 두 분은 어지간히 긴장이 되나 봅니다만, 그렇게들 긴장할 것 없습니다. 벌 받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얼굴 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여기가 황궁도 아닌데 벌써 그렇게 떨어서 어떻게 합니까? 저 보세요. 아직 집사가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일이 절대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닌데도 대단하게 들리는 사실이 이그렌은 너무도 이상했다.
‘이것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효과!’
이그렌이 의외의 곳에서 감탄하는 사이 사무엘이 말했다.
“그래도 제국의 주인을 만나는 일인데요.”
“하하하, 분명 어려운 분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제가 모시는 황제도 아닌데, 두려워하고 어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황제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대륙에 이드 경뿐일 겁니다.”
거침없이 황제와 선을 그어 버리는 이드의 언사에 기가 막한 사무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드는 자신의 말에 아연한 두 사람을 보며 쿡쿡 웃었다. 중원 출신으로 두 사람의 감정에 충분히 공감하는 한편, 현대의 지구에서 살다 와서 냉정하게 선을 긋는 스스로의 마음 때문이었다.
“왜 웃으십니까?”
“두 분의 모습에 다른 생각이 나서요. 크흠, 실례했습니다. 일단 제 말은 그저 가볍게 들어 주세요. 저희끼리 있으니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렴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도 이러겠습니까?”
그 말에 이그렌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말아 주십시오. 만약에 그랬다가는 저희까지 목이 달아날 겁니다!”
“그래서 알현한 자리에서는 이러지 않는다지 않습니까, 하하하.”
이드가 이그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사무엘은 그런 모습을 보며 살짝 질려 있었다.
“휴~ 아무리 당사자가 없는 자리라지만, 대단하십니다.”
그의 말에는 질리다 못해 비난하는 기색까지 담겨 있었다. 이그렌의 말처럼 까딱 잘못하다가는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무리 황제 앞이 아니라지만, 자신과 이그렌이 듣고 있지 않은가!
‘나라면 혹시 말이 샐까 절대 못 할 일이지, 암!’
사무엘은 자신의 그릇을 알았다. 그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을 이후 이드를 압박할 재료로 쓰는 쪽으로 잔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즉시 불가능하다고 판단, 포기했다.
이드의 말이 무례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국의 황제가 이드의 황제는 아닌 것이 사실이니까. 무엇보다 지금 시점에 나온 이 정도의 무례한 말만으로 황제가 이드를 버릴 리도 없었다. 약간의 무례보다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자신의 편으로 두면 얻는 이득이 더 크니까!
과연 제국의 황제가 그 정도의 무례는 눈 감아 주는 이라 생각하니 새삼 이드의 가치가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아쉽기도 했다.
“어떻게 잘 꼬여 내서 일리나스로 데려갔으면, 그 공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클 텐데…………?”
그러나 제도에 와서 발길을 돌릴 수도 없는 일. 사무엘 자작은 원래 생각대로 이드 곁에서 열심히 손바닥을 비빌 기회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대신 확인하듯 이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저와 이그렌 경이 황궁에 따라가도 괜찮겠습니까?”
“백작님이 먼저 부탁하시고는 그러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도에 온 김에 이그렌 경에게 황궁 구경 정도는 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이그렌을 챙기는 이드의 모습에 사무엘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
“하하하, 이그렌 경을 그렇게 아끼는 모습을 보이시니 제가 다 부럽군요. 이거, 앞으로 이그렌 경에게 잘해야겠습니다.”
“지금처럼만 해 주세요. 그러면 이번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그 토벌. 아직 대상이 어떤 자들인지 비밀입니까?”
이드가 비밀이라고 못 박아 놓아서 묻지도 못하던 사무엘은 마침 잘되었다는 얼굴로 깊은 궁금증을 내비쳤다.
