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67화
903화
“그나저나 벌써 던전에 진입하고 두 시간이야. 이러면 시간이 모자라는데.”
각 조는 던전 공략에 세 시간을 허락받았다. 시간이 다 되면 다음 조와 교대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삼 조는 이동에만 한 시간에 전투와 정리에 또 한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당장 돌아가도 세 시간이 넘는다.
“이대로 복귀하긴 여러모로 아까워.”
스폴이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제 겨우 공략 방법을 찾았는데. 무엇보다 적들도 저희가 밀실까지 찾아냈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교대를 하게 되면……………”
나만 적을 알고, 적은 나를 모를 때, 그 때가 바로 완벽한 기습의 때라고 배운 스폴이 아까워 죽겠다며 이드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공략 시간을 좀 더 늘릴 수 없을까요?”
“저번 이 조가 했던 바보짓을 따라 하자고?”
“도대체 절 어떻게 보시고, 당연히 아니죠! 전 그냥 현 상황을 보고하고, 공략 시간을 조정받자는 뜻입니다. 전장에서 직접 기사단을 이끈 경험이 풍부하신 록마틴 후작님이시라면 분명히 알아주실 겁니다.”
무엇보다 삼조에는 황녀와 명예 후작님이 있으니까요. 스폴은 그렇게 더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삼조의 요청은, 다른 조와는 다른 힘이 실리는 것이다. 다른 조에서도 짐작하고 있는 일. 기사단이 괜히 황녀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 조정이라.”
확실히 환경이 달라진 만큼 시간 조정이 필요할 듯 보였다. 6층의 공략이 끝나고 안전을 확보한 후라면 몰라도, 현재는 조심해서 왕복하는 데만도 두 시간이 걸린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공략이 가능하기나 할까.
“전 스폴 경의 의견이 나쁘지 않아 보여요. 6층부터 다르다는 말에 경계하다 시간에 신경 쓰지 못한 것은 분명한 실책이니까요.”
“저희도 황녀 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스폴의 말에 공감한 황녀가 말하자 케일럽을 비롯한 단장급 기사들이 지지하고 나섰다.
당연한 일이다. 기사들의 입장에서야 입맛만 버린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니까. 앞선 공략에서도 이드의 뒤만 따랐을 뿐.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던 터라.
오늘의 공략까지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 것이 기사들의 마음이었다.
이런 반응에 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와 기사들의 요청도 요청이지만, 이드부터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6층 공략에는 정령이 필수라는 말이지. 아니면 적 초인들의 초인기 이상의 투과 능력이나 땅을 움직일 수 있는 초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드가 토벌대의 초인들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그만한 능력자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상태로 다음 조에 공략을 넘겨 봐야 좋은 결과를 보기 힘들 뿐 아니라, 삼 조에서 만들어 놓은 흐름만 망가트릴 가능성이 높다.
“좋아. 그럼 누가 록마틴 후작님을 뵙고 올 텐가?”
“……”
결정을 내린 이드의 질문에 기사들이 묵묵부답 서로 눈치만 보았다. 서로 빠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보고를 위해서는 기사 한두 명으로는 힘들다. 다시 생겼을지 모를 함정이나, 공격을 생각하면 최소 한 개 기사단이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삼 조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 있는 기사단으로,
그런 요건을 따져 잠시의 소란이 있은 후 뽑힌 것이 슈프림 기사단이었다.
“어째서 내가!”
“어째서는? 슈프림의 방패가 가장 단단하고, 빠르기 때문이지.”
“자리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시게~ 껄껄껄.”
슈프림 기사단장의 억울한 외침에 순식간에 쿵짝이 맞아 그에게 짐을 떠넘긴 기사단장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반론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 나름 친해졌다 믿었던 단장들의 배신에 슈프린 기사단장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이미 결정된 것을 무를 수는 없는 일. 그는 이드와 황녀의 메시지를 받아 기사단과 함께 왔던 길을 터벅터벅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후.
밀실 정리가 끝났다. 마법사들이 사정하며 뭉그적거렸지만, 기사들의 힘을 버틸 재간은 없었던 것.
덕분에 빨리 끝났다.
“초인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시체의 소각까지 마쳤습니다.”
“아무렴. 신사라면 떠난 자리까지 아름다워야지.”
이드는 빠를 뿐 아니라, 깔끔하기까지 한 마무리에 만족하고는 조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삼 조. 우리는 다시 던전 공략을 재개하려 한다. 준비는 되었나!”
“충! 저희 검은 언제든 적의 목을 벨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좋군. 출발!”
“오오!”
기운찬 대답과 함께 토벌대가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그런 삼조의 진형은 처음과 달리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적에 대해 완벽히 파악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최고의 준비를 해 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확실한 대비책은 이드지만요.”
뒤를 돌아본 라미아가 생글거리자 이드가 앞서가는 그룸을 가리켰다.
“말은 바로 해야지. 진짜 대비책의 핵심은 그룹이지. 안 그래?”
‘안 그래. 나 범고래.’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줄 알고 고개를 젓는 그룹이다.
그 모습에 라미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땅의 정령이 범고래라니. 도대체 그런 이름은 왜 준 거예요?”
“흠흠. 나도 장난으로 부른 이름을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지. 난 강요한 적 없다고.”
이드는 나름 억울했다. 그라고 해서 기분 따라 가볍게 흘러나온 말에 그룸이 이렇게나 강하게 반응할 줄을 알았겠는가.
“그리고 범고래라는 이름이 나쁜 건 아니잖아? 누구보다 본인도 좋아하고.”
아닌 게 아니라 그룸은 범고래, 범고래 하며 콧노래를 부르면서 타박타박 가장 앞서 나가고 있다.
