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67화
704화
‘이 자식, 아주 제대로 눈이 돌아갔구나!’
폴럼은 자신이 사고를 칠 때마다 듣던 미친놈이라는 말이 입안에 뱅뱅 돌았다.
설마 검증이 진행되는 대전 문 앞에서 검증 대상인 이드의 실력을 깎아내리는 뒷소문을 언급할 줄이야. 이건 남의 잔치에 주인 보란 듯 똥을 싸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자신도 하지 않을 짓을 태연한 얼굴로 해치우다니!
“나도 눈치 없는 미친놈이란 소리를 많이 듣기는 하지만, 너한테는 졌다. 도대체 얼굴이 얼마나 두꺼우면 여기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
“그저 소문을 이야기했을 뿐이네. 얼굴 두께 같은 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뻔뻔한 게일의 대답에 폴럼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제기랄, 이놈이 원래 이렇게 위험한 놈이었나?’
자신의 도발을 가볍게 넘기던 게일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게일이 그의 속내를 알았다면 폴럼의 유쾌한 도발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을지도.
“그나저나 대답해 주지 않을 건가?”
“엉?”
“저 안에 새로 생긴 후작님이 초인이라면 어떨지 말이야.”
대답을 재촉하는 게일의 말에 폴럼은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그걸 나보고 답하라고? 그것도 여기서?”
“뭐 어떤가. 자네는 타인의 눈치를 보는 사내가 아니잖나?”
후후하는 멋진 미소를 매단 게일의 얼굴에 폴럼은 울컥하고 오기가 치밀었다. 그러다 곧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잔치하는 사람 문 앞에서 그 사람을 욕할 만큼 싹수가 노랗지는 않았다.
“눈치는 안 봐도 예의가 없지는 않거든?”
자신의 생각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입 밖으로 내었을 때, 대전이 시끄러워지며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게일이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쯧, 아무래도 자네와의 유쾌한 대화는 다음으로 미루어야겠군. 다음에 보세.”
“보긴 뭘 봐!”
폴럼은 멀어지는 게일의 등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그의 친구들 눈에는 싸움에 진 개의 미련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헛소리 그만하고 가자. 여기 빈둥거리고 있는 걸 보면 귀족들에게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여성 초인, 에나의 말처럼 게일뿐 아니라 대전 앞에 모여 있던 대부분이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중 몇몇 기사들은 초인들을 살벌하게 쏘아보고 사라진 게일을 쫓았다. 게일 때문에 나서지 못했지만 폴럼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둔 것 같았다.
“네놈 때문에 당분간 골치 좀 아프겠다.”
“흥! 불만 있는 놈이 나타나면 나한테 보내. 다 내가 해결할 테니까.”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겠지. 그나저나, 게일 경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 거지? 너희 새 후작에 대한 소문 들은 거 있어?”
미간을 모은 테페이의 말에 서로를 돌아본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폴럼이 말했다.
“사실은 소문의 근원이 게일 그놈인 거 아냐?”
“아니겠지. 듣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새 후작님 상대로 그랬다가는 아무리 게일 경이라도 그냥 넘어가기 힘들걸?”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문제가 될 테지만, 어차피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테페이는 언급을 피했다.
“그래도 알아볼 필요는 있어. 생각 없이 우리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거야. 내 여자로서의 예감이 간질거리거든. “헹! 너한테 아직도 여자의 감 같은 게 남아 있었냐?”
퍽!
말과 동시에 에나의 주먹이 폴럼의 뒤통수를 묵묵히 때렸다.
그때 일행의 가장 뒤에 있던 키 작은 남자가 폴럼에게 물었다.
“그런데 폴럼, 아까 게일 경의 질문에 뭐라고 답하려 했나?”
그의 말에 다른 사람도 궁금하다는 듯 폴럼을 바라보았다.
“흥, 그런 영양가 없는 질문에 답은 무슨. 그래도 굳이 하자면…… 흐흐, ‘우리 초인은 속 좁은 너희 기사들 같이 심술부리지 않는다.’라고 답했겠지. 우리 초인의 특징이 복불복 아니겠어? 강력한 초인기를 가졌으면, 당연히 위로 올라가야지. 내 말 틀렸어?”
“정확해!”
반문하는 폴럼의 말에 그의 친구들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폴럼이 말한 복불복은 초인이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다. 초인은 각성하는 초인기의 특성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후 초인력이 강해지는 경우는 있어도, 초인기가 바뀌거나 추가되는 경우는 없었다.
기사들처럼 수련과 깨달음에 따라 수준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초인이 되는 순간 강약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초인의 탄생이 가진 한계이자
축복인 특징이었다.
그 때문에 초인들은 갑작스레 자신보다 강력한 초인기를 각성한 초인이 나타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언제든지 새로운 초인이 자신의 위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것이다.
즉, 흔히 말하는 낙하산 인사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능력 차를 기사들보다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초인이다. 반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노력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친구들의 미소를 마주한 폴럼이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게일 그 자식이 무슨 꿍꿍인지 모르면 어때. 일단 그놈이 던진 떡밥이니까 그걸로 신나게 놀아 주자고. 크흐흐흐.”
