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66화


703화

황제의 색다른 면에 귀족들이 놀랄 때, 이드는 눈을 반짝였다.

‘설마 내 말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애드리브 좋네.’

이드의 짐작대로였다. 황제는 이드에게 충성 서약을 강요하지 않는 명분으로 후작과 논의하여 사전에 준비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드가 과거 마인드 마스터가 풀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말을 바꾼 것이다.

그들이 준비한 이유보다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이 실린 이드의 이유가 더 써먹기 좋아 보였던 것. 황제의 짧은 침묵은 이드의 말을 어떻게 끼워 맞출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드여, 말해 보라. 그대는 해야 할 일을 위해 타국으로 향할 일이 있지 않은가?”

황제가 물었다. 분명 편이한 질문인데 이드를 향한 눈길에는 강렬한 의지가 전해져 왔다.

‘우와, 저 표정봐라. 이건 아주 강요네, 강요.’

그러나 결코 싫지 않은 강요였다. 자신이 후작을 통해 전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답을 얻기 위한 강요인데, 싫을 이유가 있을까. 이건 마치 당첨자에게 상품을 주기 전, ‘행사에 응모한 적 있지!’하고 묻는 것 같다.

이런 강요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이드는 황제가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그러할 것 같사옵니다, 황제 폐하”

서비스로 황제 폐하를 더 강조해서 크게 외쳤다.

“……”

그 뜻을 알아차린 황제가 잠깐 어이없는 얼굴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황제 인생에 이드처럼 태평한 상대는 없었으니까. 살짝 고개를 저은 황제가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그의 대답이 그러하다. 과연 그런 이에게 약속된 대로의 포상을 내린다면 편히 움직일 수 있을까? 나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노라.”

그러자 귀족들 사이에서 누군가 한 발 나와 말했다.

“황제 폐하의 세심한 배려에 신은 그저 놀라울 뿐이옵니다. 하나 그것은 사사로운 일로, 그런 작은 부분까지 굳이 헤아려 주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지요.”

“그렇지 않소, 샘지 백작. 이드의 일은 결코 사사로운 일이 될 수 없으니. 어째서인지 아오?”

“예?”

갑작스런 황제의 질문에 백작이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의 뜻을 헤아린 몇몇 귀족들은 작게 혀를 차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드가 할 일이 마인드 마스터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오. 제국의 영웅이 남긴 숙제를 마무리하는데 제국이 나서서 돕지 못할망정 그것을 방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에게 제국의 이름을 내린다면 타국이 가벼이 발걸음하게 둘 것이며, 우리와 이웃한 나라에서도 이드의 방문을 쉽게 허락하겠는가 말이오.”

황제의 시선은 마치 너희들이 그럴 수 있겠냐는 듯 뒷줄에 선 타국의 귀족들에게 향했다. 당연히 그에 대답하는 귀족은 없었다.

그러나 이드가 자국에 오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 그의 호감을 얻을 방법이 있다고 내심 자신하는 자도 없지는 않았다.

황제는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 듯 백작을 향해 말했다.

“백작은 좀 더 세상을 넓게 보고 나라 간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겠구려.”

“고, 공부에 좀 더 힘쓰겠사옵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황제에게 모자람을 지적하는 말을 듣자,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분명 경들 중에 백작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도 있었을 터이나, 이제 나의 고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황제의 말에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따로 알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답하는 순간 백작과 동급 취급을 받으며 바보임을 인증하는 것이니까!

그때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노귀족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오나 황제 폐하, 그러므로 더욱 후예가 제국의 사람임을 확실히 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 또한 내가 고심하는 부분이오. 해서, 나는 이틀간 심사숙고한 후 결정을 내리겠소. 그리고 그 결정을 알리는 자리는 삼 일 후, 후예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공표하는 파티장이 될 것이오. 그러나 늦든 빠르든 포상은 온전히 내려질 것이니, 지금 이 시각부터 후예를 제국의 후작에 맞게 예우하시오!”

당장의 결정은 뒤로 미루었지만, 황제의 분명한 명령이 내려졌다. 귀족들도 굳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뜻이 없었다. 마인드 마스터와 그 후예에 대한 포상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제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괜히 반대해서 난화십이식만큼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을지 모를 후예에게 반감을 사는 것은 다시없을 멍청한 짓이야’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잘만 하면, 검후가 마인드 마스터에게 무공을 얻은 것처럼 자신들도 이드에게 무공을 얻을 수 있을지 말이다.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드옵니다.”

“이것으로 오늘 검증은 마치겠다. 물러가도 좋소. 밀리아리아, 함께 가자꾸나.”

검증의 끝을 알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녀에게 말했다.

“아바마마, 허락하신다면 후예께 궁금한 몇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허허허, 하긴. 넌 어릴 때부터 마인드 마스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지. 그리하거라.”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 살짝 볼을 붉힌 황녀가 황제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지만, 황제는 그 얼굴도 이쁘다는 듯 껄껄 웃으며 대전을 나섰다. 그러자 귀족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높아졌다.

그러는 중에 대전을 나서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 후예로 온전히 검증을 받은 이드와 안면을 트고 친분을 나누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의 허락을 받은 황녀의 선점에 누구도 먼저 이드에게 접근하지 못해 지켜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백작 이하의 귀족들과 타국의 귀족들이었다.

백작 이상의 귀족들은 모두 자리를 떴다.

대전에서 수많은 귀족들에 섞여 이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체면 떨어지는 일인 점도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는 이드와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드와 처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파티장이 될 것이었다.

그 속에서 황녀가 이드에게 다가갔다.

“제가 무례하게 대화를 청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요.”

“오히려 황녀님께서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아니었으면 황녀님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라는 분들 때문에 애를 먹었을 겁니다.”