그에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일리나가 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 이름이 좋아요. 무엇보다 정령과 이름을 주고받는 것은 서로의 계약을 깊게 하고, 소환된 정령의 존재를 강화시키는 첫걸음이니까요. 그리고 범고래는 크고 강하잖아요. 분명 범고래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이름으로 했을 거예요.”
이름을 주면 정령이 강해진다. 정령사 중에서도 알고 있는 이가 적은 사실이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모두가 정령에게 이름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정령사가 지금처럼 귀해지지도 않았을 테니까. 정령에게 이름을 주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정령이 소환자를 인정하고, 소환자가 주는 이름이 정령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어 주듯, 아무리 같은 이름을 불러 봐야 정령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강하다라. 그럼 씨서펀트나, 블랙터틀이라고 불러 줄 걸 그랬나요? 그쪽이 범고래보다 더 강한데.’
씨서펀트나, 블랙터틀 모두 바다를 누비는 대형 몬스터다.
지구와 달리 그레센 바다에는 범고래 정도로는 명함도 내밀기 버거운 대형 몬스터가 수두룩하다. 특히 바다 몬스터는 해양이라는 환경 탓인지. 그 덩치부터가 육지 몬스터와 차원이 다르다.
그 차이는 대양으로 나갈수록, 또 수심이 깊어질수록 점점 커진다.
그러자 그런 이드의 말에 일리나가 질색을 한다.
“정령에게 몬스터의 이름을 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무엇보다 정령들도 싫어할 거고요.”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 사자나, 재규어 같은 이름이면 몰라도 굼벵이나, 뱀, 바퀴벌레라는 이름을 붙이면 누군들 좋아할까.
“그러네요. 내 실수에요.”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 가는 사이 새로운 갈림길을 앞에 둔 때였다.
‘여깄어.’
우뚝 멈춰 선 그룸, 범고래가 이드에게 그가 보는 땅속 이미지를 전해 왔다.
“역시 더 있을 줄 알았지.”
그건 마치 잠수정에 타고 바닥을 구경하는 것 같은 이미지였다. 이드는 그 속에서 땅속을 헤엄치는 초인들의 모습을 눈, 코, 입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 있는 거대한 밀실까지.
까딱까딱. 휙~ 휙!
적의 기습을 알리는 수신호에 따라 이드의 손이 흔들렸다.
그에 조원들의 움직임에 미세한 차이가 생겼다. 발끝의 방향이 밖으로 향하거나, 말수가 줄거나, 손을 무기에 가까이 위치해 두는 등의 사소한 정비.
하지만 항상 사소한 것이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드는 법.
부웅~
앞서와 마찬가지로 뜬금없이 무기를 든 수십의 손이 사방에서 튀어나왔고, 그 공격은.
“비겁한 놈들, 기다리고 있었다!”
차차차창!
기사들의 완벽한 대처에 막혀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군데군데에서는 반격까지 하고 있는 상황.
이드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지금이다. 가랏, 범고래!”
이번엔 제대로 새 이름을 불러 줬다. 그래서인가 신이 나 폴짝폴짝 뛰던 범고래가 한순간 에잇, 하고 허공에 냅다 발을 내질렀다.
‘응. 내 집에서 나가.’
‘으어억! 날 찬 놈이 누구야!’
“우와!”
벽 속에서 울리는 먹먹한 비명과 생생한 당혹성이 교차한 다음 순간.
땅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초인들이 마치 말의 뒷발에 차인 것처럼 통로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떤 미친 새끼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던 초인들은 곧 우글거리는 기사들의 눈빛에 황급히 다시 초인기를 사용했지만, 이미 이 일대는 범고래의 영향력이 깔린 상태.
그들의 시도는 진한 통증으로 끝이 나고 만다. 대신 그들 주변으로 기사들이 포위망을 좁혀 들었다.
“반갑구나. 두더지 놈들아.”
“빛이 따가운 것 같으니. 우리가 영원히 눈감게 해 주마.”
“사악한 제국의 적을 베라!”
기사들의 기세가 실로 살벌하다.
“씨이퍼얼!!! 퇴로가 막혔다. 죽기 살기다!”
하지만 초인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쩌면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가진 거라곤 물질 투과 능력밖엔 없는 초인들이 독기를 품고 무기를 들었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
이드는 그쪽에서 눈을 돌리고는 대기 중인 적색 기사단을 불렀다. 충돌이 발생했을 때 밀실을 정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라발을 앞에 둔 이드는 범고래를 시켜 밀실 천장까지 이어진 통로를 만들고는 말했다.
“반항하는 자는 살려 둘 필요 없습니다. 저쪽 상황을 봐서는 살려 달라고 쉽게 항복하는 자도 없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항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밀실에 난입했을 때도 항복하는 자는 없었다.
“이 붉은 망토의 뜻을 안다면 감히 대항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망토를 펄럭이며 자신감을 보인 라발은 다음 순간 망설임 없이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을 두고 나머지 적색 기사단원들이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폭음과 비명,
그 비명이 멈추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밀실과 통로 양쪽 모두 말이다.
일단 한번 해 본 일은 쉽다. 정리도 빨랐다. 이번에도 포로는 없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항복하는 자는 없었다. 죽음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말이다. 모종의 금제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중간에 록마틴 후작의 명령을 받기 위해 올라갔던 슈프림 기사단도 돌아와 충분한 시간을 약속 받았다.
그에 이드와 범고래를 선두로 한 삼 조는 거침없이 세 개의 밀실을 더 정리했고, 그 후 7층으로 향하는 문 앞에 당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