폴럼이 음흉하게 웃는 사이 이드는 황녀와 함께 내궁에 있었다. 내궁은 황실 가족이 아닌 자가 허락 없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황녀를 동반한 이드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황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이드에게 낯익은 공간이었다. 특히 그 한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들어 보셨을지 모르겠군요. 이 궁전은 오래전 검후님께서 사용하시던 곳으로, 그분이 마인드 마스터에게 무공을 배운 공간이죠. 저기 걸려 있는 그림이 그 순간을 기념한 그림이에요.”
황녀의 말대로 벽에 걸린 그림 속에는 이드와 시르피가 탁자에 두 자루 검을 기대 두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때 마침 시종이 센스 있게 그림 속 찻잔과 꼭 같은 잔을 내어 왔다. 황녀가 그 잔을 들고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 그림 속 두 분을 많이 동경한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가 매우 즐거워요. 마치 그림 속 검후님처럼 이드 명예 후작님과 같이 차를 나누고 있으니까요.”
이드는 방글방글 웃는 황녀의 얼굴이 연예인을 앞에 둔 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황녀는 마인드 마스터와 검후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궁금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서는 정작 질문은 거의 하지 않았다.
결국 이드는 황녀의 수다만 들어 주다가 황궁을 나섰다. 조금 싱거운 시간이었지만,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일찍 나올까 그를 기다리던 귀족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 여자, 분명 꼬리 친 거예요.]
‘글쎄다. 꼬리 친다고 보기에는 너무 임팩트가 약하지 않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는 거죠.]
이드는 확신 가득한 라미아의 말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아무래도 아내인 라미아의 눈에 황녀가 제법 거슬렸던 모양이다.
레오날도 후작이 황녀와의 결혼을 언급했으니 예민한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황궁을 나선 이드는 천천히 걸어 저택으로 돌아갔다. 요청하면 마차를 내어 주겠지만, 며칠 연속으로 마차를 탔더니 걷고 싶었다. 덕분에 자신의 이야기로 흥분한 안티로스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었다.
광장에서는 두 번 다시 쓸 일이 없어진 단두대가 불타오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술을 마시며 가벼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연신 ‘마인드 마스터 만세! 이드 만세!’를 외쳐 댔다.
삼검왕의 눈치를 보느라 조금 억압된 듯한 소드 팰러스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와 레오날도 후작이 이드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히히히, 인기 많아서 좋겠어요!]
그 분위기에 라미아가 기분이 좋은 듯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나쁜 기분은 아니야. 그런데 소드 팰러스와는 확실히 반응이 다르지?”
[흥! 못된 노인네들이 눈치를 주니까 그렇죠. 제국의 영웅이 다시 나타났으면 환호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요.]
“그래. 저렇게 좋아하니 나쁜 기분은 아니네. 오히려 너무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살짝 민망한걸.”
[민망할 것도 많네요. 영웅을 좋아하는 데 뭐 큰 이유가 필요하다고. 그러지 말고 가서 저 축제에 섞이는 건 어때요? 삼 일 후 있을 파티보다 저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귀족들한테서 겨우 도망쳤는데 저길 들어가자고?”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하고 여기가 같나요? 어차피 여긴 이드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잖아요. 저기 너무 재미있어 보인단 말이에요.]
“알았어…… 그럼 딱 한 잔만 즐기고 가자.”
[야호! 그럼 저기 흑맥주가 있는 곳으로 가요!]
맥주를 마실 수도 없으면서 까불기는. 하지만 굳이 멋없이 그걸 지적하지 않고, 라미아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걸었다.
원래는 한 잔만 하려고 했지만, 흥겨운 분위기에 어울려 제법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자신에 대한 평민들의 분위기도 대략 살필 수 있었다. 이드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집사가 달려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후작님.”
“벌써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네요? 그런데 저 아직 후작은 아닌데요.”
“황제 폐하께서 후작으로 예우하라 하셨습니다.”
“하하, 못 당하겠네요. 백작과 이그렌 경은 돌아왔습니까?”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집사의 대답과 동시에 목덜미가 불룩해지더니 새의 형태로 복귀한 라미아가 나오며 말했다.
[대전에서 일리나스의 귀족들을 만났으니 거기 있겠죠. 그때 보니까 주변에 일리나스 귀족들이 가득하던데.]
“음, 이그렌 경이 불편하지 않으려나?”
[이제 더 이상 왕국의 사기꾼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즐기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성격에?”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본 이그렌은 그런 자리에 어울릴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밤늦게 돌아온 이그렌의 얼굴은 반질반질 빛이 나듯 밝았다.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그는 늦은 밤에 이드의 방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가문을 욕하고 조롱하던 놈들이 하나같이 웃으며 저희 가문을 칭송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아셨다면………… 아셨다면… 흐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허헝! 이게 다 이드 님 덕분입니다.”
이그렌은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한을 씻어 내는 것처럼 울어 댔다. 이드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또 흐뭇하게 바라보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그런 좋은 분위기도 잠시였다.
이그렌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했던 말을 끝없이 반복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동안 참고 들어 주던 이드는 결국 더 들어 주지 못하고 수혈을 짚어 방에 던져 버렸다.
참으로 고약한 주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만 해도 골치 아픈데. 했던 말 반복하면서 울기까지 하면 어쩌란 거야?”
최악으로 손꼽히는 주사를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다니 실로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드는 절대 이그렌과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