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72화


908화

라미아가 결론을 내렸다.

초인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다.

즉, 8층의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최종 발현 단계에서 초인기 골자 형성을 방해하는 마력 간섭을 차단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방법인데. 당장 제작에 필요한 32가지 재료를 수급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제작해야 할 아티팩트의 숫자에요.”

대략 헤아려도 천 개 이상의 아티팩트가 필요하다. 아티팩트라는 것이 대충 뚝딱거려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작에 필요한 의식과 마법의 각인들을 생각하면 정말 까마득한 작업이며, 동시에 어마어마한 시간을 필요할 것이 당연하다.

다 제작하고 나면, 그땐 이미 정신의 관은 다른 곳에 이사 가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결론이지만, 옆에 함께하고 있던 토리빈 마법사는 그저 황홀한 표정을 할 뿐이다.

“단편적인 몇 가지 단서와 잔류 마나만으로 최종 결과를 조합하고, 순식간에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마법의 조합과 아티팩트의 구상까지 해내다니. 반했다!”

결혼한 여성을 상대로 상당히 위험한 눈빛을 번뜩이는 노마법사 되시겠다.

하지만 이드는 그 눈빛을 못 본 척했다. 그는 라미아를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마법사로서, 자신이 목표할 곳에 먼저 닿아 있는 고귀한 존재로서 바라보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이건 좀 반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토리빈 마법사는 이번 토벌에서 초인 마법을 처음 접했지만, 라미아는 다르다. 그녀는 생명의 관에서 얻은 자료와 비올라, 그리고 바이트 타블렛의 연구를 통해 오래전에 초인 마법을 알고, 연구해 왔으니까.

뭐, 그렇다 해도 그 모든 것은 그녀가 가진 기본적인 마법 능력이 뛰어난 때문이니. 토리빈 마법사의 착각이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8층에 설치된 마법진을 파괴하는 방법은 어때? 어차피 마법을 유지하는 핵이 사라지면 마법도 힘을 잃을 텐데.”

“바로 그겁니다.”

이드의 말에 어떻게든 초인기를 정상 발현시켜 보려 비지땀을 흘리던 초인들이 반색했다.

“핵은 있지만 이 위치에서 파괴하긴 힘들어요.”

그러나 곧장 고개를 흔드는 라미아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핵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기에 힘들다는 거야?”

“최하층이요. 8층 전체에 보조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핵은 지하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이 틀림없어요.”

“바이트 타블렛이 이렇게도 쓸 수 있는 거였어?”

이드는 갑자기 튀어나온 바이트 타블렛의 존재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저 힘의 덩어리. 또는 초인 마법의 정수가 녹아든 비급의 개념으로 여겼는데.

그 자체로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니.

‘비급이라기보다는 신의 말과 자비, 그리고 실체적인 힘이 담긴 성검 같은 성물 쪽에 가까운 거였네.’

그것도 세관에 흩어져 있던 타블렛 중 하나의 힘만으로 초인들을 무력화시키다니. 괜히 탑주가 대가를 주고서라도 돌려받으려고 했던 게 아니다 싶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대단한 물건을 강탈한 것 같아 뿌듯한 이드다.

그럼 혹시 우리가 가진 타블렛으로도 이런 게 가능해? 제약을 걸거나 푸는 것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초인파를 상대하기가 매우 편해질 것이다.

어쩌면 특별히 싸우지 않고서도 검후를 복귀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막말로 대륙의 초인 세력을 붕괴시킬 수 있을 키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시치미를 떼지도, 딜을 받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기대는 순식간에 접혔다.

『불가능해요. 괜히 생명, 정신, 영혼으로 나눈 게 아니에요. 8층에 있는 효과를 내려면 이곳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을 얻어야 해요. 그리고 연구를 통해 사용 방법도 탐구해야 하고요.』

어디 슬쩍 찔러 볼 것 없이 단호한 라미아의 말.

이드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매우, 매우 아쉬웠다.

“아쉽네. 어쩔 수 없지. 그럼 여긴 이 상태로 공략하고, 그 후에도 특별히 조심해야겠네.”

지금까지도 앞서 공략을 완료한 층이라고 숨은 함정이나 공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초인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키는 8층은 특별히 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일단은 그래야죠. 조금 시간을 가지고 준비를 하면 이드가 한 것처럼 이 공간 전체에 대한 간섭을 차단할 수 있겠지만. 당장은 힘드니까요.”

8층의 넓이를 생각하면 그런 대대적인 작업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은 아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후작 부인!”

사막에서 오아시스의 위치를 전해 들은 것처럼 간절한 눈으로 라미아에게 고개를 숙이는 초인들이다.

