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63화


700화

뚜벅. 뚜벅.

조용하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대전을 울렸다. 두껍게 깔린 카펫이 삼킨 발걸음 소리는 희미했지만, 수백의 귀족들의 귀에는 거인의 그것처럼 크게만 들렸고,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는 그렇게 근엄하고 품위 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멋지다…….”

멍한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사무엘로 인해 귀족과 왕족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이그렌이었지만, 황제에게는 그런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때 놀라고 있는 이그렌의 옆구리를 벤 자작이 쿡 찔렀다. 그는 입가에 손을 대며 고개를 숙이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차! 여긴 대전이었지’

이그렌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허락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는 잘못하면 목이 잘릴 수 있었다.

“고개를 들라!”

“헉!”

그리고 그 순간 들린 나직하지만 대전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목소리에 이그렌은 식은땀을 쏟으며 바짝 굳어 버렸다.

‘서, 설마 내가 훔쳐본 게 들켰나?’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그렌이 두려움에 질끈 감은 눈을 뜨지 못할 때였다.

“이제 고개를 들어도 되네.”

벤 자작이 다시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조용히 속삭이기는 했지만 여상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슬쩍 눈을 떠 보니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고 있었다.

이그렌은 좀 전 고개를 들라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대전에 있는 모두를 향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안도하는 한편 괜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 어리숙한 이그렌의 모습에 벤 자작이 피식 웃고는 곧 진지한 얼굴로 다시 속삭였다.

“방금 실수가 감탄이 아니었다면 경을 쳤을 것이네. 조심하게.”

“죄,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의 모습이 너무 대단해서 그만…………….”

“후후, 그러니 자네 실수를 그냥 넘긴 것이지.”

벤 자작이 작게 웃었다. 자신이 모시는 황제를 보고 감탄했다는데, 싫을 턱이 없다. 하지만 이그렌은 그의 말에 다시 움츠리고 말았다.

“실수를 넘기다니요?”

“자네 목소리가 작기는 했지만, 황제 폐하를 지키는 기사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기사요?”

기사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에 고개를 든 이그렌은 그제야 황제의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좀 전에는 왜 저들을 보지 못한 것일까?

황제의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은 화려한 파츠 아머를 입고 투구를 쓰고 있었다. 과연 저들이 자신의 말소리를 들었을까 생각하는 순간. 번뜩!

투구 너머로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와 이그렌을 압박했다. 마치 한 번은 용서하지만 두 번은 없다는 듯이.

“무슨 눈빛이……..?

강렬한 눈빛에 움츠러든 이그렌을 보며 벤 자작이 말했다.

“제국 최강의 기사들이지. 저들이 쓴 투구는 그들이 누구인지, 또 그들이 누구를 살피는지 알 수 없게 가리는 역할을 하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감히 무엄한 생각을 품은 자가 있더라도 저 투구로 인해 기사가 어디를 주시하는지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그러니 자네도 기사들이 자네를 보지 못한다 생각지 말고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네.”

“전 티끌만큼도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이그렌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조심하라는 말이네. 이제 앞을 보시게.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실 것이니까.”

“…….”

벤 자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그렌이었지만, 정작 눈은 황제가 아니라 방금 전 눈을 마주친 기사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강렬하던 기사의 눈빛이 쉽게 지워지지 앉았다.

귀족들이 고개를 들자 황제는 그들을 찬찬히 내려다본 후 입을 열었다.

“경들이 이리 대전에 모인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이오.”

마법에 의한 것일까, 대전의 설계 때문일까. 결코 크지 않은 목소리지만 대전 끝까지 닿았다.

“모든 것이 황제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간단히 주고받는 말도 황궁 예절 중 하나로 배우는지, 귀족과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얼굴에는 황제를 향한 경외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공을 완성한 제국의 힘과 황실의 힘은 역대 최고였으니까.

“이리 강건한 경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매우 좋구려.”

황제는 대전 가득 모여든 귀족들의 모습이 흡족한 듯 인자한 얼굴로 좀 더 덕담을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았다. 그를 향한 귀족들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허허, 모두 오늘 있을 검증이 제법 기대되는 모양이구려.”

