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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61화


897화

“분위기가 어수선한 게 록마틴 후작님이 꽤 고생하시겠어.”

토벌대 안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은 이드가 작게 혀를 찼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여유로운 한편으로 잘 짜여 있던 군기가 지금은 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 흐름의 중심은 외교관들이 머물고 있는 막사다. 그리고 그런 일그러짐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처럼 외교관 막사 주변을 은근히 경계하는 기사들까지 한몫하고 있으니.

“이게 다 탑주. 그 인간 때문이잖아요. 아주 폭발 전문가 뺨치는 폭탄을 던지고 갔어요.”

이드는 라미아의 맞장구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터져도 제대로 터졌다. 도저히 피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급소에 박혔다. 다국적 토벌대였으면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났을지도 모를 엄청난 파괴력이다.

토벌대가 순수 제국 전력이라는 것이 참 다행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이 분위기를 수습하고 토벌에 온 힘을 다하려면 꽤 고생스러울 것 같았다.

“뭐, 어차피 고생하는 건 내가 아니긴 하지만.”

“지금 굉장히 얄미운 얼굴인 건 알아요?”

일리나가 샐쭉한 이드의 눈가를 꾹꾹 눌러 펴며 말했다.

“얄미워도 어쩔 수 없어요. 행복은 몰라도 고생을 나눠 짊어져 줄 의리는 없으니까.”

록마틴 후작이 들었으면 퍽 섭섭해할 말이지만, 분명히 말해 사실이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사적인 자리를 가진 적도 손에 꼽힌다.

서로 인간적인 호감과 신뢰는 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딱 거기까지였다. 전투 중이라면 몰라도 진창 같은 정치적 문제로 같이 고생해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는 이드다.

“일단 괜히 귀찮은 일에 휩쓸리는 것만 피해 보자. 갔다 올게요.”

이드는 어떤 제의가 들어오건 최선을 다해 피해 주겠다는 의지를 다지고는 일리나와 라미아를 뒤로했다.


자신의 막사를 나선 이드는 록마틴 후작이 있는 지휘부 막사로 향했다.

낮에 황녀와 쉴라가 참가한 중요 회의와 달리 전체 회의가 잡힌 탓이었다. 토벌의 재시작이 정해진 만큼 중요 사항은 그 회의에서 결정된 것 같지만.

그래도 세부 조정은 필요했고, 그런 의미에서의 전체 회의였다.

그리고 이 회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낮 회의에서 나온 결정 사항의 전달에 있었다.

그것을 보여 주듯 참가 인원이 모두 모이고 막사의 문이 닫히자 황녀가 앞으로 나섰다.

토벌대 안에서 록마틴 후작과 같은 권한을 지녔지만, 한 번도 주도적으로 앞으로 나선 적이 없는 황녀가 말이다.

“어서 오세요. 제국의 영웅분들, 미남, 미녀분들과 함께하는 저녁 티타임은 오늘이 처음이죠? 자주 좀 모여야 했는데, 반성하고 있답니다.” “하하하.”

우선 가벼운 분위기와 농담으로 말문을 여는 황녀다.

굳이 먼저 나서지 않을 뿐. 타인의 앞에 나서는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그녀는 능숙하게, 그리고 매끄럽게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고, 자신이 원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상대의 내 말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만든 후에 말을 꺼내는 것. 바로 제왕학의 기본이고, 황녀는 이를 아주 잘 따랐다.

그녀는 오늘 있었던 탑주와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낮에 있었던 황실과의 통신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달했다.

“토벌대와 황궁은 긴밀히 의견을 나누었고, 이를 지켜보신 황제께서 최종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결과를 전하기 전 잠시 말을 끊은 황녀가 좌중을 훑어보았다. 마치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듯이.

그 단순한 행동에, 그 짧은 순간에 황실과 귀족들 간의 신뢰가 차곡차곡 쌓인다.

황녀가 토벌대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기사들의 지지를 얻는다면, 이 눈빛의 교환은 귀족들의 호감을 얻는 작업이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기는 소리와 함께 황녀의 입이 열렸다.

“토벌대에 참가한 외교관과 그 호위 기사들에 대해, 제국의 입장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고로 내일부터 이어지는 토벌에서도 외교관과 그들의 호위 기사들을 배제하는 일은 없습니다.”

“어찌 그들을 그냥 두고・・・・・・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순간 좌중이 술렁였다. 낮의 회의에 참가한 인물들은 무덤덤했지만, 이 결정에 대해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탑주가 던전 안에 보물을 두겠다 말했고, 모두 그 보물을 탐내고 있다. 특히나 마스의 외교관은 대놓고 조건을 말했다 하지 않은가.

이런 시점에 외교관들의 참가를 유지한다니?

“하나 황녀 전하. 저들의 참가를 그대로 두면 위험한 전리품이 타국의 손에 넘어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을 터. 그것이 미래 제국의 우환이 될까 신은 그것이 우려스럽습니다.”

결국 온전히 납득하지 못한 자 하나가 나섰다.


이드는 심각한 표정의 남자에 냉소를 머금었다.

입으론 나라의 우환을 말하지만, 그 속이 너무 빤히 보여서다. 욕심.

좀 위험해도 탑주가 보물을 뿌렸고, 잘하면 그 보물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잘못하면 보물을 외교관들에게 도둑맞게 생겼다 여기는 것이다.

‘나라의 미래가 어쩌고 하는 인간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은 한 번도 못 봤다.’

