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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55화


891화

화르르륵!

번뜩이는 눈빛. 누가 보면 눈에 횃불이 들었나 하겠다. 거기에 마주 쥔 두 손은 귀중품을 보면 훔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소매치기처럼 상자를 향해 움찔거린다.

그러더니 애써 침착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상자를 주십시오. 제가, 아니, 저희 마법사들이 그 상자의 비밀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밝혀내겠습니다.”

말은 점잖은데, 기세는 먹이를 노리는 육식동물 같다. 거기에 저렇게 떨리는 손이라니.

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줄 생각이었지만, 그냥 주지는 못하겠다.

“그 전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일단 그런 이야기는 상자를 주시고 남은 분들과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다른 분들도 그렇지만, 특히 토리빈 마법사께서 들어 두셔야 할 말입니다. 이 상자에 관한 거죠.”

“어허. 상자에 관한 것이야 분석하다 보면 다 알게 될 일인데. 미리 알려 주시면 파헤치는 재미가 없어집니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뒤에 나온 본심이 듬뿍 담긴 말에 여기저기서 혀 차는 소리가 났다. 빠른 분석을 통해 적의 약점을 알아낼 생각을 해야지. 분석하는 재미를 따지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쯧쯧쯧.”

“크흠.”

괜히 막사 안에 있다가 같이 도매급으로 넘어간 마법사들이 난감함에 헛기침을 해댔다.

막사 안의 분위기가 변하자 아무리 토리빈 마법사라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괜히 반발감도 생겼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말이다. 보기 드문 정령사라 친해져 보려 했던 마음이 사라진 토리빈이다.

이드가 알았다면 기뻐했을 변화랄까.

“크흠.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이 상자에는 분명 초인기가 담겼습니다. 제가 보고 겪었지요. 하지만 어떻게 초인기를 담았을까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겁니다. 이 상자에 든 것. 상자에 초인기를 담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이 안에 초인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좌중이 술렁였다. 대부분은 이드의 말에 의문과 불신을 표했다.

“그게 무슨!”

“에이, 저 작은 상자에 어떻게 사람이 들었단 말이야?”

“그런데 명예 후작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잖아.”

놀란 것은 비단 귀족들뿐 아니었다.

욕망을 폭발시키는 중이던 토리빈 마법사의 눈빛도 침중하게 변했다.

“이 크기에 초인이 들었다면 ・・・・・・ 신체의 일부. 머리입니까?”

뚫어질 듯 상자를 노려보던 그의 결론이었다. 과연 욕심이 과해서 그렇지. 경험 많은 마법사다운 혜안이다.

“맞습니다. 더구나 살아 있었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만큼의 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드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사 안에 있던 초인들이 정제된 분노와 살기를 피워 올렸다.

“뿌드득. 인체 실험!”

“사지를 잘라 개 먹이로 던져 줘도 모자랄 놈들. 제 버릇 못 버리고 감히 또 이런 짓을 해!”

“윽, 머리만 살려 둔다니.”

“미쳤군, 미쳤어. 괜히 토벌 대상이 된 게 아니야.”

초인들만이 아니었다. 머리만 잘라 살려 두고 이용한다는 엽기적인 행태에 모든 사람들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중 갈색의 멋진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이드를 보며 말했다.

“그럼 명예 후작께서 확인하신 상자의 초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의 대부분 전투 중에 상자가 파괴되어 사망했습니다. 드물게 살아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상태로는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일 것 같아 안식을 주고 모두 정령의 불로 화장했습니다.”

사실을 담담하게 전하는 이드의 대답에 질문을 던졌던 남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해 왔다.

“정령의 불이면 고통받던 초인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그들을 대신해 명예 후작께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남자뿐 아니라 몇 명의 초인들이 함께 고개를 숙인다. 이드에 대한 초인들의 호감도가 소폭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드는 그 모습에서 초인들이 생각 이상으로 끈끈한 동지의식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초인들은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에 반해 평민과 떠돌이가 대부분인 희생자를 대신해 감사를 표하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평민을 대신해 귀족이 감사 인사를 한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이었다. 이드는 그것을 초인들의 네트워크가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럼 그 상자 안에도 역시?”

고개를 든 남자가 상자를 가리켰다.

“제대로 작동 중인 것 같으니 아마도.”

고개를 끄덕인 이드는 그제야 상자를 토리빈 마법사에게 넘겼다.

“휴~ 무겁군요.”

상자에 들어 있는 생명의 무게 때문인가. 보기와 달리 가벼운 상자를 토리빈 마법사는 무겁게 받아들었다.

불타오르던 호기심도 많이 가신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자로부터 초인 마법을 얻을 가능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마나 마족, 정령을 봉인해서 그 능력을 뽑아 쓰는 아티팩트나 마도구의 경우, 꼭 그 능력의 원리를 알아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아티팩트의 핵심은 봉인한 소재의 능력을 뽑아내는 것에 있다. 물론 아예 얻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봉인한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마법의 신비로움이다. 과학과 달리 원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자원을 채굴해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힘. 하지만 초인 마법을 기대한 토리빈 마법사에게는 확실히 조금 기운이 빠지는 사실임은 분명했다.

