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22화
859화
배신. 언제 들어도 껄끄러운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저 단어가 관계되는 일이 없기를 빌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배신이란 말이 아무리 싫어도 죽음이란 말보다
두렵고 싫을까.
후다닥.
“미안하게 됐소.”
황급히 녹색 유니온 리더 옆으로 다가간 페리코가 그의 손에서 떨어진 리더 홀을 손에 들었다.
“크워워워!”
그와 동시에 녹색 유니온 리더가 죽으면서 잠시 멈춰 있던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압된 정신이 폭주한 것이다. 폭주한 놈들의 첫 목표가 된 것은 녹색 유니온의 리더 홀을 들고 오크들을 지배하기 위해 정신을 쏟고 있는 페리코였다. 놈들은 머릿속을 괴롭히는 잡음의 원인이 그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 붉은 안광을 뿜으며 날이 긴 글레이브를 높이 들었다.
스스스스슥!
하지만 글레이브가 휘둘러지는 일은 없었다. 음울한 붉은 빛이 일렁인다 싶은 다음 순간.
페리코 주변에 있던 오크들의 머리가 태풍에 떨어지는 낙과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린 것이다.
“아직입니까?”
수라검기로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는 일라이져를 든 이드가 물었다.
“푸후~ 아무래도 녹색 유니온까지 지배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황색 유니온과 달리 죽은 리더의 흔적이 너무 깊습니다. 이 상태로 강행하는 건 힘듭니다. 역시 괜히 관에서 유니온을 나눠 둔 게 아니었습니다.”
죽은 오크 사이에서 피를 흠뻑 뒤집어쓴 페리코가 얼굴을 닦아 내며 급히 말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녹색 유니온의 리더 홀을 던져 버리고 이드를 향해 달려왔다.
“즉, 저쪽 오크 300마리는 재활용이 불가능하단 말이지요?”
“마스터, 베일록 장로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대부분의 특수용 아티팩트가 그렇듯 리더 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나가 필요한데, 협조적인 페리코와 달리 베일록의 마나 써클을 열어 두는 것은 찝찝한 면이 있었다.
차라리 얌전히 도망가면 다행이겠지만, 괜히 조원들이 위험할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자기 책임 아래 있는 사람은 챙기자는 것이 이드의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굳이 필요 없는 위험 요소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말씀하시면 황색 유니온으로 녹색 유니온을 공격하겠습니다.”
“아니, 황색 유니온을 여기에서 소모하는 건 아까우니까 뒤로 물러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알겠습니다.”
300이나 되는 오크 떼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지만, 페리코는 얌전히 이드의 말을 따랐다. 아주 훌륭한 포로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쿠어어엉!”
녹색 유니온은 황색 유니온이 물러서자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뒤로 물러서는 황색 유니온의 오크가 마치 성난 황소 앞의 붉은 천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이 성난 황소처럼 글레이브를 들고 황색 유니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훌쩍 몸을 날린 이드가 놈들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귀한 인형을 함부로 날릴 순 없지.”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오크 따위 아무리 덩치가 커 봤자 훌륭한 과녁판에 지나지 않는다.
번쩍.
안광이 번뜩이며 신안이 열리는 순간, 이드의 심상에 300에서 14가 빠진 286마리 오크의 움직임이 단숨에 들어와 박혔다. 초정밀 레이더가 목표물을 잡아내는 것보다 백배 더한 정확도다. 직후 일라이져가 움직였다.
난화십이식 백화난무. 화르르륵!
일라이져에서만이 아니었다. 이드의 전신에서 뿜어진 수백의 꽃잎이 붉은 비처럼 오크들의 머리 위로 내렸다. 피어나는 봄날, 벚꽃 구경을 가서도 보기 힘든 화려한 꽃의 비가 과분하게도 오크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언제나 과한 소비는 불행으로 끝나기 마련이 아니던가.
분에 맞지 않은 구경을 한 오크들은 그 대가로 목을 내놓아야 했고, 정확히 286개의 머리가 뎅강 잘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훕!”