역사를 봐도 그렇다. 저런 말을 하는 자들 중 진정으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인물은 지구와 그레센을 통틀어도 정말 한 줌이나 될까. 나머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미래’라는 말을 적당한 명분으로 가져다 쓰고 버릴 뿐이다.

이드의 눈이 황녀를 향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황녀와 쉴라에게 들은 것이 있었다.


“아나크렌을 위하는 경의 마음은 기꺼울 뿐입니다. 또한 경의 우려 역시 이해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과연 토벌대를 조직하고, 저들의 참가를 허락할 때, 저들이 던전에서 나오는 티끌만 한 전리품도 가지지 않고 맨손으로 돌아갈 거라고, 순진하게 믿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요. 그런 순진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나하나를 따라다닐 수도 없고,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전장에 저들에 대한 완벽한 감시가 가능할 수도 없으니까요.”

아무리 제국의 힘이 강해도 변화무쌍한 전장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다고 자신할 만큼 오만하고 어리석지는 않다.

“저들이 참가한 순간부터 저들이 크든 작든 초인 마법의 흔적을 가져갈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국은, 황제 폐하께서는 저들의 참가를 허락했습니다. 그것은 황제 폐하의 넓은 아량이었고, 그런 찌꺼기를 모아서는 아나크렌에 어떠한 위협도 될 수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데 그 찌꺼기가 고작 파편이 되었다고 해서 앞서 내렸던 결정을 뒤집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나크렌의 자존심을 더럽히고, 대륙에 오롯이 선 아나크렌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이 아닐까요? 본 황녀는 단언합니다. 그런 아티팩트 한둘은 아나크렌에 그 어떠한 위협도 될 수 없을.”

고고하게 목을 세운 황녀의 말에 그 앞의 사람들은 압도된 듯 조용하다.

뒤에 앉은 록마틴 후작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즐겼다.

‘후후후, 황제 폐하와 대신들을 설득한 황녀의 말씀이다. 당신들이라고 별수 있을까.’

무려 고민하던 황제와 대신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 일장 연설이었다. 전리품이 중하냐. 아나크렌의 아량과 자존심이 중하냐.

현대 국가라면 몰라도 자존심 때문에 죽고 죽이는 일이 흔한 대륙이라면 정해진 답이나 마찬가지.

처음 질문을 던졌던 귀족도 힘없이 자리에 앉고 만다. 대신 다른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저들이 전리품을 챙기는 것을 그대로 허락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들이 참가할 때 내걸었던 기본 조건은 전리품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국이 아량을 베풀 수는 있어도 저들이 사사로이 전리품을 챙기는 일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운이 좋아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이 저들이 챙기는 물건까지 어찌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제국 체면에 들고날 때마다 외교관과 호위 기사들의 몸수색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국의 눈을 피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운이고, 실력이니 제국의 넓은 아량으로 눈감아 주겠다는 것.

“물론 그렇다고 대놓고 아나크렌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아나크렌이 어째서 제국인지. 제국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철저히 알게 해야겠지요.”

제국은 제국다워야 한다는 처음 말과 달리 냉기가 풀풀 날리고, 비릿한 철의 냄새가 풍기는 말이었다.

그 기백은 좌중의 호응을 끌어냈다.

짝…… 짝짝짝.

“맞습니다. 고작 아티팩트 따위로 대 아나크렌 제국의 자존심을 굽힐 수는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감히 제국을 허투루 보는 자는 갈기갈기 찢어 개 먹이로 던져 버리겠습니다!”

우레 같은 박수와 함께 호응하는 고함이 쏟아졌다.

자신이 몸담은 제국의 품 넓은 아량과 고고한 자존심을 세운 결정과 연설.

특히나 황태자가 나기 전까지 첫 번째 황위 계승권자로 지금까지도 황제의 단단한 믿음을 얻고 있는 황녀의 말이기 때문일까. 막사 안 귀족들은 마치 황제의 직언을 들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황녀의 말에 흐트러진 분위기가 단번에 잡혔어. 후작님 운이 좋으셨네.’

한발 물러선 자세로 좌중의 분위기를 살피던 이드는 뒤로 물러나서 착석하는 황녀와 록마틴 후작을 번갈아 보았다.

막사를 나올 때만 해도 어수선한 분위기에 록마틴 후작이 고생할 줄 알았는데.

제국에 대한 애국심과 귀족과 기사로서 가진 자존심을 자극하는 황녀의 연설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다.

괜히 귀찮은 일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신경 썼던 것이 우습게 되어 버렸다. 그나마 그 사실을 일리나와 라미아밖에 몰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황녀가 내려가고 록마틴 후작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토벌대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새로운 의견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든 좋으니 말해 주시오.”

이제 토벌대 본연의 임무로 돌아올 때라고, 후작은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소드 팰러스의 청색 기사단에서 앞으로의 토벌에 대한 의견이 있습니다.”

모이엔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이드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과연 언제 움직일까 싶었던 인물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순간 눈이 마주친 쉴라와 이드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두 사람은 조용히 이어질 모이엔의 말에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제발이요~ 잠깐만 써 볼게요~”

“안 돼!”

막사의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소리에 이드가 궁금한 얼굴이 되었다. 라미아를 중심으로 비올라와 케마란이 들러붙어 징징거리고 있다.

“무슨 일이야?”

“세 분 모두 고생하셨어요.”

정신없는 와중에 일리나가 특유의 분위기로 이드들을 반겼다.

“고생은요.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황금 둥지에 대한 라미아의 조사가 끝났거든요.”

“아, 그래서? 결과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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