“신들은 그저 황제 폐하께서 현명하게 판단하시길 기다릴 뿐이옵니다.”

“좋소. 그럼 바로 시작하겠소. 오늘 이 자리에 제국의 영웅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가 나섰으니, 영웅의 유산을 선물받은 황실에서 후예의 신분을 검증하여 그 진위를 가릴 것이오. 가짜라면 영웅의 이름을 더럽힌 벌을! 진짜라면 영웅이 제국을 위해 세운 공을 칭송하여 포상을 내릴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경들이 유리알같이 밝은 눈으로 검증을 살펴 분명한 증인이 되시오!”

“명대로 유리알처럼 밝은 눈으로 살피겠나이다!”

황제의 선언에 모든 귀족들이 허리를 굽혀 복창하며 복종했다.

“오늘 검증을 받을 자를 들여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종이 복창하고 닫혀 있던 대전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앞에 서 있는 이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를 향해 수백의 귀족들이 고개를 돌렸다. 각양각색의 눈동자가 각자의 뜻을 품고 강렬한 눈빛으로 이드를 아래위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뼛속까지 꿰뚫어 볼 듯한 눈길에, 어지간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이드조차 움찔하고 말았다. 전장의 거친 분노와 살기 가득한 눈은 익숙해도, 잡다한 욕구가 가득한 눈은 처음이라 껄끄러웠다.

‘어쩐지 콘서트장이 생각나네. 관중으로는 일반 팬과 안티 팬이 섞였고 말이야.’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요. 문 열렸잖아요.]

“알았어. 들어갈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말에 이드는 목걸이로 변한 그녀를 툭툭 두드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황제 앞에 위험 인자를 함부로 내놓을 수는 없다. 그래서 대전에 드는 이드는 가지고 있던 검을 맡겨 놓아야 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에고 아티팩트로 인식된 라미아의 대전 출입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들어가지 말란다고 얌전히 그 말을 들어줄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일라이져라면 모르겠지만, 타인의 요구 때문에 라미아를 떼어 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자기들이 아는 새 형태만 아니면 되지 않겠어요?]

그것은 라미아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오랜만에 새의 형태를 버리고 목걸이로 형태를 바꿔 이드의 목에 매달리게 되었다.

사실 장신구도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격 마법이 인첸트된 장신구도 많으니까. 그래서 정말 위험한 자, 예를 들어 적국의 사신과 같은 경우는 장신구의 착용도 제한된다.

그러나 이드는 그 정도로 위험하다고 판단하지 않은 듯 장신구까지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아티팩트에 의한 마법 정도는 충분히 대비되어 있기 때문에 허락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황제의 몸에 둘러진 안전장치만 해도 그 수가 열을 넘으며, 대전 전체에는 마법 발동을 억제하는 조치가 되어 있기도 했다.

라미아의 재촉에 이드가 천천히 대전을 가로질렀다. 그러자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상당히 젊군.”

“젊음이 문제가 아니오. 저 나이에 블러디 혼을 꺾었다는 것이 문제지!”

그들은 이드의 젊음에 놀라고.

“저런 형태의 옷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소?”

“생전 처음 보는 옷인데. 마법사의 로브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목욕 가운 같기도 하고. 혹시 자작께서 아시는 복식입니까?” 

라미아와 레오날도 후작의 권유로 입은 장포의 모습에 당혹해했다.

지구에서 한 번 리폼을 거친 이드의 장포는 흰 바탕에 황금 수실과 푸른 수실로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귀족들로서는 맹세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옷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드에게 장포를 권한 레오날도 후작도 예외가 아니었다.

‘흐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모르겠군. 내가 오만했나?’

그는 술렁이는 귀족들 사이에서 당혹감을 애써 감춰야 했다. 황제의 꾀주머니라고도 불리는 그는 젊지만 스스로의 지식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지식 속에는 대륙 곳곳의 복식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드에게 장포를 권한 것도 당연히 자신이 알아볼 수 있거나 최소한 어떤 지역과 연결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후작은 자신의 그런 생각이 얕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드의 장포는 그의 지식 속에 있는 어떤 복식과도 달랐으며, 일치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미하게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결코 유의미한 정도의 값은 아니었다.