환상처럼 아련하게 흐르던 꽃향기가 가시고, 그 자리를 286개의 목에서 뿜어진 압도적인 피 냄새가 대신하자 뒤로 물러나 있던 페리코와 벤은 황급히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페리코의 경우 구역질이라기보다는 300의 머리가 한 번에 떨어지는 압도적인 광경에 대한 경악과 공포의 비명을 막은 것에 가까웠다.
‘무, 무섭다. 어째서 저런 괴물이 여기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께서 일찍 항복하신 건 백번 잘하신 일이시다.’
페리코는 돌아가는 즉시 베일록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해, 혹시라도 그가 허튼짓을 시도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장애가 있는 자신을 마법으로 이끌어 준 베일록에 대한 보은이며, 이에 더해 베일록의 허튼짓으로 자신까지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더욱 열심히 협조해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당연했고.
“자, 그럼 돌아가서 잠시 쉰 후에 움직일 테니까. 고생 좀 합시다.”
“옙. 시켜만 주십시오.”
“하하하. 역시 태도가 좋아요. 계속 그렇게 잘 협조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진짜다. 토벌대에 매우 협조적인 인물이라는 말 한마디 더하는 데 어려울 일이 뭔가.
하지만, 방금 백화난무로 인해 이드를 베일록보다 위대하게 보게 된 페리코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고마울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결국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단순한 말도 의미가 달라지고 힘이 실리는 것이니까. 평범한 사람이 전하는 감사의 말과 대통령이 전하는 감사의 말의 무게가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이 감사의 말을 전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돌면 당장 그를 대하는 공무원들의 자세부터 달라진다.
그게 바로 말의 무게다.
이드는 두 사람을 데리고 거점으로 복귀했다.
황색 유니온의 오크는 근처에 대기시켜 두었다. 가까이 두기에는 냄새가 심했다. 유니온을 지배하는 마법사들이야 익숙해졌을지 몰라도 이드와 감시조는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환골탈태와 초인의 오감은 5분이면 적응해 버리는 절조 없는 후각까지 변화시켜 도저히 냄새에 익숙해질 수 없었던 것.
페리코와 벤은 복귀하자마자 각자 베일록과 감시조를 붙잡고 이드의 경악스러운 검술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서 설명했다.
한쪽은 생존을 위해, 한쪽은 자랑스러움을 담아 말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저 오크들을 어떻게 쓰시렵니까?”
알단테가 등 뒤에서 들리는 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거리가 있어 자세히 들을 수는 없지만, 300의 목이 한 번에 떨어졌다는 소리는 분명하게 들렸다.
알단테는 자신들의 조장이 볼 때마다 점점 더 대단해지는 느낌에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감시조 따위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런 대단한 사람을 잠시라도 모신 지금의 경험은 평생의 자랑이 될 것 같았다.
지금도 봐라.
300 오크의 목을 잘랐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300이라는 병력을 획득해 오지 않았는가. 특히 이 300은 적의 병력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번 일로 적은 600의 병력 손실을 본 것과 같다.
아무것도 없는 중에 징집으로 숫자만 채우는 병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드는 은근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알단테의 눈을 따뜻한 차가 든 컵으로 가리고는 등을 기대며 편히 앉았다.
“토벌대가 오려면 삼 일 남았지?”
“예. 토벌대에서 속도를 많이 올린 것 같습니다.”
정신의 관에서 이틀로 시작을 정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 적당히 하루 정도 쉰 후에, 정신의 관 놈들이 설치해 둔 함정을 박살 내놔야지. 그렇게 뒤집어 놓고 하루 쉬면 토벌대가 도착할 테고. 그럼 놈들도 그 이상 엉뚱한 함정 같은 건 설치하지 못할 테니까.”
“하, 함정이 있었습니까?”
이곳에 와서 감시조다운 일을 제대로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정신의 관에서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도 크게 받지 못했던 알단테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간 정신의 관 주변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도 함정 같은 것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있어. 땅에 잘 묻어 둔 놈이야. 거기다 살아 있어서 움직이기까지 하지.”
