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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58화


894화

“미완의 마탑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초인 마법이 있음을 알게 할 것이다.”

토벌대가 도착한 날. 그 앞에 나타난 탑주는 이런 내용의 선언을 했더랬다.

그때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자는 이드를 포함한 소수의 관계자들뿐이었다. 나머지는 미친 마법사의 헛소리 정도로 비웃어 넘겼었다.


이제 상황이 달라진 지금 앞서와 비슷한 말을 들었지만, 느껴지는 무게감이 다르다.

몬스터의 대군. 깊은 던전. 던전 곳곳에 설치된 초인 마법. 거기에 더해 농담 빼고 초인을 갈아 넣어 초인기를 담은 물건까지 상품이라며 내보였다. 이쯤 되면 진짜 미치광이의 지랄 발광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 미치광이의 지랄 발광에 자국이 제국만큼의 힘을 보유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무공과 소드 팰러스에 비유한 것이 컸다. 무공의 대단함과 소드 팰러스의 영향력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드는 심하게 동요하는 외교관들에 탑주가 노렸던 것이 이것인가 싶었다.

분열.

‘하지만 그건 이 토벌대 안에서는 통하지 않을 텐데.’

토벌대가 다국적군이라면 통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록마틴 후작이 이끄는 토벌대는 전력의 대부분이 순수한 제국 소속이다.

그중 타국의 전력은 외교관의 안전을 명분으로 한 극히 일부. 그들이 다른 생각을 품어 보았자 당장 토벌대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 하지만 크든 작든 분란이 될 소지는 확실하다. 당장 록마틴 후작을 비롯한 제국 측 귀족들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외교관들을 흔들어 놓은 탑주가 이번엔 이드, 라미아와 눈을 마주쳤다.

“내 듣기로 후작 부인께서 흑마법의 저주를 뒤집어쓴 탓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들었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 하지만 생명의 관의 정복자여, 아시오?”

“뭐? 저주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바로 그렇소. 초인 마법이라면 기존의 마법으로 해결하지 못한 저주의 해주가 가능하오.”

단호히 장담하는 탑주다.

그 모습에 이드와 라미아는 눈을 마주치고는 내심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저주라니. 그건 온전히 인간으로 변신하지 못하는 라미아가 대외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내세운 변명일 뿐. 저주 같은 건 있지도 않다.

아니, 라미아를 저주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기라도 할까? 라미아가 제작될 당시 투입된 재료는 하나하나가 귀하고 귀한 것들. 그중 신성력이 담긴 재료도 적지 않았다. 그런 라미아에게 저주를 내리려면 흑마법사 따위는 어림도 없고, 어디 음차원 깊이 사는 지옥 대공이라도 직접 나타나야 가능할 것이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장담하니, 우스울 수밖에.

거기에 공수표를 날리는 탑주도 문제다. 대사기꾼의 자질이 있다고 할까?

비올라와 바이트 타블렛을 통해 초인 마법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아는데 저 탑주는 마치 초인 마법이 만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초인 마법이 기존 마법은 고사하고 신이 내려 주시는 신성력보다 대단하다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

“신성력은 물론 위대한 기적의 힘이오. 하지만 아시오? 초인 마법 또한 신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려 준 기적이라는 것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연산과 마나, 마력의 공명 등 많은 과정이 필요하오. 하지만 초인을 보시오. 그런 과정이 필요하오? 마법과 같은 효과를 만들지만, 그들에겐 마법과 같은 복잡한 과정은 필요치 않소. 그저 신관이 신성력을 쓰는 것처럼 기대고 바라기만 하면 되오. 아무런 전후의 과정도 필요치 않으니. 나는 초인 마법이야말로 진정 신께서 인간에게 내려 준 기적이라고 생각하오, 또…..”

떠벌떠벌.

초인 마법에 대해 설파하는 탑주의 말이 쉼 없이 이어졌다. 점잖은 척하더니. 초인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세상에서 제일가는 수다쟁이가 된 듯하다.

마법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이다.

이대로 두면 끝이 없다. 막지 않으면 사흘 밤낮 쉬지 않고 나불댈 것 같은 모습에 이드가 손을 들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오? 공짜로 저주라도 풀어주겠다는 거요?”

그렇게 말하는 이드의 표정은 심드렁하다.

그 모습에 탑주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저주를 풀 수 있다는데. 저런 무관심이라니. 혹시 후작 부인과 관계가 좋지 않은가 싶었던 것.

하지만 준비한 카드를 꺼내지 않을 수는 없다.

따닥.

탑주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렸다.

순간 미세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지만, 이드는 무시했다. 그 마법이 메시지 마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어질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듣지 않기를 원해서 사용하는 것일 터. 아니나 다를까.

“생명의 관에서 가져간 타블렛을 돌려주시오. 그렇게 해 준다면 마탑의 명예를 걸고 후작 부인의 저주를 풀어주겠소.”

과연. 뜬금없이 저주 이야기를 꺼내더니. 바이트 타블렛이 목적이었던가.

한번 회수하려다 포기한 후,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깨끗이 단념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체할 방법이나 예비가 있다고 해도 원본을 넘을 수는 없죠. 특히 진리에 닿는 새로운 법칙을 세상에 박아 넣는다는 마법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원본에 담긴 의념과 사상, 그리고 상징성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죠. 납득할 만한 대가만 제시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수하고 싶을 거라고 봐요.』 라미아가 말했다.