그래도 완전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후작은 서로 돌아보기 바쁜 귀족들을 보며 나름 만족했다.

“라미아 말대로 어중간한 파츠 아머보다는 확실히 주목을 받는군.”

어차피 이드의 출신에 대한 추론은 부가적인 것. 원래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 사이 황제 앞에 당도한 이드가 기사의 신호에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제국의 고귀한 지배자이신 필리푸스 드 페렌티움 아나크렌 황제 폐하께 이드 예천화가 인사드리옵니다.”

“어서 오라. 스스로 영웅의 후예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 이드여. 제국에 가득한 그대의 이름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황제 폐하께서 알아주시니 영광이옵니다.”

“그대가 검증을 온전히 마친다면, 내 대에서 영웅의 후예가 귀환하였음이 되는 것이니 오히려 황실과 제국의 복이다. 그대는 이제 일어나도 좋다.” 

이드는 황제의 허락에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마주했다. 빛이 감도는 얼굴에 기품이 가득한 황제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잠시 이드와 눈빛을 교환한 황제가 말했다.

“경들은 모두 주목하라. 지금 이 앞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영웅의 후예임을 증명해야 할 자이다. 그대는 스스로 제국의 영웅,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임을 자처한 자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사실 자처했다기보다는 세상에 떠도는 소문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지만.

“마인드 마스터가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대가 제국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오래전 해결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고, 제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리나와 재회한 곳은 일리나스의 시온 숲이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이드도 황제도 묻지 않는 센스를 발휘했다.

“오래전 일이라면, 마인드 마스터와 관련된 일일 터. 그대의 발길이 황궁이 아닌 소드 팰러스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소드 팰러스에 계신 검후님을 뵙고 도움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드의 대답에 몇몇 귀족들이 소곤거렸다. 이드가 소드 팰러스를 찾은 것이 황궁을 불신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곤란했겠구나. 검후께서는 부재중이시고, 그분이 없는 소드 팰러스에서는 그대의 신분을 검증할 수단조차 가지지 못하고서 영웅의 후예를 억압하였으니 말이다. 하나 이제 그대는 걱정을 덜어도 좋다. 그대가 진정 영웅의 후예라면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떠한 것이든 내가 이루게 해 주리라.”

“망극한 말씀에 감격할 뿐이옵니다.”

황제의 호의에 이드가 허리를 숙였다. 아닌 게 아니라 황제가 정말 해결해 줄 수 있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지. 당장 제국의 일도 해결 못 하는 사람한테 바랄 걸 바라야지.’

하지만 이런 이드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황제는 시종에게 일라이져를 가져오게 했다. 그에 늙은 마법사와 시종이 일라이져를 가지고 들어왔다. 

“일라이져는 확인하였느냐.”

“황제 폐하께서 내린 명에 따라 철저히 조사하여 기록대로의 진품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마법사의 대답에 시종이 귀족들이 볼 수 있도록 일라이져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귀족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일라이져 만으로 그대의 신분을 증명할 수는 없다. 소드 팰러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하나 황실에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검증할 방법이 있다. 그대는 이 검증을 받을 뜻이 있는가.”

여기까지 와서 검증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 순순히 돌려보내 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한다. 이드는 살짝 어이없는 감정을 감추고 말했다. 

“검증을 받겠습니다.”

“좋다. 그럼 검증을 시작하겠다. 밀리아리아를 불러라.”

“예. 폐하.”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황제가 대전으로 들어섰던 문이 다시 열리며 시종이 크게 소리쳤다.

“아나크렌 제국의 온당한 지배자이시자, 제국 신민을 지키는 가장 고귀하고 현명하신 필리푸스 드 페렌티움 아나크렌 황제 폐하의 장녀이신 밀리아리아 드 아이넬 아나크렌 황녀께서 입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