제 무덤 자리인 줄도 모르고 알고자 애쓰는 모습이 문득 불쌍해 보였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오늘 알현 후 며칠 안으로 발표가 있을 겁니다. 어제 레오날도 후작님이 다녀가신 것은 보셨지요?”
“예. 뭐, 어쩌다 보니………….”
은밀히 이드가 불러 주길 기다리던 것이 생각난 사무엘이 움츠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뭘 그리 조심하십니까? 못 볼 것을 본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밤에 있었던 만남이라…. 하하하.”
이 사람은 늦은 밤의 만남은 모두 떳떳하지 못한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심각한 음모론자로 정신 건강을 염려해야 할 듯하다.
“그저 시간이 늦었을 뿐입니다. 좌우간 후작님 말씀으로는 제 검증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면 그때 토벌에 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더군요.”
“오! 잘되었군요. 그럼 영지의 기사들을 미리 준비시켜 두어야겠습니다.”
공을 세우고 명성을 높일 욕심에 사무엘이 반겨 말했다.
하지만 이드가 손을 흔들어 그를 말렸다.
“아, 그러지는 마세요. 이번 일은 제국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백작님이 영지의 기사들을 동원하면 제국에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사무엘은 그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했다. 자신들의 땅에 타국 기사들이 들어오는 일을 제국이 좋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이드의 입김에 토벌에 참가하는 자신의 입장도 깨달았다.
그러나 기껏 참가해서 곁다리만 되는 것도 아까운 일.
“아무렴, 그런 일이라면 조심해야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지금 있는 기사들만으로는 아무래도 큰일을 하기가…………”
하여간 욕심은……?
이드는 슬쩍슬쩍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사무엘의 모습에 기막혀하며 말했다.
“염려마시기를. 제가 도와드린다지 않았습니까. 오늘 아침에 이그렌 경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온 가문을 신경 써 주시는데 저도 무심할 수는 없지요.”
“하하하, 별것 아닙니다. 그저 앞으로 이드 경의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할 시온 자작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이지요. 그럼 이드 경만 믿고 있겠습니다.”
이드의 말에 사무엘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는 흐뭇한 눈으로 이그렌을 바라보았다. 과연 자신의 예상대로 이드에게 좋은 말이 전달된 것 때문이다.
그러나 이드에게 전달된 이그렌의 뜻은 사무엘의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이드는 그 사실을 사무엘이 안다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함에 입술이 들썩이는 것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황궁에서 나온 사람이 이드 일행을 모시겠다며 저택으로 방문했다.
황궁에 속한 관리로 보이는 남자는 작위도 없는 이드에게 굉장히 정중한 모습을 보였다.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이 분명할 테지만, 이드로서는 기분이 좋았다.
집사가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은 이드는 사무엘과 이그렌을 데리고 마차에 올라 황궁으로 향했다.
이드와 마주 앉은 관리는 황궁의 예의를 아는지, 또 필요한 것들은 없는지를 질문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왜 묻는 겁니까?”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드 님이 실수하지 않으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희 일입니다.”
확실히 알현하는 자리에서 실수가 있으면 당사자는 물론 보는 사람도 괴로운 일이 벌어진다. 나쁘지 않은 이유에 수긍한 이드가 물었다.
“그럼 저는 어떤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황궁에 도착하신 후에 잠깐 교정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고 계신 황궁 예절에서 바뀐 것이 몇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대화가 끝나자 마차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마차는 황궁까지 수도를 가로지르는 대로를 달렸다. 그러는 중에 이드가 탄 마차처럼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가 점점 늘어나는 모습을 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슬슬 교통 체증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 모습에 이드가 물었다.
“원래 평소에도 황궁을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습니까?”
“오늘 황궁에 특별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중한 대답이었지만 이드를 보는 관리의 눈은 마치 ‘너야, 너! 바로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에 이드가 마땅치 않아 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거 꼼짝없이 구경거리가 되게 생겼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황궁에 자리하시는 분들은 구경이라기보다는 영광의 순간에 함께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관리의 말에 사무엘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검증을 받고 공인받는 자리다. 그 자리에 함께한다는 것은 충분한 자랑거리였다.
