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5화
482화
“사람이 굉장히 많네요.”
조용히 이드의 손을 잡고 걷고 있던 일리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넓은 대로 가득 사람과 짐으로 넘치고 있었다. 주변을 구경하면서 걷다가는 순식간에 일행들을 잃어버릴 만큼 복잡했다.
“제국과 거래하는 가장 빠르고 편한 루트라서 사람이 많습니다. 하이탈은 일리나스의 국경 도시 중에서도 가장 크고 번화한 곳 중 하나입니다.”
“이만한 곳이 또 있어? 일리나스의 국경 도시들은 장사 수완이 대단한가 봐?”
일리나와 자신의 사이로 사람들이 몇 차례 지나가는 모습에 일리나의 손을 잡고 있던 이드가 물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갖가지 소음과 가지각색 사람들의 모습은 이곳이 국경인지 수도의 번화가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마치 서울 번화가의 한곳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곳이 더 있단다. 일리나스가 그렇게 장사하기 좋았던 곳인가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아닙니다, 마스터. 이 정도 규모의 도시는 딱 한 곳이 더 있습니다. 북쪽의 하이탈, 남쪽의 베이탈. 일리나스 사람들에게는 수도 아루스한만큼 유명한 곳들이죠. 무엇보다 이 두 도시가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건 장사수완이 있었다기보다는 제국과 통하는 가장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데, 지리적으로 운이 좋았던 거죠. 뭐, 출입을 자유롭게 해서 사람이 늘어난 걸 보면, 하이탈의 영주는 돈의 흐름에도 나름대로 눈이 밝은 것 같기도 하지만요.”
하이탈과 베이탈. 이 두 도시는 일리나스가 유일하게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제국과의 교류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도시였다. 사람이 많이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덩치를 키우기도 했지만, 나라에서 두 도시를 키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 온 때문이었다.
“그래도 대단하네. 그럼 아나크렌은 어때? 그쪽에도 이만한 국경 도시가 있는 거야?”
일리나스에 이런 도시가 있다면 아나크렌에도 있을 만하다 싶은 이드가 물었다.
일리나스 왕국에도 이런 유명한 도시가 있는데, 명색이 제국의 국경 쪽에 이만한 도시가 없다는 것은 국가의 자존심 문제였다. 국가 간의 자존심 싸움은 정말 유치하고 의미 없는 짓이지만, 이것이 또 국민들의 자부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무시할 수도 없는 까다로운 문제였다.
과연 이드의 생각대로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마스터. 우리 아나크렌의 크람은 하이탈보다 더 크고 화려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거기다 하이탈처럼 나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래쪽에 있는 레이논 산맥의 몬스터를 막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과 방어력을 겸비하고 있어서, 그냥 딱 봐도 하이탈에는 없는 박력과 멋이 있는 곳이죠.”
물어보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크람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설명하는 에단이었다. 마치 자사의 물품을 팔기 위해 장점을 설명하는 외판원 같은 모습이었다.
‘이놈 확실히 아나크렌 소속이 맞기는 하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아나크렌의 도시에 대해서 저렇게 열심히 떠들어 댈 이유가 없었다. 제국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애국심인지, 기사가 되어서 교육받은 애국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타국의 유명한 도시에서 저렇게까지 깔보듯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이드는 일리나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에단과의 거리를 벌렸다.
마치 일행이 아닌 듯이.
[에휴, 저 성격으로 잘도 특수 기사단 같은 곳에 붙어 있었네요. 상사가 고생이 많았겠어요.]
순간, 대장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라미아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수비대장이 추천한 여관은 중앙 광장을 기준으로 영주의 성과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이드들이 생포해 온 산적의 현상금을 생각한 탓인지 비싸지만 서비스가 좋고 깨끗한 고급 여관을 추천했다. 추천받은 여관이 자리한 곳은 유흥가와 비슷한 곳으로 주변에 식당과 숙소, 술집과 도박장 등이 모여 있었다. 장사를 위해서 쉬었다가는 곳이 아니라, 관광과 휴식을 위해 온 관광객들이 돈을 쓰게 만든 거리였다.
그러나 이드는 바로 여관을 찾지는 않았다. 여관을 포함한 거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가 보이는 광장에 멈췄다. 광장은 많은 사람과 상점, 난전들로 복잡했다.
이드는 그중 제법 연륜이 있어 보이는 남자가 운영하는 과일 가게에서 일리나가 좋아하는 과일을 한 상자 구매하고는 정보를 구매할 수 있는 곳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대해서 전혀 언질을 받지 못한 에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리나의 어깨 위에 앉은 라미아에게 물었다.
“이봐, 마스터가 갑자기 저런 건 왜 찾으시는 거야? 설마, 직접 마스터의 정보를 파실 생각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왜요, 이드가 왜 저러는지 궁금해요?]
라미아가 마치 낚싯대 끝에 매달린 물고기를 바라보듯이 에단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궁금하지. 나는 이번 일에 대해서 들은 게 없단 말이야. 미리 뭘 하실지 말씀을 해 주셨으면 내가 정보를 구해오든가, 안내하면 되는데.”
그때 짧게 몇 마디 전해 들은 이드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자. 과일 상자는 이따가 여관으로 가져다주기로 했어.”
“저………… 마스터, 왜 정보 조직을 찾으시는 겁니까? 웬만한 일은 저도 알고 있는데, 저한테 물으시면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에단은 살살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말을 믿고 움직여 주던 거물의 갑작스러운 일탈에 편안히 늘어져 있던 마음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이다.
