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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73화


909화

사실 이대로 발길을 돌려도 좋다.

초인기를 무력화시켜 모두를 섬뜩하게 만들었던 8층 공략을 성공시킨 것만으로도 삼조의 역할은 충분했으니까. 그뿐인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세 그대로 9층 공략까지 끝내 버렸다.

덕분에 주어진 공략 시간이 간당간당해졌지만, 높아진 난이도를 감안하면 기적 같은 속도다.

이대로 지상으로 올라가면 또 한 번 놀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삼 조는 내려가기만 하면 한 층 이상은 기본이냐고.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운데.”

그럼에도 막상 올라가려니 아쉽다 싶은 이드다.

생소한 환경이지만 10층 문을 열었으니, 다음 조를 위해서도 최소한의 정보는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 두 번이나 이 조의 희생으로 얻은 정보의 득을 봤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특히나 컸다.

‘이 조가 마음이 넓어서 희생한 건 아니지만.’

받은 게 있으면, 나눌 줄 알아야 올바른 인간이지 않겠는가.

“한 바퀴 가볍게 돌아보고 올까나.”

적의 노림수도 모른 채 조원들을 무턱대고 숲으로 밀어 넣을 생각은 없는 이드가 그렇게 혼잣말을 할 때였다.

투웅.

컵에 담긴 물에 물방울이 떨어진 듯, 잔잔한 호수에서 튀어 오른 잉어가 물결을 만드는 듯, 숲의 중앙으로부터 궁전처럼 웅장하고, 잠든 바다처럼 잔잔한 마나가 밀려왔다.

살랑.

동시에 그 뒤를 따라 바람이 실어 오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향.

“차향인가?”

이드는 향에 숨은 차의 더운 김을 느꼈다. 실로 괴이한 지경에 이른 초감각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먼 길 날아오며 따뜻하게 피어오른 김이 식고, 증발되어 정밀 기계로도 잡아 낼 수 없는 것을 태연히 말하다니.

“알스트로메리아에요.”

살포시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는 일리나의 말이다.

“알스트로메리아요?”

“네. 시온 숲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꽃이에요. 오래전에 멀리 있는 동족에게 이 꽃으로 만든 차를 선물로 받아 마셔 봤어요.”

굳이 얼마나 오래전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혹시 꽃말도 알아요?”

“인간들 사이에서는 배려, 새로운 우정, 초대를 뜻한다고 했어요.”

그녀의 대답에 이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초대였네. 찾아온다고 했지만, 이 타이밍에 나타나다니. 보기보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네.”

그렇지 않아도 차향과 함께 전해진 마력이 기억에 있었다.

바로 토벌대를 방문했던 탑주의 마력이었다. 거기에 초대의 꽃말을 가진 차향이라니.

던전을 만들고 그 안에 숨어 피비린내 나는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참으로 고상한 초대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이드다. 하는 일과 상관없이 더 아름답고, 달콤하고, 좋은 것을 쓰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따지고 보면 탑주나 고위 귀족이나 무림의 위명 높은 고수까지 모두 타인의 피로 쌓은 성 위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

그래도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있다.

“진짜 어이없는 인간이네. 희귀해서 잘 알려지지도 않은 꽃으로 초대라니. 알아차릴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향을 접하고, 마셔 보지 않았으면 만 권의 책을 읽은 현자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엘프인 일리나가 귀하다고 한 꽃이지 않은가 말이다.

“마력으로 영역 표시 확실히 했다고 여겼겠죠. 차향은 잘난 척이고, 나는 이만큼 교양있고, 아는 것이 많다고. 그보다 갈 거죠?”

“당연, 얼굴을 마주하면 뭔가 나와도 나오겠지.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일단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야 새로운 정보도 나오는 법이다.

“전 이번에도 따라갈 수 없겠죠?”

가만히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녀가 애처로운 표정을 하고 있다. 일전 탑주의 방문에도 함께하지 못한 만큼. 이번에야말로 같이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 것 같다.

“황녀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드의 반응은 단호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황녀를 지킬 자신은 있지만, 피할 수 있는 위험이라면 피하는 것이 좋다. 사실 황녀가 직접 전투에 나선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굳이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일리나, 그리고 스폴 경은 황녀 전하를 중심으로 철저히 방어 진형을 짜도록 하고.”

“맡겨 줘요.”

“감히 어떤 자도 우리 조의 벽을 넘을 수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전 어떻게 해요?”

두 사람의 대답과 함께 라미아가 붙어 선다.

뻔히 답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에 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연히 같이 가려고 했는데. 싫으면 그냥 있고?”

“싫기는 누가요. 빨리 가요.”

훌륭한 표리부동의 표본이다.


이드는 팔을 잡아끄는 라미아와 함께 10층의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포근한 흙의 질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빼곡하던 나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뿌드득. 뿌드득.

엔트도 아닌데 스스로 움직이는 나무와 땅.

길이 만들어졌다. 푸른 가지가 늘어진 그림 같은 숲길이다. 발아래로는 작은 돌멩이 하나 차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이런 숲길을 걸으니 기분 좋네요. 이드와 단둘이 걸은 게 까마득한데.”

“시온 숲에서 많이 걸었잖아.”

이드가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시온 숲에 머문 시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곳은 어딜 가나 그림같이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그 말이 아니잖아요. 그땐 이 모습도 아니었고.”

“뭐, 그렇기는 하지.”

그땐 라미아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라, 같이 걸을 수도 없었다. 정확히는 이드의 어깨나 머리에 올라앉아 있었지.

“기다려. 지금도 열심히 노력 중이니까.”

라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이드다.