“함정이 살아 있다니요?”
“마법 함정이거든. 경우에 따라 이동이 가능한 것 같았어. 처음 확인했을 때는 정신의 관을 중심으로 구멍 없이 치밀하게 형성되어 있던 것이 마수 사냥 후에는 넓게 퍼져 있었거든.”
“그, 그럴 수가! 그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함정이 아니잖습니까. 피해도 쫓아오고, 없다는 걸 확인해도 어느새 그곳에 있을 테니. 바로 토벌대에 연락을!”
함정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는 말에 알단테가 허둥대며 통신구를 찾자. 이드가 그를 잡아 세웠다.
“잠깐만.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그게 그렇게 만능은 아니니까. 말처럼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게 아니었으면 전쟁의 개념이 달라졌겠지.”
아무렴. 전쟁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마치 현대의 미사일전처럼. 익스플로전 마법을 땅에 묻어서 적국의 지휘부나 황궁 아래에서 폭발시키면 끝나는 일이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함정으로 설치한 마법진이 움직인다니. 저는 처음 듣습니다.”
“아마 정신의 관이 여기 자리 잡으면서 준비한 것이겠지. 간단히 말해서 이 주변 일대가 모조리 함정 마법진의 일부 같은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까?”
그렇다면 마법진의 일부분에 마나를 집중해서 폭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건 그것대로 무서운 이야깁니다.”
당장 정신의 관과 이곳까지 거리가 몇 킬로미터인데. 그 넓이를 커버하는 마법진 기술이라니.
그 굉장한 규모에 알단테가 부르르 떨었다.
이드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자들이지. 토벌대도 자네처럼 저들의 무서움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지금 토벌대는 정신의 관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거든.”
“…..”
알단테 역시 감시조로 오기 전까지 그런 감정이 조금 있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동시에 이드가 함정을 파괴하려는 이유가 방심한 토벌대가 초반에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이라는 것도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저희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지금까지와 똑같아. 내가 일 끝내고 올 때까지 포로를 잘 지키고 있으면 돼.”
“…..알고는 있지만, 조금 기운이 빠지는 일입니다.”
“그러기 싫으면 실력을 길러. 다음엔 내가 잘 쓸 수 있도록.”
다음 함께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말했던 대로 하루를 쉬려고 했던 이드에게 페리코가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그것이・・・・・・ 황색 유니온의 먹이 때문입니다. 배고프다는 신호가 왔는데. 적당한 먹이가 없어서.”
아무리 마법사의 지배 아래 있어도 생물인 이상 먹어야 살아 있을 수 있는 법.
“지원 온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던 건 없습니까?”
“아무래도 최대 출전 기간을 이틀로 보고 굶길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적도 전투기 때문에 굶으면 더 흥분할 테고요. 하지만……..”
“아, 대충 알겠습니다. 우린 전투로 부릴 것도 아니니.”
“예. 거기다 아무래도 제가 지배하고는 있지만, 정식 리더 홀의 주인은 아니기 때문에, 놈들이 굶주림에 흥분하면 완벽한 통제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흠, 그렇다고 지금 와서 사냥을 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오크 300마리의 배를 채울 만큼의 사냥감이 주변에 없었다.
그때 이드의 머릿속에 푸짐한 고깃덩이가 있는 곳이 떠올랐다.
이드는 곧장 페리코를 데리고 두 개 유니온과 합류했던 지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진한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 육식 동물들이 이미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죽은 놈도 있지만, 살아 있는 놈도 있으니까. 취향대로 고를 수 있을 겁니다. 혹시 황색 유니온의 오크들이 동족이라고 먹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휙휙 고개를 저은 페리코가 즉각 호출을 하자 배고픔에 지쳐 있던 오크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죽어 있는 동족과 그 동족을 뜯어먹던 동물들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 식사는 밤새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든든하게 배가 부른 오크가 든 가마를 탄 이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