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61화
698화
전통이란 한 집단 내에서 형성되어 역사적으로 전승되는 사상, 관습, 행동 등의 체계이다. 그 전통 중에서도 복장은 사람이 생활하기 위한 필수 삼 요소 중 하나로,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역사와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특징 중 하나였다.
즉,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전통 복장을 보면 그가 속한 문화권과 소속 국가, 나아가서는 출생지까지 예측해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후작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이드의 전통 복장으로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추측해 볼 속셈이었다.
대륙에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가 사라진 후에 무공이 아닌 마인드 마스터라는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공을 제외하고 그가 대륙에 남겨 둔 것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공이라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정보의 덩어리이기는 했다. 무공이란 오랜 시간을 거쳐 쌓인 사상과 진리에 대한 탐구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그러나 마나의 수련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기술에 가까운 무공으로는 이드라는 ‘사람’에 대해 알 수 없었다.
학자들은 마인드 마스터로부터 온전한 무공을 전해 받은 아나크렌의 황실이라면 마인드 마스터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라 보았다. 그러나 마인드 마스터는 무공이라는 새로운 힘의 문을 연 존재. 그런 중요한 존재의 정보를 황실에 요구할 수 있는 간 큰 학자는 없었기 때문에 정보의 존재에 대해 확인된 바가 없다.
그리고 이런 점은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황제에게 신임을 받고는 있지만, 황실이 품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에게 허락된 정보는 대륙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그리고 후작 역시 수십 년 전에 사라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드가 나타나며 변했다.
그의 등장으로 두 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고, 수많은 질문이 생겨났다.
마인드 마스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졌으며, 무공이란 무엇인가.
가능했다면 전 대륙적인 청문회라도 열었을 것 같은 열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드라는 존재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뜻하지 않게 얻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러는 것이 좋겠소. 낯선 전통 복장이라면 익숙한 갑옷보다 사람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을 것이오. 좋은 의견이다, 라미아.”
속내를 감추고 라미아의 의견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한 후작이 엄지를 척 올렸다. 그러자 라미아가 엄지에 해당하는 부위를 들어 보였다.
누가 보면 오랜 친구라고 착각할 만한 모습에 이드는 어이가 없었다.
“아주 죽이 척척 맞는군요. 그럼 갑옷은?”
“라미아가 전통 복장으로 하라지 않소? 갑옷보다 낫다니 내 궁금해서라도 못 내어 주겠소이다. 하하하.”
기가 막힌다. 자기가 언제부터 라미아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그럼 검증 때 보도록 하겠소. 예절 수업 잘 받으시구려.”
이드는 묘하게 음흉한 표정의 후작이 등을 돌리자 그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검증 때 이그렌 경의 자리는 따로 좀 챙겨 주십시오.”
“그렇게 하리다.”
“이유는 묻지 않으십니까?”
“끌끌, 그런 사소한 일에 대한 이유를 물을 이유가 무어 있겠소.”
이드는 멀어지는 후작을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후작에게는 이유를 알 필요 없을 정도의 사소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대상조차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음, 아마 레오날도가 웃었던 건 어이없어서가 아닐까요? 어떤 간 큰 인간이 레오날도에게 자리 좀 잡아 달라고 했겠어요?]
“뭐,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런데 레오날도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구나?”
[뭐 어때서요? 레오날도가 반말로 하자는데, 어려울 것 없죠.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당연하지. 이 세상에 너보다 나이 많…….”
무심코 라미아의 말에 반박하던 이드는 갑자기 어깨를 조이는 발톱에서 오싹한 냉기가 느껴지자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아차렸다.
[나이가 뭐요?]
“어…… 아니, 그게…………… 어!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 후작은 없다고, 응!”
바짝 독이 오른 라미아의 모습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린 이드가 급히 변명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바보도 아니고 어디서 10살 꼬맹이에게도 안 통할 거짓말을…………!]
하지만 어설픈 변명은 오히려 라미아의 화를 돋우어 어깨를 조이는 발톱의 힘을 강하게 만들었다.
“아얏! 아파, 진짜 아프다고! 잘못했어!”
이드는 죽는소리를 하며 싹싹 빌었다. 진짜 피를 볼 생각으로 발톱을 조이는 것은 아닐 테지만, 실제 통증은 제법 컸다.
내공으로 강화하면 통증은 사라지겠지만, 라미아의 화는 커질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는 그저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진 성인처럼 모든 잘못이 자신의 것이라고 싹싹 비는 것이 최선이었다.
‘빌어먹을 드라마! 빌어먹을 순정 만화!’
이드는 남녀 사이의 나이 차이에 무심하던 라미아의 생각을 바꿔 버린 지구의 문명을 원망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과 라미아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복도에 방음 마법이 설치된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후작이 검증 전에 다른 귀족이 자신을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주변을 차단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드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은 복도만이 아니었다.