사무엘도 그런 의미에서 기대 중이었다. 그는 이드가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는 꿈에도 의심치 않았다.
이드는 이그렌이 가진 무공의 문제점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 외에도 은색 기사단장과의 친분을 보였으며, 삼검왕의 일인인 마르텔을 쓰러트렸다. 사무엘이 듣던 것처럼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위력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르텔을 이겼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뭐가 아쉬워 가짜 후예를 자처한다는 말인가.
그만한 실력과 인맥을 가졌다면 가짜 후예를 자처하지 않고서도 후예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이유로 사무엘은 이드에게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사실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되묻지 않았다. 이드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내보이고 싶은 그 나름의 얕은 수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창밖을 구경하던 이그렌이 마차가 지나는 광장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저기 저건 뭡니까?”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단순한 뼈대를 가진 철골 구조물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으음, 저것은…….”
관리는 쉽게 답하기가 어려운 듯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오히려 호기심을 돋울 뿐이었다.
은근히 대답을 재촉하자 결국 관리가 이드의 눈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흠, 저것은 그러니까………… 단두대입니다.”
“저렇게 크고 높은 단두대는 처음 보네만? 오늘 누가 목이 잘리는 것이요?”
단두대에 대해 좀 안다는 듯 사무엘이 나서 묻자 관리가 이미 꺼낸 말이라는 듯 바로 대답했다.
“제국에서 특정한 죄인들에게만 사용하는 단두대인데, 오늘 사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꺼낸 것입니다.”
“사용될 수 있다라………… 절 두고 말하는 거군요.”
“…….”
이드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관리가 침묵으로 답했다. 사무엘과 이그렌도 그제야 이해한 듯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두대를 바라보았다.
결국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바로 끌려 나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목이 잘리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설마 가짜의 목을 자르기 위한 단두대가 따로 있을 줄이야.
관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주변의 마차도 달라 보였다. 영광된 자리에 함께하기 위함이 아니라, 또다시 등장한 가짜의 목이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야, 무섭네. 설렁설렁 검증받았다가는 바로 목을 자른다고 달려들겠네요. 열심히 해야겠어요, 이드.]
‘그러게. 어제 튕겼다고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닌지 몰라.’
어깨에 앉은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무엇보다 단두대를 세운 이 상황에서 후작의 입김이 느껴져 찜찜했다.
정말 그렇다면 뒤끝이 지저분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마차가 몰려 길이 복잡했지만 이드를 태운 마차는 의외로 빠르게 황궁에 도착했다. 다른 마차들이 이드가 탄 마차의 문장을 통해 황실의 마치임을 알아보고 길을 내어 준 덕분이었다.
관리는 황궁에 도착한 마차를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몰았다.
“보는 시선이 많아 후문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황궁 앞이 비좁을 정도로 많이 모여든 사람이 부담스럽던 이드에게는 반가운 소리였다.
관리는 세 사람을 화려하게 꾸며진 접객실로 안내하고 물러났다.
“음, 과연, 황궁이라서 그런지 향이 좋네.”
향과 황궁이 무슨 상관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드는 화려하게 꾸며진 방보다 시원하고 맑은 향이 더 마음에 들었다.
넓은 방을 가로지른 이드는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황궁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마차와 귀족들을 보았다.
“정말 많이 모였네.”
[크큭, 인기 많아서 좋겠어요.]
“이런 인기라면 절대 사양이야. 뭔 콘서트도 아니고 말이지.”
[그래도 소드 팰러스의 대처보다는 낫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소드 팰러스의 첫인사는 최악이었으니까.”
이드가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레오날도 후작이 나타났다.
“2||··· 레오날도 후작 각하!”
갑작스런 후작의 등장에 사무엘과 이그렌이 장교를 본 신병처럼 기겁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