후계자라는 타이틀이라면 혹시 몰라도, 마인드 마스터라는 타이틀은 처음부터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드의 성격이 좋은 덕분에 그도 큰 부담 없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편하던 인물이 갑자기 정보 구매를 위한 라인을 찾고 있으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간이 쪼그라드는 긴장을 맛보게 되었다.
에단처럼 최신 정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사용하던 정보 라인 이외의 다른 라인을 찾는다는 것은 배신과 결별을 위한 준비 단계라는 표현과 같았다. 에단이 긴장하는 것은 일종의 본능적이고, 습관적인 행동과 같은 것이었다.
이드는 거의 부동자세에 가까운 에단의 모습에 픽 웃어 보이고는 상인이 말한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서 이러는 거야. 너한테 듣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쿵!
에단은 뱃속 밑바닥으로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 마스터.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 그런 거 없어. 넌 잘하고 있어. 단지 널 통해서 듣고 싶지 않은 거지. 방금 네가 크람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듣고 더 그런 생각이 들었지. 난 네 생각이 들어간 주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제3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객관적인 정보를 원하거든.”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이드의 그 말에 마음이 놓이는 한편,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한 에단의 긴장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아나크렌에 대한 정보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내가 지금 그곳 말고 다른 곳의 정보가 필요할 일이 뭐 있겠어. 목적지에 대한 정보 정도는 미리미리 챙겨 봐야지. 너처럼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외부인들이 냉정하게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각 세력의 관계는 어떤지, 그리고 과연 아나크렌의 황실에서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야. 과연 이런 정보까지 정리되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역시나.
에단은 이드가 원하는 내용에 대해 듣고는 차라리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도 지금까지 너무 순순히 자신을 따라와 줬다고 생각했다. 비록 과거에 친분이 있던 태대공녀가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 대한 소식 말고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자신을 너무 쉽게 따라나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록 엘프가 곁에 있어서 어중간한 거짓말을 모두 가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엘프의 눈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이드의 모습에 에단은 그가 얽히고설켜 출구 없는 미로 같은 아나크렌의 정국 속에서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면 단순할 정도로 자신을 무작정 믿고 따라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원래 정보라는 게 다방면에서 봐야 오류 없이 입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거니까요.”
“음?”
이드는 순간 에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에단의 생각을 짐작하고서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그저 에단에게서 듣지 못한 아나크렌 황궁에 대한 정보를 말 그대로 객관적으로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에단의 말이 사실이란 것은 그가 말을 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위대한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그러한 판단도 저절로 가능한 경지인 것이다.
인간이 아닌 신의 권능. 불교에서 말하는 육신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무공이 극에 달해서 우화등선했다는 말이 괜히 전설처럼 강호에 떠도는 것이 아니다.
“뭐, 그런 것도 있지. 그리고 네가 은근히 황궁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끙.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스터. 그저, 그저 제 말주변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해서 이후 소드 팰러스에서 자세히 들으시라는 뜻이었습니다.”
“뭐, 그렇다 치고. 이거 먹으면서 용병 길드나 찾아봐라. 광장 끝에서 동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가면 있다고 하더라.”
이드는 상인에게서 구매한 상자에서 꺼내 온 노란색 과일을 에단에게 던지며 말했다. 에단이 과일을 받고 앞서 나가자 이드는 일리나와 함께 과일을 먹으며 에단의 뒤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그때 영주성에서는 수비대장이 보낸 병사가 성에 편지와 벤을 전달하고 있었다.
벤은 기사에 의해서 성의 감옥으로 보내지고, 편지는 집사의 손에 들려 영주에게 전해졌다.
어두운 회색의 짧은 머리카락과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를 가진 남자가 집사가 은쟁반 위에 올려 건네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래쉬 하이탈.
일리나스에서 부유하기로 손에 꼽히는 영지의 주인이자 수도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남자. 그가 바로 래쉬 하이탈
자작이었다.
“쯧!”
가만히 편지를 받아서 읽은 자작이 작게 혀를 차고는 중후한 멋의 비싸 보이는 책상 위로 편지를 던졌다. 그 모습을 보고 집사가 편지를 곱게 접어 책상의 한쪽에 반듯하게 올려 둔다.
“멍청한 놈이 드디어 잡혔군. 그래서 놈은 지금 어디 있나?”
“지하 감옥의 ‘그 방에 넣어 뒀습니다.”
“잘했군.”
집사가 알아서 행동한 일이 마음에 드는지 하이탈 자작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두 놈에 대해서 따로 연락 온 건?”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혹, 상처를 입어서 숨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가 잡혀 온 만큼 곧 연락해 오겠지요.”
“그렇겠지. 그렇지 않아도 이놈들을 슬슬 처리할까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처분해야겠어.”
“그럼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기사단이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하이탈 백작은 말과 함께 간단한 손짓으로 집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잠시 창밖으로 도시를 바라보다 집사가 정리해 둔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엘프라. 엘프가 속한 여행자라는 말이지. 산적 놈들을 처리한 걸 보면 단순히 그것뿐은 아닌 것 같고, 일단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어. 혹시나 먹을거리가 있는지 말이야.”
도대체 무슨 먹을거리를 생각하는 것일까. 입술을 적시며 군침을 삼키던 하이탈 자작이 다시 창밖의 도시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자작의 눈이 음험하게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