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74화
910화
“이게 어디서 개소리야!”
・라고 소리칠 생각이었다.
「잠깐만 있어 봐요.』
라미아가 말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드의 발작을 틀어막은 그녀는 탑주의 말에 관심이 있는 척 물었다.
“이런 곳에서 들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말이네요.”
다분히 형식적인 반응으로 볼 수도 있는 짧은 말이다. 그러나 절대 성의 없다 볼 수 없으리라. 뜬금없는 입탑 권유에 욕설이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지.
좌우간 라미아가 관심을 가진 듯 반응하자.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한 진심을 담은 답이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느낄 수 있음을 아오. 그러나 내 권유는 순수한 진심임을 알아 주길 바라오. 이전까지 세상에 없던 초인 마법을 비올라에게 얻은 작은 정보와 무법의 개념 덩어리와도 같은 바이트 타블렛을 통해 파악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 무엇보다 후작 부인은 그것을 통해 황금 둥지의 사용법을 알아내셨소. 초인 마법을 세상에 나게 한 입장에서 내 어찌 이런 빛나는 재능을 지나칠 수 있겠소.”
가볍게 던져 본 말에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뜨겁게 반응하자 이드와 라미아는 움찔하고 말았다.
“……”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놀람도 황금 둥지를 보았을 때의 탑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쉴라가 황금 둥지를 들고 불을 뿜을 때 탑주는 가슴이 내려앉을 듯 놀랐다. 혹시 계약을 깨고 초인 마법이 제국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노파심에 심장의 써클이 꼬일 뻔한 것.
그러나 총명한 마법사의 정신은 그럴 가능성이 미약하다고 판단, 빠르게 탈락시켰고 대신 비올라와 바이트 타블렛의 연결점을 근거로 ‘라미아’라는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제안했다.
처음엔 탑주도 자신의 추론에 의심을 가졌을 정도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금 둥지의 활용 뒤에 그녀가 있다는 가능성만 높아졌다.
대단한 마법사라는 정보는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황금 둥지의 사용법까지 밝혀낼 정도로 뛰어났을 줄이야!
이드에게 말했듯 황금 둥지는 절대 사용하라고 내어 준 것이 아니었다.
그건 각국을 초인 마법이라는 위대한 진리의 길로 초대하는 초대장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초대장이 너무 일찍, 그리고 허무하게 열려 버렸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위기감에 전율하던 탑주는 곧 라미아의 재능에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드가 그와 만나는 것은 13층을 공략할 때였을 것이다.
생각보다 괜찮은 반응에 라미아는 조금 더 말을 이어 가 보기로 했다.
“완성이라니. 초인 마법은 완전한 것이라고, 이전 방문에서 말하지 않았던가요?”
“물론이오. 줄기는 천년의 거목같이 단단하고, 뿌리는 진리에 닿았소.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법칙을 세우는 의식 단계뿐, 이는 완성과 다르지 않소.”
잠시 말을 멈춘 탑주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같은 순간,
라미아는 이드의 마음속에다 팽팽 콧방귀를 날리고 있었다.
『하! 저 인간 마법사가 아니라, 사기꾼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의식을 남겨 두고 완성이라니? 우리가 바본 줄 아나. 확~ 그냥!』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라미아는 방방 뛰고 있었다.
탑주의 말과 달리 의식 단계야말로 초인 마법이라는 새로운 법칙의 탄생에 있어 화룡점정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감춘 채 허풍을 날리고 있다.
어쩌면 라미아가 아니었다면 의심은 했어도 속았을 수 있다. 그러나 탑주에겐 안타깝게도, 그가 말하는 의식 등의 지식을 품은 고대의 마도비의에 대해 라미아는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욱 기가 차는 것은 그 의식에 중요하게 쓰일 것이 분명한 바이트 타블렛도 이쪽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디서 허풍질이란 말인가.
『일단 더 들어 보자.』
이번에는 이드가 발끈하려는 라미아를 달랬다.