‘그렇단 말이지.’

히쭉.

이드의 입매가 길게 늘어났다. 어쩌면 검후에 대한 탐색과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복 획득이 생각보다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자리는 길게 이야기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당장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눈을 번뜩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 문제라면 차후에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하도록 하지. 다음 던전 진입 때가 적당할 것 같은데?”

“역시 명예 후작이 가지고 있었구려. 하면 그때 회수를 막은 것은 후작 부인이겠고.”

“당연하지. 은색 기사단에는 마법사가 없으니까. 그보다 어때?”

“….그렇게 하겠소.”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과 동시였다.

“방문 목적은 이걸로 끝인가?”

여전히 팔짱을 낀 록마틴 후작이 말했다. 그는 탑주와 이드 사이에 은밀히 이야기가 오고 갔음을 알았지만, 따로 추궁하지 않았다.

‘굳이 외부에 자세한 사정을 알릴 필요는 없지.’

이 자리가 파한 후 조용히 물으면 될 일이라 판단한 록마틴 후작이다.

“끝이오. 본 마탑의 위대한 출발과 초인 마법에 대한 그대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 재미있는 것이 생각났소. 던전을 내려올수록 당신들은 초인 마법의 진정한 위력을 보게 될 터. 하지만 희생만 있어서는 재미가 없을 것이니. 내가 상품을 걸도록 하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층을 해결하면 초인 마법으로 초인기를 담은 아티팩트가 나타날 것이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앞서 세 개 층을 돌파한 생명의 관의 정복자에게 드리는 상품이오.”

탑주는 품에서 와이번이 새겨진 황금 접시를 꺼내 이드에게 밀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 즐겁게 도전하여 초인 마법의 위대함을 아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오.”

“이제 끝인가?”

“그렇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온전히 끝이라오.”

“그럼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나?”

록마틴 후작이 팔짱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복 의사를 묻는 것이라면 이미 거절한 것으로 아오.”

“나도 같은 말을 반복할 생각은 없다. 대신 올 때는 마음대로라도 갈 때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군. 시작하라!”

번쩍!

록마틴 후작의 신호가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빛이 번쩍이며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거대한 마법진은 동일한 파동으로 주변을 감쌌다. 겹치고 겹쳐 새장처럼 보이는 다중 마법진.

바로 탑주를 잡기 위해 준비한 마법이었다.

본신이 아닌 마법을 통한 것이라면 생포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아무런 시도도 없이 그냥 놓치기는 아까운 일.

성공의 가능성이 적다고 해도 시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다중 마법진이었다. 단순한 물질적 수준을 넘어 영체를 가둘 수 있는 7클래스의 마법.

고스트 포트리스.

토리빈 마법사가 무려 초인기를 담은 상자까지 잠시 내려 두고 주관한 마법이다.

하지만 탑주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훌륭한 마법. 토벌대의 마법사가 토리빈이라고 했던가. 실로 뛰어난 실력이오. 그러나 고스트 포트리스로는 초인 마법 섀도 체이서를 막아 낼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오. 그럼 작별 인사는 잘 받고 가오.”

정중히 인사까지 건넨 탑주가 돌아서는 것과 동시였다.

풀썩.

온전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던 탑주의 몸이 원래의 마수의 형태로 돌아오고, 또 그 마수가 쓰러져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으려니, 웅장한 위압감을 발산하고 있던 마법진이 사라지며 침중한 표정의 노마법사가 나타났다.

“토리빈 마법사. 어떻게 되었소.”

“완전히 놓쳤습니다. 고스트 포트리스가 아무것도 걸러 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섀도 체이서라는 마법이 특별한 것이겠지요. 아무래도 초인 마법에 대해 좀 더 심각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궁리한 회심의 한 수가 너무 쉽게 무너지자 토리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결국 놈의 수작에 놀아나기만 한 것인가.”

록마틴 후작이 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그는 한쪽에 모여 있는 외교관들을 향해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초인 마법과 매직 팰러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후부터 그들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하고 후회가 되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무엇보다 외교관들은 황제의 허락에 따라 대부분의 자리에 참석이 가능했다.

토벌대의 강력한 힘에 확신을 가진 황제의 실수라면 실수랄까?

설마하니 황제도 탑주가 국가 마탑이라는 카드를 들고나올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그대들과의 작은 인연으로 미리 경고하건대, 섣부른 생각으로 가볍게 움직이지 않기를 바라오.”

행여 허튼짓을 한다면 절대 그냥 넘기지 않겠다.

그런 뜻이 담긴 묵직한 목소리의 경고를 남긴 록마틴 후작이다.

외교관들은 급히 고개를 숙여 답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록마틴 후작도 알았다. 이 경고와 대답이 온전히 지켜질 리 없다는 것을.

어차피 외교관의 일이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은 본국에 전달하는 것이 주 임무.

당연히 이번 일에 대한 결정은 각국의 결정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정신의 관은 제국의 땅에 있고, 저들이 제국의 땅에 있는 한 타국이 어떤 욕심을 부리더라도 이루어지는 일은 없으리라.’

그리고 몸을 돌린 록마틴 후작과 이드의 눈이 마주쳤다.

“명예 후작은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러시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는 라미아와 함께 록마틴 후작의 막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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