“………다 큰 어른이 황궁까지 와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민망한 표정으로 이그렌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드와 라미아가 밖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 미안. 시끄러웠지? 내가 라미아에게 실수한 게 있어서 말이야. 이제 끝났어. 그렇지?”
이드가 머쓱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라미아를 보았다. 라미아도 이그렌의 등장에 이드의 머리 위로 날개를 얹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 이번엔 이 정도로 봐 줄게요.]
“하하, 고마워. 그만 들어가자.”
“예.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응?”
뒤에 누가 있다고? 이드는 이그렌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살짝 놀랐다. 그곳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중년의 여인이 미간을 좁히고 조용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드의 감각을 속일 정도로 무공의 고수이거나, 마법을 익힌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라미아와 시끄럽게 떠들며 정신없는 사이에 다가온 듯했다.
‘아, 쪽팔려!’
이드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흉한 꼴을 보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크게 헛기침을 한 이드가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이드 경. 황실의 예절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케서린 센들러라고 합니다. 후작님의 부탁을 받고 경에게 황궁 예절을 알려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이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좀 전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들어가시죠. 이야기를 들으니 간단히 몇 가지만 고치면 된다고 하더군요.”
“저도 후작님께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황궁의 복도에서 소리치는 경의 모습을 보니 그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생각지 못한 케서린의 발언에 이드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예절이란 상대에 대한 존중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황궁에서 장난스럽게 소리치는 경에게는 황실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매우 모자란 듯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예절 이전에 경의 그 태도부터 고치는 것이 먼저입니다.”
엄하고 깐깐한 목소리. 완벽히 학교 선생님의 설교였다. 이드는 묘한 고집을 보이는 케서린의 모습에 여간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그렇게 복잡할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나머지는 들어가서 진행하도록 하지요.”
어지간히도 이드의 행동이 거슬렸는지 중간에 이드의 말을 자른 케서린이 대나무처럼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케서린의 모습을 확인한 이그렌이 슬쩍 이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절 교육 힘드시겠습니다.”
“하아, 굳이 네가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그럴 것 같다.”
이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간단히 필요한 것만 배우겠다고 하고 싶지만, 고아한 드레스를 입은 것이나 황실과 후작이 일을 맡긴 사람이라는 사실로 짐작하건대 단순한 하녀장이 아닌 것 같아 그러기 어려웠다.
후작이 나름 신경을 써 준 것 같지만, 참으로 필요 없는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황궁의 많은 시종 중 하나를 보내 주지.’
“어서 들어오세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때 방 안에서 이드를 재촉하는 케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는 작은 한숨과 함께 힘없이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모습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하필 그때 저 사람이 올 줄은 나도 몰랐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에 대한 검증은 정오를 한참 넘긴 후에 이루어졌다. 그보다 한참 전에 모여든 귀족들은 황궁의 창고를 축내며 서로의 안부와 검증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시간이 되어 대전의 문이 열리고 검증이 시작됨을 소리 높여 알리자, 흩어져 있던 귀족들이 우르르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황제가 제국의 귀족들을 모아 공개적으로 대소사를 논하는 대전은 황궁 안에서 가장 거대하고 넓었다. 그런데 그런 대전은 가득히 모여든 귀족들로 인해 좁아 보일 정도였다.
제국의 귀족뿐 아니라 일이 있어 제국에 방문한 타국의 귀족들도 모조리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황궁에서는 그들의 방문을 전혀 제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영했다. 황제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자신에게 검증받는다는 사실을 크게 알리고 싶어 했다. 제국 안팎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대전의 귀족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제국의 귀족과 타국 귀족으로 제국 귀족이 가장 앞자리를 차지했고, 타국 귀족은 그들의 뒤에 국가별로 모였다. 그중 그레센에 도착한 이드의 뒤를 쫓던 나라의 귀족들은 이드가 제국의 황궁에 발을 들인 이 사태를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아깝다. 역시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왕국에 붙잡아 뒀어야 하는 건데.”
“멍청했어. 쓸데없이 제국의 눈치를 너무 본 거야. 후예와 함께 무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멍청하게 놓친 거라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자신들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면 검증 행사를 하고 있는 게 자국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러나 안타까워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상대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검증이 철저하게 불발로 끝나기를 바라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혹시 알아? 검증을 통과 못 하고 단두대에 목이 잘릴지. 지금까지 그런 놈들이 한둘이었냐고!”
그러나 전자나 후자나 오로지 마음뿐이었다. 제국의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저 눈으로 보고 자국에 전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들은 그나마 한쪽을 바라보며 아쉽고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
“그래도 두 눈 멀쩡히 뜨고 제 품에 들어온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놓친 멍청한 일리나스보다는 우리가 낫지.
그리고 그런 주변의 시선에 한데 모여 있던 일리나스 출신 귀족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