“그러나 완성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일 뿐. 싹이 튼 초인 마법은 끝없이 발전할 것이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장대한 여정을 시작할 것이오. 그 시점에 후작 부인의 재능은 보석과 같이 빛나 초인 마법을 화려히 꽃피울 것이고, 그 공은 무한히 이어질 마법 역사에 찬란히 남지 않겠소?”
라미아가 황금 둥지의 사용법을 알아냈다고 긍정한 것이 컸다.
그 순간 탑주는 라미아를 천재로 확정했다. 그것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 새로운 영역의 탐구보다 응용에 특출한 천재라고, 황금 둥지의 사용법을 알아낸 것이 그 증거라고 말이다.
이런 재능이라면 앞으로 찬란히 빛날 초인 마법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물론 그의 확신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라미아에게 그럴 의도가 있는지와 상관없이 능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으니까.
당장 그녀의 머리에는 초인 마법 이전에 세상에 태어난 마법 학파들이 어떻게 발전했는지가 다 들어 있다. 그것을 이용하면 초인 마법의 응용과 발전 방향 따위는 금방 나온다.
문제라면 라미아 본인도,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이드도 협조하고 싶은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다는 점이다.
탑주가 어떤 거래를 청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굳이 상대방이 열심히 반응하고 있는데, 그 흐름을 끊을 필요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마법 역사라. 영광스러운 일이네요. 하지만 미래만큼 현재도 중요하죠. 현재를 살아 내야 미래가 있는데, 과연 초인 마법에 그런 기회가 있을까요? 흑마법의 사생아 정도로 취급하는 인식에, 제국의 토벌 대상이기까지 한 초인 마법. 과연 받아 줄 곳이 있을까요?”
사실 흑마법의 사생아까지는 아니다. 과장된 말이다.
누구보다 라미아가 초인 마법이 흑마법이 아님을 알고, 토벌대의 마법사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저 탑주를 자극하기 위해 던진 말이다.
“그것은 세상이 아직 나와 초인 마법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오. 탄생에 고통이 따르는 것처럼 말이오. 하지만 그 고통은 길지 않을 것이고, 그 끝에서 우리는 달콤한 과실을 얻을 것이오.”
하지만 의도와 달리 탑주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쯧, 구렁이 담 넘는 소리하고 있네.’
내심 혀를 차는 이드다. 마스가 받아 줄 거란 말을 듣고 싶었는데, 정작 마스의 마자도 나오지 않고, 중요한 정보다 싶은 말은 두루뭉술 넘어가 버린다.
다른 이야기도 마찬가지. 이건 뭐 철벽이 따로 없다.
이 방법으로는 가망이 없다. 이드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순간, 라미아의 입술이 그 뜻에 따라 움직였다.
“설명은 잘 들었어요. 하지만 유감이네요.”
“거절이오?”
“저와 남편이 명예까지 버릴 만한 메리트가 느껴지지 않네요. 흑마법을 이용한 계약도 과격하고.”
입탑 시 흑마법의 제약이 필수 조건이란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손잡는 척이라도 했을 것이다.
원하는 정보를 얻을 때까지만 협력하는 척하면 되니까. 하지만 흑마법이 중간에 끼면 위험했다.
아무리 라미아라도 흑마법의 계약을 파기하는 일은 부담이다. 무엇보다 이드가 그녀가 다치는 일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아쉽구려, 믿음을 쌓는 최고의 방법인데.”
탑주가 라미아에 대한 미련을 털어 내며 혀를 찼다.
사실 흑마법이라는 방법이 찝찝하고, 최소 팔, 다리 한 짝은 걸어야 한다는 점이 과격해서 그렇지, 믿음을 주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 간에서 확신할 수 없는 믿음을 종이 한 장으로 얻을 수 있으니까.
거기에 약속된 것만 잘 지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감시도 의심도, 확인도 필요 없다. 이보다 완벽한 신뢰의 도구가 없다.
그런데 대륙에서는 이 방법을 쓰지 않는다.
사악한 방법이라서? 아니다.