얼마의 시간이 걸려도 8층을 지날 때마다 무력한 상태가 되는 끔찍한 기분을 피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 그들의 심정이었다.


8층의 핵심은 초인의 무력화.

그에 대한 분명한 결과가 나오자 삼 조는 거침없이 전진했다. 확인을 위해 동행한 소수의 초인을 제외하고 모두 마법사와 기사로 이루어진 전력이었으니, 적이 나타나면 싸워 이기면 그뿐인 간단한 일이니까.

물론 실제 전투가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초인들이 사용하는 초인기들이 워낙 예측 불허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불을 뿜어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화살처럼 날카롭기도 하고, 폭포처럼 강렬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기사들과 마법사들 역시 그런 초인의 싸움에는 익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탑의 초인들과 토벌대의 차이점.

그건 바로 토벌대가 전투의 프로 중의 프로라는 것이다. 마탑에서 어지간히 훈련을 시켰겠지만, 수백 년 노하우가 쌓인 제국의 훈련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쿠르르르~

“플레이밍!”

“빛에 새긴 각인, 명멸하는 빛의 축복을 거두어 가리니 흑암의 권능을 두려워하라. 블라인드니스!”

초인기는 적절한 마법에 막히고.

“마법사가 길을 열었다. 창기사들 돌진!”

“후하!”

“끄어억!”

“초, 초인기가 왜 안 통하는…… 켁!”

그렇게 열린 길을 기사들이 질주한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죽은 초인들의 피와 시체뿐.


“압도적이군.”

조원들의 활약을 바라보던 이드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이대로라면 딱히 나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특히 앞으로 나서서 전장을 조율하는 스폴과 빠진 초인들의 모든 빈자리를 자신이 채우겠다는 듯 날뛰는 케일롭을 비롯한 소수의 초인들까지. 아주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다.

“그러면서도 체계적이고, 초인을 상대하는 것이 매우 익숙하네.”

“적이 많은 세상이니까요. 기사가 꼭 기사와 싸우라는 법도 없죠.”

기사들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며 황녀가 말했다. 이드를 따라 팔짱을 끼고 있어 가슴이 봉긋하다.

“그리고 한때는 세상 모든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초인과 싸웠으니까요. 오래전 일이지만요.”

초인이 세상에 인정받기 전의 이야기다. 아무래도 그때 얻은 전투 데이터는 그대로 남아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대로면 8층은 의외로 쉽게 공략을 끝낼 수 있겠는데, 다음 층까지 내려갈 건가요?”

던전 안에서는 항상 황녀와 함께 움직이는 일리나의 말이다.

이드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만 언제나 앞 조의 정보를 얻어먹을 순 없죠.”

이 조의 희생으로 두 번이나 사전 정보를 얻어 득을 보았으니, 한 번쯤은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중간중간 이어진 황녀의 응원 덕분인가. 뜨겁게 타오른 기사들은 8층을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그리고도 멈추지 않았다. 

“9층으로 가자!”

“황녀 전하께서 계신 우리 삼 조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황녀 전하께 영광을!”

분위기가 오른 기사들이 으쌰으쌰 힘을 내며 9층의 공략까지 순식간에 해치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9층이 8층과 같은 환경이었던 탓이다.

바로 초인기에 대한 제약,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제약 방법, 제약 대상이 달랐다.

하지만 그래봤자 무슨 소용인가. 삼 조에 있는 초인이라고는 한 줌도 되지 않는데.


“상품이다! 저기 상품을 찾았다!”

그렇게 기사들이 날뛰는 중에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에 전투를 마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정신없이 몰려들었다.

“잠깐 아무도 만지지 마시오! 손끝이라도 까딱하는 인간은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 가장 선두.

토리빈 마법사가 마법까지 써 가며 가장 앞서 달렸다.

“저희도 가 볼까요?”

이드도 그 뒤를 따라 일행을 이끌고 현장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모여 있던 기사들이 물러서고, 그 앞으로 황금의 제단과 그 위에 놓여 있는 커다란 대검이 보였다.

그리고 황금 제단에 적힌 짧은 글.


-시련에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정신과 마나를 쌓은 것에 경의를 표하며, 키릴 베이몬.


“경의를 표한다니. 던전을 만들어 토벌대와 싸우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닌데 거기다 누구에 대한 경의야?”

초인기에 대한 제약을 벗어난 초인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초인이 아닌 기사와 마법사에 대한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이드가 제단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두 손을 번쩍이며 제단과 대검 주변을 뱅글뱅글 돌던 토리빈 마법사가 막아섰다.