이드가 멀찍이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귀족들의 모습에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에 황녀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네요. 영웅의 후예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니 말이에요.”

“도움을 주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시는 김에 절 여기서 빼 주시면 더 감사하겠지요?”

“그럼 저도 그 은혜를 팔아 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네요.”

“하하, 말이 잘 통하십니다.”

이드는 크게 예법을 따지지 않는 황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드는 자신의 턱밑에 자리한 라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저와 함께 가세요.”

황녀의 권유에, 이드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대전을 걸어 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난화십이식이 담긴 상자를 품에 안은 여기사가 따랐다.

“허・・・・・・ 이리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 주인공을 데려가시다니.”

“황녀께서 너무하시는구먼.”

순식간에 목표를 잃은 귀족들이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이야, 우리 황제 폐하께서 확실하게 신경을 많이 써 주시네. 역시 유명하고 볼 일이야.”

대전 밖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사내의 말에 곁에 서 있던 이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는 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이 붙어 있잖아. 그럴 만하지.”

그런데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일이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곧 게일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장난칠 준비를 하던 사내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여전히 재밌게 지내는 모양이군. 오랜만이네.”

한 걸음 거리를 두고 멈춘 게일이 사내, 폴럼을 시작으로 주변의 초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유명한 게일 경 아닌가. 귀도 밝은가 봐. 설마 거기까지 들릴 줄은 몰랐지. 주변에 우리 말고 시끄러운 사람도 많은데 말이야.”

수다스러운 폴럼의 말에 무표정하던 게일의 얼굴로 오히려 미소가 떠올랐다. 폴럼으로서는 은근한 도발에 게일이 오히려 미소를 짓자 울컥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왜 내 도발을 타지 않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일. 그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게일과 마주 웃었다. 

“자네 목소리는 자주 들어서 익숙하거든.”

사실 게일은 정말 즐거웠다. 언제나처럼 유치하게 자신을 도발하는 폴럼을 보자, 이드의 등장으로 갑갑하던 마음이 풀렸기 때문이다. “익수웁!”

매번 도발이 무시당하던 폴럼의 입꼬리가 떨어졌다. 게일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제대로 역도발이 걸린 것.

하지만 폴럼이 소리를 치기 전에 언제나 그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테페이가 폴럼의 입을 막고 나섰다.

“이 자식아, 제발 장소를 봐 가며 소리쳐라. 대전 앞이라고. 그리고 우리 이야기가 들렸다면 게일 경에겐 죄송합니다.”

“테페이 경도 항상 고생입니다. 그리고 전 여러분의 이야기가 기분이 나빠 온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 이야기야 지금 수도에서 수없이 나오는 이야기니까요.”

“읍읍…… 푸! 그럼 왜 온 건데?”

억지로 테페이의 손을 풀어낸 폴럼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돌려 테페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막으려면 입만 막아, 인마! 숨막혀 죽는 줄 알았다고!”

“하하하, 역시 재밌어. 자네와 자네 친구들이 우리 기사단에 있으면 참 재미있을 텐데. 아쉬워.”

“허, 우리가 무슨 광대인 줄 알아? 거기다 초인이라면 눈 돌아가는 놈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하려고 가겠냐? 흥, 그러고 보니 우릴 보고 노력도 없이 불로소득 얻었다고 한 놈들은 이제 어쩌냐? 저기 책 몇 줄 외우고 후작이 되신 분이 새로 나타나셨는데. 그것도 엄~청 젊은 나이에. 노오력! 하는 놈들이 그렇게도 싫어한다는 천재 아니시겠냐. 벌써 삼검왕급이야. 의외로 넌 좋을지 모르겠다. 이제 천재라는 소리는 안 들어도 될 테니까.”

뜨악!

폴럼의 말에 테페이를 비롯한 친구들은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 자식이, 제대로 한번 긁어 주겠다더니 진짜 제대로 긁네.’

폴럼의 말은 자신들이 듣기에도 좀 심했다. 무엇보다 기사단과 노력을 강조하는 폴럼의 말은, 게일 뒤쪽에 있던 다른 기사들까지 도발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지금 있는 곳이 대전 앞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오랜만에 또 초인과 기사 간의 대형 사고가 터졌을 테니까.

한데 그때 모든 사람을 의아하게 만드는 반응이 나왔다.

폴럼의 빈정거림을 눈앞에서 들은 게일이 실소를 보이며 폴럼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이었다.

순간 공격인가 싶어 긴장했지만, 투기는커녕 한 점의 내력도 담기지 않은 게일의 팔에 주변 사람은 물론 폴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 미쳤냐?!”

그에 게일이 폴럼의 입을 닫아 주며 말했다.

“자네 도발은 언제나 재미있어. 그런 의미에서 내가 충고 하나 하지. 아마, 자네보다 내가 좀 더 정보력이 좋아서 빨리 듣게 된 것 같은데, 듣기로 새로 생긴 후작님이 초인일 수 있다더군. 강력한 무공도 가졌지만, 굉장한 초인기를 가지고 있어서 삼검왕을 이길 수 있었던 거지. 즉, 우리 윗사람이 아니라 자네 계열이란 뜻이네. 우리로서는 분하기는 하지만, 노력이 부정당한 건 아니야. 무공에 초인력을 더한 힘으로 겨우 삼검왕을 이겼으니까. 아, 물론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네. 원래 소문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이런 소문이 있다는 것은 좀 생각해 볼 만한 구석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자네 생각이 어떨지 궁금하군.”

마치 오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은근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말에 게일에 의해 닫혔던 폴럼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물론 답을 위해서가 아니라 놀라서. 그것도 아주 크게.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의 입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