혹시와 어쩌면에서 출발한 욕망과 욕심 때문이다. 말로는 서로를 믿는다고 하지만 특이점이 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순간 한 번 눈을 감으면
거대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미련.
그것이 이 완벽한 신뢰의 도구에 사악이라는 이유를 붙여 세상에서 밀어내게 만든 것이다.
만약 이 계약이 밀려나지 않고, 널리 쓰였다면 세상이 참 재미있게 변했을 것이다.
“그럼 바이트 타블렛에 대해 말해 봅시다.”
집중하겠다는 뜻일까. 탑주가 손을 흔들자 찻잔이 사라졌다.
표정도 본래의 냉담하고 덤덤하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절절하게 라미아를 잡으려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정말 깔끔히 포기한 모습.
‘어지간해서는 다 믿겠네.’
하지만 이드는 그 얼굴에 속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표정과 달리 이드의 본능과 기감은 탑주가 실시간으로 살의를 결심하고 있음을 알려 왔다. 그 목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라미아다.
단순히 내가 가질 수 없으면, 아무도 가지지 못하게 하겠어! 라는. 어디 치정극에 나오는 그런 소인배의 치졸한 감정이 아니었다.
‘라미아의 입을 막아 초인 마법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겠지.’
라미아에게 입탑을 권유한 이유에는 분명 초인 마법의 완성과 발전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를 통해 초인 마법의 원리와 비밀이 낱낱이 공개되는 걸을 막기 위함이 더 크다는 것이 이드의 생각이다.
한데 라미아가 그 권유를 거절했다. 그럼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그녀를 통해 초인 마법의 원리와 비밀이 각국에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 그간 피땀 흘려 초인 마법을 만들어 내고, 또 세상에 인정받으려 물밑 작업을 벌여 온 마탑과 탑주 입장에서는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된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힘들게 만들어 놓고, 그 권리와 이득은 모두 엉뚱한 사람에게 빼앗기게 생긴 것.
탑주 입장에서는 절대적으로 막아야 할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라미아의 입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살인.
이드가 탑주에게서 살의를 느낀 이유다.
‘일단 지금은 참지만, 뒤에 진짜 몸을 쓸 때 보자고.’
감히 자신 앞에서 라미아를 노리다니. 이드는 내심 칼을 갈았다.
지금이야 할 일이 있고 눈앞의 육신이 진짜도 아니라 참지만, 토벌의 끝에서 직접 만날 때 라미아를 노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해 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는 느긋한 자세로 말문을 열었다.
“그럼 어떤 조건을 가져왔는지. 들어 보지.”
누가 주인인지 헷갈릴 정도로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드다.
“우선 앞서 제시한 대로 후작 부인의 저주를 풀어 주겠소. 그리고……”
탑주가 말을 이어 갈 때였다. 이드가 중간에 그의 말을 막고 나섰다.
“더 듣기 전에 한 가지 정정하지. 라미아의 저주에 대한 것은 빼도록 하자고. 저주는 우리가 원할 때 풀 테니까.”
“과연……. 풀지 못하는 저주가 아니었던 모양이오.”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다는 듯 말하는 탑주였으나, 그의 머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과연 저주를 방패로 얼굴을 가린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이 이드의 약점이 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래 봤자 당장 답이 나올 일은 아니다.
탑주는 즉각 준비한 내용을 바꿔 말했다.
“미스릴 300킬로, 오리하르콘 1킬로, 그리고 금괴 1톤을 대가로 내어놓겠소.”
“휘익~ 부자 마탑이로군.”
이드는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금은 둘째 쳐도 미스릴과 오리하르콘은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귀금속. 그걸 킬로그램 단위로 내놓는다니.
그간 쌓은 마탑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또 마탑에서 바이트 타블렛을 그만큼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탑주의 조건은 잘 들었지만, 모자라다. 거기에 마음에 드는 조건도 아니고, 설마 귀물을 고작 금은 따위로 사려는 것은 아니겠지? 귀한 보물은 보물로 사야 한다는 말도 모르나?”
“……”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탑주의 입이 굳게 닫혔다.