“아직 검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함부로 만지시면 위험합니다.”

“괜찮습니다. 상품이지 않습니까. 설마 탑주씩이나 되어서 불량품을 상품으로 내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황금 둥지도 멀쩡했고요.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그리고! 괜찮지 않다고 해도, 저라면 문제없습니다.”

“그럼요. 이드는 최고의 테스터죠.”

이드에 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토리빈을 옆으로 잡아끄는 라미아다.

스르릉.

막아서던 사람이 사라지자 이드가 대검을 잡아 들었다. 빛을 받아 날이 시퍼렇게 번들거렸다.

그에 기사들의 감탄성이 터졌다. 뛰어난 기사는 대장장이만큼 무기를 보는 눈이 있다. 그들은 단숨에 대검이 쉽게 보기 어려운 검임을 알아본 것이다.

“이것도 사용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모양이네.”

대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고, 검기까지 뿜어 본 이드가 말했다.

황금 둥지와 마찬가지로 사용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사용법은 전하지 않은 것도.

“이건 황금 둥지처럼 바로 풀기는 어렵겠지?”

“아무래도 기본 정보가 없는 만큼, 시간이 좀 걸려요.”

토벌대에 와서 라미아의 일복이 터진 것 같다. 아니, 마법사의 호기심을 생각하면 기뻐하고 있을지도?

이드는 대검을 라미아에게 넘긴 뒤, 처음 대검을 발견한 기사를 찾았고 그에게 대검과 함께 기사의 이름을 록마틴 후작에게 전하겠다고 말했다. 그에 중견 기사단의 평기사인 그는 매우 기뻐했다.

어쩌면 저 대검이 그의 것이 될지 모른다. 가능성은 매우 낮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다른 기사들도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뒤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새로 나오는 상품은 없었다.

상품 대신 9층 끝. 10층의 입구가 나타났을 뿐이다.


그에 다시 마법사들이 나섰다.

문을 열기 전. 10층 입구서부터 9층 입구까지 직통로를 뚫었다. 9층도 구불구불한 미로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매번 복잡한 미로를 지나는 것은 피곤하고,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작업.


쿠르르릉.

“열렸습니다.”

작업을 마친 마법사들이 잠시 문에 달라붙어 있더니, 문이 열렸다.

“햇빛?”

이드는 살짝 열린 문을 비집고 나오는 따스한 빛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곧 활짝 열린 문 안쪽의 모습에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 미친놈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던전 안에 숲을 꾸며 둔 거야?”

끄덕끄덕.

이드의 말에 수백의 사람들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사람.

“진짜 숲의 향기에요. 풀과 나무.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어요.”

엘프라는 정체를 숨기고 있던 일리나는 얼굴 가득 반가운 미소로 눈앞의 현상을 반겼다. 설마 답답한 지하에서 숲을 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거대한 숲이었다. 그것도 밀림 수준으로 푸르른 숲이다.

단단한 돌벽으로 만든 미로와는 다른 의미의 미로처럼 보였다.

천장도 몇 배는 높고, 푸르렀다. 던전 밖의 하늘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하다. 둥실둥실 구름도 떠 있다.

그리고 구름 너머 뿌옇게 보이는 벽.

이드의 공간감이 벽까지 거리가 8킬로라고 알리고 있다.

“차라리 환상이면 이해하기 쉽겠네.”

일리나가 숲의 향기와 생명을 말하는데. 가짜일 리가.

“공간 확장과 왜곡을 이용했네요. 하늘은 환상 마법이고, 던전 밖의 하늘을 실시간으로 전송해 오는 것 같아요.”

라미아의 설명이다. 하지만 설명으로 납득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던전 한 층으로 꾸며진 숲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좋은 실력으로 왜 초인 마법에 매달리는지 이해를 못 하겠네.”

“오히려 도전할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도전하는 거 아닐까요? 간단하게.”

재능이 없다면 꿈은 꿈으로 끝날 뿐이지만, 재능이 있다면, 능력이 있다면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쯧쯧, 이래서 천재들이란.”

“누가 누굴 욕해요?”

불과 스물이 되기 전에 화경에 오른 이드가 천재를 욕해 봤자 누워서 침 뱉기가 될 뿐이다.

“그냥・・・・・・ 불질러 버릴까?”

숲을 바라보던 이드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으로 흘리고는 일리나의 눈치를 봤다.

“전 상관없어요.”

눈이 마주친 일리나가 말했다.

그런데 표정 변화 없는 그녀의 모습이 절대 상관없어 보이지 않는 것은 착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