인간의 형태는 하고 있지만, 골렘을 사용한 것이라 서로의 온기를 나누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 그래도 다행이라면 초인기를 얻어 철에 대한 지배력이 오른 덕에 라미아라는 존재의 변형에도 나름 발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 공을 들이면 인간은 힘들어도, 숨을 쉬고 피가 흐르는 진짜 생물은 가시권이다.

“알고 있으니까. 지금은 좀 더 쓰다듬어 줘요.”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라미아. 그녀가 이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적진 한가운데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

두 사람이니 가능한 일이 분명했다.


숲길은 정확히 4킬로였다.

초록의 숲길이 끝이 나자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지며, 거대한 정원이 나타났다. 아름답게 다듬어진 나무와 잘 가꾼 색색의 꽃이 가득한 정원.

그리고 그 중앙에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는 눈부시도록 하얀 정자.

“여기 아무래도 싸우려고 만든 곳이 아닌 것 같지 않아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핀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동감이었다. 어딜 봐도 전투 공간이라기보다는 휴식 공간이다. 푸른 나무와 정원, 그리고 정자까지. 마법사들도 휴식이 필요할 테니. 어쩌면 꼭 필요한 공간인지 모른다.

은밀하게 던전을 만들어 두고 밖으로 산책을 나갈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

그런 정원의 중앙. 하얀 정자 안에 그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검은 로브를 걸친 탑주가 있었다.

“어서 오시오.”

눈이 마주치자 탑주가 자리를 권했다.

이드와 라미아가 정원을 가로질러 정자에 들어섰다.

“쯧, 손님 대접이 엉망이군. 자기 집 안에서도 가짜 몸으로 손님을 맞다니. 예의가 없어.”

토벌대를 방문할 때와 같다. 이드는 탑주가 가짜 몸을 걸치고 있다는 것을 단숨에 꿰뚫어 보고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예의보다는 안전과 생명이 먼저가 아니겠소. 이것도 명예 후작이 너무 무서운 분이라 그러니 이해를 바라오.”

“쭛.”


이드가 혀를 찼다. 이렇게 대놓고 자신이 무섭다는데 뭐라고 할까.

사실 그의 조심성은 타당한 것이었다. 탑주 본인이 직접 나타났다면 이드는 그를 사로잡아 정보를 뽑아냈을 것이다.

탑주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검후와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보라면 토벌의 첫 번째 목적 정도는 포기할 수 있었다. 또 그게 아니라도 탑주를 잡을 경우 마탑은 자동으로 붕괴하고, 마탑을 중심으로 손을 잡고 있던 초인파와 소드 팰러스는 자연히 갈라지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한데 그런 사실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탑주는 이번에도 섀도 체이서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나왔다.

뭐, 탑주의 말처럼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찻잔이 미끄러져 왔다.

“알스트로메리아 꽃으로 만든 차라오.”

“초대라는 의미를 가졌다지?”

살짝 찻잔을 흔들자 진한 향이 뭉클 솟아오른다.

망설임 없이 차를 마시는 이드의 모습에 탑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적진 한가운데서, 적이 건네는 차를 마신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올 만큼 담력이 있어도 미친 짓이다. 적이 차에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탑주가 섀도 체이서를 뒤집어쓰고 토벌대를 방문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드는 망설임 없이 마셔 버렸다.

‘오만인가. 자신감인가.’

사실은 만독불침을 믿는 것이지만, 그걸 모르는 탑주는 내심 심각했다.

전자라면 이어질 이야기가 편하겠지만, 마법사의 감은 절대로 후자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꽃과 차에 대해 해박하시오?”

“나 말고 아내가 마셔 봤지. 확실히 좋은 차야.”

“돌아갈 때 챙겨 드리리다.”

서로 목숨을 노리는 중에 차 선물이라.

이드는 피식 웃으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먹을 것에는 죄가 없고, 준다면 냉큼 받고 싶을 만큼 좋은 차였으니까.

“선물도 받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힐끗.

말과 함께 탑주의 고개가 라미아를 향해 돌아갔다.

“내게 용건이 있나요?”

“그렇소. 후작 부인, 이전 방문에서 나는 명예 후작에게 황금의 둥지를 선물했었소. 한데 그걸 은색 기사단장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소.”

“왜 쓰라고 준 것이 아닌데 사용하고 있어서 놀랐나?”

놀란 것은 아니지만, 잔뜩 굳은 탑주의 표정에 흡족한 이드의 말이었다.

툭 치고 들어오는 이드의 말을 탑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소. 황금 둥지를 은색 기사단장에게 넘길 줄은 몰랐으니. 하지만 가장 날 놀라게 한 것은 황금 둥지의 사용법을 알아낸 것이오.

생명의 관에 있던 비올라라는 배덕자 하나가 명예 후작에게 붙었다 들었소.”

“그렇긴 한데. 비올라에 대해서 잘은 모르는 모양이군?”

“마탑의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니 말이오.”

그 말에 짝사랑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드다.

그렇게 탑주, 탑주 노래를 부르면서 탑주의 유력 후계자처럼 말하더니, 정작 탑주는 비올라의 이름도 잘 모르는 것 같지 않은가.

탑주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황금 둥지를 해석할 능력이 없다는 건 확실하오. 그럼 누가 사용법을 찾았을까? 난 그것이 후작 부인이라 생각하는데. 어떻소?” 

“그렇다고 하면요?”

“귀빈으로 맞이할 테니, 마탑으로 오시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주를 풀어 주겠소. 같이 초인 마법을 완성해 봅시다.”

“…..헐.”

파격적인 제안에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고 있던 이드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이 인간이 지금 남의 아내한테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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