대신 덕분에 한 가지 의심은 풀렸다. 놈들이 초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상자를 당당히 보상이라며 내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 말이다.

마법사 간의 좀 더 고차원적인 지식 유희라고 여겼는데.

“내 기대가 너무 높았던 모양이오.”

짧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토리빈 마법사가 상자를 들고 막사를 나섰다. 그 뒤를 마법사들과 소수의 초인들이 뒤따랐다. 상자의 처리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내일 방문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 보도록 합시다.”

록마틴 후작이 회의 주제를 잡았다.

사실 특별한 준비가 더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적진 앞에서 진을 치고 있어 최대한 경계 중이다. 그저 그 강도를 조금 더 하면 될 뿐. 이 회의에서는 황녀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그에 반해 이드는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기만 했다. 모를 때는 조용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대군의 운용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는 이드는 이 말을 열심히 실천 중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온 결과에 따라 늦은 저녁까지 토벌대의 진형과 함정을 포함한 경계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작업이 이어졌다.

“자, 어디 마음대로 해 봐라.”

록마틴 후작이 지휘부 막사 앞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토벌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실시간으로 탑주에게 전해졌다.

“후후. 내 말을 곡해한 후작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탑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록마틴 후작의 성향이나, 성격에 대한 분석이야 한참 전에 끝나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그래 봤자 자기들 기운만 빠질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지요.”

가래 끓는 목소리로 노파가 말했다. 딱 봐도 백 살은 넘어 보이는 노파는 탑주 앞에서 매우 다소곳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무지가 비효율을 낳는 법이지. 그보다 던전의 보수는 끝이 났느냐?”

“문제없이 일을 마쳤습니다. 더불어 베일록과 프리실라의 모든 권한도 소거해, 그들이 토벌대에 협조했을 때를 대비했습니다.”

부탑주가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그뿐 아니다. 베일록과 프리실라가 정신의 관에서 하던 일과 연구 역시 다른 마법사에게 넘겨졌다. 일반적인 마탑의 경우 개인의 연구를 타인이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정신의 관의 모든 연구는 탑주의 바이트 타블렛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내용은 부탑주에게 공유되고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이 없어도 그들의 연구 결과를 사용, 발전시키는 것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너는 여전히 끔찍할 정도로 꼼꼼하구나.”

과하다는 듯 혀를 차는 말투와 달리 부탑주를 바라보는 탑주의 눈에는 신뢰가 단단하다. 항상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 마법사로서 매우 좋은 자세였으니까.

사실 부탑주의 이런 꼼꼼함은 필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쓸데없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계약 때문이었다. 떠나는 것은 괜찮지만 마탑을 공격할 경우 계약 위반으로 두 사람의 생명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 적에게 협조하는 순간 죽음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내일 내가 방문하는 것만 남았구나.”

“저희들이 해도 될 일인데, 굳이 탑주께서 직접 행차하실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탁자에 둘러앉은 마법사 중 하나가 말했다.

하찮은 일에 탑주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불만인 듯했다.

하지만 탑주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물론 자신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가 움직여도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꼭 자신이 해야 했다.

“초인 마법을 세상에 내어놓고 처음으로 그것을 밝히는 자리다.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내가 아니면 누가 감당할까.”

원만한 형태의 공개는 아니지만, 일단 세상에 초인 마법과 마탑이 나서는 순간이다.

꿈꿔오던 순간이 왔다는 사실에 바위 같던 탑주의 가슴이 다 떨릴 지경이다.

“클클클. 그렇지요. 탑주가 아니면 감히 누가 대륙에다 대고 초인 마법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셔야지요.” 

과연 마법 실력을 못해도 나이는 그냥 먹은 게 아니다.

탑주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는 노파의 말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반대는 듣지 않겠다는 뜻이다.


탑주가 예고한 방문의 날이 밝았다.

록마틴 후작은 던전 공략을 중지시켰다. 공략을 지연시키려는 수작에 놀아나는 것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토벌대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손해가 나더라도 하루. 큰 손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토벌대는 조용히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이미 탑주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져, 내부적으로는 탑주의 방문을 두고 온다. 오지 않는다. 내기가 한창이기도 했다.


“올까?”

이드가 말했다. 이드들은 현재 가장 넓은 황녀의 막사에 모여 있었다. 주 임무가 황녀의 보호라서 토벌대와 따로 떨어져 여유 있게 티타임 중이었던 것.

“탑주 말씀이십니까?”

이드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차린 쉴라가 물었다. 어제 지휘부 막사에서 끊임없이 설전을 벌였던 내용이었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에서 달달달 다리를 떨며 앉은 비올라를 보며 물었다.

“그런 거죠. 슬슬 점심시간도 지났고. 그런 의미에서 네가 보기엔 어때? 탑주는 직접 만나 본 적 있다고 했잖아.”

비올라의 시선은 활짝 열린 막사의 문을 넘어 던전을 향하고 있었다. 이 방에 앉아 단 한순간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적이 없다.

“절대로 옵니다. 탑주가 헛소리를 하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종교인도 가지기 힘든데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 믿음에 대한 응답이 왔다.

던전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던 것.

그것은 검은 표범과 잘 닮은 마수였다.

“과연 믿음이 틀리지 않았네.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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